|
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0/04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7 - 남북정상회담 (2~4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은 4일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등을 포함한 3∼4개국 정상들이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을 하는 문제를 적극 추진키로 했다.
두 정상은 또 민족경제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사업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해 서해안 지역에 `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추진키로 했다.
두 정상은 이날 오후 1시 평양 백화원 숙소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10개 항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했다고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전했다.
백 실장은 "이 선언의 서명 주체는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돼있다"면서 "이 선언을 `2007 남북 정상선언'으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선언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남북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키로 해 사실상 남북정상회담 정례화에 합의했으며 선언의 구체적인 이행을 위해 내달 중 서울에서 제 1차 남북총리회담을 개최키로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관계가 국가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례화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북측 입장을 받아들여 수시로 만나자는 용어로 합의했지만 이는 사실상 정상회담의 정례화에 합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해 `평화수역화'하는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내달 중 평양에서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열기로 했다.
두 정상은 또 한반도의 전쟁반대와 함께 남북간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키로 합의하고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는 6자회담과 9.19 공동성명,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 노력하기로 했으며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통일방안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언급 없이 남북의 통일방안을 혼용한 `6.15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고만 표현했다.
특히 두 정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남북은 해주와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설정,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또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착수와 문산∼봉동간 철도화물 수송, 통행ㆍ통신ㆍ통관 등 `3통(通)'에 대한 제도적 보장조치 완비,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이용을 위한 개보수 문제 등을 조속히 협의키로 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남포와 안변지역에 개성공단식 형태의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고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에 대한 협력사업도 진행해나가기로 했다.
두 정상은 이 같은 남북경협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문화.예술.스포츠 협력과 관련, 남북은 기존 금강산 관광 이외 백두산 관광을 실시키로 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는 한편 2008년 베이징 올림픽경기에 남북 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타고 참가하기로 했다.
이밖에 이산가족상봉 확대를 위해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고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 대로 쌍방 대표를 상주시켜 상시 상봉을 추진키로 했다.
(평양=공동취재단) /한겨레 2007-10-04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2007 -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4~12일)
2007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가 4일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축포를 쏘아올린다. 출범 12년 째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한국을 뛰어넘어 명실공히 동아시아 최대 영화축제로 거듭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마련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지난 10여년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발 더 앞서나가기 위한 4가지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첫번째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영화감독들의 프로젝트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아시아 영화인들간의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영화제작 기회를 마련하는 아시아 영화펀드다. 기존의 NDIF(New Directors In Focus)와 AND(Asian Network of Documentary)를 통합 확대해 신설한 아시아영화펀드의 특징은 프리 프러덕션 단계의 시나리오 개발비를 지원하여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고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 다수의 기관과 업체가 네트워크 개념의 매칭펀드를 조성해 후반작업을 제공함으로써 영화가 완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배우들로 구성된 아시아 연기자 네트워크 (APAN) 발기인 대회도 눈길을 끈다. ‘세계로 향한 영화인의 연대’라는 주제 아래 ‘아시아를 넘어서(Beyond Asia)’라는 슬로건으로 마련된 이 행사는 아시아 영화인의 세계진출 및 성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안성기, 박중훈, 강수연, 김태희, 김효진 김주혁, 가토 마사야, 그레이스 박, 제이시 챈 등 국내외 배우들이 대거 참석한다.
이와 함께 부산 아시안 필름 아카이브도 출범한다. 부산 아시안 필름 아카이브는 아시아 필름메이커들의 영화 필름, 디지털 마스터 및 영화 관련자료들을 보존, 수집하는 것을 1차적인 목적으로 한다. 집행위 측은 수집된 자료를 통해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고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육성시켜 대중들의 참여를 권장하려는데 2차 목적을 두고 있다. 이미 한국영상자료원과 협력해 80여 편의 작품 수집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30년간 5,000여 편의 아시아 수작들을 수집할 계획이다.
한편 장준환감독, 배우 문소리 부부의 사회로 4일 오후 7시 개막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영화의 중심으로’라는 주제 아래 64개국 275편의 작품이 영화 바다의 세계로 안내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12일까지 계속된다.
조은별 /조인스 2007.10.04
news.joins.com
- TU-154
2001 - 러시아 시베리아항공 소속 투폴레프-154 여객기, 흑해 추락
2001년 오늘 승객과 승무원 등 78명을 태우고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을 출발해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로 향하던 러시아 시베리아 항공 소속 투폴레프(Tu)-154 여객기가 공중폭발 후 흑해로 추락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대공방어훈련 중 잘못 발사된 미사일에 격추된 것이었다.
이 사고로 탑승자들이 모두 숨졌다.
승객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간 사람들로 가족을 만나기 위해 고국에 가다 참변을 당했다. /YTN
- 'Institute de France and Pont des Arts' - 'Portrait'
1999 - 프랑스의 화가 뷔페(Buffet, Bernard, 1928~1999) 자살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71)가 1999년 10월 4일 프랑스 투르투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비닐봉지를 얼굴에 덮어쓰고 질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파킨슨씨병을 앓아 왔고 "삶에 지쳤다"는 말로 자살을 예고했다고 측근이 전했다.
국립미술학교(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뷔페는 1946년 화단에 등단하면서부터 주목받아, 이듬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50여년 활동기간 중 8000점 이상의 작품을 그려 '다산작가' '재벌 화백'으로 불렸고, 그의 그림은 한 점당 50만프랑에 팔릴 정도로 고가였다. 외국, 특히 일본ㆍ러시아ㆍ이탈리아에선 '프랑스 현대예술의 교주'로 추앙받았지만, 막상 국내에선 대접받지 못했다. 파리 퐁피두 센터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하나도 사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음울한 잿빛과 날카로운 선. 그의 작품은 주로 비극적인 내용이 화폭에 가득했다. /조선
- 1991, Election of Yeltsin, 1st President
1993 - 옐친 러시아 대통령, 최고회의 의사당에서 농성중인 보수파 의원을 무력 진압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3년 10월 4일 러시아 최고회의 의사당에서 농성중인 보수파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 대규모 유혈사태까지 빚으면서 2주간에 걸쳐 벌였던 보수파 투쟁에서 승리했다. 보수파 지도자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과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은 체포됐다.
러시아 정부군은 이날 탱크와 장갑차를 세우고 보수파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는 의사당 건물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 의회 지지파와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의사당 건물을 장악했으며 보수파 의원들은 투항했다.
정부군이 오전 7시부터 10여대의 탱크와 30여대의 장갑차로 의사당 건물을 포위한 뒤 로켓포 등을 발사하며 공격에 나서자 오후 5시경 수백명의 보수파 의원과 지지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조선
부룬디는 한국과는1991년 수교하였고, 1992년 외무장관 시프리엔 음본임파(Cyprien Mbonimpa)가 방한하였다. 북한과는 1967년 3월에 수교하였다. 수교 후 한국은 자동차, 의료기자재, 의약품 등을 무상원조하고 있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 90만 8000달러이며 주요 수입품은 폴리에스텔 섬유, 타이어, 튜브, 자동차 등이다. 2001년 3월 현재 한국인 체류자 5명이 있다. /naver
1989 -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한 세계성체대회가 1989년 10월 4일부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개막됐다. 세계 108개국의 가톨릭 고위 성직자와 국내외 신자 65만명이 참석한 대회는 8일까지 5일간 열렸다. 폐막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참석, 장엄미사를 집전했다.
교황과 김수환 추기경이 방탄차에 탑승하고 미사장에 입장하자 신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사회자의 선도로 '교황 만세' '비바 일 파파'를 합창했다. 교황은 미사 개회를 알리는 성호경을 또렷한 우리말로 시작, 강론을 뺀 전례일체를 우리말로 진행했다. 미사는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잔치답게 독서와 기도, 봉헌부문에 외국인들이 다수 참여, 독서는 중국인 여대생과 일본인 수사가 각기 자국어로 했고, 신자들의 기도는 불어-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고유어인 카갈로그어로도 올려졌다.
세계성체대회는 성체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성찬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행사로 4년마다 열려 '가톨릭의 올림픽'이라고 불린다. 이 행사는 본래 신심 운동으로 시작됐지만 지금은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강조하는 성격이 더 강하다. 1881년 프랑스의 릴에서 처음 열렸다. /조선
1961년 8월 한국의 유럽 친선사절단이 아일랜드를 방문함으로써 양국은 첫 외교 접촉을 가졌다. 그 뒤 1967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아일랜드 정부가 재한(在韓) 아일랜드 국민의 이익보호를 위한 영사 보호업무를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대행하도록 요청한 데 대하여 동의하였다.
양국은 1983년 10월 4일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87년 4월 IDA(Industrial Development Agency:아일랜드산업개발청) 사무소를 서울에 개설하고, 같은 해 7월 주(駐)아일랜드 대한민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naver
1979 - 김영삼, 국회의원직 제명파동
1979년 10월 4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야당인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 처분했다. 여당은 1979년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김영삼 총재의 기자회견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규정해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했다. 징계 사유는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징계 종류는 제명이었고, 징계 시기는 정기국회 회기 중이었다. 10월 4일 이 동의안은 신민당 의원들의 국회 본회장 점거에도 불구하고 40초 만에 전격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경찰의 차단 속에서 여당 의원들만의 비공개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여당 의원 159명 전원 찬성으로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가결되었다. 이에 대해 신민당 의원들은 전원 사퇴로 맞섰고, 끝내는 부마사태를 유발함으로써 박정희 유신정권의 말로를 재촉했다. /브리태니커
1966 - 바수톨란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레소토로 개칭
1868년에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 1871년에는 케이프 식민지에 병합되었으나, 바소토족의 저항이 강했기 때문에 1884년에는 영국 보호령 바수톨란드(Basutoland)로서 영국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의 지배를 받았다.
1910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한 후로는 남아프리카 정부가 여러 차례 병합을 요구하였으나 주민들이 이에 반대하였으며, 영국도 바수톨란드의 자치를 강화하여 1959년에는 헌법으로 의회를 창설하였고, 국민당을 비롯하여 몇 개의 정당도 결성되었다. 1964년에는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을 폐지하고, 1965년에는 국민의회가 설치되었으며, 총선거 결과 레아부아 조나단의 국민당이 국왕 모셰셰 2세가 지지하는 회의당을 근소한 차로 이겼다.
1966년 10월 4일 총리 조나단 아래 국명을 레소토 왕국(Kingdom of Lesotho)이라 정하고 독립하였다. 그러나 회의당 등 야당이 독립 의안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으며, 국왕이 야당적 입장에 선 결과 국왕과 총리의 대립이 격화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1966년 12월에는 총리가 국왕을 한동안 연금하기까지 하였다. /naver
이준열사의 유해는 1963년 9월 26일 헤이그 묘소를 떠나, 9월 27일 도쿄 주일한국대사관에 안치되었다가 9월 30일 김포국제공항에 안착, 낙원동 소재 건국대학교 구내에 모셔졌다가, 10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유해봉환 국민장을 거행한 후 수유리 묘소에 안장되었습니다. ^.@)
[일성 이준열사 유해봉환 및 국민장 공고]
1. 영봉식 일시 : 1963년 9월 30일 오후 1시
장소: 김포국제공항
2. 봉안소 장소 : 건국대학교 구내(낙원동 소재)
3. 봉안식 일시 : 1963년 10월 4일 오전 10시
장소 : 서울운동장
4. 하관식 일시 : 1963년 10월 4일 오후 3시 30분
장소 : 수유리묘소
1959 - 소련 '루나 3호' 발사, 세계 최초로 달 뒷면 촬영
1959년 10월 4일 소련이 우주선 '루나3호(Luna-3)'를 우주에 쏘아올려 달 표면 관측에 성공했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촬영하기 위한 기구를 탑재한 루나3호는 10월 6일부터 달상공 7천km 궤도상에서 사진촬영을 시작했다.
탑재된 기구는 대물렌즈의 초점거리 200mm와 500mm의 카메라 2대와 자동현상장치였다. 촬영 후 루나3호는 47,500Km까지 지구에 접근해 영상을 송신했다.
소련은 달의 뒷면 약 70%가 촬영된, 예상보다 화질이 선명한 미지의 세계를 10월 26일 공개했다. 달이 항상 지구를 향해 똑같은 면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진에 나타난 대부분의 지역은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최초의 달 표면 탐사, 우주개발의 선두라는 3개의 위업을 달성하게 됐다. /조선
1958 - 제트여객기 코메트 4, 런던~뉴욕간 대서양 정기항공에 첫 취항
제트여객기 코메트(Comet) 연혁
1949-07-27 - 첫 비행에 성공
1952-05-02 - 최초의 정기항공 런던-요하네스버그 노선에 첫 취항
1952-07-08 - 런던 토쿄 노선에 첫 취항
1954-01-10 - 코메트(G-ALYP), 동체피로로 공중폭발 사고
1954-04-08 - 코메트(G-ALYY), 공중폭발 사고로 운항정지
1958-04-29 - 코메트 4(Comet-4) 처녀비행
1958-10-04 - 코메트 4(Comet-4) 런던~뉴욕간 대서양 정기항공에 첫 취항
1957 - 세계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1957년 10월 4일 밤. 소련의 모스크바 방송이 긴급뉴스를 전했다. 인류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Sputnik-1)'를 발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미·소간 우주경쟁에서 비로소 우위를 차지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인류에게는 우주탐사를 향한 대장정의 첫걸음이었다.
러시아 말로 ‘동반자’를 뜻하는 스푸트니크호는 지름 58cm, 무게 83.6kg에 불과하고 단순히 전파만을 발사하는 수준이었지만 미국에는 충격이었다. 미국 NBC방송이 스푸트니크가 쏘는 전파를 받아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하고 있을 때 미국 지도자들은 구겨진 자존심에 분을 삭이고 있었다.
만약 그 쇳덩이가 수소폭탄이라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끔찍했다. 추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쫓아갈라치면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련은 저만큼 앞서갔다. 소련이 11월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하고 나서야 미국은 이듬해 1월 말, 겨우 8kg짜리 익스플로러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1959년 5월 원숭이를 태운 로켓을 발사했을 때는 소련이 이미 그해 초 달까지 날아간 첫 인공위성 루나1호를 쏘아올린 뒤였다. 인류최초의 우주인과 여성 우주인을 하늘로 날려보낸 것도 소련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미소는 그때까지였다. 1969년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주는 미국의 영역이었다. /조선
1955 -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졸업식
서울 태릉에 자리잡고 있는 육군사관학교!
1955년 오늘 4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친 육사 11기 생도 151명이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뀐 뒤 열리는 첫 졸업식이었다.
대통령 각하, 뱀프리트 장군, 국방장관 등이 굳은 악수로 졸업생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1945년 군사영어학교로 시작한 육군사관학교 초급장교 교육을 위한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육군사관학교로 발전했다. 군경력자들이 입교해 단기교육을 받던 초기의 제도는 1954년부터 4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뀌었다. /YTN
무솔리니는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국제여론과 국제연맹에 대항하기 위하여 독일과의 접근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1936년의 에스파냐내전 개입은 이를 가속화시켜 히틀러와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1937년 국제연맹 탈퇴, 1939년에는 독일과 군사동맹을 맺기에 이르렀다. 1940년 6월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1940년 10월에 시작된 그리스침공의 패배로 인하여 독일에의 종속은 결정적이 되었다.
1935 - 우리나라 첫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1935년에 만들어진 이용우(李用雨) 감독, 이필우 촬영·녹음으로 된 <춘향전>은 한국영화 최초의 발성영화이다. 즉, 경성촬영소가 <춘향전>을 토키로 만들어 1935년 10월 4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것이다. <춘향전>은 흥행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러한 기술적인 혁명은 한국영화계에는 빨리 닥쳐온 셈이다. 즉, 무성영화가 예술적으로 완숙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였으며 산업적으로도 발성영화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구미영화계와는 달리, 한국영화는 다음 단계로 옮길 채비를 미처 하지 못한 채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옮겨지게 되었다. 불과 10여년의 무성영화기는 예술적 성숙을 위하여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산업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도 부족하였다. 무성영화시대에 비하여 엄청나게 뛰어오른 제작비는 영화계에 과중한 부담이어서 수지면의 균형을 취할 수 없었다. 발성영화 초창기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이규환 감독의 <나그네>(1937), 안석영(安夕影) 감독의 <심청>(1937), 방한준(方漢駿) 감독의 <한강>(1938)·<성황당 城隍堂>(1939), 홍개명(洪開明) 감독의 <청춘부대 靑春部隊>(1937), 윤봉춘(尹逢春) 감독의 <도생록 圖生錄>(1938), 김유영 감독의 <애련송 愛戀頌>(1939),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국경 國境>(1939)·<수업료 授業料>(1940)·<집 없는 천사>(1941) 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우리들 고유의 것, 우리의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 이른바 자연주의적 미학에 충실하려는 기미를 보인 것이다. <김정옥>
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Viewframe.aspx?id=5121&ser=4
발성 영화 시대 개막
1935년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발성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녹음 기술을 위해 일본을 오가며 노력한 이필우의 연구와 공로의 결과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은 대사도 많지 않고 주제음악 및 배경음악도 양악을 사용하여 고전적인 내용과 일치되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지만, 당시 대단한 인기와 환영 속에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춘향전> 이후로 한국 영화계는 본격적인 발성영화 시대의 개막을 보게 되었다. 무성영화의 종말을 인식한 각 영화제작사들은 앞다투어 시설 근대화와 자본의 대형화를 계획하게 되었다. 기술 대혁신이 필요하게 되었고 연기자들도 실력이 없으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 녹음 촬영이었으므로 연기자와 기술자 사이의 협력 체제가 절실히 필요했고, 이는 반사적으로 한국 영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리랑 3 (1936,나운규)><나그네(1937,이규환)><심청전(1937,안석영)><오몽녀(1937,나운규)> 등이 모두 토키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러나 막대한 제작비로 너나없이 모두 발성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제작자들은 당장 경영 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을 만들어 위세를 떨치던 <경성촬영소>마저도 <오몽녀>를 마지막 작품으로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자본으로 무성 영화의 몇배나 드는 발성영화를 경쟁적으로 만들었으니 영화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제작사의 대형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청구영화사><성봉영화사> 등 대형영화 주식회사다 설립되었다. 대형 영화사들이 설립되자 그동안 난립했던 중소 영화제작사들과 군소 프로덕션들은 자연 도태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 수가 줄어드니 제작편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영화 일색인 흥행 현실에서 관객의 입장료는 일본 영화업자들의 배만 불릴 뿐이었다. 한국 영화계는 갈수록 위축되었는데, 한국영화사의 분기점이 되었던 발성영화의 등장이 역설적으로 영화계의 자본 사정 악화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http://frame.naroot.net/korea/korea2.htm
1933 - 루즈벨트 미국대통령 범아메리카주의(汎美主義, Pan-Americanism) 고취
1933년 대통령 F.D.루스벨트의 선린외교정책 추진과 더불어 세계에 파시즘의 위협이 증대됨에 따라 라틴아메리카 제국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범아메리카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1938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미주회의에서는, '미주 제국의 상호방위·상호불가침'이 확인되었으며, 1947년 '미주 상호 원조 협정'에 의한 집단 방위체제가 확립되었다. /naver
1903 - 진공관 컴퓨터를 만든 불가리아의 물리학자 아타나소프(Atanasoff, John) 출생
아타나소프 [Atanasoff, John (Vincent), 1903.10.4~1995.6.15]
John Vincent Atanasoff (October 4, 1903 – June 15, 1995) was a Bulgarian-American physicist. The 1973 decision of the patent suit Honeywell v. Sperry Rand named him the inventor of the first automatic electronic digital computer, a special-purpose machine that has come to be called the Atanasoff–Berry Computer.
The son of a Bulgarian immigrant who became an electrical engineer, Atanasoff held positions as a teaching professor, a governmental wartime research director, and a corporate research executive before being recognized in the 1970s and 1980s for digital electronic computer research he conducted at Iowa State College in the late 1930s and early 1940s.
http://en.wikipedia.org/wiki/John_Atanasoff
1895 - 미국의 희극배우, 감독 키턴(Keaton, Buster) 출생
1894 - 스웨덴의 시인, 전기작가, 소설가 벵트손(Frans Gunnar Bengtsson) 출생
1892 - 오스트리아의 총리 돌푸스(Dollfuss, Engelbert) 출생
1861 - 미국의 화가, 조각가, 삽화가 레밍턴(Remington, Frederic) 출생
1858 - 헝가리 태생 미국의 물리학자 푸핀(Pupin, Michael Idvorsky) 출생
1822 - 미국의 제19대 대통령 헤이스(Hayes, Rutherford B.) 출생
1814 - 프랑스의 화가 밀레(Millet, Jean-François) 출생
1797 - 스위스의 소설가 고트헬프(Gotthelf, Jeremias) 출생
1720 - 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피라네시(Piranesi, Giovanni Battista) 출생
1669 -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사망
|
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