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며칠 자주 이어진 술자리로 인하여 사실 답사 당일인 11일, 몸의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적을 사랑하는 우리 회원들과 함께 한다는 즐거운 생각으로 며칠을 기다려 온터라
컨디션에 아랑곳 없이 집결지인 연화재로 향했다.
집결지에 도착하니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차량과 입구에 막아선 경찰 차량으로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한 두 사람씩 회원들이
도착한다. 근데 이를 어쩌노!!
이 이상한 분위기가 서울 집회에 참석하려는 시위대를 경찰들이 원천봉쇄하려는 상황이란다.
이 난감한 상황에서 차량이 빠져나가야 하는데 주변은 경찰 차량과 싸이카로 둘러싸여 있다.
겨우 맘좋은 경찰관에게 싸이카를 조금 이동시켜 주라고 부탁해서 차량 2대가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경주 입구에 도착하니 용강공단부터 차량이 정체되고 있었다.
원인은 포항과 똑같은 이유였다.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농성 중이어서 모든 차량이 되돌아가거나 우회하고 있었다.
겨우 겨우 정체를 벗어나서 강변도로를 타고 삼릉 입구에 도착하여 회원들에게 필요한 용무를
보게 하고 인원을 정비하여 첫 목적지인 치술령 (울주군 두동면 소재)을 향해 출발하는 데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나 지체가 되었다.
내남과 봉계(불고기단지)를 지나 치술령 가는 조용한 도로는 도로 옆으로 보이는 호젓한 저수지
와 여러 가지 색깔로 치장하여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너편의 골짜기,발갛게 탐스런 감이 달린,
감나무가 있는 가을 햇살 아래의 시골집 등......깊어가는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늦가을이 물들어 가는 도로를 달려 박제상 유적지인 치산서원이 있는 마을에(두동면 만화리)
도착하였다.
마을에서 등산 출발지인 법왕사까지 산길로 차를 몰아 법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일행 10명은 치술령을 향해 출발하였다.
치술령은 해발 762M로 정상까지 1시간이 소요되는 오르막길로 그 뜻을 살펴보면 솔개가 사는
높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1시간여를 숨을 헉헉거리면서, 또한 등산화가 무겁다고 느끼면서 (일행 중 2명만 그랬고 다른
사람들은 잘 올라갔음) 정상에 올랐다.
정상 가는 길 갈대 앞에서 여소장님들 3명을 가을의 여심이라는 제목으로 한 컷 하고 정상에 도착
하여 치술령이라는 표지석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망부석으로 향하였다.
치술령에는 2개의 망부석이 있다.
경주시에서 망부석으로 지정한 바위와 울산시에서 망부석으로 지정한 바위가 따로 있는데
경주의 망부석은 정상 바로 아래에 있고 울산의 망부석은 정상에서 아래 쪽으로 약 300M쯤
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경주의 망부석이 기록에 전해 내려오는 망부석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경주의 망부석에서 볼 때 울산 앞바다가 보이고 바위의 높이로 볼 때도
이곳이 맞는 것 같다.
망부석은 박제상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눌지왕 때 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는 왕의 동생 미사흔 (미해공)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박제상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기록됨)은
미사흔을 구출하고 자기는 잡혀 갖은 고문을 당하지만 신라에 대한 충성을 굽히지 않아 결국은
목도라는 섬에서 화형을 당해 죽게 된다.
박제상의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멀리 동해바다 건너 일본을 바라보면서 남편을
기다리며 통곡하다가 죽어 두 딸과 함께 바위가 되었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국수봉
바위굴에 숨으니 이 바위굴을 은을암 (새가 숨은 바위)이라 한다.
박제상의 세 딸 중 살아남은 둘째 딸은 박제상이 구한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과 결혼하게 되고
제상의 유일한 아들인 문량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거문고의 달인 백결선생이다.
박제상은 신라 5대왕인 파사왕의 5대손이고 박혁거세의 자손으로 전해지는데 신라 18대 실성왕의
딸인 치술공주와 결혼을 한다.
내용상으로 보면 박제상은 자기 장인을 죽인 눌지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이 또한 현재의 입장에
서는 이해 못할 일이고, 또한 박제상의 부인인 치술공주도(후에 치술신모 또는 국대부인으로
봉해짐)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남편이 떠난 후 문천의 모래밭 (장사 벌지지)에서 크게 울다가
이를 들은 눌지왕의 색도를 받아 딸 황아를 낳으니 아버지의 원수와 관계를 가진 셈이 된다.
현재의 상식으로는 헷갈리고 또 헷갈리지만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만고충신
박제상과 열녀 국대부인으로 믿고 싶을 뿐이다.
치술령 바로 아래 호젓한 장소에서 낙엽을 방석삼아 빙 둘러 앉은 우리 일행은 여회원님들이
정성껏 준비해온 맛있는 음식으로 즐거운 식사를 한 후 하산하여 만화리 마을 입구의
치산서원을 찾았다.
치산서원은 조선시대 때 박제상과 국대부인을 배향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입구의 열녀문
(홍살문)과 호젓한 분위가 인상적인 서원이었다.
박제상 유적지를 떠나 다음 답사지로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용산서원을 찾을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지연된 관계로 지나쳐 올 수 밖에 없었다.
용산서원은 300년의 부를 존속시킨 12대 만석꾼 경주 최부자의 조상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을 배향
한 서원으로 최진립은 병자호란 때 적과 싸우다 두 명의 노비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병조판서
로 추증된 인물이다.
경주 최부자의 시작은 최진립의 세째 아들인 최동량으로부터 시작되니 충신 집안에, 진정한 의미
의 존경받는 부자, 즉 노블리스 오블레스를 몸으로 실천한 집안이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일제 때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대고 해방 후에는 그의 전 재산을
털어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웠으니 진정한 부자의 의미를 몸소 실천하였다.
최부자 집안의 감동적인 6가지 가훈과 행동지침인 육연은 지면상 생략한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용산서원을 지나쳐 경주남산 경애왕릉 입구의 삿갓골 석불을 찾았다.
삿갓골 석불은 허리 밑 부분과 두광부분이 망실된 석불입상으로 코부분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육계, 나발, 백호, 삼도 등 부처님의 상호가 잘 나타나 있으며 통견의 가사 밑에 나타난 몸의
탄력성이 돋보이고 있다.
거신광으로 표현된 광배에 새겨진 화불과 당초문, 보상화문 등의 표현기법을 볼 때 8세기 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허리 밑 부분이 망실된 석불 옆에는 석불의 하체부분과 석불이 서 있었던 이중의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좌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석불에 대해 회원들에게 설명하고 석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후 마지막 목적지인 경주 박물관
으로 향하였다.
원래 답사계획은 박물관에 들르기 전에 박제상부인의 전설이 서려있는 남천의 장사벌지지를
찾을 예정이었으나 시간에 쫒겨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경주 박물관에 들른 우리 일행은 선사시대 유물관, 신라 유물관, 미술관 등을 둘러보고 개인적
으로 관심이 있었던 삼화령 삼존불과 장항사지 석불두, 고선사지 삼층 석탑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물관 관람을 끝으로 답사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 온 우리 일행은 감자탕과 찜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면서 뒤풀이를 한 후 다음 달 답사지와 일정을 약속한 후 답사일정을 마쳤다.
시간 때문에 약간은 서두른 감이 있어 알찬 답사가 되지 못한 것 같아 참석한 회원 여러분
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다음 답사 때는 더 알찬 답사를 약속하면서 답사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참석 회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2007. 11. 11
* 지금까지 저의 지겹고 조잡한 내용의 답사기를 읽어주신 회원 여러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번 답사기를 끝으로 답사기 등재를 끝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최선생님 오늘도 박제상 유적지에 대한 답사기잘 읽고 갑니다....!! 제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인데 언제 기회를 내야겠습니다...
이제 이걸 끝으로 마지막으로 한다고하니 아쉽기만 합니다..^^ 여러 답사기 많이 올려주세요~
어벌사... 더 없능교?
독자들의 빗발치는 후속편 요구를....
이제는 길라잡이 활동을 통한 멋진 답사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