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ㅣ이태영
여성들의 지위는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위인전을 차지하는 여성 인물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 많은 위인 가운데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신사임당, 유관순, 퀴리부인, 헬렌 켈러,
나이팅게일, 마더 테레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수의 작음도 놀랍지만, 그 인물 구성의 구태의연함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신사임당, 유관순, 퀴리부인, 헬렌켈러, 나이팅게일,
마더 테레사는 충분히 위인전에 들어갈 만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남성 위주의 관점에서 받아들인 여성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남녀를 똑같이 놓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이들을 제외하고 또 위인전에 들어갈 만한
여성 인물이 있느냐는 주장은 일견 객관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여성의 권리 행사와 사회진출을 위해 갈 길이 먼 현실에 맞게 자라나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삶의 지표로 삼을 인물들을 소개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요구에는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다.
여성인물을 통해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은 남녀 차별이 극심했던 사회에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사회에서 남자와 동등한
인격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 이태영
2001년 12월 17일 한국 가정 법률 사무소에서 이태영 선생님의 3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그의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그를 추모할 만하다.
지금이야 여성들의 법조계 진출이 활발해졌지만 이태영이 변호사의 꿈을 꾼 일제 시대에는 여자는
그저 시집가서 애만 잘 낳으면 최고라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었다.
하긴 일제시대에도 서구 풍조의 영향을 받아 남녀 평등을 주장한 신여성들은 있었지만 이태영같이
온갖 고난을 뚫고 자신의 뜻을 이룬 사례는 찾기 어렵다. 당시에는 여자가 법학을 공부하려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돈이 없는 그로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정일형을 만나 혼인했지만, 그것은 고난의 시발점이었다.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정일형은
5년 가까이 징역살이를 해야 했고, 이미 삼남매의 어머니였던 이태영은 혼자의 힘으로 자식들과
늙은 시어머니를 건사해야 했고,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누비이불 장사로 연명하던
이태영에게 남편의 출소와 해방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그는 비로소 제대로 된 법률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서울 대학교 법대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나이도 문제였지만, 지금도 애 엄마가 공부를 하려면 어려운데
당시에는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쉬는 시간이면 남의 눈길을 피해 아이의 젖을 먹이고
다시 수업에 들어가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그런 뼈를 깎는
노력 끝에 고등 고시 사법과에도 합격할 수 있었다.
그의 합격 뒤에는 여자 아이라도 공부를 하고 싶어하면 끝까지 공부를 시킨 어머니,
꿈을 심어 준 큰오빠, 아내의 공부를 위해 방까지 따로 마련해 준 남편 정일형이 있었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꿈을 이룬 것은 전적으로 이태영의 투혼이었다.
변호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넌, 변호사가 되어야겠구나."라고 던진 오빠의 말 한 마디를 꿈으로 간직하고
모든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실현해 낸 것은 이태영이 선구자다운 품새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직업을 평생 꿈으로 간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는 이태영에게 천대받고 억압받는 여성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태영에게 중요한 것은 변호사라는 직업이 아니라 변호사가 되어 할 수 있는 일,
여성을 봉건적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이태영을 제일 먼저
변호사가 된 여성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일을 처음 시작한 특별한 변호사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돈 한 푼 없이 쫓겨났어요."
"남편한테 수없이 매를 맞지만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어요."
"집에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살림을 차리는 거예요." 이런 하소연을 하는 여성들을 위해
이태형은 무료 법률 상담소를 열었다. 책상 하나 간신히 들어가는 사무실과 이동 사무실에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혼자 뛰어다니며 법률 상담을 했다. 그가 그나마 안정을 찾은 것은 그의 제안으로 천칠백여 명의 여성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1976년에 '여성백인회관'을 짓고 난 뒤였다.
그러나 이태영이 아무리 법률 상담을 한다고 해도 법이 이것을 뒷받침하지 않으면 그 한계는 명백하다.
1950년대의 가족법은 헌법의 남녀평등 조항을 무색하게 했다. 집안의 주인은 아버지나 아들이어야 하고,
부모가 돌아가셔서 재산을 나눠도 딸보다 아들이 훨씬 많이 가졌고, 이혼을 하면 재산은 모두 남편의 것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고 싶어도 권리가 전혀 없었다.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러나, "남녀가 평등하다고? 조상들이 저승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남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움직이는 사회에서
그의 노력은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12월 세 번째로 가족법이 개정되어 그나마 민주적인 꼴을 갖춘
오늘의 가족법이 되기까지 37년 동안 이태영은 굴하지 않고 가족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태영은 이처럼 여성의 아픔을 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그들이 인간답게 살 법률적 제도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는 여성 문제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라가 독재 치하에 있으면 어찌 여성인들 해방될 수 있을까?
그는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1976년, 명동 사건 즉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1998년 그는 세상을 떴지만, 여성의 평등을 위해 변호사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평생토록 지키며
갖은 난관을 불굴의 정신과 용기로 헤쳐 나갔기에 그에 대한 추모의 행렬은 끊이지 않으며,
아직도 만연한 남녀 차별을 뚫고 사회의 주인으로 우뚝 서야 할 자라나는 여성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리라.
한국일보 대표이사 사장· 발행인 장명수 추천사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여자 아니면 남자로 태어납니다.
여자로 태어나든 남자로 태어나든 그것은 큰 축복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는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주인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남자들은 사회에 나가서 다양한 일을 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살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런 생각에 순종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여자지만 집안에서만 살지 않겠다. 사회에 나가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꿈꾸는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우리 나라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최초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수잔 B. 앤터니, 최초의 여성 유엔 인권위원장 엘리너 루스벨트,
최초의 대서양 횡단 여성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등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그런 꿈을 꾸었고,
여성의 새로운 삶을 개척했던 선구자들입니다.
제가 어린이들에게 이 훌륭한 여성들의 전기를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여자 어린이들도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에는 여자라고 해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미 여성 장군, 과학자, 비행사, 경찰서장, 열차 기관사, 법관, 장관,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등으로
성공한 여성들이 사회 곳곳에 든든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성을 억압하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뤘던 선배 여성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은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르게,
아름답게 바꿔 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크고 높고 아름다운 꿈을 꾸세요.
여러분은 모두가 이 세상의 주인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