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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9월 23일 월요일]
『대동야승』 제9권 [해동야언 Ⅲ] <기묘사화>
○ 기묘년 11월 15일 초저녁에 중경(仲耕)이 달빛을 받으며 관(館)에 왔는데, 정연(挺然) 이구(李搆)도 왔다가 별을 보려고 간의대(簡儀臺)로 돌아갔다. 조금 후에 정원 사령(政院使令)이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서문(西門) 재상 두어 사람이 입궐하고 또 근정전 안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하니, 서로 말하기를, “어찌 정원에서 알지 못한는 일이 있으리오.” 하고, 곧 내려왔다.
잠시 후에 명이 내려서 입번(入番)한 승지 두 사람과 홍문관 두 사람, 한림(翰林)ㆍ주서(注書) 등을 의금부에 내렸는데, 밤 이고(二鼓)에 곧 옥에 갇히었다. 사재(四宰) 이자(李耔), 형조 판서 김정(金凈),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대사헌 김식(金湜), 부제학 김구(金絿),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憙),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 등을 잡아 가두었는데, 유인숙ㆍ공세린(孔世麟)ㆍ홍언필 등 세 사람은 석방을 명하고, 또 심연원(沈連源)ㆍ안정(安珽)ㆍ이구(李搆) 등 세 사람에게 석방을 명하였으며, 이자에게도 석방을 명하였다.
16일 아침에 부사(府事) 김전(金銓)ㆍ이장곤(李長坤)ㆍ홍숙(洪淑) 등이 국청(鞫廳)에 나란히 앉아 국문하기를, “조광조ㆍ김정ㆍ김식ㆍ김구 등이 서로 편을 지어서 속이고 격동시키는 풍습을 이루고, 후진들을 유인하여 권세있는 관직에 점거하고 명성과 위세를 서로 의지하여 자기들과 맞지 않는 사람은 배척하고, 자기에게 붙이는 자는 받아들여서 공론이 바르지 못하고,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되었다.” 하였다. 공사(供辭)에 관련된 윤자임(尹自任)ㆍ박세희(朴世熹)ㆍ박훈(朴薰)과 나는 조광조 등의 속이고 격동시키는 논의에 호응하였다고 하였다. 공사에 관련된 공초 내용은 대개 같았다.
내가 공초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고인(古人)의 글을 읽어서 자못 방향을 알았으므로 집에 있으면 효제(孝悌)를 다하고, 나라에 있으면 충의(忠義)를 다하여야 한다고 여겼으며, 동지들과 더불어 옛 도(道)를 강구하여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 세도(世道)가 지극히 잘 다스려지게 되기를 기약하여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려 하였다. 또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할 뿐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아부하였으리오. 조광조 등과는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기 때문에 서로 교유하였으나, 결렬함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당상(堂上)들이 곧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니 임금이 취초(取招 죄인을 심문하여 공초를 받음)를 지만(遲晩 고문을 그치고 자복한다는 뜻)하고 법률에 비춰서 시행하도록 명하고 날이 저물어 또 앉아서 모두 지만으로 취초하여 조광조 등 네 사람은 사형(死刑)에 준하고, 남은 네 사람은 형장 1백에 3천리 유형을 처하기를 입계(入啓)하였는데, 조광조와 김정 두 사람에게는 사약을 내리기를 명하므로 삼공(三公)들이 다투어서 사형을 감하고, 형장 1백을 쳐서 먼 지방에 안치(安置)하고, 남은 네 사람에게는 형장을 속죄하여 외방에 부처(付處)하게 하고, 삼경(三更)에 모두 놓아주니 집에 와서 조금 잤다.
17일 이른 아침에 동소문(東小門) 밖의 백성의 집에 나가 있었는데, 또 금부(禁府)에 모두 모이라는 명이 있었다. 색승지(色承旨) 성운(成雲)이 와서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시종하는 신하로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지극히 좋은 정치를 기약하였다.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에 너희들이 조정의 일을 처치하는 것이 지극한 과오가 있어 인심을 불평하게 하였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죄를 준 것이니, 나의 마음도 어찌 편하겠느냐. 죄주기를 청하는 대신도 어찌 사적인 의도가 있겠는가. 너희들의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가 밝지 못하여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법률대로 죄를 주면 반드시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너희들은 사심(私心) 없이 국가를 위하였기 때문에 끝으로 감하여 가벼운 죄를 주었으니 알고 떠날지어다.” 하였다. 이날 밤은 동소문 밖 민가에서 잤다.
금부에 갇히던 날 밤에는 모두 꼭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날 밤 넓은 하늘에는 구름이 없고, 밝은 달빛이 뜰에 가득하였는데, 빈 뜰에 벌여 앉아서 서로 술을 부어 권하며 영결하였다. 원충(元冲) 김정이 시를 지었는데,
저승으로 돌아가는 오늘 밤 나그네에게 / 重泉此夜長歸客
부질없이 밝은 달이 머물러 인간을 비추네 / 空留明月照人間
하고, 대유(大柔 김구의 자)가 또 고시(古詩)를 읊었으니,
흰 구름 속에다 뼈를 묻으면 길이길이 그만일 것을 / 埋骨白雲長已矣
부질없이 흐르는 물 남아서 인간으로 향하네 / 空餘流水向人間
하고, 또 읊기를,
밝은 달 긴 하늘의 밤 / 明月長天夜.
하니, 원충이 화답하기를,
추운 겨울 이별하는 때로다 / 嚴冬惜別時
하였다.
모두 조용하고 근심이 없는데, 다만 서로 말하기를, “차야(次野)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 하니, 차야가 울고, 홀로 효직(孝直조광조의 자)이 통곡하며, “우리 임금을 보고자 한다.” 하였다. 서로 권면하기를, “마땅히 조용히 의리에 나아갈 것인데 어찌 울기까지 하리오.” 하니, 효직이 말하기를, “조용히 의리를 성취하는 것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리오마는, 우리 임금을 보고자 한다. 우리 임금이 어찌 이렇게까지 하리오.” 하고, 밤이 새도록 울었는데, 이튿날 사형에 처하는 것을 들은 뒤에는 태연하였다.
○ 기묘년에 지정(止亭) 남곤(南袞)이 판서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대궐 북쪽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서 비밀리 아뢴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밤중에 선전관을 보내어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리고 제학 김정, 대사헌 조광조 등 일곱 사람을 대궐 뜰에 나치하여 금부에 내려 가두기를 명하였다.
이튿날 밝기 전에 지정이 미복(微服)으로 초립(草笠)을 쓰고, 거친 베옷을 입고 떨어진 신을 신고서 정승 정광필 집에 이르러 문지기를 불러 말하기를, “급히 안에 들어가서 알리되 손님이 왔다고만 말하여라.” 하였으나, 문지기가 그 얼굴을 보고 남 정승임을 알고 들어가 고하기를, “어떤 손님이 왔는데, 얼굴을 보니 남 판서인데, 다만 의관이 허름하여 천인(賤人)같습니다.” 하였다.
정 정승이 크게 놀라고 이상히 여겨서 급하게 나가 보니 바로 남공이었다. 공이 이상하여 묻기를, “어찌하여 이러하는가?” 하니, 지정이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곧 또 말하기를, “이 무리를 만약 한 사람이라도 남기면 해로움이 무궁할 것인데, 상감이 반드시 공을 불러서 의논할 것이니, 공은 상감의 뜻에 따르도록 힘써야 한다. 남김없이 없애 버려야 나라의 형세가 평안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후회가 많을 것이니,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 위험한 말로 위협도 하고, 혹 감언이설로 꾀하기도 하였다.
정 정승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공이 정승으로써 천한 의복을 입고 시내를 거쳐 왔으니, 이는 크게 놀랄만한 일이오, 사림(士林)들을 모해하는 것은 본디 내 마음이 아닌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리오.” 하니, 지정(止亭)이 크게 성을 내어 옷을 떨치고 돌아갔다.
조금 있다가 정광필이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서 입시하니, 지정이 벌써 그 일을 도와서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형구(刑具)가 이미 뜰에 갖추어져 있었다. 정광필이 울면서 간언하여 중지하게 하였는데, 눈물이 두 뺨에 흐르고 옷과 소매가 다 젖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죽음을 면하고, 죄가 유배에 그쳤는데, 드디어 지정과 함께 거스름이 있어서 즉시 정승에서 파면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밤에 일을 담당한 재상들이, 예문관 관원을 파면하기를 아뢰어 이조 랑(吏曹郞)을 불러 그날로 정사(政事)하게 하였다. 사문(斯文) 구수복(具壽福)이 그때 이조 랑이 되었는데,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이르러서 항의하기를, “만약 사관(史官)을 다 파면하면 오늘날 기주(記注)를 누가 담당하리오.” 하고, 하교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므로 일을 담당하던 자들이 크게 노하여, “명령을 거역하는 죄는 다스리자.” 하였다.
그 다음날 밤 새벽 종을 칠 때에 영의정 정광필 필보(弼父)가 비로소 대궐 뜰에 들어오자 구 사문(具斯文)이 맞이하며 그 까닭을 말하니, 영의정이 그렇다고 하고는 또 말이 없었다. 영의정이 빈청(賓廳)에 들어가니, 일을 담당하던 자들이 먼저 이 일을 거론하여 고함치며 노기(怒氣)가 발발하였고, 영의정도 크게 노하여 꾸짖으니 그들의 마음도 진실로 조금 풀어졌다.
날이 새자 초계(抄啓)하는 일을 크게 논의하는 데 영의정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진노하시면 그때 가서 그 죄를 끝까지 다스려도 늦지 않다.” 하고, 인해 천면하여 곧 당하지 않게 하고, 또 큰 죄도 없게 하였다. 영상이 임기응변으로 어진이를 도와 나라를 보필하고 사람을 구제하고 덕을 펴서 어지러움을 포용하고, 난폭함을 안정시킴이 이와 같았다.
국조(國朝) 이후로, 범죄자에게 공적(功籍)을 깎은 것도 있고, 선원(璿源 왕실의 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한 이도 있으나, 문무방(文武榜)에는 공정치 못한 시험으로 뽑은 경우가 있으면, 파방(罷榜)을 시켜도 이름을 깎는 일은 없었다. 과거를 본 사람 중에 성수종(成守琮)이란 자가 있어 기묘년 별시(別試)에 합격하였는데, 논의하는 자가 대책문(對策文)이 문리(文理)가 접촉되지 않는다고 아뢰어 방목(榜目)에서 이름을 깎았으니,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찬성 이항(李沆)이 배척을 당하여 경상도 감사가 되었다가 대사헌 조광조 등이 죄로 귀양간 뒤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부름을 받고 곧 돌아오려 할 때 함양(咸陽) 군수 문계창(文繼昌)이 전별시(餞別詩)를 지어 주었는데, 이르기를,
명공의 이번 걸음, 신선에 오르는 것같구려 / 明公此去似登仙
얼크러진 많은 일을 칼날로 풀 베듯이 / 盤錯須憑利器剸
사냥한 뒤라고 삼굴에 토끼 없으리 / 畋後豈無三窟兎
때마침 독수리 한 마리가 가을 하늘에 오르네 / 會着一鶚上秋天
하였는데, 찬성이 기뻐하며 받아 가지고 조정에 돌아와서 전하니 사림(士林)들이 겁을 내어 발을 움츠렸다.
황계옥(黃季沃)은 목사 필(㻶)의 아들이다. 기묘년에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이 이미 귀양가게 되었는데 황계옥이 우리 형님 숙균(叔均)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상소하여 조 대사헌 등을 구제하려고 이미 원고를 갖추었으니, 자네가 그것을 정서해 주게.” 하고, 드디어 소매 속에서 내어보이며 말하기를, “상소의 뜻이 어떤가.” 하니 답하기를, “이 글이 매우 아름답구려. 선(善)을 좋아하는 공의 마음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으리오.” 하고, 극진한 말로 권하였는데, 황계옥이 정서하지 않고 갔다.
며칠 후에 윤세정(尹世貞)ㆍ이래(李來) 등과 함께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그 요지에, “조 아무개는 옛 법도를 어지럽게 하고, 당파를 만들어 나라를 그릇되게 하였으니 청컨대 법으로 처치하소서.” 하였다. 조 공은 이 일로 화를 당하였다. 대개 황계옥은 상소 두 건을 지어놓고 먼저의 글을 우리 형님에게 보였는데, 자기와 맞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서하지 않고 갔으니, 그 간사한 형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패관잡기》
조 부자(趙夫子)는 집을 다스리고 몸을 행동하기를,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학문을 독실하게 하여 심한 더위에도 꿇어앉아서 의관을 반드시 단정히 하고, 아침부터 저물도록, 초저녁부터 삼경까지 우뚝이 움직이지 않고, 맑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을 여름 더위나 짧은 밤에라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학문을 생각하면 정주(程朱)에는 미치지 못하나, 역시 많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직접 조금 시행하다가 갑자기 불행하게 되었으니, 당시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충암(沖庵)의 학문은 처음에는 비록 노장(老莊)에 빠졌으나, 후에는 식견이 실제로 남보다 한층 높았으며, 그의 귀양소(歸養疏)와 사직소(辭職疏) 등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이런 식견을 가지고도 그 뜻과 같지 못하고 마침내 큰 화에 빠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제학 김정(金淨)은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제주도로 장류(杖流)되었다. 해남(海南) 바닷가에 이르자 길가의 늙은 소나무 밑에서 쉬면서 세 절구(絶句)를 지어 읊고 소나무를 파서 쓰기를,
뜨거운 길에서 더위 먹는 사람 쉬어 가라고 / 欲庇焱程暍死民
바위와 계곡을 멀리 하직하고 길가에 몸을 굽혔네 / 遠辭巖壑屈長身
촌 도끼 날마다 찾아 오고 가을 불볕 뜨거운데 / 村斧日尋商火煑
정(정은 진시황인데 다섯 소나무에 대부를 봉하였음)만큼 그 공을 아는 이도 세상에는 다시 없네 / 知功如政亦無人
하였고, 또,
바닷 바람 지나가니 슬픈 소리 멀리서 나고 / 海風吹過悲聲遠
산에 달이 외로이 떠오르니 여윈 그림자 성글고 / 山月孤來瘦影踈
곧은 뿌리 샘 밑에 뻗게 되어 / 賴有直根泉下到
눈ㆍ서리에도 그 기상 없어지지 않았네 / 雪霜標格未全除
하였고, 또,
가지는 부러지고 잎사귀 헝클어져 / 枝條摧折葉鬖소髿
도끼에 상한 몸이 모래 위에 누우려 하네 / 斤斧餘形欲臥沙
기둥과 들보가 되려던 희망 슬프다, 그만일세 / 望絶棟樑嗟已矣
굽은 가지는 바다 신선의 뗏목이나 만들리라 / 楂牙堪作海仙槎
하였는데, 사림들이 전송(傳誦)하며 가엾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충암이 처음 금산(錦山) 유배지에 이르렀을 때 어머님이 하룻길 되는 곳에 있었는데, 근심으로 병을 얻어 점점 위급하였으므로 충암이 듣고 달려가서 문병하고, 조카 천부(天富)를 머물러 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다. 이어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시켜서 군수 정웅(鄭熊)에게 고하고, 또 그 이튿날 돌아갈 뜻을 말하였더니, 정웅이 편지를 쓰고 감자(柑子)ㆍ꿩ㆍ술을 보내어 병든 어버이에게 공급하게 하였는데, 마침 이배(移配)되어 금부 도사가 급히 유배지로 향하였다. 충암이 허둥지둥 돌아와서 곧 진도(珍島)로 나아갔다.
후에 권신(權臣)들이 망명(亡命)하였다고 잡아다 문초하므로, 충암이 정웅을 끌어들여 말하였더니, 정웅이 거짓으로 말하기를, “그가 사실 도주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알지도 못하였으며 감자ㆍ꿩ㆍ술을 보냈다는 것은 바로 그가 꾸민 말입니다.” 하였더니, 도대체 잠시 죄수를 놓아준 죄를 면하려고 사군자(士君子)가 사형에 빠지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마음인가. 《패관잡기》
○ 충암이 그 생질에게 답장한 글에 제주(濟州)의 풍토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물산(物産)을 서술한 곳이 상여(相如 한(漢) 나라 사마(司馬)상여)의 〈자허부(子虛賦)〉와 같으면서도 광채가 더하였고, 또 문장이 비장(悲壯)하여 실로 근세에 없는 작품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만약 한라산 절정(絶頂)에 올라서 사방으로 바다를 돌아보며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을 구부려 보고, 월출(月出)ㆍ무등(無等)의 여러 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기이한 가슴속을 씻을 만한데 이태백이 이른바,
구름이 드리우니 대붕이 나는듯하고 / 雲垂大鵬飜
물결이 움직이매 큰 자라가 잠겼도다 / 波動巨鰲沒者
한 것이 오직 여기에 해당할 만하다.
나는 객지에 갇혀 있는 몸으로 형편이 할 수 없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남자가 세상에 나서 큰 바다를 가로질러 와서, 발로는 이 기이한 땅을 밟고 눈으로는 이 진기한 풍속을 보니, 또한 세간의 기이하고 장한 일이다. 도대체 오려고 하여도 올 수 없고, 머물려고 하여도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역시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같으니, 어찌 그렇다고 한탄하리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부모형제가 멀리 떨어져 있고, 친한 벗들을 멀리서 생각해 보니, 예전에 같이 따라 놀던 사람이 시들어지고 죽은 이가 이미 많을 것이다. 하늘 밖에서 외로운 몸이 몇 번이나 세상의 변고(變故)를 당하여서도 평소처럼 마음을 먹었으니, 진실로 기꺼이 천리에 순응하지 못함은 아니나, 홀연히 이를 생각하면 역시 슬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하였는데 나는 이 글을 읽다가 항상 이 대목에 이르면 문득 책을 덮고 눈물을 흘렸으니 아, 슬프도다. 《패관잡기》
○ 충암이 죽음에 임하여 사(辭)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몸을 절도에 던져, 외로운 넋이 되었도다 / 投絶國兮作孤魂
자모를 저버렸으니 천륜이 막혔도다 / 遺慈母兮天倫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빠뜨렸도다 / 遭斯世兮隕余身
구름을 타고 상제의 문을 지나서 / 乘雲氣兮歷帝閽
굴원을 따라 함께 놀리라 / 從屈原兮齊逍遙
기나긴 어두운 밤이여 언제나 날이 새려나 / 長夜冥兮何時朝
빛나는 붉은 정성이여 풀속에 묻혔도다 / 炯衷丹兮埋草萊
당당한 장한 뜻이여 중도에 꺾이었도다 / 堂堂壯志兮中道摧
아 천추만세토록 나는 슬퍼하리라 / 嗚呼千秋萬歲兮應我哀.
하였다.
이신(李信)이란 자는 본래 중인데, 대사성 김식(金湜) 등이 이학(理學)으로 문도를 가르치는 것을 듣고, 곧 머리를 기르고 불교를 버리고 와서 학문에 종사하였다. 대사성의 집 담가에 토실(土室)을 짓고 과거의 마음가짐이나 행실을 굽혀 학문에 매진하여 조석으로 게을리 하지 않으므로 대사성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자제와 같이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대사성이 실패한 뒤에, 대사성의 문도를 모아 대신을 모해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옥사가 성립되어 포상을 받았다. 뒤에 충청도에 돌아갔는데 강도(强盜)에 관련되어 옥에 갇혀서 매 맞아 죽었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