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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 * 저작권 문제
철학의 항해 118번 방송은 필자 안재오가 쓴 도서 원고,: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안에 들어 있는 책의 일부인 글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문은 본문과 다른 소리의 AI 목소리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플라톤의 후기 4부작으로 알려진 4개의 책, 즉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트』, 『테아이테토스』 그리고 『정치가』 들 중 『테아이테토스』만이 플라톤의 작품이고 나머지 셋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소피스트』, 『정치가』 그리고 『파르메니데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상하는 3부작 시리즈라는 말이 『정치가』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의 구상은 소피스트, 정치가, 철학자이다. 철학자에 해당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입니다.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소크라테스: 테오도로스, 당신이 테아이테토스와 귀한 손님을 모처럼 나한테 소개해 주어서 고맙소.
테오도로스 : 소크라테스, 그들은 당신을 위해 정치가와 철학자, 그리고 소피스트들에 대한 정의를 완전히 내렸어요. 그러니 나한테 삼 배나 감사해야지요.
소크라테스 : 뭐 소피스트, 정치가, 철학자라구요? 오, 친애하는 테오도로스, 그래 그것이 대수학자, 대기하학자인 당신이 내린 평가인가요, 그걸 내 귀가 용납할 줄 알고 있어요? (플라톤 전집 5권 최민홍 번역 364 『정치가』)
그리고 『정치가』에서는 대화자로서 엘레아의 손님과 소크라테스와 동명인 젊은이가 나옵니다. 이는 대화 중에서 「소(小) 소크라테스」 라고 불리워집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① 『소피스트』 편은 주인공이 엘레아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 이고 ② 『정치가』는 역시 엘레아의 손님과 「소(小) 소크라테스」입니다. ③ 『파르메니데스』 편은 파르메니데스와 소크라테스 라는 사실입니다. ② 에서 젊은 소크라테스가 엘레아의 손님에게서 배우는 처지에 있습니다.
③ 『파르메니데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직접 배우는 사람의 역을 맡고 있습니다. 특히 ③ 에서는 소크라테스가 학문적으로 미성숙하여 때로 파르메니데스의 조롱을 받습니다.
플라톤의 대화는 보통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지하고, 조롱받는 소크라테스의 위상은 플라톤주의에 대한 평가절하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③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설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집필순서도 ①,②,③의 순서로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부분적인 근거는 「소피스트 다음으로 정치가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본문 구절입니다. 플라톤 전집 5권 최민홍 번역 『정치가』 365
어쨌든 이 3부작은 서로 뗄 수 없게 구성이 되어 있고 따라서 한 사람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확실하고 그 저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리고 『정치가』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임을 지시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여기서 학문의 분류(分類) 라는 개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분류 즉 존재의 분류, 대상의 분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큰 특징입니다.
손님 :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학문을 실천이 수반되는 것과, 순수하게 지성에 국한되는 것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플라톤 전집 5권 최민홍 번역 『정치가』 366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① 이론 철학 : 형이상학(=제일 철학, 신학), 자연학, 수학 등
② 실천 철학 : 윤리학, 정치학 등
③ 제작학 : 시학, 수사학 등
위의 인용에서 우선 그는 학문을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즉 「모든 학문을 실천이 수반되는 것과, 순수하게 지성에 국한되는 것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양 학문의 기본적인 구도이다. 이를 발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이론과 실천이라는 2원적인 지식의 체계를 최초로 분류한 사람입니다. 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3분설과 2분설은 다음에 더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피스트 편에서도 분류의 문제가 자주 등장합니다.
(1) 정치과학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대한 관심, 특히 『정치가』에 담긴 정치는 그렇게 매력적인 관심이 아닙니다. 이는 플라톤이 그의 『국가』에서 표현한 국가와 정치 혹은 통치자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깊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데아 지식을 지닌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백성들이 비로소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행복한 나라를 만든다는 환상과 열정은 고귀한 이상주의를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정치학에서도 이상국가 보다는 현실의 국가와 정치체제에 대한 분류와 분석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정치가』에 나타난 정치 개념은 극히 현실적이며 심지어는 기술적입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① 기술적(技術的)이며 즉 technological ②기술적(記述的) 즉 descriptive 합니다.
즉 ① 정치란 대중 통치기술 혹은 집단 관리기술이며 인간 관리기술입니다.
② 정치에 대한 꿈이나 이상보다는 당시 현실 정치의 모습을 가치중립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정치에서 가치 개념을 완전히 탈색(脫色)하고 기술적이며 즉 technological 이며 기술적인 즉 descriptive 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입니다. 플라톤처럼 무슨 이상국가에 대한 꿈과 비전은 전혀 없습니다. 이점이 또한 그의 정치학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동물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정치를 동물 관리의 일부로 보기도 합니다. 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긴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이 동물 이하의 대접을 받고 먹을 것도 살 곳도 입을 것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정치를 동물 관리의 특수한 경우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감지덕지(感之德之) 할 뿐입니다.
손님 :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순수한 학술의 일부에 통치 또는 명령의 학술이 속하고, 여기서 ① 자가판매(自家販賣)와 비유할 수 있는 ② 자기명령(自己命令)이라는 부류가 갈라진다고 하였지요? 그 중요한 부분은 생명체의 사육(飼育)이며, 이 통치는 또한 군거동물(群居動物)의 사육으로 한정되고, 다시 이 군거동물은 보행동물(步行動物)의 사육으로 ③ 무각보행동물(無角步行動物)의 사육 기술이며, 이 사육기술도 ④ 순수종족(純粹種族) ㅡ 동물 ㅡ 사육(飼育)이라는 세 명칭 하에만 포함되는 부분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이것을 다시 세분하면 여기에 <인간 ㅡ 사육술>을 찾아보게 되지요. 이것은 두 발가진 동물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추구한 것이라고 하겠어요. 이것은 곧 통치자의 일이요 정치가의 일이지요> 『정치가』 377~378 플라톤 전집 5권 최민홍 번역
여기서 ①자가판매(自家販賣)란 자영업과 같은 말입니다. 즉 자영업 판매업을 말합니다. ②자기명령(自己命令) 역시 스스로 내리는 명령 혹은 자발적인 명령의 뜻입니다. 이 둘 다 대리점이 아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③무각보행동물(無角步行動物)이란 뿔없는 보행동물 예를 들어 개나 말 같은 동물을 말합니다. ④순수종족(純粹種族) 이란 잡종이 아닌 종족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노새는 말과 당나귀의 잡종입니다.
이런 분류의 기술이 정치나 정치가를 아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하나의 재미로 이런 분류를 한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분류를 자주 하는 것은 소피스트와도 같습니다. 소피스트 편에서는 소피스트들을 분류를 통해서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즉 소피스트는 취득술, 수렵술, 설득술, 자칭 교육술을 가진 존재로 규정됩니다. 소피스트 대화를 보겠습니다.
지금 의론에 따르면, 테아이테토스, 이런 결론이 내릴 것 같습니다. 즉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기술(획득술) 중의 취득술(取得術), 그 중의 수렵술(狩獵術), 그 중의 육상동물(陸上動物)의 수렵, 그 중의 인간 수렵, 그 중의 설득(說得)에 의한 수렵, 그 중의 사적(私的)인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렵, 그 중의 사례(射禮)를 돈으로 지불받는 수렵, 즉 자칭교육술(自稱敎育術)로서, 더구나 그것이 부자요 명문(名門)인 젊은이들의 수렵일 경우에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의론에서 결론을 내지자면 소피스트술이라고 이름을 붙여야겠지요. 플라톤 전집 5권 136 『소피스트』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의 특징은 일종의 사회계약설 비슷한 사상이 거기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 집단의 특징인 정치 즉 국가의 기원을 사회계약론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당장의 시급한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현실의 긴급한 실천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국가와 정치를 발생론적으로 탐구합니다.
이 점에서 『정치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과 동일한 면이 있습니다. 즉 국가의 성립을 발생론적으로 고찰하는 것입니다. 단 그 차이점은 전자는 신화적인 발생을 다루는 반면 후자는 인간의 본성에 의한 국가의 형성을 탐구합니다.
플라톤의 실천적인 정치학은 그의 『국가』에 나타난 생각, 즉 「훌륭한 사람들이 정치 참여를 거부하면 그 대가(형벌)는 열등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에서 간단히 표현됩니다.
그들은 결코 어떤 소득을 기대하고 통치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네.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자기와 동등한 사람으로써 통치자의 자리를 맡길만한 사람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불 그 자리에 앉는 것이네. 마치 오늘날 권력을 쥐고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처럼 말일세. 그러므로 진정한 통치자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있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졌네. 플라톤 전집 1권 최민홍 번역 『국가』 52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 사회의 불행과 재난이 종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당시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치의 조건을 밝히는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혹은 국가의 성립 기원부터 알고 싶어 합니다.
그는 국가나 정치가, 즉 왕이 없었던 일종의 자연상태를 즉 state of nature를 상정합니다. 정치나 국가가 도입되기 전에는 신이 직접 통치하는 사회라고 합니다.
『정치가』에는 여러 가지 장황한 신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 자주 나오는 것은 「태고(太古)에는 사람이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치가』 380
그밖에도 이와 관련해서 천체(天體)가 지금과는 반대 방향 ㅡ역회전(逆回轉)ㅡ 했다 는 말도 나옵니다. 이런 시대에는 생물이나 인간이 노쇠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젊어지고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성질을 갖게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치가』 382 참고 그 시대에는 신(神)이 직접 인간과 우주를 감독하고 통치했다고 합니다.
신의 통치 하에서는 정부가 없었어요. 그리고 여자나 어린이는 각자 개인에게 속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다 땅에서 태어나 전혀 과거(過去)의 기억이 없었어요. 물론 이런 인간들에게도 땅은 풍족한 과실을 제공했어요. 인간은 나체(裸體)가 되어, 주로 푸른 하늘 아래 살았어요. 그 곳의 기후가 적합하거든요. 그들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고 땅위에 무럭무럭 자라는 부드러운 풀위에 누워 지냈어요. 『정치가』 384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태고(太古)적의 신의 통치하에서는 정부가 없고 소유권도 없고 인간은 마치 성경의 「에덴 동산」에서처럼 벌거벗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 때 인간들은 동물들과 사로 소통 교감했다고도 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이 때 인간들은 생존을 위하여 고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간과 세계는 타락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물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지진이라고도 합니다.
거대한 신화들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치 즉 인간들 간의 지배 통치가 없던 시기와 있게 된 시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정치 전기(政治前期)와 정치기(政治期)로 역사를 양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전기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기는 아닙니다. 단지 사람들이 아이도 낳지 않고 번식이 일어나며 스스로의 노동으로 살지 않고 자율과 자치가 없이 신과 자연의 은혜로 살아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치기(政治期)로 들어서면서 인간이나 ㅡ동물들도ㅡ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됩니다. 스스로 성장하며 양육하고 생산하도록 운명지워집니다. 동물들과도 죽고 죽이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큰 곤경에 빠진 인간들을 돕기 위하여 신들은 인간들에게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부여합니다. 불은 프로메테우스가 주고 여러 가지 기술은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네 여신이 주고, 곡식의 씨앗과 나무를 심는 법은 또 다른 신들이 준다고 합니다. 『정치가』 386
이리하여 인생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생기게 되었어요. 이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야 여러 신들의 관심이 인간으로부터 떠나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진로를 찾아가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며 세계의 변화와 함께 변하며, 때로는 저 방법으로 그렇게 하였지요. 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할 테지요. 우리가 앞에서의 논의에서 통치자와 정치가에 관하여 설명할 때 범한 오류를 분명히하는 데 유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387
위의 인용문은 많은 함축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 혹은 정치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하기도 하고 또 통치자 내지 정치가의 임무를 말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 과정에는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 등이 포함되었고 소유권과 가족 등의 의미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정치가 혹은 왕의 역할이 어떤 면에서 신(神)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즉 최초의 통치자는 신인데 나중에 인간이 이를 물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치자는 신을 대신하여 인민을 다스리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정치의 역할은 인간 집단의 사육(飼育)이라는 정치의 정의(定義)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성경의 구절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 때 동물 사육을 참고하면 다소간의 인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손님 : 소크라테스, 나는 신성한 목자의 풍모는 통치자의 그것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이 지상(地上)의 정치가들은, 그 성격이 그 치하(治下)에 있는 자와 유사하고, 오히려 그들의 성격과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소 소크라테스 : 참, 그렇군요.
손님: 그런데 우리는 이들 정치가에 대하여 연구하고, 그들이 과연 신성한 목자처럼, 그 치하의 인민보다 월등한가, 혹은 동등한가, 이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하겠어요. 『정치가』 387~388
여기서 영어번역을 보면 「통치자」는 왕 (king)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위 문장에서 「신성한 목자」는 신(神)을 말합니다. 즉 신(神)은 왕보다 고귀합니다. 「지상의 정치가」들은 그 당시 현실의 정치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통치를 받는 인민들과 그 수준이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합산하면 신은 왕들 즉 (통치자)보다 낫고 당시의 정치가들은 이들보다 못하다는 것이 됩니다. 당시 아테네는 민주정치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문장에서 암시하는 것은 왕정이 민주정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통치는 인간들의 사육(飼育)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 즉 인간이 같은 인간을 다스리는 기술은 사육이 될 수 없고 관리 혹은 행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손님 :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할 일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명칭을 개조하여, 사육(飼育)보다는 <관리>의 개념(槪念)을 얻어, 이를 분류할 일이지요. 왜냐하면 아직도 많은 분류가 있을 테니까요. 소 소크라테스 : 그럼 어떻게 분류해야 할까요? 손님 : 우선 신성한 목자(牧者)와 인간의 수호자(守護者) 혹은 관리자(管理者)를 구분해야지요. 『정치가』 387~388
이제 정치가는 목자가 아니라 행정가 혹은 관리자로 규정됩니다. 그리고 더 분류를 하여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통치를 순종하는 것을 정치라고 하고 폭력으로 관리하는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세분합니다. 이런 관리술(管理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제왕 또는 정치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왕이란 참된 왕(true king)을 말합니다.
정치가와 왕을 각각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민주적인 아테네에서 요구되는 정치인과 그가 후일 가르칠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정치를 기술로서 분류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더 관리로서의 정치를 탐구합니다. 정치는 협동기술 즉 cooperative art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비되는 개념은 원인기술 즉 causal art입니다. 이는 또 협동원인과 주요원인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직조술(織造術)을 예로 듭니다. 옷감 자체를 만드는 기술을 원인기술이라고 부르고 옷감 짜는 기구를 만드는 기술을 협동기술이라고 합니다.
이것 없이는 어떤 기술도, 그 일을 할 수 없는 기술을 “협동기술”이라고 부르고, 현물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원인기술”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정치가』 395
다시 말해서 정치는 생산이 아니라 그 생산을 위한 도구를 만드는 기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들이 하는 여러 가지 생산 활동을 조정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굳이 칼 마르크스의 개념을 쓴다면 토대와 상부구조에 해당합니다.
즉 정치가 빵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들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육에서 관리로 그 규정이 바뀐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닙니다. 사육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위주이지만 관리의 대상이 되는 인간들은 스스로 먹이를 구하거나 만들어 냅니다. 이런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특성은 고도의 사회성이다. 도덕이나 법 그리고 각종 제도를 통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인간들의 생산성마저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협동기술”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기술 개념을 가지고 정치를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기술의 일종인 “도량술”즉 art of measurement 을 활용하여 장단과 과부족의 문제를 추구합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중용 즉 the golden mean 개념이 처음 나옵니다.
윤리의 중용에 앞서 기술에서의 중용이 있습니다. 이는 실은 표준을 말합니다. 생산 기술에 있어서의 알맞은 정도를 중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표준에 의하여 대와 소가 규정됩니다. 예를 들어 섬유 직조술의 경우 실의 길이나 굵기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맞는 것을 말합니다.
손님왈 : 여기서 이렇게 하여 대•소가 존재하게 되고 식별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단 이것은 상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 밖의 중용 혹은 이상적인 표준과 비교가 있어야 해요. 『정치가』 396
여기서 말하는 중용은 즉 (the mean) 달리 말해서 “이상적인 표준” (ideal standard) 입니다. 또 정치에 관하여 중용은 관리의 표준입니다. 생산에 있어서 표준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 혹은 관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의 표준이 서지 않으면 관리 곧 정치기술은 제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손님 : 다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관리의 기술을 두 가지로 나눠 구분하여 한편으로는 대소, 장단, 심천, 광협, 지속 등을 관리하는 기술을 두고, 또 한편으로는 중용, 조화, 호기, 합당 등등. 환언하면 중용 혹은 극단에서 벗어난 기준을 나타내는 말로 관리하는 기술을 두기로 하지요. “정치가” 399 “환언하면 중용 혹은 극단에서 벗어난 기준을 나타내는 말로 관리하는 기술을 두기로 하지요”. 이 부분의 제대로 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극단에서 벗어난 기술 즉 중용 혹은 표준을 가리키는 기술을 말하지요”. 조화, 호기, 합당은 영어로 the fit, and the opportune, and the due 입니다.
도량술로서의 기술은 다시 두 가지로 구별됩니다. 즉 첫 번째로 단순히 양을 측정하는 기술과 두 번째로는 중용 혹은 표준에 근거해서 주어진 양의 과부족을 측정하는 기술입니다. 관리로서의 정치기술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중용 혹은 이상적인 표준은 달리 말해서 조화, 호기, 합당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기준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관리의 기술은 보편적이며 만물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술은 어느 의미에서는 관리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중용을 찾는 것이 정치의 전부는 아닙니다.
중용 혹은 표준을 찾는 기술은 또한 위에서 언급한 협동기술과 연결이 됩니다.
손님 왈: 이리하여 우리는 국가에서 기구를 만드는 기술은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우리는 협동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기에는 보다 더 많은 이유를 찾아내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만일 이런 기술이 없다면 국가는(도) 위정자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는 통치술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정치가” 402
위의 인용에서 “국가에서 기구를 만드는 기술”이란 다름아닌 정치와 행정 그리고 관리를 위해서 필요한 기술을 말합니다. 국가의 각종 제도, 행정 조직, 국방 기구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각종 법과 규칙들일 것입니다. 이런 국가 기구가 없으면 국가도 정치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2) 정치 제도 및 형태 분석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의 정치 형태를 따라 크게 3가지의 정치 형태를 구별합니다. 즉 왕정과 소수자의 정체와 평민정치입니다. 이를 보통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정 즉 (monarchy)는 다시 선한 왕정 곧 (royalty)와 폭군왕정 곧 (tyranny)로 나누고 소수자의 정체는 귀족정치와 과두정치로 나눕니다. 평민정치는 선악의 구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가”에서는 총 5가지의 정부 형태를 구별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평민정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습니다.
왕정과 소수자의 정치는 각각 두 가지씩 있습니다. 즉 좋고 나쁜 것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이들의 가치를 구별하는 기준은 자의와 강제, 빈곤과 부유 그리고 규율과 무법 등입니다.
손님 왈 : 여기 자의와 강제, 빈곤과 부유, 규율과 무법의 표준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 각각의 정체에 적용했어요. 처음 양자는 각각 두 가지로 나누어 왕정에 두 가지가 있다고 보고 여기에 따르는 두 개의 명칭을 붙였어요. 왕정과 폭군정치가 그것이지요.
소 소크라테스 왈 : 과연 그렇군요.
손님 : 과두 정치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귀족정치와 과두정치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정치가” 407
이 문장에는 약간의 의미의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왕정이 다시 선한 왕정과 폭정으로 분류되고 과두정치는 귀족정과 과두정치로 분류됩니다. 그 의미는 1인 정치 즉 (군주정치)는 왕정과 폭정으로 나뉘고 소수의 정치는 귀족정치와 과두정치로 분류된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처럼 민주정치에 대한 편견은 없습니다. 그는 모든 정치 형태에 대해서 가치 중립적입니다. 왕정에 대해서도 위의 인용문처럼 좋은 왕정과 나쁜 왕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손님 왈: 군주정치가 휼륭한 법률의 제약을 받을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여섯 가지 정체 중에서 가장 훌륭한 정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만일 불법이 판을 친다면, 인민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압제가 심한 정체가 될 수 있겠지요?
소 소크라테스: 사실 그렇습니다.
손님: 소수에 의한 정치는 1인 정치와 민주정치의 중간으로 선•악에 있어서도 중간정도이지요. 그러나 민주정치는 다른 정치 제도와 비교하면, 가장 유약하며, 크게 선을 행할 수 없는 동시에, 크게 악도 저지르지 않지요. 관직이 너무 세분되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이 정체는 법으로 다스리는 모든 정치 중에서는 가장 악하고, 불법으로 다스리는 정치 중에서 가장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치가” 421
앞에서는 1인 통치, 소수의 통치 그리고 다수의 통치 즉 (민주주의) 등 기본적인 3가지 정치 형태로 나누고 다시 1인 통치는 왕정과 폭정으로 그리고 소수의 통치는 귀족정과 과두정으로 구분하여 총 5가지 정치 형태를 분류했으나 여기서는 6가지 라고 합니다. 아마 민주정치도 선과 악으로 나눈 것 같습니다. 이는 “정치학”에서와 같은 방식입니다. 모든 정체 즉 왕정,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치는 모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치가”와 “정치학”은 같습니다.
그리고 군주정도 무조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법률의 제약을 받을 경우 가장 좋다고 합니다. 법의 제약없는 군주정 즉 폭정은 가장 나쁜 형태입니다. “불법이 판을 친다면, 인민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압제가 심한 정체가 될 수 있다” 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입니다. 굳이 현대 정치와 비교한다면 그는 입헌군주제를 선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던 플라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증오했다고 하는데 이는 상당히 과장된 견해입니다. “국가” 8 편에 나타난 플라톤의 민주주의, 과두정치, 전제정치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묘사를 보면 그가 단순히 민주주의를 싫어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은 민주주의 정치의 장점인 자유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 재판의 부당성 때문에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강한 실망과 불만은 있었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을 떠나 정치학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철학자 즉 최고의 지식을 가지 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현실 정치의 분석에서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재미있습니다. 민주정치는 “가장 유약하며, 크게 선을 행할 수 없는 동시에, 크게 악도 저지르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민주주의는 법치 가운데서는 가장 악하고 불법 정치 가운데서는 가장 나은 것입니다.
즉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중립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법의 한계를 알면서도 다른 한편 법의 통치를 선호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는 “정치가” 여러 군데에서 법의 약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손님 왈: 입법이 통치자의 한 과업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법률에 의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통치자의 권력을 지닌 자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있나요?
소 소크라테스 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손님 왈: 그 이유는 이러하오. 법률은 어떠한 경우에나 통하는 가장 올바른 것을 완전히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가장 좋은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각각 개성과 행위가 천차만별하고, 인간사의 무한하고 불규칙적인 움직임은 결코 일반적이고 단순한 법칙을 적용할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통치자의 기술로도, 어느 때나 영원히 계속하여 적용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치가” 411
한 마디로 법률은 복잡다단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다운 정치가란 앞에서 말한 통치의 기술과 학식을 가진자입니다. 즉 관리의 기술을 가진자로서 중용과 이상적인 표준에 의거하여 법을 적용시켜 복잡한 현실을 타개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특정한 정치의 형태가 반드시 결부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정체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법률에 의하여 1인 독재를 하는 정치 즉 왕정입니다. 그러나 이도 불법이면 안 됩니다. 가장 나쁜 정치가 됩니다.
손님 왈: 그렇다면 유일한 참된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통치자가 올바른 학술을 깨치고 다스리는 정치라야 하며 결코 무지한 자가 다스리는 정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률에 의거하여 다스리건 말건, 인민의 뜻에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 이와 같은 것은 전혀 통치자의 개념 속에 포함시킬 것이 못 됩니다. “정치가” 409
법의 지배를 무시하는 듯한 위의 문장의 속 뜻은 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즉 법 역시 통치자가 인민들을 위하여 만드는 것입니다.
굳이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실정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법을 만드는 목적과 그 의지라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 곧 정의와 공정 그리고 국민의 복리 등의 추상적인 개념이 실정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손님 왈 : 그 통치자가 공익을 위해, 어떤 사람을 죽이거나 국외로 추방하여 나라를 바로 잡거나, 또는 인민을 국외로 이민시켜 인구를 줄이거나, 혹은 해외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를 늘이거나간에, 적어도 그들이 지혜와 정의에 의해 행동하고, 그 권력을 대중의 질서와 발전을 위해서 행사한다면, 그들이 지배하고, 또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국가는, “정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밖의 모든 정치는 결코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 단지 이 정치의 모방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방 정치 중에서 어떤 것은 선정(善政)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악정(惡政)입니다. 그런데 선정도 한낱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정도가 아닙니다. “정치가” 409, 410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 못지않게 정치의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 문제와 관련하여 좀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실정법과 정책은 통치자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기본법 즉 오늘 날의 헌법 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법이 가지는 2중적인 의미를 좀 더 살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을 보아야 합니다. 그 역시 법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의 형식주의에 빠져 현실을 무시하면 거대한 모순에 부딪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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