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가 조수미(47)가 9월 29일 저녁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주빈 메타와 함께 무대에 선다. 공연 제목은 ‘슈퍼콘서트V-빈 필하모닉 & 조수미’, ‘
슈퍼콘서트’는 현대카드가 문화마케팅의 일환으로 펼치고 있는 초대형 공연 프로젝트.
일 디보, 비욘세, 빌리 조엘, 플라시도 도밍고에 이어 다섯 번째 공연이다.
“빈 필하모닉과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어서 감격스러워요.
167년의 전통을 지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죠.
또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와 함께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가슴이 뜁니다.
인도계인 주빈 메타와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많은 추억이 있어요.
우리는 동양계로서 아시아 아티스트들을 세계 무대에 많이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왔죠.”
주빈 메타와 조수미는 항상 고춧가루를 가지고 다니며 뿌려먹는 ‘고춧가루 친구’라고 한다.
“그는 언제나 인도 레스토랑에서 인도 음식만 먹자고 해요.
인도 음식을 잘 소화 못하는 음악가들에게는 곤욕일 수 있지만 주빈 메타의 마음을 이해하죠.
그가 인도 음식을 먹으며 힘을 내는 것처럼, 저도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나요.”
조수미는 주빈 메타가 음악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했다.
“주빈 메타는 인도와 인도 사람을 매우 사랑해요.
언젠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 한 인도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다급하게 주빈 메타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아이가 부당한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다면서
도와달라고 했죠.
그러자 주빈 메타는 그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빈 경찰과 씨름하다가 그 사건을 해결했어요.
자국민을 사랑하는 그의 행동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그녀는 이날 공연에서 빈 필하모닉과 호흡을 맞춰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중 ‘꿈속에 살고 싶어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중 ‘웃음의 아리아’ 등을 들려준다.
빈 필하모닉은 브람스의 교향곡 4번과 하이든의 교향곡 104번도 연주한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42년 창단됐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빈 필하모닉은 조수미에게 지휘자 카라얀을 생각하게 한다
. 자신에게 ‘신이 내린 목소리’라고 극찬한 카라얀과 호흡을 맞춰 1988년 빈 필하모닉 공연에서 노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카라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 공연이 무산된 적이 있다.
“빈에서 마에스트로 카라얀과 일하면서 빈 필하모닉을 이미 사랑하고 있었어요.
오스트리아인들의 낭만이 연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조수미는 이미 연주 스케줄이 짜여있었기 때문에 이번 한국 공연 제안에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 공연에 제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아 연주를 하기로 결정했죠.
9월 26일 프랑스 파리 공연을 하고 28일 한국에 입국해 29일 공연을 한 후 다음날 미국으로 떠나 1
0월 3일 뉴욕 공연을 하게 돼요.”
그녀는 1년에 300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낸다.
몇 년간의 연주 일정이 꽉 짜여있기까지 하다.
“다른 대륙을 이동하다 보니 시차로 고생을 많이 해요.
또 연주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을 보기도 하죠.
지난 6월 1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로 가던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제 가슴이 철렁했어요.
그건 두 달 전 제가 탔던 비행기였거든요.
저는 7월에도 이 비행기를 타요.”
조수미는 이전에도 로마행 인도네시아 가루다 비행기가 추락해서 무척 놀란 적이 있다고 했다.
“제가 타고 3일 뒤에 그 비행기가 사고가 나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결혼해서 아이들과 조용히 집에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해요.”
1962년 서울에서 2남1녀 중 첫째로 태어난 조수미는 성악가가 꿈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성악가가 됐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수미를 임신했을 때부터 매일 유명 성악가의 음반을 들었다.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조수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노래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KBS 동요 프로그램 ‘누가누가 잘하나’에 나갔어요.
‘불어라 은피리’라는 곡으로 연말 결선까지 올랐는데 6학년 언니와 동점을 받고 우수상을 탔어요.
‘내가 음악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깨닫는 계기가 됐어요.”
이때부터 조수미는 성악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화예중·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성악과(82학번)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꼴찌를 했다는 그녀는 2학년 때 중퇴하고 1983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1983년 유학을 시작할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써왔어요.
당시 일기장에는
1. 어떤 고난이 닥쳐도 꿋꿋이 이겨내며 약해지거나 울지 않을 것
2. 절대 약하거나 외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3. 어학과 노래에 온통 치중할 것
4. 항상 깨끗하고 자신에게 만족한 몸가짐과 환경을 지닐 것 5. 말과 사람들을 조심할 것.
그리고 말과 행동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적혀있어요.”
조수미는 유학 2년 만에 나폴리에서 개최된 존타 국제 콩쿠르를 거머쥐었고 이어 이탈리아 시칠리안·베로나 국제 콩쿠르,
스페인 바르셀로나 비냐스 국제 콩쿠르 등에서 1등을 차지했다.
국제적인 무대는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질다 역으로 데뷔했다.
주로 해외에서 생활하는 그녀는 자신을 항상 응원해주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힘을 낸다고 한다.
조수미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을 때 한국사람이라는 생각이 더욱 든다고 했다.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비 오고 흐린 날 흰밥에 고추장 넣고 김치 비벼서 먹고 싶을 때가 있어요. ”
그녀에게 가장 힘들고 기억에 남는 공연 중 하나는 2006년 프랑스 샤틀레 극장에서의 공연이다.
“그날 1500여명의 파리 시민이 몰려왔는데 아무도 제가 부친상을 당했는지 몰랐어요.
네 번째 앙코르곡으로 오페라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부른 뒤 이 사실을 관객에게 이야기했고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죠.
아버지의 임종조차 보지 못한 것이 딸로서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지만
아버님도 기분 좋게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게 축복이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도 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여자로서 완벽한 행복을 맛보고 싶어요.
물론 예술가에게 결혼은 매우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노력을 해야겠지만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첫댓글 예전에 대구두류예외 음악당에 조수미씨가 왔었는데...정말 목소리가 환상적이였어요...야외의 공간인데도 어찌나 소리가 탁티게 나오는지...조수미씨 앵콜송도 불러줬는데...몇년전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