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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 증명하는 성경의 신뢰도
고고학이 성경의 신성성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다. 고고학이 성경 비판론자들의 이론들에 대하여 큰 공헌을 세웠으나, 성경이 영감 받은 책이라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이 실제적이고 논리적이었다는 것을 고고학을 통하여 알게 됨으로 성경 말씀의 정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위를 통하여 성경의 영감 성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열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나열하는 고고학적 발견들은 구약 및 신약 성서에 기록된 모든 지명 및 인물들이 실재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
고고학자들의 증언
1. 고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F. Albright : “고고학이 실제적으로 구약성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Yale 대학의 Millar Burrows : “고고학은 여러 케이스를 통하여 근대 비평가들의 논리가 가상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며, 역사적 발전단계를 인위적으로 적용했음을 증거 하였다...”
3. Merrill Unger : “구약성서 고고학은 모든 나라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소생시켰다...””
4. Frederic Kenyon : “지난 19세기 후반기를 휩쓸었던 성경 회의론 자들의 비판에 관하여 고고학이 그 허구성을 증명함으로서 고고학은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1. “Black Stele” : “모세 오경을 정말로 모세가 기록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구약 비평가들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이슈들 중 하나였다. 모세 당시에 글씨가 존재하지 않았었으며, 만약 있었다고 할지라도 거의 이용되지 않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세 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Black Stele”이 발견되어짐으로 이러한 논리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 비석에는 쐐기 모양의 글자들로 함무라비의 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으며, 이것은 적어도 모세가 태어나기 3세기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측정되었다.
2. 헷 족속 (Hittites) :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성경비평가들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헷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 외에는 이 족속에 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지금은 1200년의 헷 족속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3. Ebla : 로마 대학의 Paolo Matthiae와 Giovanni Petinato에 의하여 시리아 북쪽 지역에서 Ebla라고 불리는 서판을 발견하였다. Tell Mardikh 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196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1968년 Ibbit-Lim 왕조의 상이 발견되었다. Ebla는 B.C. 2300년경에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서 약 260,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B.C. 2250년에 Nara-Sim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1974년 이래로 17,000개의 Ebla와 관련된 서판들이 발견되었다.
Ebla 서판이 성경학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세 시대에는 쓸 수 있는 글씨가 제정되기 전이라고 성경 비판론자들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썼다는 모세 오경이 실제로 모세의 글이 아니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았었던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Ebla 나라의 서판은 모세가 나기 1000여년 전의 법과 풍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가상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 서판에 기록된 법률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구약의 신명기가 다른 책들보다도 더 늦게 기록되었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이 밝혀졌다.
또한 Ebla 서판이 밝힌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창세기 14장을 증거한 것이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 (창 14:1,2). 창세기 14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어졌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5 도시의 왕들과 싸워서 이긴 이야기를 하나의 소설처럼 여겼었다. 그런데 Ebla 서판은 위에 기술된 5나라의 이름을 창세기에 기록된 그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의 풍습과 연대들도 기록하고 있어서 창세기 14장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증거 하였다.
4. Mari 서판 : 마리 서판의 발굴이 Andre Parrot의 지도아래 1933년에 시작되었다. 유프라테스 중부에 위치한 마리는 북서쪽지방의 셈족 부조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1936년 M. Parrot은 B.C.17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되는 수 천 개의 설형문자 서판들을 발견하였으며, 이 서판들은 창세기에 나온 부조들의 생활문화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4장 10절에 나오는 나홀성의 이야기가 하란과 같이 마리 서판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리의 왕이었던 Arriyuk은 실제로 창세기 14장의 아리옥과 같은 사람이었으며, 벤쟈민도 마리의 한 족속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William F. Albright)
5. Nuzi 서판 : Nuzi는 이라크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지역인데, 이 곳에서 발견된 서판들은 부조시대의 사회적, 법적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부조의 이야기들 중에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부인이 시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렇게 하였으며, 후에 야곱의 두 아내도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부조시대 때에 행하던 이러한 풍습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몇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졌다. 그러나 Nuzi 서판의 기록은 이러한 결혼 풍습에 관한 법이 그 때 당시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Nuzi 서판에 기록된 신랑 Shennima와 신부인 Kelim-ninu의 결혼 서약에서 아내가 임신에 실패하게되면 시녀가 남편의 둘째 부인이 될 것이라는 계약을 한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풍습은 다른 시대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부조시대에만 존재하였던 풍습이었다.
6. 소돔성의 문 : 창세기 19장 7-8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이 닫힘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야기가 나온다. Keil과 Albright의 조사에 의하면 B.C. 2200-1600년경 사이에는 무겁고 강한 문을 집집마다 설치했다고 한다. B.C. 900-600년경에는 대부분의 개인집들이 커튼이나 문이 없는 둥근 게이트를 썼었으나, 롯의 시대에는 경찰의 힘이 충분하지 않아서 강한 문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7. 요셉의 역사 : 창세기 37장 28절에 보면 요셉이 은 20개를 받고 팔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은 20개가 그 때 당시 노예를 파는 적절한 값이었을까? K. A. Kitchen의 연구에 의하면 은 20개는 B.C. 18세기 때 노예를 파는 평균값이었다고 하며, 그 전에는 주로 은 10-15개 정도로 노예 값을 매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은 20개에 요셉이 팔렸다고 하는 기록은 시대적 정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흉년이 들어 요셉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사갔다는 성경의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Beni Hasa의 무덤에 셈 족속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셉이 노예에서 수상으로 올라가는 사건은 그 때 당시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나일 지방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가나안 사람 Meri-Ra는 왕의 갑옷 드는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가나안 사람 Ben-Mat-Ana는 통역관의 높은 직위를 얻었으며, 셈 족속의 Yanhamu는 Amenhotep의 부수상 직위를 얻어 삼각주 지역의 곡창지대를 관리하는, 흉년 때에 요셉에게 부여된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다.” (Howard Vos)
8. 낙타 : 어떤 학자들은 창세기 시대에 낙타를 썼다고 기록한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여 B.C. 2000년경부터 이미 낙타가 사용되고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구 바벨론 시대에 있었던 페소포타미아의 기록을 보면 낙타의 사육과 사용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며, Nuppur에서 발견된 수메르의 기록에도 낙타의 사육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B.C. 25-24세기에 있었던 나라 Mari의 옛 집터에서 낙타 뼈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에도 B.C. 2000-1200년경의 것으로 판정되는 팔레스타인 집터에서도 발견되었다.
9. 라기스 문서 : 예레미야 34:6,7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이스라엘은 느브갓네살에게 쓸데없는 반역을 저질렀다. 유대는 이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계속 싸우기만을 고집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항복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 반역의 마지막날이 왔다. 히브리 백성의 독립의 가능성은 예루살렘에서 35마일 떨어진 두 전초기지인 라기스와 아세가의 방어에 달려있었다. 이때 라기스에서는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자세히 적은 편지를 발송했다. 이 편지를 라기스 문서라고 부르며, 이 편지의 발견은 구약을 연구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라기스 문서에 적힌 언어는 완전한 고대 히브리어였다. 이 문서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정확한 시대를 발견했으며, 이 안에 기술된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이 예레미야가 기술한 것과 완전히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Albright)
1. 누가복음 : 누가복음 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 시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를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비평학자들은 그 때 당시 호적은 없었으며, 구레뇨도 수리아의 총독이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지도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첫째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로마는 정규적으로 세금 등록을 실시하였고 또한 매 14년마다 호적을 실시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정말로 아구스도의 영으로서 시작된 것이며, 첫 번째로 시행된 때는 B.C. 23-22, 또는 B.C. 9-8 년경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둘째로, 구레뇨는 B.C. 7년과 A.D. 6년경, 모두 2번 총독의 자리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안디옥에서 발견된 비문과 조세푸스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셋째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보면 호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호적 할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는 자들은, 호적에 상관된 가족 등록을 하고,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땅들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야할 필요가 있다.”
2. 빌라도 : 1961년까지는 빌라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충분하지 못하여 단지 성경에 나와있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두 이태리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발굴하여 가로 2피트, 세로 3피트 정도 되는 라틴어로 된 비석을 발견하였다. Antonio Frova가 처음 이 비석을 읽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다 총독 빌라도가 티베리움을 가이사랴의 시민들에게 선사하다.” 이 비석은 빌라도가 실제로 살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고고학적 기록이었다.
3. 나사렛 : 여호수아 19장 10-15절에는 스블론 자손들이 거할 땅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그런데 나사렛은 이 이름들 중에 없다. 조세푸스는 갈릴리 지역의 45개 마을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지만 거기에도 나사렛은 없다. 탈무드에도 62개의 마을들이 나오지만 여기에도 나사렛은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실존하였는가?” 하고 비평가들이 질문을 한다.
1962년 Michael Avi-Yonah가 가이사랴에서 행한 발굴 작업에서 3개의 조각난 비석들 중 2개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석을 나사렛 비석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첫 비문이다. 이것을 통하여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A.D. 1세기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근대 나사렛의 발굴은 나사렛에 로마시대 훨씬 이전부터 정착 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또한 나사렛이 아주 작은 동네였다고 밝히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여왕은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고 그곳이 예수의 가족들의 거주지였다고 여겼다.
4. 가버나움 :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마 2:1)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지붕을 뜯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위의 말씀과 마가복음 1:29-34절을 같이 볼 때 예수님의 집은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딸려있는 집 (Insulus :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바깥채)인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의 어업이 번영하였다면 베드로의 집은 다른 보통 집들보다 조금 커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에 나온 이러한 집의 구조가 실제로 그 때 당시 존재하였을까?
고고학자들이 가버나움의 자리를 발굴하였을 때 이렇게 생긴 Insulus가 발견되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거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곳 위에 팔각 교회당을 지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교회가 가버나움에서 발견되었고 그 교회 아래서 Insulus라고 불리는 바깥채의 잔여가 발굴되어져 마가복음에 기술된 집의 형태가 실제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5. 베데스다 연못 : A.D. 1세기경, 구 예루살렘 북동쪽 4분의 1지점에 베데스다 (“새 도시”)라는 도시가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되어지는 St. Annes 교회 근처를 발굴하는 작업이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F.F. Bruce는 이 발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발굴을 통하여 베데스다 연못이 발견되었는데, 이 연못은 쌍둥이 연못으로 남-북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두 연못 사이를 바위가 막고 있고, 그 주위를 “포르티고”라고 불리는 네 현관이 둘러싸고 있다. A.D. 333년경에 이곳을 방문하였던 보르도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쌍둥이 연못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쿠무란에서 발견된 청동 두루마기에도 히브리말로 “Beth-esh-dathain” (두 개의 샘터)라고 베데스다 연못을 설명하고 있다.
6. 맷돌 : 가버나움은 화산지역으로 화산암을 이용한 생활 기구들이 많이 쓰였다. 한 좋은 예는 가버나움 발굴 시 발견된 맷돌이다. 가버나움에서는 화산암으로 맷돌을 만들었으며 다른 지역으로도 수출을 하였는데 이 맷돌은 두 사람이 같이 돌리게 되어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17장 35절에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7. 갈릴리 배 : 1986년 1월 아마추어 고고학자 Moshe와 Yuval 형제는 Kibbutz Ginosar과 Moshava Migdal 사이 갈릴리 해변에서 B.C. 1세기부터 A.D. 1세기경에 쓰였던 갈릴리 사람의 배를 발견하였다. 이 배는 고기잡이와 사람, 화물 운송용 등 다목적으로 쓰였던 배인데, 길이가 27 피트, 넓이가 7-1/2 피트로서 13명을 태울 수 있는 배였다. 이 배의 구조를 통하여 그 당시 가뭄으로 갈릴리 호수가 깊이가 낮았었음을 알 수 있었다.
8. 성전 :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마가복음 13:1)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은 아니다. 탈무드는 “헤롯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건물을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어느 랍비의 말을 적고 있다. 이 성전이 있었던 곳은 25-30개의 풋볼 경기장을 합친 크기의 지역으로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크며, 벽의 높이는 주변 건물들 보다 10층 이상 더 높았다. 벽을 쌓을 때 사용된 돌들 중 가장 작은 것들만 해도 2-5톤이나 되며, 큰 것들은 고대 어느 시대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데 그 길이가 40피트, 넓이가 10피트, 무게가 400톤이나 된다. 이러한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웅장한 성전을 보며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마지막을 비교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주변 환경과 잘 융합되어 있다.
9. 빈 무덤 : “여자들이 갈세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1-15)
실제로 이 소문은 총독의 귀에 들어갔다. 로마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팔레스타인에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는 라틴어로 쓰여진 후 헬라어로 번역되어 유대의 모든 도시들에 붙여졌다. 1878년에 나사렛에서 흰 대리석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진 글귀가 발견되었다. “시저의 법령이라. 모든 무덤들과 묘지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어린이들, 또한 가족들의 제사를 위하여, 또한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여 어떠한 장애 없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자가 그것들을 무너뜨리거나 매장된 것을 빼내거나, 악의를 품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무덤의 문을 바꾸면, 우리의 신들과 제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정이 세워져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존중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해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만약 이 법을 범하면 중형에 처할 것이다.”
이 비석은 1세기초의 글씨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비석이 A.D. 5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로마 중앙 정부가 아그립바가 죽기 전까지는 갈릴리 정부를 관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포고는 A.D.44년 이후의 것으로 판정되어진다. 글라디우스가 A.D. 41년부터 54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이 글을 쓴 것이 확실하다. A.D. 49년, 글라디우스는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몰아내었다. 지금도 현존하는 A.D. 41년경에 쓰여진 글라디우스의 편지를 보면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시리아로부터 바다를 통하여 오는 모든 유대인들의 방문을 금지 시켰다. 만약 이 법을 어기면 “나는 그러한 자들을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을 퍼뜨리는 자로서 취급하겠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은 바로 로마 제국 전체에 자라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Blaiklock에 제공한 다른 여러 증거들을 통하여 글라디우스가 유대나 시리아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증가에 관한 경고의 편지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을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그 날부터 염려해 왔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글라디우스가 후에 위와 같이 작은 일에 전에 없는 중형을 부과하는 포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10. 요한복음 : 복음서들 중에서 성경 비판론자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책으로 비판받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 복음이다. 비판론자들은 요한이 쓴 글들과 복음서는 헬라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 출간된 Atlantic Monthly에는 “적당히 적힌 일대기와 피상적으로 씌어진 헬레니즘 철학”이라고 요한 복음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빛을 제공한다.
Alleg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쿰람 도서관은 요한의 글들에 관한 연구와 그에 관하여 오랫동안 지속되던 잘못된 관념들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교정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요한은 더 이상 헬레니즘에 가장 많이 물들었었던 전도자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의 모든 생각들은 유대 종파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극히 팔레스타인적인 사상이며 그가 쓴 모든 자료들은 복음주의 전통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제 요한을 헬레니즘 철학이나 그노시스주의에 영항을 받지 않았던 순수 유대적인 사람으로서 인정하게 되었고, 요한이 자세히 기술한 예루살렘의 지리학적 배치나 예루살렘의 멸망 전의 상황을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요한은 요한복음 3:23절에 침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고 적고 있는데 애논의 의미는 “샘터”이고 이곳은 실제로 살렘(Salim)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요한은 또한 2장 1절에 “갈릴리 가나”라고 하여 시돈 옆 가나와 확실히 분리하였고, 4장 5-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셨다고 간단히 기록하지 않고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놀랍도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해사본이 증명하는 성경의 정확성
프레더릭 케뇬은 다음과 같이 구약 성경의 신빙성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다. “A.D. 1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되어지는, 마소레틱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사본이 정말로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지은 그 히브리 성경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해사본이 발견되어지기 전에는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의 정확성에 관하여 이와 같은 많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정확한 답변을 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가치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사본은 주후 900년부터 복사되어진 것인데, 이 사본들이 예수님 당시인 A.D. 32년경에 쓰였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보아왔던 구약성서가 그 원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이 사해 사본들 가운데는 이사야서 전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B.C. 12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있었던 마소레틱 사본에 의한 이사야서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해 사본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봉사하시면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동일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사해사본은 약 4만개의 작은 단편들로서 이루어져 있다. 이 조각들로부터 500개 이상의 책들을 엮을 수 있었다. 이 사본들에서 성경에 포함된 책들 외에 다른 성서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통하여 옛 쿰란 문화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서류들은 “자도카이트 문서”, “사회 규율”, “훈련 법칙”등을 포함하고 있어서 쿰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일상 생활 문화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성경 주석에 도움을 주는 여러 중요한 문서들도 발견되었다.
<출 처: www.sos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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