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Cruise 여행기 (7)
2013년 10월 18일,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니 Cruiser 배가 벌써 그리스의 남쪽
지중해 상에 있는 그림같은 SANTORINI 섬 앞에서
정지를 하고 서 있었다. 산토리니 섬은 그리스 에개해 남부에 자리 잡은 반달 모양의 작은 화산 군도의
한 섬이다. 그리스 본토와는 200km 정도 떨어저 있다. 이 섬은 티라(THERA or THIRA)라고 지도상에 나타나 있기도
하며 면적은 평방 73 km이다. 2001년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13,670명이 거주 한다고 하였다. 이 섬에는 BC 2,000경에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랬는데 BC 1,500년경에 화산이 폭발하여 당시에 한 참이나 번창하던 미노아 문명이 전멸을 당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본토로 이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섬에는 큰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크루스 배는 그 주변바다에
서 있고 작은 통통배들이 손님들을 섬으로 실어 나른다.
산토리니는 원래 큰 섬 하나로 되여 있었는데 화산 폭발로 고대의 그 취락들이
모두 파괴되었고, 남은 폭발 잔해물로 칼테라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
섬의 그 아름다운 절경과 밤의 유행은 유럽 최고라 할 만큼 흥행을 이루고 있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기이한 섬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섬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석호(石湖)는 가로 세로가 각각 12km와 6km이며 주변 3면은 300m 높이의 가파른 절벽이 둘러 싸고 있다. 이 석호는 원래 용암의
분화구여서, 우리 나라의 백두산 천지같이, 큰 호수를 이룬
것인데 그 수심이 400m나 된다고 한다. 호수의 동남북쪽은
암벽으로 막혀 있고 서쪽으로만 터저서 배들이 드나 드는 항구는 모두가 서쪽으로 되여 있다. 이 산토리니
지역은 수 만년전 부터 알려진 화산지대로서 수없이 많은 화산이 그 많은 섬들을 신출귀몰하게 만드는 지대로 알려저 있다.
여러 척의 작은 통통 배들이 우리 크루스 배쪽으로 닥아 왔다. 한 번에 한 200여명씩 불이 낳게 실어다가 산토리니 섬에 내려 놓았다. 그 작은
섬에 약 50여대의 관광버스가 우리를 태울려고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아니 이 작은 섬에 저렇게 많은 버스가 광광객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섬에 오길래 저렇게 많은 버스들이 흥행을 한단 말인가? 바다쪽을 바라보니 다른 크루스 배 두 척이
또 관광객을 내릴려고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 손님들을 가득히 실고 줄지어 떠난 버스는, 마치 강원도 대관령 같이 꼬불꼬불하고
위험스러운 갑파른 언덕길을 뺑뺑 돌아서 산정에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간이 콩만해 질 정도로 아슬아슬
하였다. 그러한 곳에서 그 대형 버스로 그 좁은 비탈길을 운전하는 사람들은 목숨을 내 놓고 하는 일
같았다. 우리 집 사람은 아예 눈을 감고 밖을 내려다 볼 생각조차 하지를 않았다.
정상에 오르니 넓게 펼처지는 평원같은 들판. 한 가운데에 큰 호수가 있고 별천지 같은 집들이
아름답게 흩어저 있었다. 버스는 그리스의 정교 교회당, 식당들이
늘어저 있는 좁은 골목길의 장터 마을, 별별 희한한 여행상품들을 팔고 있는 뒷골목 동네, 이 섬에서 유일한 생산품은 포도주라면서 주정 공장에 가서 시음을 하는등, 안내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 줄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화장실을 들어 가는 데도 50유로(80 센트)를
지불해야 하고, 좁은 식당에 들어가 무엇을 좀 사 먹을려고 하였지만,
손님은 가득한데 , 주방을 들여다 보니, 혼자서
꿍얼대고 있어서 한 참을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와 버렸다. 하지만 집들의 모양새나 길거리에서 느끼는 냄새로
보아 밤문화는 아주 요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13년 10월 20일, 산토리니
섬 관광을 마치고 우리 크루스 배가 이틀을 달렸다. 도착한 항구는 이태리 남부 서쪽에 있는 AMALFI Coast 였다. 여기에서 부터 시잔된 크루즈 여행의
마지막 날 excursion 일정은 이태리 남부의 아름다운 섬 “카프리”섬, 미항 “쏘렌토, 나폴리”를 둘러 보고, 오후에는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인한 화산재에 뭍혀 1.700여년이나 버려젔던 옛도시 “폼페이”를 관광하는 일이었다. 이 날은 일정이 빡빡하여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아말피 항구에서 통통배에 분승하여 1시간쯤을 달리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카프리”섬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아도 멋지게 생긴 섬이었다. 산마루턱에 예쁘게, 점백이
같이, 푸른 숲속에 지어저 있는 별장들의 모습은 완전히 그림같은 절경이었다. 항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산꼭대기로 올라 가니 먼 바다가 시원히 보이고 북쪽으로는 가물가물하게 나폴리
항구가 눈에 들어 왔다. 여기에서 한 참을 걸어 산마루의 절경을 구경하며 많은 사진을 찍었다. 헌데 그 그림같은 집을 앞에 가서 보니 많은 집들이 수리가 제대로 아니 된 모습이었다. 어느 집은 아예 폐가가 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이탤리의 별장들이
그렇게 되여 있다는 것른 곧 그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 가지 아니 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시 통통배를 타고 한 40분 쯤을 북쪽으로 달리니 아름다운 “소렌토”가 눈에 들어 왔다. 나는 뱃머리에 기대 서서 옛날 고등학교 시절
김상두 음악 선생님이 가르처 주신 <돌아 오라 소렌토로>를
험밍으로 살며시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 오라 이 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 오라!
레몬 향기와 오렌지 나무로 가득한 정원의 도시 소렌토, 세계적인 칸소네와 함께
낭만이 넘처 흐르는 소렌토,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지중해 햇살의 소렌토, 그러나
진정 그런 낭만만이 가득한 도시만은 아니었다. 이 소렌토라는 항구는, 위의 노래
에서 말하고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간
항구이다. 130여년전, 바로 이 곳에선 이별의 눈물, 슬픔의 눈물을 바닷물에 뿌리며 영원
히 다시 못 볼 이민선이 떠났던 곳이다. 그 이후 카나다로 미국으로 그리고 알젠틴
으로 이민을 떠난 사람은 모두 2,500만명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소렌토는 그 아
픔과 슬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고향을 등지고 이민 배
를 타던 그 시절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나는 내가 이민 비행기를 타고 김포비행장
을 떠나며 어머님과 가족 친지들의 손을 잡고 눈물 훌리던 45년 전을 회상했다.
이민을 떠나 온 사람들은 언제고 슬픔과 그리움과 고향의
향수를 가슴에 품고 사
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소렌토는 그리움의 도시이기도 한 것이다.
1890년대에 이 항구를 떠나서 캐나다로 몰려 온이탤리의 이민자들은 토론토의
St. Claire &
DUFERIN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600,000 명이 몰려 살고 있는
토론토의 이 지역을 그들은 자칭 Little
Italy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소렌토에서 큰 식당에 들어가 이태리 정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한 접시 한 접시씩 가저 오는 음식은 아주 모양새 있고
정갈스러우며 맛이 좋왔다.
특별히 피자의 맛은 아주 특별하였다. 식사후 소렌토 시내를 잠시 돌아 보고
우리
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나폴리 만을 끼고 남쪽에 있는 도시가 소렌토라면 북쪽편
에 펼처진 도시는 나폴리이다.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우리 버스는 나폴리 초입을 한
바퀴 돌아 다음 행선지인 폼페이로 향했다. 나폴리에 내려 “잔잔한 바다위에 저 배
는 떠나가고…”하는
나폴리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슬적 돌아만 온 것이 좀 아쉬었
지만, 그래도
세계의 3대 미항중의 하나인, 아름다운 나롤리 항구를 먼
발치로나마
바라볼 수 있었든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번 크루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죽음의 도시, 위락의 도시,
1,700년간 화산
재에 뭍혀 있던 발굴의 도시, POMPEII 였다. 이탈리를 여행하면서 이 폐허의 도시
폼페이를 돌아 보지 않고, 이탤리의 역사와 고적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하였다.
AD 79년 8월 24일, 나폴리의
동남쪽, 소렌토의 동북쪽에 있는 <베수비오>화산
이 폭발하였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로마 귀족들이 즐겨 찾는 위락의 도시였
던 폼폐이가 하루 사이에 없어젔다. 아무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예견
하지 못했다. 당시
라틴어에 화산이라고 하는 단어가 없었다니까 그들은 화산에 대
한 위험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든 것이다.
천지가 개벽을 하는 폭음과 함께 화산이 폭발했고, 폼페이의 하늘은 순간적으로
시커먼 연기와
화산재로 캄캄해젔다. 그리고 18시간 동안 약 백억톤에 달하는
화산재와 암석 파편이 뿜어저 오르며 폼페이의 집들을 덮첬다. 약 2만 5천명으로 추정 되는 폼페이 사람들은 그 뜨거운 화산재에 의하여 죽음과 더불어 까맣게 타 죽은 미라로 변하였다.
폼페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베수비오> 화산은
이후 17세기에, 그리고 근간에
는 1944년에도
폭발하였다. 다행이 1944년 폭발시에는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는
예고가 있어서
큰 피해를 모면하였다고 한다. 폼페이 발굴은 1549년, 수로공사중에 유적이 발굴되면서 시작되였다. 하지만 한참동안 방치해
있었는데 1748년, 새롭게 총체적 발굴을 시작함으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등의
유적지들이 노출되여 나왔다. 현재는 아마도 2/3정도가 발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발굴된 그 유적들을 둘러 보니 연자방아깐, 상하수도인 듯한 파이프시설, 공중변소, 하물며 남녀 위락시설까지 노골적으로 들어나 그 당시의
풍만한 문화를 엿볼 수가 있었다. 어느 방의 벽에는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의 조각들이 붙혀 있는
데 세월이 흘러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희미한 조각상 앞에 진을 치고 서서, 2천년 전 옛사람들이 하던 짓을 제 멋대로 상상하면서, 껄껄대며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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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박 13일간의 지중해 Cruise 여행을 이렇게 감사하게 다녀 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공부할 수 있었음을 다시 한 번 감사 드리며,
그 소감을
여행기란 글로 써서 사랑하는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음을 또한 저의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부족한 표현일랑 사랑으로 감싸 주시기를 바라면서 (끝)
2013 11
7 강 신 봉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