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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일과 쉼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했다(창1장).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다(창1:27절).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였다. 피조물 중 인간만 성삼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 덕분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대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얻었다(창1:26, 28절).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또는 나라)는 인간의 통치 행위를 통해 이 세상에 문자적으로 실현될 것이다(창1:26절).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의 창조 목적이었다. 창조 기사는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된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인간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잘 설명한다.
이 목적과 의미가 다른 피조물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미천한 인간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욥7:17, 시8:4-6절).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인간만이하나님 앞에 진정한 인간이다. 문화사명(cultural mandate)(창1:28절)이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존재이다(시49:20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 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3:18절)
이를 깨달은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자신의 일(창1:28절)을 하고자 벌떡 일어났다. 유감스럽게도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은 거의 끝났다. 그 날 저녁부터 하나님이 거룩하고 복되다고선언한 안식일이 이미 시작되었다(창2:3절). 안식일 다음 날로 이들은 문화 사명의 수행을 미루어야 했다. 안식일 먼저 쉬면서 자신을 존재케 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은혜를 묵상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해야 했다.
창조 안식일은 이리도 중요하다. 그리고 일과 쉼 사이의 관계도 설명해 준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창조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미모든 창조 사역을 마쳤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인간은 생존하기 시작하면서 곧 창조 안식일을 맞았다. 하나님에게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은 인간이 처음 맞은 일주일의 첫 날이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명한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하기 전 또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 앞에 쉬면서 그를 경배해야 한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고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쉬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먼저 인류는 구체적으로 맛 보아야 한다. 이 때 마음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주어진 삶을 살며 사명을 수행할 것을 인류는 굳게 결단하게 된다. 이것이 안식일 제도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러나 안식일 제도는 쉼만 강조하지 않는다. 안식일 먼저 쉬는 것은 나머지 6일 동안 문화 사명(창1:28절)을 잘 수행하기 위함이다. 결국 쉼도 일을 위한다. 이 점에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 차이는 거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일주일의 첫 날이다. 신약 성도들도 일주일의 첫 날 먼저 주 안에서 쉬어야 한다. 이런 원칙에서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은 동일하다.
안식일 제도는 다른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6일 동안 하나님은 모든 창조 사역을 마쳤다. 그 결과 인류는 제 7일을 맞으며 곧바로 안식에 들어갔다. 인류는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그저 누릴 뿐이었다. 결국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이 창세 전 세운 모든 작정이 완성될 때 비로소 인류는 영원한 안식에 이를 것이라고 계시하고 예언한다(히4:1-11절).
이 점에서 성경의 처음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사이 차이가 없다. 창세기는 창조 사역 후 안식이 있을 것을 기록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우주적으로 행해질 하나님의 심판 후(계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 새 예루살렘이 세워질 것이다(계21-22장). 이 점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새로운 창조일 것이다. 심판 후 곧 새로운 창조 사역 후 곧바로 승리한 성도들만 영원한 안식에 이를 것이다. 이로써 창세 전 세운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완성될 것이다.
그럼 만약 인류가 안식일이나 주일을 무시하고 일에만 몰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인간은 끊임없이 일할 수 있는 기계나 로봇이 아니다. 쉼 없이 일만 한다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쌓이며 정신과 몸도 견디지 못한다. 삶의 자세에서 여유로움을 서서히 잃는다.
이 뿐만 아니다. 일에 묻혀 창조주나 구원주를 경배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마저 잊어버리게 된다.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도 잃는다. 그렇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류는 상실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현세(現世)를 최대한 즐기며 살자는 허무적 쾌락주의이다. 아니면 생을 스스로 마감시키게 하는 허무주의가 만연한다.
어떤 유명한 목회자는 한국에 공휴일이 많다는 것에 유감을 느낀다. 주님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 쉴 틈이 없다고 말하며 은근히 자신을 자랑한다. 사실 그는 일 중독자이다. 이런 모습을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이 보편적으로 보여준다. 대부분 이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들의 열정은 때때로 주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쉼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지도자일수록 자신의 열정과 열심을 일주일 한번 정도라도 내려놓고 자신 앞에 나와 먼저 쉬라고 요구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나 신약의 주일 제도는 사명과 일에 대한 인간적 열정과 열심을 잠시 내려놓고 인류가 하나님 앞에 나와 먼저 쉴 것을요구한다. 진심으로 내려 놓으려면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이런 자기부정은 신자들로 하여금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성화(聖化)와 질 좋은 목회(牧會)에 달하도록 돕는다.
미국은 개방된 나라이다. 다른 민족이라도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미국 무대에서 설 수 있다. 이 덕분에 미국 사회는 자신의 경쟁력을 제고(提高)시킬 수 있다. 특히 운동 분야에서 볼거리를 세계에 제공함으로 높은 수익성을 창출한다. 자유와 개방이 미국 사회를 오히려 발전시킨다. 각 분야에서 미국이 세계적으로 일등인 이유이다.
미국의 개방된 시장 덕분에 일본, 한국과 중국은 경제개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미국 시장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려면 제품의 질을 높여야 한다. 미국에서 인정받으면 다른 나라들에 수출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본, 한국과 중국이 국력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이유이다. 특별히 한국이 6.25 전쟁후 50년 지나 거둔 경제적 업적은 실로 위대하기도 하다.
한국의 유능한 운동 선수들이 미국 무대에서 활동하며 자기 기량을 더 높이며 스타가 된다. 골프와 야구에서 특별히 두드러진다. 미국 가정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들과 부모 중 하나가 미국인인 2세들도 미국이라는 넓은 무대에서 어릴 때부터 경쟁을 통해 실력을 기르며 세계적인 일류 선수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안타까운 현상이 보인다.
성공한 한국 선수들 중 심한 기복(起伏)을 보인다. 반면 서구 선수들은 늘 꾸준한 결과를 낸다. 한국의 축구 선수가 유럽 무대에 진출했다면 일단 그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와 달리 골 게터로서 성공하지 못한다. 많은 청소년들이 축구 선진국인 영국이나 브라질로 유학을 간다. 고교 과정까지 이들은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성인 무대에서 두각을 보여주지 못한다.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인은 성공 또는 승리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지나치다. 부모들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녀들이 일등 하기를 항상 바란다. 2등은 의미가 없다. 29회 북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된 한국 선수가 은메달로 끝났다. 이 때 열심히 응원하던 한국 관중들은 메달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최선을 다한 선수를 한국인들은 칭찬할 줄 모른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선진국 문턱을 넘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 아니면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이유일 것이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경기나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도록 선수들을 다그친다. 여기에 부작용이 따른다.
선수들은 청소년부터 운동을 즐겁게 해야 하지만 힘겹게 한다. 승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이들은 심리적 압박감과 무거운 의무감을 안고 운동을 하거나 경기에 임한다. 이런 심리 상태는 몸을 굳게 하며 유연성(柔軟性)을 떨어트린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 실패가 가져올 비난을 미리 겁 낸다. 이것이 한국 선수들의 골 결정력을 낮추는 원인이다.
유연성 부족은 운동이나 경기 중 부상의 원인도 된다. 이 뿐만 아니다.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청소년의 육체적 성장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동을 시킨다. 성인 선수에게만 요구되는 고난도 기술을 가르친다. 고등학생 때 이미 성인 선수의 기량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이 망가지고 체력도 한계에 달한다. 이들은 꽃 봉우리도 펴지 못하고 조기 은퇴한다.
그러나 선진국의 지도자들은 운동을 즐기도록 청소년들을 가르친다. 충분히 쉬도록 배려한다. 성장 과정을 고려하여 절대로 무리하게 운동을 시키지 않는다. 경기에서 1등을 하든지 꼴등을 하든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운동 경기가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성공과 실패는 자연스러운 인생사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을 통해 이들은 인생이나 삶을 배운다.
패배나 실패가 있다면 더 좋은 기량을 쌓을 수 있는 기회로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경기 결과에 초연한 체 최선을 다 할 수 있다. 마음과 몸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으며 운동이나 경기를 이들은 즐긴다. 성장하면서 육체적 힘과 함께 마음과 몸의 유연성이 극대화된다. 저절로 골 결정력이 높아진다. 유럽 무대에서 매년 50 골 이상을넣는 유명한 축구 선수가 있다. 한국 선수들은 꿈 꿀 수도 없는 골 수이다.
한국인은 대립적 이분법으로 쉼과 일을 이해한다. 일은 좋지만 쉼은 나쁘다. 그 결과 쉼과 일 사이 구분이 사라지며 한국인들은 늘 긴장 상태에 있다. 청소년 때부터 선수들은 쉴 줄 모르고 운동에 몰두하며 몸을 혹사시킨다. 나중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청소년 시기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일과 성공과 승리에만 일시적으로 집착하는 지도자라면 참으로 부적합하다.
일과 쉼은 이분법적으로 대립되지 않는다. 성경의 창조 기사(창1-2장)는 일과 쉼이 모두 문화 사명(창1:28절) 수행을 위한다고 말한다. 쉼은 일을 떠나는 것이지만 일을 하기 위한 휴식이다. 이런 깨달음이 한국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출세(出世)라는 유교적 가치가 한국인의 의식을 늘 지배한다. 성공만이 인생의 최고 가치이며 목표이다. 이 철학이 한국인들을 지치게 만든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 무대에서 성공한 한국인들은 계속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 이미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이 때 이들은 쉼 없이 성공을 향해 그 동안 달려온 자신의 피곤한 모습을 되돌아 본다. 많이 지친 자신을 발견하며 쉬고 싶어한다. 더 이상 예전처럼 노력할 필요를 못 느낀다. 이것이 성공 후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슬럼프의 원인이다.
서구 선수들은 우리들과 다르다. 성공과 실패 그리고 승리와 패배, 이 모두 인생에서 피할 수 없이 경험할 수있는 과정임을 이들은 안다. 모든 일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인생을 즐긴다. 실패할 때도 좌절하기보다 쉬면서 실패 원인을 살핀다. 패배와 실패는 자신의 약점과 단점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이 점에서 서구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에 비해 성숙하고 삶에서 훨씬 자유롭고 여유롭다.
차이가 또 있다. 한국 선수들은 성공을 위해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만 집중하고 몰두한다. 그러나 서구 선수들은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공 분야에도 진력한다. 이들은 삶을 다양하게 즐기려 한다. 현재 세계 올림픽위원회의 위원장은 치과 의사로서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 서구 선수들은 성공 후 다른 분야에 종사할 수 없는 한국 선수들과 크게 대조된다.
출세와 성공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보는 유교적 가치관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일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이런 삶은 쉼을 빼앗아가며 인생은 물론 인격까지 삭막하게 만들고 때로는 파괴시킨다. 이젠 일을 놓고 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한번 준 생명과 삶을 마음껏 즐기기 위함이다. 출세욕이나 성공 지향적인 삶 자세를 부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쉴 줄 아는 것 – 이것이 신자의 인격을 성숙시키며 인생을 즐기게 만든다. 쉼과 일 사이 균형이 더 높은 수준의 성화와 질 높은 목회를가능하게 한다. 이를 위해 자기부정이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