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시목은 우선 아랫배를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꿈속에서 새에게 먹힌 아기를 추슬러 복원시키려는 듯 배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이 너무나 사악하여 진저리가 쳐졌다. 시어머니로 돌변한 새의 눈빛을 생각하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의 시어머니의 눈빛에 질려버린 나머지 두려움에 떨어온 결과가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목이 침대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뭐지” 의식을 거스르는 무엇이 방 밖에 있었다.
“뭘까? 의혹이 빠르게 시목의 뇌리를 스치고 있을 때 그 뭘까?가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방 밖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생각한 순간 방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내가 들어섰다. 시어머니의 몸 위에 엎드려 있던 그 사내였다. 평소 집안일을 하러 와서도 시목과 눈을 맞추기를 꺼리던 그 사내가 시어머니와의 사건 후 한동안 눈에 띠지 않더니 지금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집안에 시목 혼자 있는 이 시간에 나타나 시목의 방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시목은 공포로 몸이 굳어져갔다.
“흑” 시목은 숨을 들이키며 반사적으로 몸을 사렸다.
“어떠, 어떻게?” 말의 허리가 자꾸만 부러져 나갔다. 어떻게 감히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항의는 이미 의미가 없다는 걸 직감하며 방어자세를 취하는 시목과는 상관없이 사내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가면을 쓴 사람처럼 무표정한 그 사내가 성큼성큼 침대로 다가서자 사내의 무표정이 자아내는 하얀 공포가 시목의 전신을 에워쌌다. 시목은 본능적으로 이불깃을 끌어다가 복부를 가렸다. 그러면서 시목은
“이것이었구나.”를 느꼈다. 며칠동안 자신이 극렬하게 시달리던 공포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베일 뒤에 숨어있던 어떤 음모가 일순간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내는 서둘지 않았다. 서둘지 않고 계획된 바를 치밀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그는 말하자면 감정이 없는 어떤 무기일 뿐이었다.
12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는 처제 필로멜라의 용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필로멜라의 언니이자 자신의 아내인 프로크네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항상 새로운 것의 탐닉과 정복욕에 열중하는 습관을 가진 그의 성벽은 필로멜라를 치열하게 원한 나머지 필로멜라가 언니인 프로크네의 부름으로 트라키아에 왔을 때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산속의 오두막으로 납치해 겁탈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만일 이 사실이 아테네의 왕이자 자신의 장인인 판디온에게 알려진다면 그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망국의 사태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만용을 부린 테레우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로멜라의 혀를 잘라 산속 오두막에 유폐시켜버리고 언니 프로크네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혀를 잘린 채 산속의 오두막에 유폐된 필로멜라의 비탄과 분노가 오죽했으랴. 자신의 처지를 언니나 아버지에게 알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이 당한 상황을 옷감에 수놓아 언니 프로크네에게 전한다. 죽었다던 동생의 사연을 간파한 프로크네는 남편 몰래 동생을 왕궁으로 데려온 후 복수를 계획하는데 그 방법이 과연 엽기적이었다. 자신과 테레우스 사이에서 난 아들 아티스를 죽여 그 고기를 테레우스에게 먹이고 식사를 마친 테레우스가 아들을 찾자 필로멜라를 시켜 그의 아들 머리를 들고 테레우스 앞에 나타나게 했다. 경악한 테레우스는 도끼를 들고 두 자매를 쫓아다니고 이에 쫓기는 두 자매를 가엾게 여긴 제우스가 언니는 나이팅게일, 필로멜라는 제비로 변신시킨다.
13
사내는 짜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듯 했다. 시목의 손발이 침대에 묶이고 나자 시목의 저항은 끝이 났고 사내의 무기는 시목의 여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패자의 자포자기는 모든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자기망실에 빠지기 마련이었다. 시목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폭력에 저항하던 그녀의 기력이 바닥이 났을 때 그녀는 무너지는 자신을 방관하는 또 하나의 자기를 응시하지 못하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사내의 동작은 쾌락추구가 아니었다. 다만 노동이었다. 무엇이 사내를 그렇게 만들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내는 다만 시어머니의 도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목의 여성을 가차 없이 유린하던 사내가 시목의 여성에 악취 나는 오물을 쏟기 시작했을 때 각본대로 시어머니가 등장했다. 시어머니는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 무표정 뒤에 감춰졌던 시어머니의 의도가 시어머니의 입 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맹폭한 목적을 달성한 짐승의 승리, 자기의 영역을 침범한 상대를 물어뜯어 항복을 받고서야 만족하게 돌아서는 맹수의 만족이었을까? 아니 자신의 비행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필로멜라의 혀를 자른 테레우스 역을 충실히 해낸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무기가 되어 시목의 혀를 잘라낸 사내는 일을 마치고 시목의 방에서 조용히 물러갔다.
시목은 눈을 감았다.
시목은 시어머니의 계략이 진행되는 동안 낌새를 모르고 불안에 떨기만 했던 자신을 자책할 생각이 없었다. 시목은 그런 몰염치하고 비인간적인 계략이 있다는 자체를 예측할 수 없었음이 당연하다 여겼다.
사내가 시목의 여성 속에 쏟아놓은 독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의 부분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한 부분이 부패되기 시작하면서 시목은 뱃속의 아기를 생각했다.
자신의 자궁 안 모성이라는 지순한 보호막 속에서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날개를 얻어 비상할 날을 기다리던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은 명주보다 부드럽고 비단결보다 찬란한 겹겹의 태궁을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그 태궁이 사내의 독에 침해되어 부패를 시작하고 있었다. 태궁이 부패하면서 아기의 형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기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시목의 전신을 쥐어틀며 할퀴기 시작했다.
“윽”
시목은 심한 구토를 느꼈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은 시목은 구역질을 계속했다. 자신의 하체가 드러나 있다는 것도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구역질이 심하게 날 뿐이었다.
구역질을 하면서도 사내의 독소가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태궁을 잠식해 들어가는 환영에 전신이 경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어머니의 계략에 의해 도용당한 자신의 질(膣)이 독소를 기르는 소(巢)가 되어있고 그 소(巢)는 지금 태궁을 공략하는 독소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구역질은 계속 나는데 입으로 오물은 나오지 않았다. 징그럽게 접착한 태궁의 독소는 그리 쉽게 입으로 뱉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시목은 자신의 여성을 후비기 시작했다. 자신의 여성을 통해 태궁에 들어간 사내의 독소를 여성을 통해 방출해야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는 미친 듯이 자신의 여성을 후볐다. 여성이 쓰라려왔다. 그러나 쓰라린 게 문제가 아니었다. 피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목은 자신의 손에 자신의 여성이 파열하며 흘러내린 피로 흥건해졌는데도 후비고 또 후비다가 결국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14
강한 포르말린 냄새가 그녀를 깨웠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시목의 영토 안에는 흩어진 영혼의 잔해들만 너절하게 깔려 있었다. 시목은 그것들을 수습하지 않았다. 아니 수습할 기력이 없었다. 남편은 마산 친척집에 다녀올 일이 있다는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했다 한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남편은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임신한 시목이 무엇엔가 시름시름 시달리곤 있었지만 이런 사태에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남편은 어쩌다 잘못된 유산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목을 치료한 의사는 예리했다. 시목의 여성을 헤집고 태아를 들어낼 때 발견한 상처들이 아무래도 맘에 걸리는 듯 했다. 그래서 산부인과의 여의사는 시목이 혼자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시목에게 넌지시 물어왔다.
“저 부인 같은 경우의 사산은 정신적 충격과 외적충격 요소로 인해 일어나는 사태인데 혹 무슨 일이라도?”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시목은 함구했다. 시목의 함구는 현 상황에 대한 강열한 부정이었고 그 일에 대한 철저한 분노였다.
"그래 나 스스로를 감시하자. 그리고 나를 고통 속으로 던져버린 만행을 규명하자. 그래서 그 만행의 끝이 어딘지 알아보자“는 심산이었다.
5일간의 입원기간동안 그녀는 서서히 자신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패된 전체 가운데 일부를 분해한 개체를 가지고 전체를 서서히 회복할 것이냐? 전체를 한꺼번에 복원하는 길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를 고려하던 그녀는 전자를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자신을 분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분해한다는 일은 결국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새로운 사고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는 의연해져 있었다. 두려웠던 것들을 겪고 난 후의 정신적 무장은 그녀를 이미 세상과 대처할 수 있는 강한 여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퇴원하는 길로 시집으로 향했다. 이제 시어머니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없었다. 시어머니가 휘두른 무기를 경험한 자로서의 의연함이었다.
집에는 시어머니 혼자 있었다. 문을 열어주는 시어머니와 당당히 마주 섰다. 마주서서 당신이 헤친 내 세계를 지금부터 복원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시선으로 시어머니를 직시했을 때 시어머니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안중에 없다는 듯 또박또박 제 방으로 들어가 몇 가지 옷과 필수품을 가방에 던져 넣듯 넣어가지고 집을 나섰다.
시어머니는 집안 어딘가에 숨어서 그런 며느리를 지켜보고 있었으리라는 짐작이 갔지만 그런 것은 이미 시목에게 상관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10년이라는 시간을 자신을 복원하기 위해 소진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