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 공동체와 기적
2023.12.31.(성탄후제1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마태14:15-21)
들어가는 말
우리사회에서 ‘동정’(同情)이란 말은 금기어에 가깝습니다. 빠른 근대화의 과정에서 동정의 대상은 비난의 대상과 동일시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가출청소년들은 의지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을 가진 기성세대, 특히 기복신앙에 익숙한 기성세대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인데, 그들은 자녀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동정에는 항상 조건이 따릅니다. ‘네가 열심히 한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동정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동정 혹은 동정심을 거북해 하면서 외면합니다. 동정이 없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누군가를 동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그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를 잃고 이상하게 변질돼버린 동정이란 단어를 버린다고 뭐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이 단어를 외면하면서 우리는 ‘타인과 함께하려는 의지와 열정’마저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동정이란 단어 대신 ‘연대의 정’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연대의 정
연대의 정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공감을 표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음주운전에 희생된 젊은이,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과속으로 일어난 어린이 교통사고 등,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사건에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공분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갑니다. 바쁘게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합니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일 뿐이다.’
공감은 타인의 일에는 선을 그으면서, 사회적 책임은 회피합니다. ‘그 일이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내 방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의 일은 당신이 해결해라. 그렇게 할 능력이 당신에게 없다면, 법이든 사회복지든, 제도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같은 환경과 같은 세대 속에서 공감대는 늘 그리고 쉽게 형성됩니다. 어떤 일이든 공감할 수는 있지만, 문제의 해결 주체는 자기 스스로여야 합니다. 이 때 타인에 대한 연민의 정 대신, 자기연민(self-pity)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신이 불쌍해 보이고 때론 무능한 자신을 탓합니다.
자기연민은 복권당첨과 천사의 등장 같은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만,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이 사라진 세상에서 상상은 한낮 꿈에 불과하며 가혹한 현실만이 놓여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도 당신을 향한 연대의 정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의 없음은 주변에 예수님과 같은 능력자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적은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 때문에 무언가를 내어놓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내어놓음의 결과만을 기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일으키고, 로또번호를 맞추고, 불치의 병을 낫게 했어도, 그것이 놀랍긴 해도 기적은 아닙니다.
빵과 기적의 관계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수많은 기적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연대의 정에서 시작된 결과일 뿐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5-16)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 중에 누구에게 빵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자들에게 빵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빵의 소유를 먼저 확인했다면, 빵이 없는 제자들은 내어놓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책임에서도 벗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먹을 것을 주라’는 단정적인 명령은 소유와 상관없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마태복음은 영리하고도 약삭빠른 교회, 즉, ‘내가 가진 것이 없는데 무얼 나눈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교회들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태복음은 가지고 있는 빵이 아니라, 요구받은 이들의 책임과 참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지고 있는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소명도 이와 같았음을 분명하게 고백할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철저하게 숨겨져야 합니다. 드러나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과 물고기를 내어놓은 후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놀랄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만족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 중에 누구에게’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나에게는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변명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공동체와 기적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공동체적으로 부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중에 가진 자’(단수)가 있으면 그가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복수)라고 부릅니다. 부자나 부자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고, 가난한 자나 가난한 교회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교회는 타인에 대한 ‘연대의 정’이 가능하지만 가난한 교회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연대의 정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community)를 향한 요청입니이다. 제자들은 ‘우리’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소유이지 개인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느 특정한 누군가의 소유가 될 때, 기적은 그 누군가의 결과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연대의 정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기적은 누군가의 소유나 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기적은 연대의 정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됩니다. 이미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건네준 빵을 제자들에게서 받아먹은 누구도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기적은 놀랍지 않으면서도 만족스러운 것이며 행복한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인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라면 예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든, 우리는 언제나 내어 놓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선한목자공동체의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결코 돈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에 참여할 수 있을법한 부유한 사람이나 부유한 교회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연대의 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공동체의 이름, 이것이 참된 교회인데, 그 이름으로 예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나와 너에게 있는 것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공동체 됨 없이, 그리고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은 채 기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공동체, 즉 우리에게 있는 것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기적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외에, 어른 남자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20-21)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것’ 그것이 타인과 함께(com)하려는 열정(passion)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은 가진 것을 내어놓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것과 그 결과를 확인하는 것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연대의 정은 내어놓음에서 시작되어 끝까지 보살피는 데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남은 부스러기를 모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책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나누어준 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배불리 먹을 때까지, 그리고 그 뒷마무리까지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기적에 참여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시작된 연대의 정은 오병이어의 전 과정 속에서 제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진정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과정에 참여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