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도안과 인물 ③
화폐도안 인물, 누가 좋을까
우리의 화폐에 나오는 인물은 서울의 도로명으로도 기리고 있다. 세종로는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 세종로 인근에 있는 종로구 옥인동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충무로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이름이다. 그리고 아직 화폐인물은 아니지만 을지문덕은 을지로의 이름으로 기린다. 을지로와 충무로는 무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므로 문관을 대표하는 이름을 딴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퇴계로는 일제강점기에는 대화정, 소화통이라고 부르다가 1946년에 퇴계로로 이름을 바꾸었다. 퇴계로는 비록 퇴계(退溪 李滉)가 서울에서 거주한 사실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 학자이었으므로 도로 이름을 지은 것이고, 율곡로는 이율곡(栗谷 李珥)이 종로구 관훈동에 살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1966). 나라를 빛낸 위인이나 나라를 지킨 장수를 기리는 것은 기억해야할 의무이므로 우리가 반드시 기려야할 몇 분을 생각해 본다.
이순신과 충무로 : 조선왕조 500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하여 모두 아홉 명이지만,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충무로는 일본인 상권이 형성됐던 혼마찌(本町)인데 일본인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도로명을 충무로로 바꾸었다.
을지문덕과 을지로 : 612년(영양왕 23), 수나라 양제는 100만 명이 넘는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살수대첩의 명장으로 기록되었고, 고구려의 위상을 드높인 장수이다. 살수대첩은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가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한 싸움이다. 퇴각한 수나라는 이후 두 차례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공격에 국력을 소모하였고 반란이 일어나 618년에 멸망하였다. 을지문덕을 기리기 위해 1946년 을지문덕 장군의 성씨인 을지를 따다가 구리개로 불리던 이름을 을지로로 개명하였다. 구리개는 구한말부터 중국인(화교)들이 밀집해 차이나타운 상권을 형성했던 곳이라 중국인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 도로명을 을지로로 바꾼 것이다. 을지문덕은 고구려를 대표해서 반드시 화폐에 등장해야할 위인이다.
강감찬과 낙성대 : 귀주대첩은 1019년(현종 10)에 강감찬이 중심이 되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귀주에서 거란의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을 맞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거란군은 전략적 패전에도 불구하고 수도인 개경을 향해 곧바로 진군하였지만 강감찬은 개경도 지켰고, 철병하는 거란군을 다시 귀주에서 맞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어 귀주대첩의 명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귀주 대첩의 승리로 두 나라의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이후 거란은 전쟁대신 외교로 고려에 대한 정책을 바꾸었다. 강감찬을 기리는 곳은 장군의 출생지인 서울의 낙성대이다. 흔히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한국전쟁사에서 3대 대첩이라 불린다. 따라서 강감찬도 고려를 대표해서 화폐에 등장해야할 위인이다.
광개토대왕 : 우리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유적은 장수왕이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재위 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집안) 동쪽에 광개토대왕의 능과 함께 비를 세웠다. 그리고 남한에 있는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지는 아차산성과 연천에 있는 호로고루성과 2002년 남북사회문화협력사업의 결과로 북한에서 직접 제작해 우리나라에 선물한 광개토대왕릉비 등이 있지만 많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왕중의 대왕인데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을 기리는 것은 주요 도로명에서도 조차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한 광개토대왕도 당연히 화폐에 등장해야할 대왕이다.
서희 : 우리역사에서 고려야말로 외세의 침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이다. 10~11세기에는 거란이 3번, 12세기에는 여진이, 13세기에는 몽골이 7번, 14세기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침략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나라를 넓히고 굳건히 지켜왔다. 죽고 죽이는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은 승전보다도 더 좋은 전략이다. 고려의 역사에서 전승 장군 같은 역할을 한 외교관이 있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은 김춘추와 서희이다. 그중에서 서희(徐熙 942~998)는 외적이었던 거란과의 외교에서 빛나는 역할을 하였다. 그 공로를 기억하기 위해 외교부 산하의 국립외교원에 서희의 흉상을 세워 기리듯이 화폐도안 인물로도 기려야할 분이다.
유관순, 김 구 : 오만원권 주인공을 둘러싸고 김구, 광개토대왕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됐으며, 여성으로 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신사임당, 유관순, 김만덕, 선덕여왕 등이 경합을 벌였다. 경합의 정점은 유관순과 신사임당 이었다. 여성 인물 선정으로 보면 진보, 보수, 남녀 구분 없이 거의 이견 없이 유관순을 선호하는데 신사임당이 선정된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순위가 높았지만 최종 4인 후보에 들지 못 한 것에 대해 정부가 한·일 관계 경색을 우려해 탈락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유관순은 김구와 마찬가지로 현 시대상황에서는 경합을 불허하는 위인임에 틀림없다. 한국은행의 2009년 고액권 발행과 관련, 신사임당과의 경합에서 밀려 아쉬움을 남긴 유관순(柳寬順 1902~1920)과 김구(金九 1876~1949)에 대해서는 군말을 안 붙여도 누구나 추측하기 쉬우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김만덕 : 대신 지명도 면에서 당시에는 다소 낯설지 만, 요즈음은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위업이 높여지고 있는 조선시대의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이 있다. 제주의 김만덕은 2009년 6월 한국은행 발행 5만원권 화폐의 초상 인물 후보로 거론되었다. 김만덕은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성공한 기업가이자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 존경 받았던 인물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장사로 자수성가한 김만덕은 제주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때에(1790~1794) 자신의 전 재산(1000금)을 털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도민들을 구제했다. 김만덕은 여성, 신분, 지역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어 성공한 최초의 대한민국 여자 거상이었다. 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재난으로 굶어 죽어 가는 제주 사람들을 살린 조선시대 최초의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비록 중앙은행의 고액권화폐후보에서 밀리긴 했지만 제주지역 지역화폐인 ‘탐나는전’의 고액권의 인물로 2021년 6월에 선보였다.
이 밖에도 그동안 화폐도안 인물선정과정에서 거론되었던 인물들을 일별해보자. 10만 원권 후보는 김구, 광개토대왕, 안창호, 장영실, 안중근, 정약용 등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했거나, 광복 후 독재에 저항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과 경제발전의 주역인 1세대 기업인들도 거론되었지만 선정되지 않았다. 논리의 배경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것을 단순히 특정한 인물의 공로로 돌리기 어렵다는 궁색한 나로남불식의 궤변으로 들린다. 이병철이나 정주영 같은 기업인들도 일단 그들의 행위는 사익을 추구하는 게 우선이었고, 심지어 유일한 박사의 경우도 이런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과학계에서 강력하게 추천한 인물인 장영실은 첨단과학시대에 걸맞지 않는 과거 지향적이며 표준 영정도 없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강감찬, 김정희, 장보고, 주시경, 한용운, 정조대왕, 안용복, 윤동주, 윤봉길, 서희, 신채호, 을지문덕, 장기려, 정선, 허준 등이 거론되었다.
화폐인물 선정관련 논란을 부추기는 배경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다. 100원 주화, 1000원 권, 5000원 권, 1000원 권 지폐 도안은 민주적 절차가 생략된 채 선정되었다. 군사정부 시절에 여론 수렴 절차 없이 권력층에서 도안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은은 기존 도안 인물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점과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고려해 인물 도안을 변경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러저러한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과 변명에 대해 항간에서는 선정위원을 공개하지 않아 빌미를 주었고 밀실결정의 탓이라고 몰아붙이므로 한은은 그러한 구태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https://www.yjb0802.com/news/articleView.html?idxno=36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