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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본문 : 디모데전서 6장 12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새번역>
신앙생활은 ‘비우기’와 ‘채우기’의 반복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닮기를 원해서 ‘작은 예수’가 된 우리들에게는 이 비우기와 채우기의 작업이 더욱 더 신중하고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반대로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워낸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하며, 채운 것에 대해서는 유지시켜 나가야 할 힘이 필요합니다.
주로 작은 예수에서 다시 예수 닮기를 원하는 소망으로 후퇴하게 되고,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삶으로 후퇴하게 되는 지름길이 바로 이 비우기와 채우기 작업의 잘못된 반복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비웠던 것을 다시금 찾아와 채우게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비웠던 것은 이제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삶에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우고 버렸던 것입니다. 다시 주워오지 않고, 다시 그 것으로 자신을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채우고 말씀으로 채웠다면 구멍으로 그 은혜와 말씀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결단입니다.
특별히 디모데전서 6장은 우리에게 이 비우기와 채우기에 대한 귀한 말씀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닮기를’ 시리즈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성품 마지막 이야기를 이 본문들을 중심으로 해볼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성품은 바로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더 멋지게 표현하자면 ‘의분’입니다. ‘의로운 화’입니다. 더 멋진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4복음서 저자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건은 총 13가지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을 바로 ‘성전정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만날 수 없었던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우리가 알던 예수님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주님께서 왜 이렇게 화를 내셨는지! 바로 그 순간의 ‘의분’, 예수님의 화를 우리는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울 때는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화를 내야 할 때는, 절대 용납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닮기 원하여 작은 예수가 된 우리는 이제 이 예수님의 성품, ‘의분’을 반드시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에, 요한복음은 공생애 초반에 ‘성전정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심지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리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가복음 11장 17절, 새번역>
예수님의 ‘의분’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하셨어야 했습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성전’에 대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로 우리 역시 ‘나’라는 성전의 ‘성전정화’를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의분에 대해서 함께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가장 큰 전제는 이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고린도전서 3장 16절, 새번역>
저는 지금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는 것에 대해서 ‘의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성전을 지키기 위한 분노였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성전 된 우리를 정화하기 위한 의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성전이 언제나 깨끗할 수 있도록 ‘나’에게 화를 내는 ‘의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하는 내가, 이제 주의 성전인 내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과 같은 상황이 되지 않도록,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을 지켜 나가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성전의 주인 쟁탈전에 대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주인을 아주 존경할 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절A, 새번역>
성전의 주인은, 나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된 ‘작은 예수’들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은 주인이 하고 싶으신 대로 하도록 종은 그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종이 주인이 되고자 쟁탈전을 벌이곤 합니다.
바로 그 교만과의 싸움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셨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닙니다. 자꾸만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기에,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주인의 자리를 넘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누가복음 17장 10절, 새번역>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의 자리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종의 자리를 유지하도록, 주인에게 순종하도록, 스스로에게 화를 내셔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로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둘째, ‘말씀’ 외에 교훈들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디모데전서 6장 3~4절, 새번역>
세상에는 좋은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시대정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말은, 시대정신은, 언제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내 안에 ‘말씀’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과 전쟁을 선포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가장 노리고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교묘하게 말씀처럼 보이는 가라지를 알곡들 사이에 뿌려 놓고 갑니다. 잘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싸움입니다. 말씀을 방해하는 것들을 향해 화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했던 이 경고가 언제나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가복음 8장 33절, 새번역>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예수’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양보하기 시작하고, 말씀의 해석들을 의지하고, 설교들에만 귀를 기울이게 될 때 우리는 이 싸움에서 필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도록 싸우셔야 합니다. 말씀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여유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언론전, 심리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렇게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마태복음 4장 10절, 새번역>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마무리하는 삶, 그것이 예수를 닮은 작은 예수의 삶이기에 말씀이 아닌 것들과 반드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셋째, ‘팔고 사고’, 돈의 논리에 대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0절, 새번역>
왜 이렇게 긴 구절로 우리를 설득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돈’은 정말로 무서운 ‘우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돈’이 가지고 있는 악, ‘돈의 논리’는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쓴 편지에서도 이 부분을 정말 힘을 주어 강조합니다.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디모데후서 3장 1~2절A, 새번역>
예수님 당시 성전정화가 필요했던 가장 원초적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팔고 사고’의 문제였습니다. ‘돈의 논리’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뒤바뀌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마태복음 21장 12절A, 새번역>
이미 성전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서 사고자 해서 판 것이 아니라 이미 팔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시장이 되어 버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면 백 번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바뀌어 버리면 정말로 예배를 망쳐버리게 되는 돈의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시작해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은 결코 ‘돈의 논리’에 얽매이거나 연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결코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토록 무서우리만큼 행동하셔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이들이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유형’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돈의 논리’의 결과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왜 제자들이 예수를 버렸습니까?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 후 분명히 ‘유형’의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보장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억울했을 것입니다. ‘돈의 논리’가 만들어 낸 억울함이 예수를 팔게 했고, 예수를 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예수에서 반(反) 예수로 변질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돈의 논리’에서 오는 유형의 보상이 없을 때의 일입니다. 일한만큼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것이 유형의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는 ‘돈의 논리’와 치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돈’은 잘못이 없습니다. ‘돈의 논리’가 우리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과 싸우지 마시고, ‘돈의 논리’와 싸우셔야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농담으로라도 ‘돈의 논리’에 빠져있다고 쳐도 고작 은전 30개에 예수를 팔아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몇만 달란트를 준다고 해도 팔까 말까 한 대 정말로 고작 그 돈에 팔아 넘기는 돈의 논리라니! 정말로 어리석고 속상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요점은 이것입니다. 부디 ‘돈의 논리’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에게 이 ‘돈의 논리’와의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시대는 정말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세상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 속에서 ‘Another Level’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사랑의 힘, 나눔의 행복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반드시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어른 세대들부터 모범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돈의 논리’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그래서 승리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멀멀 가가’의 기준을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디모데전서 6장 11절, 새번역>
너무도 당연한 싸움이 있습니다. 멀리할 것은 멀리하고, 가까이 할 것은 가까이 해야 합니다. 멀리해야 할 것들을 가까이 두고, 가까이 해야 할 것들을 멀리 두게 되면 싸움을 시작할 수도 없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에 약한지, 내가 무엇을 멀리 두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가까이 두어야 하는지! 지금 당장 ‘멀멀 가가’의 기준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예수를 닮은 작은 예수의 삶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이 기준과의 싸움을 미루거나, 이 싸움에서 일부러 져 줄 경우, 곧 알게 되실 것입니다. 얼마나 빨리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지를! 얼마나 빨리 신앙에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는지를!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다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5~25절, 새번역>
싸우셔야 합니다. 기준 없는 내 삶에 ‘의분’을 표시하셔야 합니다. 더 이상 묻어두시고, 그냥 넘어가시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주십시오. 오늘 당장 이 싸움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성전 주인 쟁탈전에 대하여 싸우셔야 합니다.
말씀 외에 교훈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싸우셔야 합니다.
돈의 논리와 싸우셔야 합니다.
기준 없는 삶과 싸우셔야 합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내셔야 합니다. ‘의분’을 스스로에게 보이셔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반드시 싸우셔야 합니다. 싸워서 승리하셔야 작은 예수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영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 새번역>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때, 그 어떤 것도 우리라는 성전의 ‘생명력’을 빼앗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한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싸움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응원은 하시지만 반드시 스스로 싸우셔야 하는 싸움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이미 승리하신 싸움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스스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 하나님께 속한 전쟁임을 깨닫고, 왜 이미 승리하신 싸움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싸우십시오. 의분을 표출하십시오. 스스로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 새번역>
사랑과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그리고 의분입니다. 이 10가지는 평생 우리의 성품이 될 것입니다. 지난 2달간 ‘예수 닮기를’의 여정을 함께 달려온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작은 예수입니다. 이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웁시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합시다!
결단 찬양 - 승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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