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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 - 요순 시대 이후에 우(禹) 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요 임금은 순 임금에게, 순 임금은 우 임금에게 선양했으니 제우(帝禹 재위 기원전 2070년 ~ 기원전
2025년) 는 중국 고대 최초의 나라 인 하(夏) 나라의 건국자로........ 아버지는 곤이며 곤의
아버지는 오제(五帝)의 하나인 전욱(顓頊)이니 우는 전욱의 손자이고 전욱은 황제(黃帝)의 손자
이므로 우는 황제의 고손자가 되니 도산씨(塗山氏) 의 딸에게 장가가 계(啓) 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우는 홍수를 다스리느라 서른이 되도록 결혼하지 못했는데 꼬리 아홉개 달린 흰여우가 도산씨 딸로 변신해
사랑을 고백하자 결혼한 것인데 그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자 도산씨는 홍수를 다스리는 현장으로
찾아가니 우가 곰으로 변해서 알산동에 있는 것을 보고 창피해서 도망치자 우가 쫓아가니 곰의 형상이라
무서워 돌로 변하니 우가 “내 아들 돌려줘” 외치자 돌이 입을 벌리니 아이가 나온지라 계(啓)라고 했습니다.
우(禹)는 인덕이 있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고 또 탁월한 정치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았으니.... 아마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인으로서 그려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요의 시대인 기원전 22세기 말에 우는 치수(治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에게 천거
되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를 시작하는데 여름에 맡았기 때문에 그의 마을을 하(夏)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열자” 의 양주 제 7에 따르면 일에 너무 몰두해서 아이도 기르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았으며
신체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손발의 살갗이 텄다고 하는데... 禹(우)라는 문자는 본래 도마뱀
이나 악어, 용의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로, 우의 기원은 황하에 살던 물의 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우는 즉위 후에 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궁전의 재증축을 재고하였으며 관문이나 시장에 걸려있는
세금을 면제하였으며 도시를 만들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고 또한 하천을 정비
하였고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키웠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구주(九州)를 두었으며 검약 정책을 취해 스스로 솔선수범 합니다.
사마천은 하왕조의 성을 사(姒)라고 했는데 중국의 하(夏)씨, 증(曾)씨, 하후(夏侯)씨 등은 우(禹)의
자손이라 하며, 춘추전국시기 기(杞)나라 임금 간공(簡公)의 아우 타(佗)가 기나라가 초(楚)나라에
망하자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으니 다시 하후(夏侯) 씨가 생기게 되었다는데 삼국지
의 조조(曹操)는 정사 삼국지 중 배송지의 주에 의하면 그 아버지 조숭의 본성이 하후씨라고 합니다.
하(夏) 나라는 황하 문명의 한 갈래로 중국 문헌에 최초의 세습 왕조로 기록된 나라이니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을 화하(華夏)족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라 국명과 위치(화산 일대)에서 유래된 것이나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해 실존한 나라로 인정받지는 못하니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얼리터우 청동기
문화를 '하 문화' 로 부르나 '문화(culture)' 로는 인정해도..... 국가로 까지 발전했는지는 이견이 있습니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까지 황허(黄河) 유역에 존재했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문화로 1952년 위춘(玉村)에서 처음 유적이 발견되었고 1959년 허난성
(河南省) 옌스(偃師)의 얼리터우(二里頭)에서 발견된 유적이 대표로 허난성 중·서부와 산시성
(山西省) 남부 일대에서.... 100여곳의 유적들이 발견되었으니 고유한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는 신석기시대 후기인 기원전 2300년경 부터 기원전 1800년경 까지
중국 북부(화북)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 산둥성에 걸쳐 퍼져 있는 신석기 흑도 문화인
룽산문화(龍山文化)의 특징들을 계승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는 기원전
5000년 에서 기원전 3000년 까지 이어진 황하 중류의 양사오문화 (仰韶文化 앙소) 라고 합니다.
얼리터우(二里頭) 유적 상층에서는 궁전 터를 포함해 고대 도시의 유적이 발굴되어 초기 왕조국가
(王朝國家)의 성립을 보여주니 중국에서 가장 오랜 궁전 유적이며 하(夏) 왕조나 상(商) 왕조
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하(夏) 나라의 존재와 문화를 밝히는
데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니.... 허난성 옌스의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됩니다.
1~2기에서는 석기(石器) 와 토기(土器), 골각기(骨角器) 등 촌락문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발견되었고 3~4기
의 층에서는 칼과 창, 도끼, 끌, 화살촉, 낚시바늘, 술잔 등의 다양한 청동기(靑銅器)와 궁전문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면적은 4㎢ 정도이며, 가운데 부분에 2개의 궁전(宮殿) 유적이 분포하니 1호 궁전
터는 100×108m 정도의 네모반듯한 방형(方形) 으로 주위에 담과 회랑(回廊)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됩니다.
2호 궁전터는 73×58m 로 커다란 무덤이 있어 제사(祭祀) 등 의식을 위한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벽은 없으며 궁전 주변에서 청동제 칼, 화살촉, 방울, 잔 등을 만들던 작업장이 발견되어 청동기가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며 골각기(骨角器)를 만들던 작업장, 묘지와 주거지도 발견되었는데, 묘(墓)
에서는 솥, 잔 등의 청동기 껴묻거리와 함께 목이 잘린 채 순장(殉葬)된 사람의 유골 등도 발견되었습니다.
옥기(玉器)들도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은 산둥 룽산문화(龍山文化)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지만 다각(多角)의
날을 가진 창이나 도끼 등 얼리터우 문화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형식들도 발견되며 점을 치는데 쓰던
점뼈(卜骨 복골)도 출토되었는데, 여기에 갑골문자(甲骨文字) 와 모양이 상당히 비슷한 24가지의 부호
(符號)들이 새겨져 있는데 얼리터우 문화는 상(商)의 청동기 보다 이른 시기에 나타난 청동기 문화입니다.
고고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은채 전설로만 있던 하(夏) 왕조의 존재를 증명할수 있을것으로 주목되었지만
상(商)의 존재를 실증했던 갑골문자(甲骨文字)와 같은 문자가 발굴되지 않으면서 상(商)의 앞시대 문화
라는 것이 자리잡기도 했으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상(商)보다 이른 시기의
유적들임이 밝혀지면서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얼리터우(二里頭) 문화가 하(夏)와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얼리터우(二里頭) 유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가지 해석이 대립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4기(期)까지를 모두 하(夏) 시대의 유적으로 보고 궁전(宮殿)도 하(夏) 후기(後期) 의
도성(都城)으로 파악하는데, 반면에 2~3기(期)까지는 하(夏)나라의 문화이지만 상층
의 궁전은..... 상(商) 나라의 최전기(最前期) 문화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국성은 사(姒), 씨는 하후(夏后)이고 건국자는 우임금인데 (상서)에 요순시대에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 치수사업을 벌여 성공한 공로로 순 임금에게 선양받아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며 우의 한자인 '禹'(성씨 우)의 형태는 손으로 뱀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우임금이 뱀으로 상징되는 강의 범람이라는 환란을 평정한 영웅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상서” 및 “사기”에서는 그의 사후 하나라의 왕위가 가천하(家天下)로 우의 아들 계(啓)에게 세습
되면서 왕위 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하는데, “죽서기년”에서는 본디 오랑캐의 우두머리 고도를
계승자로 추천했으나 죽는 바람에 그의 아들 백익에게 선양할 생각이었으나, 우의 아들 계가
연맹 귀족들의 도움으로 백익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 세습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이설를 전합니다.
하왕조의 동성 제후국 가운데 호씨가 이에 반대하여 병사를 일으키자 계(啓)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서 서쪽으로 진격해 감(甘, 산시성 후현) 땅에서 대전을 벌여 소탕했고
제후국의 우두머리들을 양적 땅에 불러들여 조정회의에 참석하게 했으며 또 균대
(허난성 위저우)에서 제후들을 모아 잔치를 벌여 왕권을 굳히니 “균대지형" 이라 부릅니다.
아들 태강이 왕위에 올라 백성을 돌보지 않고 쾌락을 즐기니 형제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고 중강을 이어
상이 즉위하자 동이족 궁씨의 우두머리 후예가 하나라 도읍을 공격해 왕위에 올라 제예라 칭했는데
교만해져 사냥이나 즐기다가 측근 동이족 백명씨 한착에게 살해당하니 한착은 왕이 되어 예의 아내를
빼앗았고 하나라 임금이던 상을 추격해 죽였지만 아내는 친전 유잉씨 땅으로 도망쳐 소강을 낳았습니다.
한착이 하왕조를 빼앗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자 장성한 소강은 유잉씨의 목축을 담당
하는 목정을 는데, 한착의 아들 요가 추격병을 보내자 유우씨에게로 도망쳐서는
부락과 군대를 손에 넣으니 유격씨 부락으로 도망쳤던 하의 신하 미가 짐관씨와
짐신씨 부락의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 반격해 한착을 죽이고 하(夏)나라를 되찾았습니다.
소강의 중흥 이후 하나라는 발전하니 저작모(창을 만들었음)로 불리는 아들 저는 동쪽 지방을
개척하기 위해 수도를 원(허난성 지위안현)에서 라오추(카이펑현)로 옮기고 동이(東夷)를
정벌해 동해에 이르렀으며 아들 괴는 회하강과 사수강에 거주하던 우이, 황이, 풍이, 백이,
적이, 현이, 양이등 9개 동이부락으로 부터 조공 받으니 “구이래조(九夷來朝)” 라고 부릅니다.
마지막 왕인 걸왕은 키가 크고 힘이 세며 용맹스러우니 천하에 적이 없다고 여겨 노는데
탐닉했으니 여러 부족의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자.... 도리도 모르고 막돼 먹은
걸의 행동을 참지못한 동쪽의 상(商)의 우두머리 탕(湯)이 기원전 1600년에 군사
를 일으켜서 도읍 까지 밀고 들어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걸은 명조 땅으로 도망칩니다.
상나라의 주왕과 더불어 “하걸은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2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인간 말종
이었으니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고 상나라의 시조인 성탕에 의해
멸망되니 하나라는 471년에 걸쳐 13대 16왕이 재위했는데, 이후 상나라는 달기와 엮여서,
주나라는 포사와 엮여서 멸망했으니까 3대 왕조가 미녀에 의해 국가를 망치게 된 셈 입니다.
사실 멸망 패턴이 항상 똑같다는 점은 상(商)나라와 하(夏)나라의 존재가 주(周)나라의 역사를
토대로 창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한 이유가 되었으니... 이런 주장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뒷받침 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상나라도 같은 이유로 인정이 안 되었다가 갑골문자(甲骨文字) 를 통해 인정되었으므로
하나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세부 내용을 팩트체크
하면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고 갑골문자 분석으로 상나라의 실존은
밝혀졌지만...... 하나라의 실존을 뒷받침할 유적이나 유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갑골문에서 탕왕(湯王)은 상왕조의 창시자가 아니라 상왕조를 중흥시킨 왕일 뿐이니... 갑골문
에 따르면 상 왕조의 시작은 탕왕이 아니라 삼황오제 중 하나인 제곡 고신씨로 거슬러 올라
가는데,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전혀 없는 등 갑골문에서 하 왕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박으로는 하(夏)나라를 무너트린 상(商)나라 입장에서는 모반으로도 볼수 있는 일이니
굳이 하(夏)나라를 새길 필요가 있냐는 것인데.... 정통성이 문제되는 상황에서 전에 존재했던
왕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신생국가로서는 별로 좋은 판단이 아니였을 거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국성이 사(姒)라고 전해지는데도 논란이 많으니 최초의 문자로 보고 있는 갑골문이나 홍도문 들은
상나라 3기인 은허 시기 이후를 중심으로 발굴되고 있는데, 그보다 600여년이나 빠른 하나라
초기의 인물인 우왕의 후손들의 성씨를 '사'(姒)라고 “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데 정황상 후손으로 여겨진 기나라가 '사성(姒性)' 인걸 보고 추측한 것도 같습니다.
상(商)나라의 존재와 같이 왕계가 전하고, 선진시대 여러 문헌에서 언급이 되는 왕조라서 실존했을 가능성
이 충분하나 현재까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증명되지는 않았는데..... 하나라의 후보지로 꼽히는 곳
이 낙달묘(洛達廟), 이리두(二里頭) 등의 지역이지만, 정확한 문자 자료가 없어 아직 실증은 불가능 합니다.
2000년에 중국 사회과학원이 종료한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얼리터우 문화를 하나라로 비정해서
실존한 국가라고 확정하고 연대를 추산하였지만 국제 사학계는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 사학계 내에서도 하상주단대공정은 비판과 논란을 받고 있으니 공정에서 얼리터우
문화의 추산연대가 문헌상 하나라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끼워 맞췄다고 봅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는 하(夏)나라의 존속 시기는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 라고
주장하는데, 다만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22세기 부터 기원전 18세기 까지 존속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세계 학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2019년 기준으로 한국어판,
영어판 및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중국 측이 주장하는 하나라의 연대가 병기되어 있습니다.
하(夏) 나라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일개 성읍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으니..... 당시 중원에는 하(夏)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城邑)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夏)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사기(史記)” 의 사마천 등 후대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인데,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 들도 진, 한 등의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중국 사학계는 실존한다는 가정하에 하(夏)나라를 중원 지역에서 좀 잘나가는 종주 성읍(城邑) 국가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달리 황하와 장강 유역 일대를 포함한 대부분
의 땅들이 강수량이 많은 아열대 내지 열대성 기후 덕분에 슾지가 많은 온대림이 있었다고 짐작됩니다.
물소는 물론 코끼리, 코뿔소, 곰, 호랑이, 표범을 포함한 맹수들과 전설의 속에 등장하는 용의 모티브가
되었을 양쯔강 악어를 비롯한 대형 파충류들에 붕, 봉황, 짐의 모티브인 듯한 조류들이 살고 있었던
험악한 열대밀림의 땅이었으니, 상고 시절에는 밀림문명이 맞았지만 춘추전국시대로 가면서 부터
황하유역 일대는 전란통에 평야가 되고 장강 유역 일대만 밀림이었다가 한나라 이후에 개간되었습니다.
통치 영역 바깥에는 문자는 없었지만 문명들이 존재하였으니....... 열대밀림에 세워진 극소수의 '성읍
(城邑) 국가' 들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 국가는 후대의 중국 문명으로 계승되고 일부
는 단절되었는데 성읍 국가 이외 지역에는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으니 주나라 후기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한나라때 한족(漢族)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정지었는데 이런
사실이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진
이후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을 합쳐서 중국문명이라는 범칭으로 칭하는 것이 대세 입니다.
일각에서는 제요 도당씨와 제순 유우씨가 실존하고 이들이 하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후일 하나라를 건국하는 집단을 이끌던 일종의 족장으로 보기도 하니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하(夏)나라 국왕은 1. 우(禹) 45년 - (익(益) 3년) - 2. 계(啟) 10년 - 3. 태강(太康) 39년
- 4. 중강(中康) 13년 - 5 상(相) 28년 - 찬탈 후예(后羿) 8년 - 찬탈 한착(寒浞)
40년 - 6. 소강(少康) 21년 - 7.저(杼) 17년 - 8. 괴(槐) 26년 - 9. 망(芒) 18년 - 10
설(泄) 16년 - 11. 불강(不降) 59년 - 12. 경(扃) 21년 - 13. 근(廑) 21년 -
14. 공갑(孔甲) 31년 - 15. 고(皐) 11년 - 16. 발(發) 11년 - 17. 걸왕 이계(履癸) 52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기(杞)나라가 하(夏)나라 우(禹)의 후예라지만 확인된
바는 없는데, “산해경” 과 사마천의 “사기” 서 흉노가 하나라의 후예로 기록되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과 마찬가지로 주변국 역사에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붙여
넣은 걸로 보는 견해가 많으니 월(越)나라 왕실도 하나라 왕실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첫댓글 우임금이 세운 하나라에 대해서 잘 알았습니다.
하나라는.... 유적이 좀 더
발굴되기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