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 (1897-1944)
한국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불응하다가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사망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193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목사직에서 면직 당했다가 2006년에 목사직을 회복하였다.
한상동 목사 (1901-1976)
1924년 박창근의 전도로 신자가 되어 1927년 가문의 추방을 받고 고향을 떠나 진주 광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93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7년 졸업했다. 1938년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한 것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46년 6월 진해에서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의 시작이었다.
한국에서의 신사참배 실시와 황민화 정책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사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목적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으로 개칭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었고, 신사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근로 봉사의 월례 행사가 강요되었다. 또 각 가정에 신붕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1938년, 한국 교계가 질곡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조여오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부쩍 강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장로교 평북노회(1938년)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등도 뒤를 따랐다. 천주교는 이미 1936년 5월에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를 참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숭실학교, 숭의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들은 스스로 폐교(1938년 3월) 까지 하며 항의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와중에 주기철 목사와 한상동 목사 같은 분들은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렸다. 일제는 회유와 협박, 심지어 고문까지 하면서 이들의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이들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 결과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죄로 목사직을 파면당하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에 순교했다.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다가 체포되고, 옥고를 치루며 핍박을 당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애국심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로 투옥된 신자만 2천 명이 넘었고, 약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약 5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주기철 목사님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옥중에서 혹은 사형장에서 그 어디에서든지 내 목숨 끊어질 때 꼭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한상동 목사님
"신사 참배를 할 수 없는 여섯가지 이유"
첫째, 계명을 어기게 되니 하나님이 노하시므로 할 수 없다.
둘째,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데 그렇게 못하니 할 수 없다.
셋째, 결국 교회가 없어지게 될 것이니 할 수 없다.
넷째, 강요하는 개인도 망하니 남의 망하는 꼴을 볼 수 없으므로 할 수 없다.
다섯째, 신사 참배하면 국가도 망할 것이므로 할 수 없다.
여섯째, 나 자신이 지옥 갈까 두려워 할 수 없다.
일본이 우리 민족 정식을 꺾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
창씨 개명 : 일제 강점기 (1910-1945)에 한국인의 성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일.
신사참배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
단발령 : 우리나라의 전통과 정서를 잘라 버리고 무시한 일
학도병 강제징집 :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젊은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전쟁에 참가시킨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