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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체험
-난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느님을 생각한다.
오는이 바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드물게는 무릎꿇고 기도할 때도 있지만,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고 맡긴다. 6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어느 때는 잠자리에 누워서 기다리다가 5.58분 핸드폰의 알람이
울리면 일어 나기도 하지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면 내방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6시 평화방송 TV의 아침미사로 하루를 시작하고,
아침을 먹고 나면 아내와 함께 뒷산을 오른다.
아내는 산 길을 걸으며 꼭 묵주기도를 바친다.
나는 그 동안의 나의 삶을 돌아보며 묵상을 한다.
-보통 11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5시에 일어난다.
잠을 청하며 자는 동안 잘 보호해 달라고 성모님께 청한다.
3-4시간 정도 잠을 푹 자고나면 다시는 잠이 오지 않는다.
보통 할 일이 있으면 새벽에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고등학교때는 괘종시계를 4시에 맞추어 놓고, 3년간을 하루도 빼지 않고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
전날은 친구들과 놀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 친구들이 의아해 한다.
“저 녀석은 언제 공부하는데 나보다 잘하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공부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도 어김없이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세상 어떤 일도 두렵지 않고 편안하다.
“야훼이레”라는 말처럼 하느님이 나의 모든 걸 알아서 해 주시리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난 내가 중하교 2학년 크리스마스때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지금까지 60년이상은 신앙생활을 한 셈이다.
한동안 냉담했던 시간을 빼더라도 50년정도는 신앙인으로 살아 온 것같다.
그중 40년이상은 내 인생의 목표를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안에서
살아 온 것같다.
나의 집안은 누가 뭐래도 신라귀족으로 말하자면 성골집안이다. 나도 아들도 딸도 모두 성당에서 혼배성사로 신부님 주례하에 결혼을 했다. 나와 딸은 명동대성당에서, 아들은 역삼동성당에서, 명동성당에서 결혼하려면 결혼날자를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일년에 한번, 가을에 추첨을 한다.
추첨에 당첨된 날이 결혼식 날자다. 그나마도 당첨이 안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내가 중2가 막 되었을 때, 서울상대를 다니던 큰형이 광주의 집에 왔었는데, 책을 한권 던져 주면서 “너는 공부만 하지말고 이런 책도 읽어 보아라” 하셨다.
형이 던져준 책이 바로 내 인생를 바꾸어 버린 헤르만 헷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 였다.
여기에서 죽어가는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피나는 노력을 한다.
피땀을 흘려가며 죽어가는 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이토록 애절하게 설명을 할가?
나도 이 분에 대해서 알아 보자”하는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하느님은 이렇게 나를 부르셨고, 나는 응답했다.
“주님을 부르던 날, 당신은 내게 응답하셨나이다.
주님, 천사앞에서 내마음 다하여 기리오리다“
-“야훼이레”라는 말이 있다.
야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하신다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야훼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주님 뜻대로 이끌어 오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해 성탄때 세례를 받았다.
그당시는 세례받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세례를 줄가하고 웬만하면 주는 것같은데,
그때는 거의 1년간 교리를 배우면서 신부님이 직접하시는 찰고시험을 3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교리문답책에서 까만 항목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외어야 했고
하얀 것은 그뜻을 대충 설명할 수 있어야 통과 되었다.
-중2의 어린 나이에 혼자 신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가?
부자로 잘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갑자기 가난하게 되어
어린 나이에도 상처를 입어 누군가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나 보다.
어쨋든 나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이렇게 응답했다
이제 중3이 되어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었다.
나는 공부를 잘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줄곳 1등을 해 왔다. 중학교에 와서도 어쩌다 1등을 뺏길 때도 있었지만 공부는 잘했다. 정상적이라면 광주일고를 가야 했으나 카톨릭 신생학교인
살래지오를 1등으로 합격하여 3년간 학비를 내지않고 다녔다.
집이 가난하여 학교 다닐 형편이 못되었으나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신부님들은 내가 사제가 되기를 원하셨고, 나도 고3때 신학교를 갈가 말가 무척 고만하다가 서울 법대를 갔다.
이제 고달픈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돈한푼 없이 서울에서 학교 다니려니 자연히 입주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시간제 일바이트로는 하숙비와 학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당은 다닐 수가 없다.
하느님을 잊지 않고는 서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가정교사를 하다가 학생이 내말도 잘 듣지 않고 마음이 맞지 않아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밥은 굶으면 되지만 잠자리가 문제였다.
할수없이 상계동의 서울공대 기숙사에 있는 친구를 찾아 갔다.
그 곳 기숙사에서 여름방학때 까지 2달간 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기숙사 식당 아줌마들이 학생들 얼굴을 알기 때문에 친구가
밥을 타면 나를 먼저 가져다 주고 다시 맨 끝에 가서 줄을 서
밥을 타 먹었다. 상계동에서 종로5가 법대까지 학교를 다녔다.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만은 졸업해야 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렇게 지내는 서울생활 덕분에 난 냉담을 하게 되었다.
이제 냉담생활의 시작이다.
하느님을 잊지 않고는 서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고달픈 서울생활을 해야만 할가?
이렇게라도 꼭 대학을 다녀야만 할가?
온갖 잡념이 머리를 빙빙 돌았다.
한번은 가정교사를 하다가 그 집 학생이 말도 잘 듣지 않고 마음이 맞지 않아
가정교사를 할 수가 없어 그 집을 나왔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밥은 굶으면 되지만 잠자리가 문제였다.
할수 없이 서울공대 기숙사에 있는 친구를 찾아 갔다.
상계동에 있는 서울공대 기숙사에서 여름방학 때까지 2개월간
친구에게 신세를 졌다. 기숙사 식당 아줌마들이 기숙사생은 얼굴을 알기 때문에
친구가 밥을 타면 나에게 먼저 가져다 주고, 다시 맨 끝에 줄서서 다시 밥을 타 먹었다.
기숙사생 중에는 내가 잘 아는 중학교 동기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다행히 룸메이트도 잘은 모르는 사람이지만 마음씨 좋은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이렇게 상계동에서 종로5가의 법대를 2달간 다녔다.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만은 졸업해야 했다. 하느님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후에도 냉담은 계속되었다.
한번 마음에서 떠나가신 하느님을 되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난가 보다.
결혼해야 할 적령기가 되었다.
재주가 없어 연애는 하지 못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냉담신자의 머리에서 왜 이런 발상이 나올가?
결혼은 반드시 천주교 신자와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벌이나 직장때문인지 주위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 왔다. 그러나
그 많은 아가씨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가문이나 돈은 중요시 하지 않았다. 내가 인생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됨됨이가 중요했다.
장남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부양해야할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었다.
그러니 됨됨이가 올바른 아내를 얻어야 마음이 편할 것같았다.
이렇게 얻은 것이 천주교신자인 현재의 내 아내다.
내 아내는 부모님은 물론 집안전체가 열심한 신자가정이다.
나의 생각은 적중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 아내는 동생들을 잘 돌보아 주었고,
장남은 아니지만 30년이상 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금도 아내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내색하며 큰 소리 치면 내가 꼼짝도 못할텐데 웬일인지
이것을 앞세워 나를 욱박지른 일은 없었다.
-나는 결혼후에도 냉담신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내 눈치를 봐 가며 미사에는 가지만 일부러 맨 뒤쪽에 앉아
있다가 신부님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를 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하느님의 섭리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뭔가 알 수없는 힘이 작용하여 그 힘에 이끌려 가나보다.
-35살때의 일이다.
명동의 직장에 왠 낯선 사람이 찾아 왔다.
백발이 성성한 어떤 노인분이 찾아와 우리성당 신자분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3박4일의 어떤 교육에 가라고 권유한다.
일요일 미사에도 잘 가지않던 내게 3박4일의 교육이라니 당치도 않다. 나의 꾸르실료 교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나이 지긋한 성당봉사자가 급한 사정이 생겨 못가게 되자 임시 땜방으로 급조된 것이 나다.
아내가 열심한 신자였으므로 그 남편을 보내 보자고 결정한 듯하다. 아내에게 말하니 “거절할 것이 뻔한데, 자기는 말못하니 직접 말 해보라”고 한 모양이다.
그런데 멀리 마천동에서 명동까지 찾아온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말을 쉽게 거절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생각 해 보자”며 돌려 보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상한 일이 생겼다.
그 당시 우리 직장은 여름에만 일주일간 하기휴가를 주어 왔는데
앞으로는 년중 아무 때나 써도 되고 2번에 나누어 써도 된단다.
참 신기한 일이다. 오랫동안의 관례를 깨고 이제 아무 때나 하기휴가를 쓸 수 있고 그것도 나누어 써도 된단다.
“그래 그 무슨 교육이라 했더라? 결근하지 않고도 갈 수 있네.
까짖것 무슨 교육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받아서 나쁜 교육이라면
백발이 성성한 하얀 노인이 할 일 없다고 명동까지 찾아와 나에게 권유했겠나? 그래 뭔지 몰라도 한번 가보자.“
이렇게 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
아니 하느님이 이렇게 만들어 주셨다고 해야 겠지.
이 꾸르실료 교육에서 난 하느님을 만났다.
그 분은 나를 위해 울고 계셨다.
나는 이제 나의 신앙을 찾았다.
하늘의 빛깔이 달랐다. 어제 본 하늘이 아니다
온 세상이 새로워 보였다.
-성당에 돌아와서 신부님께 물었다.
“무슨 봉사좀 할게 없나요?”
신부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등부교사를 하란다.
그때까지 우리성당은 고등부교사 할 사람이 없어 고등부 주일학교가 없었다.
중등부도 다른 본당 교사가 파견되어 해주고 있었다.
난 고등부 주일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모집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봉사의 마음이 생겨 지원은 하였으나 오랫동안
냉담을 하였으니 아는 것이 없었다.
고등부과정은 책을 보고 공부하여 가르친다 하더라도 학생들의 질문이 걱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생의 무식은 학생들의 질문에서 폭로되는 법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즉시 명동의 성바오로서원에 갔다.
내가 교사하기에 필요할 것같은,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을 20여권 샀다. 그리고 신앙공부를 시작했다.
고3때 서울대입시 공부하듯이 오히려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하느님은 참으로 오묘하신 분이시다.
난 가르치기 위해 신앙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였으나
하느님은 나를 가만 두지 않으시고 나의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게 해 주셨다.
나의 본당 신부님은 아일랜드 신부님이셨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부임지가 목포였다고 하신다.
이제 백발이 성성하게 되셨다. 우리나라에 신앙을 전해준 고마운 선교사다.
신발은 시장바닥에 앉아 꿰매 신으시지만 가정방문 때나 고해성사를 보시다가도 어려운 신자를 만나면 전부 털어 주는 성인 신부님이다.
나는 미카엘 신부님을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나에게 참 신앙을 심어준 분이다.
이 신부님이 나에게 예비교리도 맡으라 하신다.
당신은 언어가 자유스럽지 못해 아무래도 표현이 부족하다고 하신다. 고등부교사를 하다가 예비교리 교사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이 새하얗다. 하얀 옷을 입은 어떤 분이 나를 썰매에 태우고 하얀 산을 향해 달려 간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썰매를 끌던 노인이 대답한다,
“나는 미카엘 대천사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나의 본당 신부님이 미카엘 신부님 이었다.
-난 이 때부터 성당밖에 모르고 살았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가지않고 성당에 와서 일도보고 냉담자 방문도 하고 술도 꾸르실료 동료들과 함께 마셨다.
마천동성당은 그때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중 하나였다.
청계천 철거민을 이주시킨 동네다.
그러나 마천동성당은 현재의 강남이 허허벌판일 때도 있었던
천호동 성당 다음으로 역사가 깊은 성당이다.
지금 열개 이상되는 한강다리가 제1한강교와 광진교 2개뿐일 때도 광진교를 건너 계속가면 마천동성당 이었다.
문정동성당도 마천동에서 분가했다.
문정동성당 지을 땅을 사고 가건물을 지을 때도 동네 노인들은
우리도 수녀원도 없이 못사는데, 전세나 내어주면 되지 땅은 왜 사주느냐고 항의를 했다.
그러나 땅은 사 주어야 그곳 신자들이 성당을 지을 것 같았다.
문정동성당 땅을 사기 위해 바자회를 했다.
내가 바자회 집행위원장이 되어, 신부님은 돈이야기 하기가 곤란하다고 미사강론도 내가 했다.
바자회는 온 동네의 축제가 되어 신자아닌 분들도 모두와서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었다. 뽀빠이 이상룡이 유명가수를 몰고와
사회를 보며 노래를 부르니 바자회를 하는 학교 운동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그 때는 꾸르실리스타인 뽀빠이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바자회는 토,일 양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런데 토요일 밤에 비가 왔다.
잠을 자다가 빗소리에 깜짝 놀라 바자회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바자회장에 있는 모든 비닐을 수거하여 바자회 상품이 비에 젖지 않도록 덮었다. 그리고 집에 가지 않고 바자회 천막에서 새우잠을 잤다.
아침에 신부님, 수녀님이 걱정이 되었는지 운동장에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모든 상품이 비에 젖지 않게 잘 덮여 있고 내가 거기서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큰수녀인 엔젤수녀님이 감동을 먹었는지 묵주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건 보통 묵주가 아니다. 묵주알이 얼마나 큰지 거짓말을 약간 보태면 주먹만 하다.
성인 5명이 둘러 앉아 한 단씩 잡고 묵주기도 바치기에 딱이다. 지금도 가보처럼 잘 보관하고 있다.
천장 바로 아래 못을 박고 걸었는데 내 책상까지 늘어 진다.
바자회는 대성공이었고 큰돈을 벌어 문정동성당 설립에 큰 보탬이 되었다.
-나에겐 또 한가지 잊지못할 추억이 있다.
내 고등학교 동기에게 크게 사기를 당해 알거지가 된 적이 있다.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오랫동안 마음먹고 준비해 온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 그 당시엔 내가 상당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 고등학교 동기이지만 가깝게 지낸 적이 없어 잘은 모르는 동기다. 그는 나를 속이기 위해 먼저 고등학교 교감신부님을 먼저 속였다. 스페인 신부님이니 우리나라 물정도 모르고 신부님이니 순진할 것은 당연하다.
살레지오 수도원에 약간의 기부도하고 수도회의 지원기관인 불우청소년 교육기관인 돈보스꼬센터에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그가 공원묘지 사업을 하는데 그의 공원묘지를 살레지오 수도원에서 8000천평을 샀다는 것이다.
지금은 계약금만 주었고 앞으로 계속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한다.
확인한 결과 그가 중부지방 어딘가에 있는 10만평이상의 공원묘지부지를 계약한것은 사실이었다. 땅값은 얼마 안되지만 여기에 공원묘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공원묘지를 분양 하고 있다.
살레지오 수도회가 이 땅 8000천평을 샀다면 그의 공원묘지 사업은 성공할 것이 확실하다. 살레지오 수도회는 돈이 많다.
학교를 설립할 때 도시 변두리의 땅을 싸게 구입하여 학교를 짖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도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이므로
얼마안가 그 땅이 도시의 중심지가 되고 수도회는 그 땅을 팔아 거액을 챙기고 다시 변두리 싼땅으로 학교를 이전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초기 학교설립자들이 돈을 버는 이유다.
-나의 모교 교감신부님이셨든 스페인신부님이 나를 찾아와
그 친구의 공원묘지 사업을 도와 주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내가 가진 돈으로 공원묘지에 투자했고 공원묘지사업을 한다고 다니던 직장도 사표를 쓰고 그만 두었다.
그위의 여러 사람에게도 권유했다.
그들은 나의 말을 믿고 아무것도 알아 보지 않은채 그 땅을 샀다.
거액을 투자한 나의 가까운 친구는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 봐야 겠다고 살레지오 수도원에 스페인 신부님을 찾아가 스페인 신부님께 살레지오 수도원에서 공원묘지 산게 틀림없냐고 문의했고
신부님은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다.
-모든 것이 사기이였음이 탄로난후 나의 친구는 억울하여 살레지오 수도원에 찾아가 항의 했다. 수도원 재무책임자의 답변은 기상천외 였다. 그 돈을 수도회가 전혀 책임질 수 없으니 신부님을 감옥에 보내라는 것이다. 당연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내 친구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단지 천주교 신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 뿐이다. 억울했다.
40년전 1억이라는 거액을 날리고 바보가 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눈이 뒤집혀 보이는 것이 없다.
그의 친한 친구인 동아일보 기자에게 하소연하여 살레지오 수도회와 스페인 신부를 거짓말 집단으로 매도하여 철저하게 망가트리겠다는 것이다.그래야 손실에 대한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난 다르다. 아무리 벌거숭이가 되었어도 나의 모교와 신부님을 그렇게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손해 본것, 이제는 어찌할 수 없으니, 친구에게 모든 걸 잊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내가 그가 손해본 1억중 반은 내가 갚아 주기로 합의하고
신문에 터트리는 것등, 살레지오 수도회와 신부님께 보복하는 것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난 나의 가진 재산을 모두 날렸고, 그 외 나의 지인들을 끌어들인것도 모두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들도 아무것도 모른채 나의 말을 듣고 투자한 것이므로 내가 갚아 주어야 한다.
여기에 오천만원을 추가로 갚기로 하였으니 눈앞이 캄캄하다.
이 돈을 모두 해결하는데 절약하고 또 절약해서 4년이 걸렸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급여가 높은 직장에 다시 들어가게 돌보아 주시고 이 모든 일을 해결하게 해 주셨다.
-스페인 신부님은 내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고 희생했는지 아실가? 모르실가? 그뒤로 내가 그 일을 내색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아내는 아실거라고 한다.
내친구가 수도회에 찾아가 1억을 갚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난리를 쳤으니까. 40년전 1억은 정말 큰 돈이었다.
수도원 재무담당자가 감옥에 보내라고 했으니까. 신부님께 말했을거라고 한다.
-난 그후 내딸이 남모르게 결혼을 해야 했을 때,
이 스페인 신부님을 주례로 살레지오 수도원에서 혼배성사를
받았다.
딸이 학생때 아들 삼형제중 막내와 연애를 하였는데, 시아버지가 아침을 먹으려 하면 막내 아들이 없다.
눈을 뜨자마자 애인이 보고 싶어 우리 집으로 온다.
그래서 형들보다 먼저 장가를 보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형들이 장가가기전이니 또한 아직 학생신분이니 남자집의 사정이 청첩을 돌리고 사회 예식장에서 떳떳이 결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딸은 살레지오 수도원에서 스페인 신부님의 주례로
혼배성사를 받고, 10년정도후 나의 본당 주임신부인 김충수신부님께 사정얘기를 하고, 청첩장을 돌리고 사회예식장에서 친구 친척 및 지인들을 초대하여 혼배갱신식을 다시 했다.
-난 스페인 신부님으로 인하여 엄청난 재산상 손실을보고
힘들기도 하였지만 신부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후 나의 다른 친구나 그 신부님을 아는 살레지오의 동창, 후배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신부님도 하늘나라로 가시고 엄청난 세월이 흘러 난생 처음으로 이 글을 조심스럽게 쓴다.
난 하느님께서 내가 당신만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게 하기위해
가져 가신 것이라 믿는다
돈이 많으면 생각이 흩트러지고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돈이 필요할 때는 필요한만큼 반드시 주셨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로마서 8, 2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