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에서 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을 경험하다.
1. 일자: 2017. 4. 1 (토)
2. 장소: 청량산(870m)
3. 행로 및 시간
[입석(10:30)
-> 청량사 전망대(11:00) -> 경일봉(11:33)
-> 자소봉(12:14~20) -> 구름다리(12:45-50)
-> 점심(~13:05) -> 장인봉(13:26,
안내소 2.6km) -> (긴 계단) -> 소나무전망대(14:21) -> 금강굴(14:28) -> 안내소(14:47) -> 주차장(15:00)]
주중 내내
일관된 비 예보에 강행과 취소 사이에서 갈등하다 몇몇 분들과 상의하고 관망한다. 상대적으로 일기가 좋은
근교로 장소를 변경했으면 좋으련만, 이미 예약한 버스와 한번 정하면 좀처럼 변경이 용납되지 않는 성향이
섣부른 판단을 못하게 한다. 혹, 누군가‘이 비에 굳이 그곳에 가야 하나?’라는 댓글을 달아줄 걸 기대해 보지만 대간종주꾼들에겐 어림없는 일이었다.
토요일 아침, 서울 날씨는 예상대로 좋다. 버스 안에서 까막바위님이 해운님께 여우털로 만든 열쇠고리를 선물했다. 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해운님께 드리는 개근상이자, 이 험한 날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의리에 대한
감사 표시라 여겨진다. 탱큐, 까막바위님.
문막에서 아침을 먹은 후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다 깨어보니 경상도 땅,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오늘 같은 날은 예보가 좀 틀려도 되는데…. 눈에 친숙한 도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청량산 입구다. 인적이
드물다. 다행히 콤비 버스는 입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약 20분, 시간을 벌었다. 우중
산행 준비에 분주하다. 오랜만에 나온 행진님과‘달고 나온
일행이’(내심 여자분 이길 기대했는데 남자여서 조금은 아쉬웠다.) 있어
평소보다 새로운 기분이다.
입석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길을 오른다. 봄이 왔다는 진실과 눈에 보이는 사실 사이의 간극, 비 내리는 숲은
늦가을 느낌이 강해 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에 젖은 갈색 나뭇잎,
지난 가을의 잔재는 너무도 선명하다. 눈으로 꽃을 봐야만 봄이라고 믿는 건, 그만큼 시각에 길들여진 감각기관 탓이리라. 배낭커버만으로 부족해
우비까지 입고 비탈을 오르는 일행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화려한 색감이 숲에 생기를 돋게 한다. 비 내리는 봄 숲의 풍취가 그윽하다.
어풍대라 불리는 전망대에 선다. 부처님오신날 준비로 연등으로 치장된 청량사가 선명하다. 붉은 연등이
칙칙한 주변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청량사의 가람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뒤편 암봉 위로 구름이 인다. 여기저기서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기대하지 않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놀람과, 날씨가 맑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경일봉과 자소봉 갈림에 선다. 어려운 길을 택한다. 숨이 차 오른다. 비가 가져온 습기에 땀이 섞인다. 30분 된비알에 호되게 당하고서야 경일봉에 도착한다. 길 정비 중인지
여기저기 금줄이 쳐 있다. 비는 굵어졌다 그쳤다 하며 여전히 추적추적 내린다. 경일봉만 오르면 주능선 길이니 힘겨움이 덜하겠지 하는 기대는 연이은 굽이에서 무너진다. 그나마 간간이 나타나는 평지가 위안이 된다. 바위 벼랑에 선 소나무
가지에 촉촉히 빗방울이 맺혀 있다. 생기가 느껴진다. 이
비가 산과 둘과 사람에게 얼마나 이로운가를 알기에 감사한 마음이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연무는 점점 심해진다. 돌아 내려올 거 뭐 하러 가냐는 유박사님을 남겨 두고, 가파른 계단을
지나 자소봉에 선다. 널찍한 산정 공터와 덩그러이 놓인 망원경이 평소 이곳의 위세를 알려주고 있으나, 소백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청량산 최고전망대가, 오늘은 연무만이
자욱하다. 풍경이 없는 자소봉은 그리 감동적인 곳은 아니었다.
산행 시작한지
얼추 2시간이 흘렀다. 경일봉을 들렀다 오느라 40분 정도 더 걸렸다. 아직은 버스 대절해 와서 루틴한 코스만 가면
아깝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강하다. 비가 눈으로 변한다. 처음에 낭만으로 다가왔으나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길가에 우뚝
솟은 탁필봉의 위용을 바라볼 여유도 또 계단을 올라 연적봉에 들를 기분도 아니다. 선후미로 나눠 각자의
길을 간다. 굵어지는 비가 눈으로 바뀌면 하산로를 청량사 방향으로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인봉에서 낙동강 방향으로 떨어지는 길 사정이 얼마나 험할 지가 관건이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진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가파른 사면에 커다란 빙폭이 시선을
끈다. 그 풍경만으로 판단하자면 이곳은 아직 한겨울이다. 연무
속 암봉 풍경이 몽환적이다. 생각을 가다듬는다. 해운님 말대로
올 겨울 눈 맞으며 산행한 적 없지 않는가? 즐겨야겠다.
부지불식간에 회색 도화지 위에 초록색 기둥이 세워진다, 청량산에
명물 하늘다리에 도착했다. 아찔한 고도감과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에 젓는다. 바람님과 해운님을 시작으로 인증사진을 찍는다. 카메라 모드를 M/풍경 등으로 바꾸어가며 셔터를 눌러대지만 마음먹은 대로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흐린 날씨와 내 실력부족이 함께 낳은 결과다. 아쉬운 마음으로 하늘
위에 놓인 다리를 걷는다. 밑이 보이지 않으니 처음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으나 미묘한 흔들림이 감지되고
겁이 난다는 주위의 말을 들으니 일순간 공포감이 밀려와 발걸음이 빨라진다. 두려움은 마음먹기의 산물이다. 이 궂은 날씨에 이곳까지 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구름다리에서 조망되는 풍광이었는데 참 아쉽다.
눈 발은 점점 굵어진다. 낭만과 걱정이 공존한다.
다리 건너편
소나무 숲에 조촐한 점심상이 차려진다. 새로 오신 분이 준 양주 한잔에 속이 확 덥혀진다. 채왕님 쑥떡, 아이넷님 김밥. 해운님
계란(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어 주머니에 넣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까지
먹고 나니 배가 꽉 찬다. 배가 부르니 추위도 한풀 꺾인다.
구름다리에서 장인봉은 그리 멀지 않았다. 청량산 정상에 섰다. 4월의 눈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이내 적응하며
우리가 이곳을 다녀감을 기념한다. 생각이 정리된다. 예정대로
길을 가야겠다. 이 생각은 낙동강을 굽어보는 전망대에서 바람에 실려 떠다니는 구름과 그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중 마을의 평화로운 전경을 보자 더욱 굳어졌다. 길은 빙판은 아니다. 내리는 눈은 땅에 닺자마자 녹는다. 언제 다시 이런 낭만을 경험해 보겠는가? 그럼, 가자!
선택이 옳았음은 일행들의 얼굴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긴
계단을 내려서며 바위에 낀 신비로운 색깔의 이끼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낙동강변의 풍경에 감탄한다. 청량산을
끼고 돌며 구불거리며 남행하는 강물의 흐름을 내려다 보는 행위는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하산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다음 산행지에 대한 여러 대안들이 쏟아져 나온다. 음식점에 전화를 해 매운탕 주문을 한다. 매운탕, 오늘 같은 날씨에 정말 잘 어울리는 음식이리라.
언제부턴가 날이 몰라보게 맑아져 있다. 아마도 좀 전에 산에서 폭설을
경험했다고 하며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하기에 오늘은 만우절 아니겠는가. ㅎㅎ
자연의 섭리에 놀라며, 산에서 봄, 가을, 겨울을 경험하고 다시 봄을 맞은 기분을 만끽한다.
보글보글 끊고 있을 매운탕을 생각하니 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 에필로그 >
집에 돌아와
서둘러 사진을 정리해 밴드데 올리고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사진과 마주한다. 청량사 위로 이는 구름, 하늘다리 위 몽환적 분위기, 진눈깨비에 등 돌리고 식사하는 모습,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힌 장인봉에
날리는 눈 발, 정상 전망대에서 사진은 제대로 담아 내지 못한 구름에 실려 모습을 드러낸 낙동강 그리고
그 넘어 평온한 마을 풍경…. 모든 게 추억이 되어 아련한 마음을 자극한다. 산이란 참 묘하다. 궂은 날씨 속을 오르내릴 때는 왜 이 짓을 하나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다녀 와 하룻밤 자고 나면 이내 또 그곳이 그리워지니 말이다,
오늘 사진에는 유독 눈을 감은 모습이 많이 잡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그만큼 비바람과 눈보라 치는 날이 궂었단
증거다. 그 눈비를 뚫고 재미난 추억을 함께 만들어준 11동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