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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바리바리 짐 싸들고
배위에 올라 바라보던 산천
점점 더 멀어지고
소주 한 병 마시고 뱃전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로 흩어지는 회한...
그래, 생각해 보면
우리 보따리 인생 아닌 적 있었겠는가?
태어나서 이 세상 마칠 때까지
삶은 어차피 내가 짊어지고 다니는 보따리였던 것을
-김우영 시 ‘우리 보따리 인생 아닌 적 있었겠는가?’ 후반부
경기도 평택항 소무역연합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사람과 보따리’ 창간호에 ‘우리 보따리 인생 아닌 적 있었겠는가?’라는 창간축시를 쓰면서 평택항 소무역상들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리고 지난 4월9일 동행취재차 대룡훼리에 승선, 평택-중국 산동성 위해를 왕복하면서 소무역상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밤늦게 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를 하면서 이른바 ‘보따리상’들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
이번 동행 취재를 통해 느낀 것은 일반 국민들이 갖고 있는 ‘보따리상’에 대한 편견은 대단히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왜곡된 언론보도로 인해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을 ‘불량식품 반입자’ 또는 ‘밀수꾼’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생활인으로서 대단히 건전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고 소량으로 들여오는 수입농산물에 대한 자체적인 점검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의 왜곡된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본 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취재를 위해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신 대룡해운 평택지사 백진오 지사장님과 대룡페리 안명근 수석사무장님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또 최태용 연합회장님과 이성수 연합회 총무님, 그밖에 취재에 흔쾌히 응해 주신 소무역상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선상 복도나 휴게실, 갑판에서 나를 볼 때마다 “우리들 얘기 잘 좀 써주세요”라고 말하던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1 평택항에서
나는 배 여행을 즐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지만 여행은 무엇보다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서 꼼짝 못하고 가야하는 비행기와 달리 선상에서의 생활은 여유롭고 자유롭다. 갑판에서 노을 지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고 맘에 맞는 이들과 한잔 하는 낭만도 있다. 거기다가 경비도 훨씬 싸다는 이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중국, 일본을 십여 차례 넘게 배로 다녀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마냥 흥겹고 낭만적인 여행이 아니었다. 평택항에서 위해 영성항까지 소무역상들과 밀착 동행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배 여행을 하면서 소무역상들을 자주 보아왔다. 한 5년 전 중국 발해만 영구항으로 가는 배 안에서는 술 취한 소무역상과 충돌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소무역상인들의 조직을 통해 선상 음주소란.난동 등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으므로 그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4월 9일 오후 서해대교가 무척 가깝게 지나가는 평택항에 도착해 먼저 대룡페리 백진오 평택지사장을 만났다. 백지사장은 이곳에만 8년째 근무한다고 하니 웬만한 일은 모두 꿰고 있을 터이다.
대룡해운 백진오 평택지사장
“최근 환율 급등 직격탄과 정부의 소무역상인 물품 반입량 규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어려워진 소상인들의 수지타산을 맞춰주기 위해 승선료를 20%나 인하했어도 배의 승선 인원이 10%나 줄어든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지요. 정부가 큰 기업은 지원해주고 있지만 중소기업에 대한 혜택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백지사장은 또 이른바 ‘보따리상’이라고 불리는 소무역상들에 대한 견해도 털어놓았다.
“소무역상들을 범죄인 취급하는 언론이나 정부의 편견은 고쳐져야 합니다. 이분들이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수입이 줄어들어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아져 약 2년 전부터 부쩍 고령화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어요. 그러다 보니 중국인들이 많이 치고 들어오고 있지요.”
그는 인천항의 경우 이미 중국인 소무역상이 절반을 차지했다고 지적한다.
옆에 있던 사단법인 경기도 평택항 소무역연합회 최태용 회장(61)이 말을 이어 받는다.
“중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벌어먹겠다고 이 일을 하는데 시비 걸 수는 없지요. 다만 잘못하면 자칫 수입식품의 질 저하라는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최회장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현재 소무역상들 자체적으로 검색대를 만들고 우수한 농산물만 통과시키고 있어 앞으로 인증 받은 농산물의 정식수입을 제도화시키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
자체검색대에서 검사를 하는 모습
또 평택항 앞에 정품 수입 농산물을 판매하는 장터를 조성하는 사업도 구상 중이란다.
#.2 ‘보따리상’들을 만나다
이야기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와 소화물을 부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수백명의 소무역상들이 짐을 부치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 이들이 중국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옷감 원단, 전자제품 부속품, 기계부품 등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오는 것은 참깨나 참기름, 압축 포장된 마른고추, 깐 마늘, 잣 등 농산물들이다.
이들은 ‘따이공(代工)’이라고도 불린다. 보따리를 운반해주고 수고비를 받는다는 의미인데 이들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최태용 회장은 ‘뱃삯 빼고 밥값 빼고 나면 한 3~4만원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한달에 10번이나 12번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중국을 왕래해봐야 손안에 남는 건 최저 생계비의 절반도 안 되는 40만원 정도라는 것.
평택항에서 만난 소무역상들의 표정이 그처럼 어두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수입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배 안에서 만난 한 소무역상은“잠은 배안에서 자고 먹는 것은 중국 측 수집상 점포에서 해결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전해준 보따리 상들의 생활은 이렇다.
저녁에 배를 타고 간단한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과 점심은 중국에 내려 수집상에서 무료로 주는 것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수집상에서 싸준 도시락을 갖고 배에 승선, 그날 저녁과 다음날 한국에서의 아침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시락을 4개씩 받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점심과 다시 배를 탄 후 저녁으로 먹기 위해서다.
오후 4시경 대룡페리호에 승선했다.
선사 측의 호의로 객실을 배정받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식당으로 가 보았다. 이 배의 식사비는 3,500~4,000원이다. 식사 내용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일반 식당보다는 훨씬 싼 식비이지만 이마저도 소무역상들은 선뜻 사먹지를 못한다.
대신 전날 중국 수집상으로부터 받은 도시락이나, 컵라면, 빵과 우유를 하나 사서 휴게실에 모여 먹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의 처지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따라서 이들은 스스로를 ‘선숙자(船宿者-배에서 사는 노숙자)’라고 자조적으로 부른다.
#.3 우린 ‘선숙자’들이예요
소무역상들은 노부부가 함께 배를 타는 경우가 많다. 늘 떨어져 사느니 비록 기름 냄새는 나지만 아예 배안에서 함께 사는 게 더 편하고 수입도 두 배로 늘어서 좋다는 것이다.
이번 취재 여행에서 만난 유정의씨(68)도 부부가 함께 배를 타고 있다.
유정의 씨
“2002년부터 아내과 함께 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5년 동안 공직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는 의류 보세업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일본으로 수출하던 물건이 차차 줄어들면서 어려움이 닥쳤지요. 배를 타게 된 동기는 사업구상을 하던 차에 후배의 권유에 의해서 타게 되었습니다. 올해 7월 17일이면 만 6년째 접어들지요”
대부분의 소무역상들은 배를 타는 자신들을 인생의 밑바닥에 서있다고 말한다.
물론 유정의 씨 경우처럼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보따리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태용 회장도 중국에서 큰 규모의 공장을 경영하는 CEO였지만 IMF 때 도산된 이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호구지책으로 배를 타게 된 경우다.
회사 CEO는 물론 공무원, 교장, 대학강사, 군간부 출신도 있다. 세미프로골퍼와 지역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잘 나가던 사람들도 함께 배를 탄다.
승객들과 소무역상인들이 저녁식사를 마친 후 식당에서 사단법인 경기도 평택항 소무역연합회 관계자들과 소줏잔을 앞에 놓고 자리를 함께 했다.
안명근 대룡페리호 수석사무장
대룡페리호 안명근 수석사무장(61)의 배려로 만든 자리였다. 이 큰 배를 운항하면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인상이 참 온화해 보인다.
그는 최태용 회장을 비롯한 소무역상들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다. 그래서 소무역상인들과 선사와의 갈등이 크게 표출되고 있지 않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필자가 말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저런 얘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만큼 이 사회에, 정부에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는 것일까?
“한번은 전체 모임 때 ‘배에서 내리면 갈 곳 없는 분들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는데 무려 150여명의 노인이 손을 드는 겁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지요. 아, 물론 집안이 망해 집이 없는 분도 있지만 자식이나 가족들이 불편해 나와 사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어요”
이야기를 하는 연합회 이성수 총무(52)의 눈가가 어느덧 촉촉해지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 총무의 말을 연합회 우청학 이사(51)가 이어 받는다.
“이 분들은 중국 수집상들이 싸준 도시락에 물을 말아 먹어가면서 고생해 돈을 벌지만 집에다 모두 주고 다시 배를 탑니다. 그래서 저희는 회원들에게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을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합니다. 실제로 어버이날엔 어르신들께 카네이션도 달아드리고 선상에서 잔치를 열어 노래자랑도 하고 경품으로 배표나 담배 등 작은 상품도 드립니다. 앞으로는 회갑이나 칠순을 맞은 회원이 있으면 합동으로 작은 선상잔치도 열 계획입니다”
#.4 보따리상들 다 굶어 죽으란 말인가?
소주가 몇 순배 더 돌고 밤이 깊어가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생존권 문제로 넘어갔다.
사진 오른쪽으로부터 최태용 연합회장, 안명근 수석사무장, 이성수 총무, 우청학 이사
사실은 필자도 한 달 내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배를 타봤자 한달에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40만원 정도의 수입 밖에 못 올린다는 이야기에 반신반의했던 터였다. 그래서 만나는 소무역상들에게 은근히 묻고 또 물어 본 결과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언론에 대한 불만이 컸다.
“방송들은 모든 보따리상인들을 부도덕한 범죄 집단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를 나른다고 하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란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성수 씨는 중국에서 1인당 들여오는 농산물은 기껏해야 10만원어치 정도인데 비해 우리가 가지고 나가는 물품은 주로 전자부품, 옷감 원단, 공산품 등 수백만원어치라고 밝힌다.
옆에서 대룡 페리호 안명근 수석사무장이 한마디 거든다.
“왜 한 때 우리나라가 중국산 마늘을 거부하니까. 중국에서도 한국산 휴대폰 수입을 거부한 적이 있었지요? 결국 이 신경전에서 우리나라가 졌지요. 왜냐 하면 휴대폰 한개 값이 중국산 마늘 3가마 값이니까요. 허허허...”
맞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비록 구모가 작은 보따리상이라고 할지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남는 장사임에 틀림없다.
어디 그 뿐이랴. 월수입 80만원 정도만 보장되면 평택항에서만 2000명 정도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실업자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정부의 일자리창출사업으로도 좋은 일이 아니냐고 이들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시름은 점점 깊어진다.
앞으로 6월부터 반입물품을 50kg으로 규제한다는 것이다. 일반 여행객의 반입량과 똑 같은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여행객들은 놀러 다니기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이고 자신들은 직업인으로 배를 타는 만큼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벼랑 끝까지 몰린 이들은 지난해 선상시위를 결행했다.
지난해 10월 20일 소무역상 600여 명이 중국에서 입국한 뒤 입국심사와 통관을 거부한 것이다.
소무역상인들은 평택항 여객터미널에서 이틀간 철야농성을 벌였다. 또 10월 23일에는 ‘평택항 소무역연합회’ 주최로 700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배포된 호소문의 내용은 ‘생계형 보따리상에 대한 관세청의 규제 강화는 굶어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과 원칙은 지켜야겠지요. 그런데 이제껏 묵인해 주던 상태에서도 근근히 먹고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원칙을 내세우며 규제를 강화하면 보따리상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묵묵히 소줏잔을 기울이던 최태용 회장이 무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국회와 관계 요로에 소무역상인들의 작은 요구가 담긴 진정서를 여러 번 제출했지만 반응이 없었다고한다. 요구사항이 또 다시 묵살될 때는 모든 소무역상인들과 함께 바다로 뛰어 내리는 목숨을 건 시위도 생각 중이라고 밝혔다.
#.5 난 죽을 때까지 이 배를 탈 거예요
술자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는 길. 담배 한대 물고 갑판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차서인지 갑판엔 아무도 없었다. 선실로 돌아 오는 길 복도 곳곳엔 비닐봉투들이 묶여져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아는 터라 가슴이 찡해왔다. 소무역상인들이 배안 식당에서 밥 사먹을 돈을 아끼느라 중국에서, 또는 한국에서 가져 온 밥과 반찬들이다. 이들은 이 찬밥에 물을 말아 짠지무침이나 김치와 함께 먹으며 바다를 건너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행여, 이 글을 보신 여행객들이 배를 타실 때 배 좌우측 갑판이나 계단, 3등실 구석에 누렇고 흰 비닐 봉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시거든 보기에 안 좋다고 눈 흘기지 마시길 바란다.
그것은 ‘보따리상’들이 일용할 귀중한 양식이다!
늦은 밤 휴게실 텔레비전 앞에 10여명의 소상인들이 앉아 한국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이들을 지나쳐 방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아까 저녁에 만난 문모 노인(74)부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요? 14년째 배를 타는데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배를 탈거예요. 돈을 못 벌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여기만큼 맘 편한 곳이 없어요. 집보다 편해요. 자식들, 주변 사람 눈치 볼 것 없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게 인생이지요”
다음날 아침 일찍 선상에 나가 보았는데 해뜨기 전부터 벌써 운동을 하는 소무역상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랬다. 이번 동행 취재를 통해 느낀 것이지만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이들의 세계는 지극히 건강했으며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집단이었다.
전날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말했었다.
“간혹 싸우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불러 놓고 ‘우린 그야말로 한배를 탄 사람들이고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인데 싸우지 말자’라고 화해를 시켜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질서가 잘 잡히고 단합도 잘돼 기쁜 맘으로 배를 타고 있습니다”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가니 전날 만났던 소무역상인들이 필자를 반갑게 대해준다. 아침 인사를 건네니 한결 같이 우리 얘기 잘 써달라며 손을 꼭 잡는다.
그런데 어제 승선한 500여명의 소무역상인 중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한 20~30여명이나 될까? 전기한 것처럼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배가 영성항에 도착하면 수집상에 가서 늦은 아침을 먹을 것이다.
#.6 중국 수집상 단지의 풍경
오전 10시, 배가 마침내 영성항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필자는 영성시가 위해시와 다른 도시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위해시 안에 영성시가 있는 것이란다.
수속을 마치고 영성항 인근에 있는 수집상 단지인 ‘상무청’에 도착한 것은 11시 경. 영성 상무청엔 수집상 62개소가 모여 있다.
영성항 인근에 있는 수집상 센터 상무청
16호 상점인 성택상회로 들어섰다. 이곳엔 말린 압축고추, 녹두, 땅콩, 말린 밤, 조 등 농산품과 한약재 등이 쌓여있다.
한국 사람인 이집 여주인과 남편도 직접 보따리를 들고 한국에 드나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배안에서 안면이 있었다. 머리를 삭발해서 스님인줄 알았는데...
가게 안에서 차한잔을 마시고 있는데 함께 배를 탔던 소무역상인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한다.
70은 넘어 보이는 두 사람이 먼저 가게로 들어선다.
“오늘 중국세관에서 물건 뺏긴 사람들 많대?”
“갖고 오지 말라는 걸 자꾸 갖고 오니까 그렇지. 그 놈들은 뭐 눈이 없나?”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한국산 화장품과 술이나 담배를 규정보다 많이 들여오려다 보니 간혹 중국 세관원들과 시비가 붙고 물건을 압수당한다고 했다.
과연 다른 소무역상인들이 가게와 들어와 풀어 놓는 물품을 보니 국산 담배와 화장품이 많다. 한국산 담배는 낱개로 담아와 여기서 다시 원래대로 포장을 한다. 하지만 따이공 역할을 하는 소무역상들에게 돌아가는 담배 한 보루의 마진은 2000~3000원 정도. 이밖에 전산지, 옷감 원단, 양말, 부품들이 보인다.
수집상 내부
압축시킨 고추
가게 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중에도 택시나 승합차를 이용해 수집상 단지로 많은 소무역상인들이 줄을 지어 들어온다.
11시30분, 다른 소무역상들이 몰려들기 전에 식사를 하자고 해서 가게 2층에 있는 간이식당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소무역상인들이 다시 배를 탈 때까지 몇 시간이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수면실도 마련해 놓았다.
식사는 갓 지은 밥,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 조기구이, 시금치나물, 부추무침, 김치 등...당연히 모두 ‘중국산’이었지만 집에서 먹는 밥상처럼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이날 낮엔 위해시내와 적산법화원을 돌아 본 후 석도항의 한 음식점에서 군산-석도를 왕래하는 군산항 소무역상인회의 정광호 회장을 비롯한 임원 4명과 만났다.
#.7 군산항 소무역상인회 임원들과의 만남
“나라와 나라 간의 국경이 생긴 이래 소규모건 대규모건 상행위는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위해와 한국의 뱃길이 열린지도 19년이나 되고 소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정부의 잘못된 법체계로 인해 우리 소무역상인들이 이리저리 휘둘림을 당해 왔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별게 아닙니다. 우리도 떳떳하게 세금 낼 테니까 먹고 살 수 있는 적정량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군산상인회 고광진 운영위원장은 고대의 역사까지 인용하면서 정부의 지원과 사회의 관심을 요청했다.
정광호 회장도 국가에서 제도권으로 받아 준다면 더욱 자정노력을 해서 신뢰 받는 집단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서 언론에 얻어맞을 때마다 타격이 너무 커서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지만 언젠가는 제도권 안에서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정부의 입장에서도 기초생활수급자나 노숙자가 늘어나는 것보다는 당당하게 내 힘으로 배를 타면서 돈을 버는 소무역상이 국가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군산항 소무역상인들, 맨 오른쪽이 정광호 회장
이날 평택항 소무역상인들과 군산항 소무역상인들이 만난 자리는 비장한 분위기조차 감돌았다.
군산 정회장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정부가 이대로 강력단속만을 실시한다면 분신자살이라는 참사도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격앙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나통 들고 청와대 앞으로 가자는 것이 군산 소무역상인들의 분위기라는 것.
평택과 군산의 소무역상인들이 바다로 투신하고 신나를 끼얹어 분신자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평택항 최태용 회장은 “평택항소무역상의 경우 작년 7월에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경기도와 평택시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우리 평택항과 군산항의 소무역상인들이 힘을 합치면 안 될 것도 없지요. 두 배의 에너지를 낼 수 있으니 반드시 힘을 합쳐서 제도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갑시다”라고 이날 만남에 의미를 두었다.
군산항 소무역상인들은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도 안개가 자욱한 항구로 돌아갔다.
#.8 보따리 대장을 뽑는다고?
우리도 대룡페리호 안명근 수석사무장의 따듯한 마중을 받으며 다시 평택항으로 돌아오는 배안에 올랐다.
그날 저녁 갑판에서는 대룡페리호 소무역위원회 위원장을 뽑기에 앞서 후보자들의 정견발표를 들어 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보따리 대장을 뽑는다구? 누굴 찍어야 혀?”
귀가 약간 어두운 듯 할머니 한분이 계단을 오르며 동료에게 귓속말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크게 들렸다.
갑판 위는 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무역상인들은 갑판을 메우고 후보자들의 한마다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고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1번 후보는 소무역상인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으며 강력한 방패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 했다. 2번 후보는 배안에서 먹고 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고 말해 두 사람 모두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들의 세계는 국가 권력보다 민주화 되어 있었다.(그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나이가 2번 후보 보다 10살가량 많은 1번 후보가 당선됐다)
이튿날 아침 서해대교가 지척에 있는 평택항에 도착하면서 ‘보따리상’들과의 사흘간에 걸친 동행취재는 마무리 됐다.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도 소중한 것이었다. 우선 그들에 대한 굴절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개인적으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그 인연으로 당시에 만났던 몇몇 분들과 그 후로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이런 협박(?)도 예사롭게 하게 된다.
“나 현직에서 은퇴하면 배 탈 거니까, 거부하면 같이 안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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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중에 저도 끼면 안 될까요?? ㅎㅎ.................
경기시인협회 문학기행 갔을 때 저는 이 배에 타고 있었지요. 나중에 한자리 알아봐 줄테니 한잔 사슈 ㅎㅎㅎㅎ
넵...언제 두 잔 사지요..ㅎㅎ
좋은 여행과 취재를 하셨네요, 배를 타고 여행 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고요, 멀미는 괜찮나요?
배가 가는줄도 모르고 갔어요. 워낙 큰배라 롤링이 없지요.
서해는 파고가 낮아서 크루즈 여행을 해 볼만 합니다. 배에서 하룻밤 꿈도 없이 잘 수 있음........백두산 갈 때 단둥까지 배로 가봤는데 멀미 하나도 안 하던데요.....
맞아요. 담번 환율 내려가면 경기시인협회 회원들 배여행 한번 해봐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