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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한국 선종사 개관1
선종禪宗의 전래傳來 한국 불교 역사는 시대적으로, 삼국시대 수용보급기, 통일신라시대 교학발전기, 고려시대 선교양종흥융기, 조선시대 쇠퇴기, 그리고 근현대의 개화확산기로 나눈다.2 이 시대 구분은 선종의 역사와도 대부분 일치하는데, 불교의 전래와 다른 점은 선종은 신라 승이 직접 중국에 가서 수선 전등해 왔다는 것이다.
신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한 이는 법랑法朗으로, 28대 진덕여왕(647~654) 대에 당나라에 가서 중국 선종 4조인 도신(四祖道信, 580~651)의 법을 받고 귀국한다. 그의 자세한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제자 신행(信行, 704~779)에게 선법을 전했다는 사실이「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3에 전한다. 신행 역시 36대 혜공왕惠恭王 765년에 중국에 가서 신수(神秀, ? ~ 706)의 법을 이은 보적普寂(651~739)의 제자, 지공志空에게서 북종선北宗禪을 배우고 돌아와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 머문다. 그는 혜공왕 15년(779)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원효(元曉, 617~686)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달마의『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도 중국 선종과의 교류가 긴밀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 왕자 무상(淨衆無相, 684~762)4은 당에 가서 혜능 이전 중국의 선종 부흥에 기여하였다. 다만 무상이 귀국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전래 초기 신라는 정치적으로 호국불교의 성격을 뛰고 있어 아직 선종을 받아들일 토양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상 외에 입당 귀화한 선승으로는 조안照安, 혜청慧淸, 진각眞覺, 현눌玄訥 등이 기록에 보이는데, 선수행의 여건이 신라보다 당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5
법랑의 선법과 신행의 북종선 역시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끊어졌으나, 신행의 문하에서 준범遵範이 나오고, 준범은 혜은惠隱에게 법을 전해, 이들을 거쳐 지증智證에 이르러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으킨다. 이로써 혜공왕 대 선풍이 일기 시작하여 56대 경순왕에 이르는 약 200년간을 한국 선의 황금시대라 할 만하다.6
선 도입후 한국선풍을 대략 산문선山門禪으로 대표되는 신라선풍新羅禪風,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의 고려선풍高麗禪風, 그리고 조사선祖師禪을 강조한 조선선풍朝鮮禪風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의 선을 통상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하는데, 중국과는 다르게 같은 계열의 법을 받아왔음에도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을 ‘구산선문’이라고 하는데, 가지산문迦智山門, 실상산문實相山門, 사굴산문闍崛山門, 동리산문桐里山門, 사자산문師子山門, 성주산문聖住山門, 희양산문曦陽山門, 봉림산문鳳林山門, 수미산문須彌山門 등이 이들이다.
신라 말 道義의 迦智山門(821년)에서부터 고려 초 兢讓의 曦陽山門(935년)에 이르기까지 115년에 거쳐 세워진 九山禪門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선문이자, 현재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원류이다. 신라 후기에 선법을 개산한 각 산문의 개조들은 거의 모두가 다 曹溪 慧能의 법을 이은 南宗禪[祖師禪] 계열의 洪州宗 馬祖 道一(709~788)의 손제자이다. 고려 초에 개산된 須彌山門과 曦陽山門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7
그러나 신라에는 九山이란 용어조차 없었고, 구산선문이란 용어도 고려 시대에나 등장하였다. 즉, 구산선문은 고려 중기까지 살아남은 산문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즉, 신라시대에는 구산선문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선문이 존재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가 아닌 고려시대에 개산된 선문도 구산선문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8
나말여초羅末麗初의 九山門을 우리나라 선종의 기원으로 하는 주장은 학계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풍부한 金石文과『景德傳燈錄』,『祖堂集』, 禪宗의『高僧傳』등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선종이 나말여초에 기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異論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九山門만이 성립되었다거나 구산문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많은 불합리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초기 禪宗史에서는 九山이란 용어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구산이 성립되었다거나 九山門만이 개산되었다는 그 어떤 전거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9
구산선문의 선사들이 한때 화엄학의 대가들이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의 선종수용은 화엄불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중국 선종을 전등해 오기는 하였지만 “한국불교의 독특한 가풍 속에서 중국 조사선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10 새로운 사조인 중국의 조사선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교학불교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겪기는 하지만 기존의 한국적인 풍토에서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말여초의 선풍은 조사선을 중심으로 선과 교를 아우르는, 심지어는 선의 여러 가지 다른 가풍들마저도 수용하여 융화融和 발전한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11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 신라의 선문은 크게 북산계北山系와 남악계南岳系로 나눈다. 이는「희양산지선대사비명」의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12이란 기록에서 기인하는데, 북산계를 말하는 ‘북산의’는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道義元寂, ? ~825) 선사를 말하고, 남악계를 말하는 ‘남악척’은 남원 실상사 홍척(洪陟證覺) 국사를 말한다.13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는 78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마조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받고, 무려 35년만인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귀국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왕즉불王卽佛이라는 왕권불교가 성행하고 있어 선을 펼칠 수는 없었고 배척받게 되어, 장흥 가지산에서 멀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쫓겨 가 15년간 나오지 않고 은둔한다.14 그의 사상은 세속에 초탈한 선풍으로 선 우의사상인 ‘순선純禪’으로 발전, 사굴산闍崛山의 범일(梵日, 810~889)과 성주산聖住山의 무염(無染, 799~888) 등으로 이어져 북산계를 형성하였다. 반면 남악계 홍척은 도의와 같이 서당지장의 법을 받고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돌아온다. 도의보다 5년 늦게 귀국한 홍척은 도의와는 다르게 국사의 호를 받았으며 흥덕왕興德王과 의강宜康태자의 귀의를 받는 등 지배적인 권위를 유지하며 도시 불교적인 성격을 띄었다.15 그는 선禪과 교敎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하려고 노력하여, 그의 사상을 ‘융선融禪’이라고 한다. 동리산桐裏山의 도선(道詵, 827~898)과 쌍계산雙溪山의 혜소(慧昭, 774~850) 등으로 이어져 남악계를 형성하였다.
순선과 융선의 두 사상은 후에 우리나라 불교계에 있어 두 개의 큰 흐름으로 발전하는데, 융선 사상은 고려사회에 영향을 끼쳐 선교 쌍립시대를 열었고, 순선 사상은 조선시대 조사선풍으로 이어져 한국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편, 산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신라의 산악불교가 고려에 오면 도시불교화 하는데, 초기에는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도 판각되었다.
오교양종五敎兩宗과 조계종曹溪宗 신라와 고려(918-1392) 초기 선과 교를 통틀어 5교9산五敎九山이라고 하고, 더 확장하여 고려 중기에서 조선(1392-1897) 초기에 걸친 중세와 근세 초기 불교 교파를 총칭하여 ‘오교양종五敎兩宗’이라고 한다. 오교양종이란 용어는 오교五敎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성립종파라고 하기보다는 전 불교나 전 불교의 승려들을 총칭하여 쓰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16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오교양종中 오교는 고려시대는「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에 보이는 법상종法相宗, 계율종戒律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으로, 조선시대는『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라 자은종慈恩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종조宗祖는 법상종과 자은종은 진표(眞表, 8세기)17, 계율종과 총남종은 자장(慈藏, 7세기), 열반종과 시흥종은 보덕(普德, 7세기), 법상종과 중도종은 원효(元曉, 617~686), 원융종과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이라고 한다.18 오교양종中 양종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19을 이른다.
숙종 5년(1101) 대각大覺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행적을 기록한 개성開城 흥왕사興王寺「대각국사묘지명」에 중국의 종파나 고려의 산문을 거론하지 않고 모든 선종을 통틀어 ‘선적종禪寂宗’이라고 칭하였는데, 당시는 구산선문 역시 선적종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숙종(1095-1105) 대 의천이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개창함에 따라, 종래의 구산선문을 총칭하던 선적종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하면서 ‘천태종’과 ‘조계종’의 두 선종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禪宗의 각 山門派를 보편적으로 禪宗이라고 칭한 것을 볼 수 있고, 선종의 각 산문파를 禪寂宗으로 통칭하였다가 曺溪宗으로 부르게 된 것에 관하여서는 碑를 건립할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이란 혜조담진慧照曇眞, 원응학일圓應學一, 대감탄연大鑑坦然 등으로 이어지는 僧伽와, 이자현李資玄, 권적權適, 윤언이尹彦頤, 문공유文公裕 등 재가거사에 의한 새로운 선불교 운동을 지적할 수 있다.20
이로써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종전의 오교와 조계, 천태 두 종을 합하여 오교양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조계종명曺溪宗名은 먼저 승가의 실정을 잘 모르는 재가자在家者와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하여 호칭되다가, 승정僧政에 도입되어 일방적으로 승가僧伽의 모든 산문을 총칭總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1 스스로 아홉 산문이 산문이나 교단을 조계종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교양종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억불책抑佛策에 의해 세종 때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 정리된다.
의천과 지눌의 선교화회禪敎和會 고려선풍高麗禪風을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이라고 하는데, 선과 교가 화회하는 과정은 후삼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념통일에 부심했던 의천이 송으로부터 천태종을 가지고 들어와 송도松都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구산선문 중 오산문五山門을 천태종으로 흡수한다. 독자적으로 승과를 실시하는 등 산문선의 승려들을 천태종으로 통합하려 하였다.22
大覺國師 義天은 天台山의 法燈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하여 天台宗을 제창하셨다. 그러므로 거돈사, 신(광)사, 영암사, 고달사, 지곡사 등 다섯 본산의 유명한 學徒들이 王命에 의해 大覺國師 門下에 모여들었고, 그 밖에 곧바로 여러 종파의 유명한 학도들이 3백여 명이나 모였으니 앞의 다섯 문파의 학도들과 합하면 무려 1천 명에 이르렀다……그리하여 앞서 국가의 초창기부터 크게 유행하던 조계종 ․ 화엄종 ․ 유가종과 함께 법식을 나란히 하여 세상에서 四大業이라 일컬었다. 大覺國師 義天이 입적하니, 앞의 다섯 문파는 각각 의지할 본산 절이 있었으나, 오직 義天 門下 제자만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선봉사비음기仙鳳寺碑陰記」)23
의천 문하에 참여한 7백여 명의 학도學徒들은 오산문의 선승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초기에는 천태종 개립開立에 대거 참여하였다가,24 의천이 입적하자 상당수가 본산으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승들을 무리하게 대거 영입한 천태종의 교세는 의천 입적 후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당시 선승에게 영향을 주어 선의 입장에서도 선·교 화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보조국사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으로 나타났는데,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은 고려 후기의 선을 크게 부흥시킨다. 특히 그의 삼문三門25에 의한 독창적인 선사상은 당시 서로 대립해 있던 선과 교를 서로 융화融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에게 誦持를 勸할 때는『金剛經』으로 하고, 立法演義는『六祖壇經』을 本意로 하였으며, 李通玄의『華嚴論』과『大慧語錄』을 새의 두 날개처럼 여겼다. 開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惺寂等持門이요, 圓頓信解門이며, 徑截門이다. 이에 의하여 修行하고 新入하는 者가 많아 禪學의 隆盛함이 近古에 比할 바가 없었다.26
지눌은 처음『육조단경』에 의하여 뜻을 체득하였고, 이통현(李通玄, 635~730) 장자의『화엄론』에서 크게 얻은 바가 있었으며,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대혜어록』을 보고 안목이 열렸다고 한다. 멀리는『육조단경』을 스승 삼고 가까이는『대혜어록』으로 벗을 삼아 조계와 대혜의 심법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다.27 그리고 화엄적 깨달음으로부터 선교일치의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
부연하면 지눌이 대혜의 어록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생애 후반부에『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와『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등 강의와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을 선양하였지만, 한편으로는『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와『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여 화엄적 頓悟돈오의 길도 열어주었다. 선조의 돈오가 화엄의 원돈28이라는 것으로, 돈오가 결코 禪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선과 교가 아울러 서로 보완하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선의 관점에서 화엄을 해석하고 또는 화엄의 관점에서 선을 해석함으로써 교를 선 안으로 포섭”하며 선·교의 갈등을 해소하려 하였던 것이다.29
그러나 지눌의 자각의 체험은 모두 교재를 통해서 이루어졌지 중국에 가서 선종을 직접 수선 전등하지는 않았다.『대혜어록』의 한 구절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간화선을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지눌의 사상체계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고,30 지눌에 대한 평가 또한 제각각인 측면이 있다.
지눌이 간화선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하긴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간화선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삼문三門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들어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만나 화두를 직접 받아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대혜어록』의 한 구절을 열람하는 기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간화선사로서의 지눌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상반相反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탈중국적인 한국 간화선을 정착시켰다는 평가와 하택신회荷澤神會와 규봉 종밀의 선禪을 계승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평가가 그것이다.31
그런 면에서 지눌을 간화선을 처음 소개한 선사라고 단정하지 말고, 그의 선적 사유체계를 ‘보조선普照禪’이라고 따로 보자는 견해도 있다. 그의 사상체계가 종합적이며 독창적이어서, 한국 불교사상사적인 측면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벗어난 독자적인 선사상을 일으킨 선사로 보자는 것이다.32 그것은 진각국사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이 지눌의 선풍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혜심과 지눌의 관계가 수년간에 불과해 지눌의 선풍이라고 보기보다는 혜심의 독자적인 선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33 혜심의 선풍이 오히려 중국 간화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눌과 혜심의 선적 사유체계를 서로 독립하여 봄으로서, 대내외적으로 ‘보조선’과 ‘간화선’을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선법으로 정립하자는 의견이다. 이는 간화선과 지눌 선법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보조선과 간화선을 상호 분리시키는 것으로 하나의 간화선에 두 개의 선맥禪脈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눌의 선법이 조사선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것에 비하여, 혜심의 선풍은 조사선의 정신에 아주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간화선의 맥락은 지눌보다는 오히려 혜심에게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진원지가 표방하는 바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우리나라 간화선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혜심이 된다.34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눌의『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수심결修心結』,『간화결의론』등 저작이 일본의『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될 정도로 그의 사상은 우리 불교사에 우뚝하다. 그의 선풍은 이후 16명의 훌륭한 국사를 배출하여 오늘날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승가 교육과 수행의 전당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각국사 혜심은 화두話頭 1,125칙과 조사들의 염拈 · 송頌 등 어록語錄을 수집하여, 1226년 30권에 달하는 선문공안집『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펴냈다. 그 뒤 제자인 각운覺雲이 347칙의 화두를 첨가하여 1,472칙으로 늘어난다.『선문염송』은 현재 조계종 공식 선공안집이다.
한편 지눌의 선은 그 제자 혜심에 이르러 기본사상이었던 화회사상보다는 지눌사상의 일부였던 경절사상만을 강조하여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하는 경향도 보였다. 이 영향으로 조선시대의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에 교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사선풍이 주류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보조국사 지눌과 그 뒤를 이은 진각국사 혜심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간화선은 800여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변하고 있다.
여말삼사麗末三師 12세기 후반 지눌이 처음 대혜의 간화선을 소개한 이래, 13세기 들어서는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 등 원나라 간화선사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고려 말인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일컬어지는 걸출한 유학승들의 출현으로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는 없지만 14세기 공민왕대 이후 간화선이 불교계에 주류를 이루게 된 데에는 단순히 불교계 내부의 흐름이 아니라 정치적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원나라에 유학하여 전법과 인가를 받은 승려들이 갑자기 불교계의 주도적 인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14세기 이후 왕사나 국사를 역임했던 대표적 선승들은 대부분 기존에 불교계에서 왕사나 국사를 역임했던 인물들의 후계자였고, 많은 경우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중략) 가문이나 산문의 배경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 입원 유학과 간화선사의 인가만으로 고승에 반열에 올라 왕사나 국사로 책봉되는 사례는 (이전에는) 없었다.35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의 소생이 아니었던 관계로 애초부터 고려나 원나라에 강력한 정치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정치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불교계도 마찬가지여서 이전의 산문세력이나 유력가문 출신이 아닌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나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등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불교계를 장악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인 1352년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石屋淸珙(1272~1352)의 印可를 받고 원나라 황실의 귀의를 받아 간화선사로 명성이 높았던 태고보우를 황실로 초빙하여 설법을 들었고, 1356년에는 그를 王師로 책봉하여 불교계의 최고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1361년에는 역시 원나라에 유학하여 平山處林 등 쟁쟁한 간화선사들로부터 전법과 인가를 받고 원나라 조정의 후원을 받았던 나옹혜근을 왕궁으로 초빙하여 설법하게 하고 곧바로 왕실의 원찰인 神光寺 주지를 맡게 하였다. 또 1365년에는 태고보우와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유학하여 석옥청공의 가르침을 계승한 백운경한을 나옹에 뒤이어 신광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36
태고보우는 가지산문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주류는 아니었고, 나옹혜근 또한 사굴산문 출신이었지만 산문의 주류는 아니었다.37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역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대표적 산문의 주류적 흐름을 계승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38 이런 면에서 기존 산문에서는 간화선 수행과 함께 전통적인 선수행도 병행하였던 반면에, 이들은 기존 산문의 전통에서 자유로워 간화선 우월성 선양에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다.39 간화선이 각광을 받으면서 태고보우 선사의 법은 환암幻庵, 구곡龜谷, 벽계碧溪, 벽송碧松, 부용浮蓉으로 이어져, 현재 한국의 승려들은 부용의 두 제자인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법손이라고 할 수 있다.40
고려 말 정치적인 이유와 맞물려 간화선이 흥성하였지만, 조선시대 간화선은 다시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17세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활약으로 잠시 부활하였다가,41 20세기 들어서야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의 등장으로 다시 간화선 전통이 부활하였다. 이후 간화선 전통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정리하면 보조지눌이 선풍을 일으켜 조계종의 기초를 세웠지만, 태고보우, 백운경한, 나옹혜근 등 중국유학승이 임제종을 실제로 전한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명맥이 희미해진 것을 근세 경허 선사에 이르러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임제종은 양기방회의 양기파와 황룡해남의 황룡파 중 양기파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양기파는 대혜종고의 대혜파와 호구소룡의 호구파로 갈라지는데, 그 중 호구파의 법맥을 받아온 고려 말 나옹을 거쳐 청허를 주류로 내려오다가 한동안 암흑기를 보낸 뒤, 근세 경허鏡虛에 이르러 다시 문풍을 진작시키게 된다.42
경허 선사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는 있지만, 깨닫고 나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였으니43,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임제종은 아니다. 성철 스님이『한국불교의 법맥法脈』에서 밝힌 한국 조계종의 법맥은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 심법까지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중국 임제종 법맥을 이은 태고보우를 종조로 내세우고 있지만, 경허 선사도 성철 스님도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 또한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문제는 근 · 현대의 간화선사에게 나타나는 ‘법맥에 의한 한국선의 정통성 찾기’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박해당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입실면수入室面授의 사자상승법에 따르면 모든 법통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장 근대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경우만 보더라도 스스로 깨달았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조계종이 선종이 아닌 선교를 통합하는 회통적 성격의 종단이라 한다면 이 같은 법통설에 대한 논란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조계종의 종지 종풍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44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과 조사선 고려 말에 오면 선의 우위성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1206~?)은『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다른 나라에는 없는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등장시켜 조사선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소위 범일45이 선과 교의 뜻을 밝히면서 말씀하셨다는 ‘진귀조사설’이다. 진성여왕이 범일국사에게 선·교의 뜻을 물었을 때 대답한 말 중에 나온다.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설법을 하였다. 그 뒤에 성을 넘어 출가하여 설산 중에서 공부를 하다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는데 이미 깨달은 이 법은 지극한 깨달음이 못되었다. 그래서 수십 개월 동안 다시 유행을 하여 진귀眞歸 조사를 심방尋訪하고서 현묘하고 극진한 사무친 도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46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고, 뒤에 진귀조사를 만나 얻은 조사선 경지가 참된 깨달음이라는 내용이다.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徹底시켰다는 지금 보면 다소 허황된 이야기다. 천책의『선문보장록』에는 이 이야기를『달마밀록達摩密錄』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조선 중기 청허는『선교석禪敎釋』에서『범일국사집梵日國師集』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석가가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조사선의 입장에서 기술된 듯한데, 부처와 조사를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는 데에는 의의가 있지만, 이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또한 청허의『선교석』으로 강조되면서, 조선 후기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47의『선문수경禪文手鏡』에도 이어져 150년간의 선문논쟁으로까지 비화飛火하였다.48
보물 제86호 굴산사터 당간지주
탑의 시대에서 부도의 시대로 일반적으로 인도 불교를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 불교로 나누는데, 그중 원시불교, 부파불교 시기에 형성된 경전을 원시불전49이라고 하고 대승불교시기에 형성된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등을 대승경전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아함경전과 대승경전 모두 석가모니의 설법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과 성질은 서로 달라 전혀 다른 불교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모두 대승불교도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판단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50이 제기된 바 있다.
원시불전은 실로 그 내용이 소박하고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들의 진지한 자세, 그리고 그에 대한 붓다의 교화와 가르침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중략) 확실히 대승경전은 아함경전에 비해 사상이 깊고 넓음을 느낄 수 있다. 대승경전은 붓다의 언행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승비불설(대승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이라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다.51
대승경전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직접 불법을 실천하여 정각을 이룬 사람이나, 깨달음을 직접 체험한 무수히 많은 무명의 부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의경전僞疑經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타의 설법인양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부처님 이름으로 간행된 무수한 부처와 보살들의 이론서인 셈이다.
소위 僞疑經典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불타佛陀의 說法으로 가탁假託하여 표현한 僞造經典을 말한 것인데, 그것은 아직도 인간이 인간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다름 아닌 권위주의시대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52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대승불교의 성립과 그 발전의 역사는 단순히 인간이 ‘부처님을 신봉한 역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부처가 된 역사’를 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종래의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에서 오직 석가모니불 한 분만을 부처님으로 신봉하던 입장과는 달리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출현되고 있는 특성을 보인다.53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을 표방하였다면, 선종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어록語錄’이라는 장르를 출현시킨다. 남종계의 하택신회荷澤神會의 노력과 마조계의 선불교 운동으로 전개된 조사선은, 조사들을 부처보다도 우위에 두면서 부처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조사들의 언행을 모은 어록이 등장하자, 수·당대에 걸쳐서 많이 만들어지던 위의경전僞疑經典의 제작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동안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지켰으나, 이후 불상이 만들어지고 우상화되면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종은 부처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본래가 부처님이라고 선언하고 나아가 부처님을 능가할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는 보통명사였던 부처님이 언제부턴가 고유명사가 되어 떠받들어지다가, 다시 보통 명사화되고 복수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과정은 불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54
국보 제21호 석가탑
종래의 전통적인 천태종, 화엄종 등 대승불교, 교상불교敎相佛敎의 입장에서 볼 때 선불교는 중국불교의 이단으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부처님이 원했던 진짜 불교로 되돌아 온 셈이다.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각 산문별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맥이 이어지면서 불상이나 탑의 숭배보다는 조사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어 많은 부도55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던 탑과 같이 조사들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56 문헌상으로는『삼국유사三國遺事』권4「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와 권5「혜현구정조惠現求靜條」에, 7세기 전반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법사57의 부도와 백제 혜현의 부도를 각각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어 늦어도 삼국시대 말에는 부도가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 원광법사 부도
초기에는 원광법사 부도58처럼 탑의 형식을 빌려 조성되다가 이후 부도의 형식이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초의 부도 형태는 선종을 처음 소개한 도의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439호 진전사터 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부도 중 가장 오래된 진전사터 부도는, 기단부와 중대석은 탑의 형식을 그대로 하고 상대석의 연꽃받침, 몸돌 그리고 지붕돌은 팔각으로 구성한 부도의 초기형태를 보여준다. 아무리 깨달으면 부처라지만 탑과는 구별한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제439호 진전사터 부도
이 부도에서 발전한 형식이 통일신라말 성행하였던 전체가 팔각인 팔각원당형이다. 흥법사터 염거화상부도가 그 팔각원당형의 완성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국보 제53, 54호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 북부도는 그 모양이나 섬세함, 화려함에 있어 팔각원당형의 극치를 이룬다.
국보 제104호 (傳)흥법사 염거화상 부도와 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고려로 접어들면서 부도는 정교함은 다소 떨어지지만 규모는 커지는데, 장중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담백한 형태를 보인다. 흥법사터 진공대사 부도, 고달사터 부도와원종대사 부도가 대표적인데, 기단은 방형으로 바뀌고 중대석은 원형으로 두터워지면서 그 위에 귀부에서 따온 용과 거북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후 여러 가지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는데, 고려 후대 법천사터 지광국사 부도에 이르면 팔각원당형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면 방형으로 변하였고 화려함은 극에 달한다. 국보 제4호 고달사터 부도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 부도
이후 그때까지 국사나 이름난 고승들만 조성되던 부도가 일반 스님들까지 유행처럼 번지면서 그 화려함과 장대함은 줄어들었고 인도의 원탑 양식으로 변해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로 자리 잡게 된다.59 보물 제1346호 백양사 소요대사 태능(太能, 1563∼1649)의 부도와 부도전
근대 한국 불교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았던 불교 종파들이 타의에 의해서 통합되다 보니 종파뿐 아니라 선교 양종의 구분도 없어져 한국불교를 “통불교”라고 한다. 그 이면에는 초토화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는데, 조선시대 불교는 ‘승과의 폐지’와 ‘승니의 도성출입금지’ 등으로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 억압과 천시는 출가자의 급감으로 나타났고, 자연히 승려의 수준 또한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학敎學의 부진, 교단의 쇠퇴 등으로 말미암아 상층사회에 포교의 기반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의례불교만이 남아 성행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교단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에 이르러, 여말선초 10만 명에 달하던 승려 수가 1909년에 이르면 6천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급감하게 된다.60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비롯된 거사불교의 흐름이 개화사상가에게 이어지고, 개화사상과 더불어 유교를 대신하여 불교가 부각되면서 종단조차 없이 명맥만을 유지하던 불교계는 은둔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화를 고민하게 된다.61 출가 수행자에게는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바로 불교의 혁신이자 도약이었고, 결정적으로 1895년 시행된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은 한국 불교의 부활을 의미하였다.62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적 특수성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을 도리어 불교 중흥의 계기로 받아들여, 식민지 시기 급격히 친일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63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마시키고자 일본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정책에 호응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진종 대곡파와 일련종을 필두로 일본불교의 주요 종파들이 경쟁적으로 조선 포교에 나서게 된다.64 이후 정토종, 조동종, 임제종 등이 가세하여, 1910년 한일 합방시 이미 각 종파의 포교소와 출장소가 68개소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종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원종과 조동종 등은 한국불교를 그들과 통합하려는 시도도 하였는데, 이에 자극 받아 석전 스님과 만해 스님이 한국 불교는 임제종 정통이라 통합 할 수 없다는 “임제종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진출은 우리 불교를 발전시키려는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자각하는 계기를 준 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서구열강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독립을 보존하고 동양의 평화와 질서를 아시아인 스스로 확립하자는 ‘아시아 연대론’이 대두 되고 있었다.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 삼국 중 한 나라가 망하면 다른 나라의 존립도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불교라는 종교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국가가 힘을 합쳐 서구열강과 그들의 기독교에 맞서야 한다는 연대론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구 열강을 등에 업고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연대론은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일본불교계의 조선포교는 정치적 목적뿐 만 아니라 조선 불교의 발전을 도모한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또 서구세력과 기독교에 맞서기위한 종교적 연대감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65
해방 후에는 제국주의 일본에 동조하여 민족의식을 저버렸다는 반성과 함께, 왜색 불교를 청산해야 한다고 일본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게 된다. 이로 인해 대처·비구의 싸움 등 혼란이 야기되었고,66 많은 학승들이 쫓겨나고 일본에서 출가하고 배운 승려들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어야 했다.67 기존 종단을 정화한다고 종조로 모시던 태고 보우를 조계종은 보조 지눌로 바꾸고 태고사를 조계사로 명칭을 변경하였는데,68 만암 스님 같은 분은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하시면서 반대하시다 종정 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독립운동가로만 잘 알려져 있지 그가『조선불교 유신론』이나 재래식 경전을 현대식으로 바꾼『불교대전』을 써서 조선 불교를 개혁하려던 스님으로서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일본에 다녀 온 후 말년에「승니의 가취嫁娶」라는 글을 쓰고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은 조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일본 학자는 한국불교의 특징을 유학승에 의해 전해져 뿌리내린 구산선문의 다양한 불교 형태가 비교적 큰 변화 없이 유지 보존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서 한국의 선종을 관찰함으로써 당나라 시대의 선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하였다.69 단편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오랜 동안 정체되어 있는 우리나라 불교의 단면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불교는 구산선문의 선풍과 더불어 보조지눌의 선풍도 희미해져 수행의 구심점을 잃고 인도 티베트 불교 등이 유행하는 등, 좀 심하게 얘기하면 중국 선종형성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참고한 책과 글
1) “All history is contemporary history.” - Benedetto Croce,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이탈리아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크로체의 말이다. “모든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 자체라기보다는 현재의 관점에서 불러내고 해석한 과거”라는 의미이다.
2) 노권용,「석전영호 대종사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
3) 보물 제137호 지증대사적조탑의 비명. 희양산문 개산조 지증(智證道憲, 824∼882)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다.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내린 시호이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이었는데 키가 8척이나 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분”이었다고 한다. 신라 헌강왕 5년(879) 경북 문경 희양산에 봉암사를 창건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波를 열었다. 참고로,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은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이른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이다. 비문에는 신라시대 선종의 유래 과정과 지증 대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4)『정중무상평전』에 의하면, 저자 최석환은 2001년 8월 무상이 중국 오백나한 중에 한 분임을 밝혀내고, 그해 10월 허베이성 백림선사에「조주고불선차일미기념비」를 건립하여 마조가 무상의 제자임을 공식화하였다고 한다. 중국 오백나한은 석가모니부터 중국 제공(濟公, 1148~1209)선사까지 인도와 중국 성인들을 망라하고 있는데, 그중 선승으로는 307위 달마존자와 455위 무상존자 둘 뿐이다. 무상공존자無相空尊者는 신라왕자로 알려진 신라승 무상으로 중국 초기 선종을 이끌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신라 구산선문의 초조가 되는 것이다. (최석환 지음,『정중무상평전』(茶의 세계, 2010) & 변인석 지음, 『정중 무상대사』(한국학술정보(주), 2009)).
5)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 165.
6) 이희익,『선禪과 한국문화재韓國文化財』 p. 130 &『선禪과 과학科學』 pp. 84~85.
7) 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263. 봉암사는 신라 말 지선에 의해 창건되었고 고려 초 긍양(兢讓, 878~956)에 의해 다시 창건되면서 희양산파의 중심 사원이 되었다.
8)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14~15 & 77~78.
9)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
10) 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263.
11)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조계종사』(서울: 조계종출판사, 2006) pp.131~133.
12)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 후 구도승求道僧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김益州金 진주김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谿寺의 혜소慧昭, 신흥언新興彦, 용□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등인데, 보리菩提의 종사宗師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남동신,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한국고대금석문 Ⅲ,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p. 174~211.)
13)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14~15 & 77~78.
14) 도의선사의 사상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廉居和尙, ? ~844)에 전해지고,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계시던 염거화상의 가르침은 보조 체징(普照體澄, 804~880)에게 전해진다. 보조선사는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여기에서 그 법을 펴니, 이것이 구산선문 중 가장 앞에 나오는 가지산파의 개창 내력이 된다.
15) 홍척은 신라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을 개창한다.
16) 한기두韓基斗,「韓國佛敎의 五敎兩宗 問題」『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20~28.
17)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속성은 정씨(井氏).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고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았다. 어느 날 사냥을 하다가 논둑에서 쉬면서 반찬으로 쓰려고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두었다. 그리고는 산에 가서 사슴을 쫓다가 다른 길로 집으로 돌아와 개구리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다음해 봄에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듣고, 문득 지난해 일이 생각나 가보니 개구리들이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었다. 진표는 탄식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고는 출가하여 계법(戒法)을 구하기로 하고 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숭제(崇濟)에게 가서 배움을 청했다. 숭제는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전하고 〈공양차제비법 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미륵보살·지장보살 앞에서 참회를 하고 간절히 구하여 계를 받아서 세상에 유전하게 하라고 했다.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변산 부사의암(不思義庵)에서 3업을 닦으며 삼칠일(21일) 동안 기도하여 지장보살의 현신수계(現身援戒)함을 얻고, 다시 영산사(靈山寺)에 가서 전처럼 기도하여 미륵보살에게서 〈점찰법 占察法〉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았다. 그뒤에 금산사를 중창했다. 경덕왕이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시주하자 그것을 여러 사찰에 나누어주었다. 그뒤 금강산에 가서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여 7년 동안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부사의암에 돌아갔다가 고향으로 가 부친을 뵙고, 진문(眞門) 대덕방(大德房)에 있었다. 속리산의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이 찾아와서 계법을 간청하자 가사(袈裟)·발우(鉢盂)와 〈공양차제비법〉·〈점찰선악업보경〉 및 간자 189개를 주며 교법의 유포를 부탁했으며, 속리산의 길상초(吉祥草) 나는 곳에 길상사를 창건하게 했다.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죽었는데, 제자들이 그대로 두고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지자 비로소 흙을 덮고 돌을 세워 표시했다.
18) 김영수金映遂,「五敎兩宗에 취하야」,『震檀學報』第36號. (앞의 책, pp. 20~21에서 인용)
19) 천태종은 원래 중국에서 창종된 것으로 교종의 하나였으나 고려에서는 선종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20)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
21) 曺溪宗의 성립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는 구산문이 총합하여 조계종이 되었다는 설과, 둘째로 보조지눌에 의한 조계종 성립 설, 셋째로 통시대적 조계종 설이다. 그런데 승가내부에서 스스로의 교단이나 산문을 조계종이라고 칭한 경우는 1172년(明宗2)이후부터이고, 고려 중후기를 통하여 수회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1172년(명종2)에 건립된 大鑑坦然의 비와, 1295년(충렬21)에 건립된 普覺一然의 비와 1313년(충숙원년)이후에 건립된 寶鑑混丘의 비에서 나타나고, 조계산 수선사의 중창기의 曺溪도 조계종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탄연의 비에 나타나는 조계종은 조계종 하에 굴산을 두고 있으므로, 9산문이나 오산문 등 모든 산문을 조계종 하에 두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문손門孫들에게 지속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사칭私稱으로 끝나고 있다. 일연의 비와 혼구의 비에서도 조계종명을 사용하고 있으나 체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즉 “華山曺溪宗麟角寺迦智山下”라고 한 것은 “曺溪宗迦智山下華山麟角寺”라고 했어야 옳을 것이고, “曺溪宗慈氏山瑩源寺”라고 한 것은 “曺溪宗迦智山下慈氏山瑩源寺”라고 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한 종명도 公的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私的으로 칭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 조계종은 승가의 산문이나 종파를 나타내는 명칭이 아니라, 승가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가자와 사대부들에 의하여 호칭되다가, 승정에 도입되어 일방적으로 승가의 모든 산문을 총칭하는 용어로 잘못 적용된 것이라는 것이다.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에서 요약)
22) 김영수金映遂,「오교양종에 대하여」『震檀學報』第36號 (『고달사지 발굴 그리고 전시』(여주군 향토사료관 발행) 각주에서 인용).
23) 이영자李永子, 東國大 名譽敎授,「大覺國師 義天 이후의 國淸寺와 法眷考」, 운문사雲門寺「원응국사비문圓應國師碑文」에도 총림의 납자들 가운데 천태종으로 들어간 사람이 10명 가운데 6, 7명이 되었다고 한다.
24) 앞의 논문. 義天에게 입문한 주요 문하생들은 주로 선종의 오산문의 고승들이 초기에 7백여 명이나 대거 참여하였고, 의천 문하에 직접 참여한 학도도 3백여 명이었다. 이 오산문은 대개 중국에 유학하여 천태종과 인연을 맺은 고승들이 주석하던 사찰들로, 이들 사찰의 고승들은 대개 중국에서 법안종法眼宗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특히 居頓寺 智宗과 靈巖寺 英俊의 행적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25) 삼문三門은 고려의 유학자 김군수金君綏가 지은 지눌스님의 비문에 등장하는 말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을 말한다. 이는 보조선의 수행법으로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성적등지문이라고 하고, 화엄사상을 도입해 원돈신해문을 세우고 선지를 내세워 경절문을 세운다는 뜻이다. 화엄의 원돈은 선종의 돈오와 통한다.
26) 최성렬, 조선대「牧牛子 知訥의 看話禪 受容과 그 態度」(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06.
27) 이능화李能和,『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종익李鐘益,『조계중흥론曹溪中興論』 그리고 퇴옹성철退翁性徹,「태고종통론太古宗統論」『한국불교의 법맥』등에서 인용.
28) 「원돈」은 원만돈족圓滿頓足의 뜻. 이 일상적인 마음에 모든 법을 결여함이 없이 원만히 갖추어, 곧 깨달아 성불하는 가르침.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이리 부른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은 바로 이런 도리를 나타낸 말이다.
29) 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266~268.
30) 성철스님 법어집,『백일법문百日法門』, 장경각. 성철 스님은 이 책에서 지눌의 사상이 저작에 따라 달라진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31)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06.
32) 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269~270.
33) 혜심의 지눌에 대한 관계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사법관계는 아니다. 혜심의 도력을 알아본 지눌이 두 차례의 선문답을 통해 그를 인가하였을 뿐이다. 혜심은 31세 되던 해인 1208년 지눌이 법을 계승하고자 했지만 굳이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깊이 은거해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宗門의 명예를 초연히 버리고 心要를 닦는 수도자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은둔한지 2년 후인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주위의 권유와 왕의 칙명으로 부득이 수선사 제2세가 되어 지눌의 법석을 이어 開堂하고 교화를 편다. (앞의 논문집, p. 260)
34) 앞의 논문집, pp. 277~278.
35)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2.
36) 앞의 논문집, pp. 141~142.
37) 태고는 집안도 한미하여 개인적인 후원자의 원찰이나 사가에서 수행하였다. 그것은 인가를 받고 돌아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고향에 있는 작은 암자에 머무른다. 나옹 역시 승과에도 합격하지 못하였고, 스스로 공부하다 깨달음을 얻은 후, 1347년 입원入元해 指空과 여러 간화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다.
38) 백운경한은 1351년 54세의 나이에 원나라로 가서 지공指空과 임제의 18세 법손法孫인 석옥청공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하였던 경한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본으로 알려진『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술하였다.
39)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9.
40) 퇴옹성철退翁性徹, 「태고종통론太古宗統論」『한국불교의 법맥』, 장경각.
41) 중종이 승하하자 보우대사는 문정왕후에게 불교중흥책의 하나로 승과僧科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린다. 문정왕후는 명종 3년(1548) 보우대사를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수진대사를 봉선사 주지로 취임케 하고, 명종 7년, 선교禪敎양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를 실시하였다. 훗날 임진왜란의 구국성사들인 서산대사는 1回 합격(명종 7年, 1552)하였고, 사명대사는 4回 합격(명종 16년, 1561)하였다. 조선시대 유명한 선사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을 드는데, 이들이 나온 시기와 승과의 부활이 맞물린다.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승과가 폐지되므로 서 더 이상의 선사는 나오지 않았다.
42) 불교영상『현대 고승열전 평전』에서 인용 요약.
43) 경허 스님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셨지만, 이후 “나로서 용암 장노의 법을 이어 그 도통을 정리하고, 만화 강사로써 나의 수업사를 삼음이 옳다”하면서 청허의 12대손이며 환성의 8세손이라고 법맥을 정리하셨다. (『현대 고승열전 평전』불교영상, p. 15)
44)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10.
45) 신라의 선승禪僧으로 성은 김 씨이며 계림 출신으로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흥덕왕 6년(831)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고승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진리를 깨닫고 6년 동안 그를 섬겼다. 명주도독 김 공의 요청으로 강릉에 굴산사를 세우고 40여 년간 주석하면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열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국사성황신으로 대관령국사성황사에 모셔지고 있다. 한편, 범일은 마조도일의 제자 염관제안鹽官齋安의 제자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조開祖이다. 그의 이력을 감안한다면 진귀조사설은 범일이 스스로 저술한 것이 아니라, 400여년 뒤에 천책이 조작하였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46) 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唯我獨尊 後踰城住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遊行數十月 尋訪祖師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 乃敎外別傳也 (『선문보장록』은 진정국사 천책이 1293年에 저술)
47) 백파긍선은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의 승려로, 12세 때에 “한 자식이 출가出家하면 구족九族이 모두 천상天上에 난다”는 말을 듣고서는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에서 선은사禪隱寺에 들어가 시헌詩憲 스님에게 머리를 깎았다. 23세 때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의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을 스승으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율종律宗의 계맥系脈을 이었다. 그 뒤 평북平北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서 수행하다가 도를 깨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선법을 공부하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며 그 이름을 크게 떨쳐 ‘호남湖南 선백禪伯’으로 불렸다. 50세 때『선문수경』을 지어 당시 불교계에 일대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8)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546~547.
49) 원시불전으로는 남방에 전해진 <상좌부계 5부(빠알리어 성전)>와 서역,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으로 전승된 <현존 4아함(한역 4아함)>이 있다.
50) 그 대표적인 것이 18세기 일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대승비불설이다. 나카모토는 대장경을 간행하는 사찰에 들어가서 업무를 돕게 되는데, 대장경의 판목인쇄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불경이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점차로 복잡한 것으로 변해갔다는 이른바 ‘가상설加上說’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하여『슛쵸오고고(出定後語)』라는 책으로 써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 입적 후 500년경부터 차례로 만들어진 것으로 인위적인 위경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설론의 시발점이다. 그는 아함경 단 1개만이 부처님의 불경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대승비불설론에 대해 일본 내에서 치열한 종교적 논쟁이 벌여졌고, 나카모토는 마구니이고 미친 자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현재 일본 불교학계는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 정론임을 인정하고 있다.
51) 구모이 쇼겐 지음, 이필원 옮김,『초기불경 숫타니파타로 읽다, 붓다와의 대화』 p. 35.
52) 鄭性本 著,『中國禪宗의 成立史硏究』 p. 24.
53)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86.
54)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 p. 43에서 인용요약.
55) 부도는 부다(Buddha)에서 그 어원이 왔다고 하는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과는 달리, 고명한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조형물이다.
56) 카페 <절터 踏査紀行>「남한강 유역, 폐사지기행, 부도 따라 가는 여행」참조.
57) 원광법사는 속성이 박씨 또는 설씨로 80세 혹은 99세를 살았다고 한다. 589년에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을 하여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쳤기에 중국의 당『속고승전』에 전기가 실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11년간의 유학 후 600년에 귀국하니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진평왕도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인처럼 높이 받들었다고 한다. 귀국 후 주로 가실사(청도 운문사 근처의 절)에서 기거하다가 귀산, 추항에게 화랑 세속오계를 가르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주역을 담당한 화랑들에게 정신적, 도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생활지침도 제공하였다. 그리고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를 지을 정도로 불교사상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다. 말년에는 왕이 손수 의복과 약물을 마련해 주었고, 637년 신라 진평왕 52년에 황룡사에서 임종하자 왕이 장례도구를 내리어 임금의 장례와 같이 하였으며 명활산에 장사지내고 삼기산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금곡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부도의 일부가 파괴되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58) 경북문화재자료 제97호 원광법사 부도, 높이 2미터 정도로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1층 몸돌 각 면에 사각형의 문비를 새기고 파내어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좌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4단 층급받침이다.
59) 석종형 부도로 가장 오래된 것에는 신라 말기의 태화사지12지상부도를 비롯하여 금산사석종, 신륵사보제존자석종(1379), 화장사지공화상탑 등 고려시대의 예가 남아 있다.
60) 서재영,「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60.
61) 한상길,「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53.
62) ‘승니 도성출입 해금’에 대해 일본 승려 사노의 활약이라는 설과 내무 대신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해제 된 후에도 완전히 철폐된 것은 몇 년 후로 이능화는 단발이 보편화되면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구별이 모호해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해금은 사노의 건의와 개화파의 결정으로 단행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상황의 변화, 개화파와 연결된 불교계의 자각, 기독교의 팽창에 대한 한일 불교계의 위기의식, 유교적 정치이념의 쇠퇴, 외세에 맞서 불교를 신장시키고자 했던 조정의 의지, 민권의식의 향상 등과 같은 복잡한 인과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재영,「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63~94. & 강석주 외,『불교 근세 백년』, 민족사 (2002)).
63) 류승주,「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 불교」『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98~119.
64) 앞의 책.
65) 서재영,「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76~86.
66) 동국대학교 석림동문회 기획 편찬,『한국불교현대사』pp. 18~37.
67) 청담스님도 일본 병고현 송운사에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효봉 스님을 길러낸 석두 스님이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대처했다는 이유로 해방 후 그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때의 분위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68) 조계종은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조계산에서 이름을 따 조계종이라 하였는데, 원래 불교 선종 교종 종파와는 관계없이 이름만 빌려온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과 함께 해방 후 혼란기 때 등록된 단체이다. (김용옥,『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1989).
69)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 p. 279. |
첫댓글 선종사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에 대한 정리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일본사 선종 개관사가 되겠군요.
뿐만 아니라, 선종사가 현대에 이르러 명상 혹은 수행을 장치로 해서
미국, 구라파 등 세계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가 등도 생각 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사진 작업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원래 글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요사이는 글 쓰는 것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언제 한 번은 쉬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내려 영하산방에서 바라보는 가은산은 온통 하얀데, 햇볕이 생각보다는 따뜻합니다.
봄 준비로 시끌시끌한 모습을 들으며 느끼며 또 한번의 찬란한 봄을 기대해 봅니다.
전원 합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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