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 카페에 올린 글들을 다시 정리를 하는 것은 제 생전에 현재적인
영감으로 말씀이 이루어진 실재를 첨가하여 다음 세대에 성경을 보는 참고서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은근히 조급해 지는 마음으로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욥기는 20 여년 전 선교지에서 선교사들과 교민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편집한
내용입니다. 먼저 들어가는 말씀으로 신실한 믿음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신실한 믿음이란 실제로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체화 embody) 진실이란 참인 진리가 실제(true)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는 신실하시고 때로는 진실하시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참 신앙은 신실하시고 진실하신 주님께로부터 계속 은혜를 공급받는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이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예수 믿고
말씀을 순종하며 무엇을 해야만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그야말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일(job)에 묶여 있느라고 진리를 알아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비밀을 놓치고 그만 욥(Job)과 같은 수준이 되고 맙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주님의 빚진 자 되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욥처럼 나의 갈 길을 그가 아시나니 연단하신 후에 정금 운운하면
안 됩니다. 그건 교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이들이 흡사 새마을 사업에 동원 되듯
일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다 생기는 문젭니다.
얼마가지 않아 그만 냇가의 조약돌 같이 탱글탱글하고 무미건조 해지고 맙니다.
정상적인 신앙은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주님의 빚진 자 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것만 눈물만 솟구치네‘ 이렇게 되어야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고후5:14)고 합니다.
이는 그 사랑이 우리를 포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
사랑에 눌리는 일 외에는 다른 빚은 지지 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을
의무로 하지 말고 책임감으로 이를 악물고 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의 일을 부역에 참여하듯 하므로 하나님께 빚진 마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가 받을 빚이 있는 채권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요즘은 교인들이 마지 못해 교회에 참석해 주는 듯한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하나님이 자꾸 자신을 누르고 계신다’고 불만을 합니다.
‘나는 별로 흠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게 없는데 괜히 하나님이 심술을
가지고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냅니다. 사실 경제적이나 질병 등의
고난을 당하는 분들이 은근히 하나님의 불공평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목사가 암이 걸렸을 때에 왜 하필 접니까? 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담 안에 속해서 사망 아래에 있는데 본인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 거룩하게 되는 법을 알게 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얻도록 징계를 하고 있음에도 여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 정말 이렇게 하시렵니까?
정말 이러실 겁니까? 나를 이렇게 욕보이면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게 뭡니까?
나를 가난하고 초라하게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겠어요?’하고 나옵니다.
일(job)을 중요시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욥(Job)의 신앙의 트랩에 걸리고 만 겁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늘 은혜의 빚과 사랑의 빚을 지고 그 분 앞에 찍 소리
못하고 무익한 종이오니 하고 주인 앞에 엎드리는 강아지 같은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
그 엄청난 거룩하신 사랑 앞에 우리 무슨 소리를 낼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벌레만도 못한 나를 찾아오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람들 중에 ‘예수님 도와주세요. 예수님은 참 좋은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힘,
나의 소망입니다’고 입에 달고 외치다 보면 예수님이 인간보다 한 두 차원 높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무흠하신 출중한 수호신 정도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죄인의 모습인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들 중에 최고입니다.
그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요? 아니지요.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
본체의 영광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주재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공동화장실의 똥통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낮아지신 겁니다. 그보다 더 낮아져서 나를 구원하시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이 되면 참으로 Amazing grace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하고 어처구니없는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랑의 빚을 진자는 그 빚으로 계속해서 행복합니다.
세상의 빚은 지면 질수록 불행해 지는데 사랑의 빚은 지면 질수록 행복해집니다.
부모로부터 자녀들이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우리 부모의 빚을 갚을 수 없어 하고,
산소 앞에서 나는 부모의 빚을 다 갚을 수 없어 탄식하고 운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과 나를 다시 살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따라 아버지께 나아갈 때마다 언제나 영원한 생명을 주심은
내가 청구한 구원이 아닙니다. 난 그리스도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경건치 못했습니다.
아니 주님에 대한 감각도 없었습니다. 1,000촌도 넘는 이방인 중에 이방인이었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선인을 위해서 죽은 이가 혹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누가 대신 죽어 주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요. 맹세하신 약속에 대한 최후의 수단이십니다.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신 겁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전시하셨습니다(롬5:8) 그 사랑 앞에 우리가 무슨
일을 좀 하고 헌금을 제법 했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일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외감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데 까지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만 입만 나불거리며 높아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많이 진채로 그 사랑 앞에 경외감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주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항상 나를 떠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촉촉하게 심령을 적셔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욥기가 영어로 "book of job"인것을 오늘 공부 했습니다.
저도 욥기를 읽으면서 소문자로 job이 아닌 대문자 JOB 로 거듭나길 원합니다. 즉 책임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야다) 사랑의 존재로서 말 입니다.
욥기 강론이 기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많이 진채로 그 사랑 앞에 경외감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주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항상 나를 떠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촉촉하게 심령을 적셔 주시어 은밀히 그 사랑안에 머물게 하십니다.'
아멘~~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하나님께 감사하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이 좁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무들이 계시기에 오늘도 새벽을 깨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