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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김 만 옥
의령군 가례면 우체국장과 가례면 시외버스표 판매소장은 다 같이 내 사촌들이다. 그들은 그 고장에서 그냥 국장님과 소장님으로 불리어진다.
우체국장이, 그것도 벽지 별정 우체국장*이 국장님으로 불리어질 때는 좀 거창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들어 넘겼는데 버스표 판매소장이 소장님으로 불리어질 때는 나는 한참 동안 말귀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처음 그 호칭을 들은 자리에는 마침 경찰관 파출소장까지 같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불리어지는 소장님은 모조리 다 경찰관 파출소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니까.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확인한 결과 사촌의 구멍가게가 시외버스표 판매소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사촌 역시 소장님으로 불리어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 맞다. 판매소장도 소장은 소장이니까.
국장과 소장과 나, 셋이서 한자리에 모일 때도 그렇지만 둘 중에 어느 한 사람하고만 같이 있을 때도 나는 으레 집채만 한 배를 안고 온 집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세 며느리와 그 세 며느리의 시어머니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건 우리 세 사람이 한 달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났기 때문이다. 여자인 나를 가운데로 국장은 한 달 먼저 소장은 한 달 나중에 태어났으니 그 어머니들이 배부른 시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을 게 아닌가? 동시에 배부른 세 며느리를 거느린 우리 할머니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참으로 몸과 마음이 분주했을 것이다. 배부른 며느리 하나만을 보아도 저 태산 같은 짐을 우짤꼬 싶을 텐데 세 며느리가 동시에 배가 불렀으니 그 답답하고 무지근한* 심정은 오죽했을까?
아버지의 동기는 형제 네 분과 고모님 한 분 해서 오 남매인 데다 어느 한 분도 자식 귀한 줄 모르게 생산들을 하셨으니까 내 사촌의 수는 꽤 많은 편이지만 그 많은 사촌 중에 유독 우리 셋이 특별한 유대감을 갖는 데는 그런 연유가 있다.
지난겨울 그날, 소장 집에서 소장 내외와 내가 같이 있었는데 가례면 경찰관 파출소장까지 끼어들었으니 나는 두 소장님과 같이 있었던 셈이었다.
자연 우리 네 사람은 그날 그 자리에 없는 국장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다. 국장 집은 소장 집에서 읍내 쪽으로 다리 하나 건너에 자리 잡고 우체국과 살림집을 겸하고 있다. 읍내에서 가자면 우체국이 먼저고 다리 하나 건너야 소장네 잡화가게가 있다. 우리가 어릴 때 자라던 읍내 서동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신작로를 따라 5리 밖에 빤히 보이는 곳이 가례였다. 읍내 아이들인 우리는 5리 밖의 가례를 촌이라고 얕잡아 봄으로써 대단한 도방 사람 티를 내려 했는데 뜻밖에도 사촌들이 어른이 되더니 그 가례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국장은 우리가 회동하고 있던 바로 그때 다리 건너 우체국 뒷방에 누워 있었다.
어느새 자정이 넘고 술기운이 도를 넘는다 싶을 때부터 판매소장은 파출소장을 곁눈질해가며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었다.
“논설위원. 좀 들어보소. 우리는 이리 사요. 서른세 평짜리 빌딩에 슈퍼마켓 이요.”
그의 잡화가게를 슈퍼마켓이라 한다든지 옥상을 2층이라 치고 슬래브 단층집을 빌딩이라고 과장하는 것은 알겠는데 문단의 말석에서 어쩌다 신문에 글 몇 줄 올리는 나를 자꾸 논질위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내가 논설위원인 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나를 논설위원이라 부르는 이유를 그 자리에서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궁금증을 참고 민망한 대로 그냥 듣기로 했다.
판매소장의 처는 제 남편의 말의 양에서 이미 마셔버린 술의 양을 측정하는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서울 시누이의 앞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모로 뜨고 제 남편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판매소장은 제 마누라의 낌새를 알 텐데도 아첨기 있는 웃음을 웃으면서 논설위원을 더 자주 입에 올렸고 아슬아슬하다 싶을 정도로 파출소장에게 시비조의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출소장은 판매소장의 그런 주사쯤에는 이력이 난 듯 허허 웃으며 판매소장의 처에게 술을 더 가져오라고 보채기만 했다.
판매소장의 처는 이제 제 남편만 아니라 파출소장에게도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내가 국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작년 초여름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는 그 전날인 토요일 오후에 뜻밖에도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교육받으러 왔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온 김에 고모님을 뵈야겠는데…….”
마지막이란 말에 기겁을 한 나는 펄쩍 뛰며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니. 고모님이 그 정도로 위중하셔?”
“허허. 놀래기는 와 이리 놀래노? 무신 죄 지었나? 고모님 연세를 생각하모 그 일은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거 아이가.”
그의 말투로 보아 당장 돌아가실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로하신 데다 건강도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도 같은 서울에서 진작 찾아뵙지 못한 데 대한 가책까지 없다는 말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가잔 말이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안내 쫌 해도라. 촌놈이 길을 알아야제.”
“내일은 일요일인데.”
또 그놈의 일요일 타령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일요일을 고스란히 지키겠다는 본능적인 반응은 거의 고질이었다. 서울 사람들의 그 일요일 콤플렉스를 알 리 없는 사촌이 곧 되물었다.
“와? 일요일에 예배당 가나?”
일요일은 가족이 다 모여 있는 날이고 주부가, 그것도 친정붙이의 일로 집을 비움으로써 일요일의 단란에 금을 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뻔뻔한 서울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예배당은 무슨 예배당.”
“예배당 안 가모 일요일이모 우떻고 일요일 아이모 우떻노. 그라지 말고 같이 가도오. 여기 교육원하고 너거 집하고가 제일 안 가찹나? 니 아이모 안내해줄 사람도 사실은 엄꼬.”
일요일이면 어떻고라니. 그러나 좋다. 일 년에 한 번 사촌끼리 고향에서 만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서울에서 만나는 일을 반가워하지 않을 수는 없지. 그 빌미로 모처럼 아버지의 동기 중에 유일하게 살아 계신 고모님께 문안드리는 것도 괜찮은 일이고.
서울 온 시골 친척을 푸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큰 불이익이 되는가에 대한 계산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나는 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간 이 모든 서울의 소시민다운 생각이 탄로 나지 않게 반가움을 듬뿍 실은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누가 안 간다 그랬소? 당연히 가야지. 내일 몇 시에 어디서 만나면 좋겠소?”
체신공무원 교육원 옆에 있는 용문우체국 앞에서 약속 시간 오 분 전부터 그를 기다릴 때는 전날의 찌무룩하던 기분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즐거운 기대감으로 부풀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가 뜨거운 초여름의 햇빛 속에서 여전히 달랑거리는 걸음걸이로 웃으며 다가왔다. 작고 영리한 눈가에 듬뿍 웃음을 띄우고.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옷차림을 나는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보라색을 머금은 베이지색의 여름 재건복* 윗도리와 희뜩희뜩 눈 무늬가 있는 감색 하의에 밝은 청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시골 사람들도 요즘은 세련되어서 외양으로 도시 사람들과 구별이 되지 않던데 이 양반 행색 좀 보게. 예나 지금이나 꼭 같구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다 아무리 시골 우체국이지만 명색이 국장인데 국장님 체신도 생각해야지 쯧쯧.
혀를 차면서도 변하지 않은 그가 변한 것보다는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소탈한 성격 탓인지 객기 탓인지 그는 고등학생 때도 남다른 차림으로 눈길을 끌곤 했다. 염색해야만 입고 다닐 수 있는 군인 작업복을 그냥 입고 다니는 데 대한 처벌로 어는 날 규율 선생님이 그의 등짝에다 흰 페인트로 ‘염색’이란 글자를 써주었던 일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 글씨를 등짝에 멘 채로 그냥 계속 다녔는데 마치 전쟁 포로나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 같았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작은 몸매에다 바짝 마르기도 했고 얼굴빛도 까맣게 타 있었다. 그래도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달랑거리는 그의 걸음걸이와 눈웃음에 그냥 남아 있었다.
“워낙 먼 데라 버스를 타야겠어. 서울역에 가서 좌석 버스를 타면 편안하게 갈 수 있으니까.”
택시로 안내하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을 변명하며 나는 버스에 올랐다. 놓칠세라 나를 뒤따라 버스에 오르며 그가 말했다.
“지난번 일요일에는 과천 대공원에 갔는데 돌아올 때 뻐스를 잘못 탄 기라. 서울 오는 뻐스가 아이고 안양 가는 뻐스더라. 촌사람 시껍했다.*”
“안양이든 과천이든 서울역 가는 차는 다 있을 텐데 걱정할 것 없지 뭐.”
내가 대학 다니고 그가 군인일 때 그가 휴가 나와 돈암동 내 자취방을 찾던 일이 생각나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타고 돈암동 극장 앞에 내려서 집을 찾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그만 삼선교에서 잘못 내려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내린 삼선교에서부터 돈암동 쪽으로 찾아갈 생각은 않고 출발지였던 서울역으로 돌아가 아까 탔던 그 번호의 차를 다시 탔다는 것이었다.
“우쨌든 간에 서울역만 찾아가모 되는 기라.”
대단히 잘한 짓인 양 자랑하던 그때가 생각나서 나는 웃었던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가 아니라 ‘모든 길은 서울역으로’ 였다.
일요일인데도 버스 안은 붐볐고 그래서 그는 나와 몇 사람 건너에 서게 되었다.
차가 원효로 입구 신호대에 걸렸을 때였다. 어느 자동차가 속력을 놓고 달리다가 갑자기 신호가 바뀐 탓인지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하는 모양이었다. 매양 듣는 도시 사람들조차 또 교통사고 한 건 났나보다 할 정도로 그 급정거 소리가 원효로 일대의 하늘과 땅을 찢어놓을 듯 유난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촌의 태도는 좀 지나쳤다 할까?
몇 사람 건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섰던 사촌이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촘촘히 서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소리가 난 반대편 창 쪽으로 몸을 빼내는 데는 단 2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안내자다운 세심함으로 그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의 그 기민한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발을 밟힌 사람인지 누군가가 “이 양반 왜 이래?” 하는 소리도 들렸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상당히 민망쩍어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호기심 많고 구경 좋아하는 그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며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호기심에 비해 겁이 많은 그가 일천구백육십 년 삼 월에 마산에서 취한 태도는 또 어떠했던가?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그의 호기심이 너무 컸고 현장에 뛰어들기에는 또 너무 겁이 많아 그는 정말 괴롭게 그의 큰집인 우리 집과 현장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차를 갈아타기 위하여 서울역 에 내렸을 때 내가 그에게 물어보았다.
“아까는 뭐 볼 거 있다고 그리 야단을 부렸소?”
“아 촌사람이 서울 왔이모 보고 가서 할 이약도 있어야제. 아따 구경거리 하나 생겄나 캤더마는 소리만 컸지 벨일 아이더라.”
말마다 촌사람 촌사람 하는 것도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내 아버지는 둘째, 소장의 아버지는 셋째, 국장의 아버지는 막내였는데 국장의 아버지는 일제 말에 징집되어 남양군도에 가서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에 막내인 국장의 어머니가 제일 먼저 과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육이오에 집 이 불타버리곤 그 핑계로 큰집이 있는 마산으로 이사해서 자연 위로 두 집은 마산에서 살고 아래로 두 삼촌댁이 똑같이 계속 고향을 지키고 살았는데도 유독 국장네 식구들만 말마다 자기네를 촌사람이라 비하하는 버릇이 있었다. 큰집 인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을 때는 “촌사람 괴기 좀 먹어보자” 하며 수저를 들었고 무슨 이야기든 시작할 때는 “촌사람 머로 알아야제” 부터 했다.
그 말버릇은 국장의 어머니가 특히 더 심했는데 그 과부 숙모는 자신의 말과는 달리 유식 했고 세련되었고 용기 또한 대단한 분이었다. 보도연맹*원이다가 마산 형무소에 들어간 그 남동생을 빼내기 위하여 어떤 유력한 인사를 만나러 숙모가 부산으로 간 사이에 전선은 삽시간에 우리 고장을 휩쓸고 정암강을 건너 함안 벌판을 지나 마산 문턱까지 가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큰집이 있다지만 아이들만 두고 온 고향 일이 걱정되어 전쟁이 끝나도록 부산이나 마산에 도저히 눌러 있을 수가 없었던 숙모는 젊은 여자의 몸으로 단신 성분이 각기 다른 두 가지 군대의 영역을 헤치고 함안 벌을 뚫고 정암강을 건너왔던 것이다.
숙모가 대성통곡을 하며 우리가 피란 가 있던 궁류마을 입구로 들어설 때의 놀라움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단 우리에게 돌아온 숙모는 그녀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그 전쟁터를 뚫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만 비행기 소리나 총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온몸을 떨어대는 증세로 우리는 숙모의 그 전쟁터 뚫어내기의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따름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이 비행기 소리나 총소리만 들으면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순식간에 격렬하게 떨어댔기 때문에 우리는 두꺼운 이불을 덮어씌우고 힘을 합해서 눌러주곤 했다. 그러다가도 그 공포의 소리만 사라지면 숙모의 떠는 증세도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곧 정상으로 돌아와 전쟁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우리에게 임진왜란이 얼마나 오랫동안 끈 전쟁이었는지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달래기도 했다.
폭격에서 안전하다는 벽촌⁕을 찾아가 며칠 있으면 어느새 굶주림이 뒤쫓아왔고 굶주림을 피해서 다시 두고 온 양식 이 있는 읍내 가까이 와 있으면 폭격이 뒤쫓아왔다. 아군과 적군이 정암강을 사이에 두고 벌인 치열한 공방전은 우리를 이승과 저승 사이로 넘나들게 했다. 그런 과정에서 틈틈이 숙모로부터 얻어들은 지식은 꽤 많았다. 백산 안희제 선생, 당시의 국방장관이던 신성모,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 심지어는 월북한 남로당의 거물에 이르기까지 주로 우리 고장이 낳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들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전쟁 중에도 내게 터무니없는 긍지와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마치 나 자신의 미래상이 그들 기라성 같은 인물들의 면모에서 한 대목씩 추출해 낸 것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것 같은 희망이었다. 게다가 인목대비가 우리와 본이 같다는 이야기는 나 자신이 왕비가 될 운명인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런 황당무계한 꿈이야말로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거칠고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역 정류장의 인파에 섞여서, 골인 선으로 들어오는 마라톤 선수의 이름과 번호를 확인하듯이 줄줄이 들이닥치는 버스의 번호를 기민하게 살피며 나는 사촌에게 건성으로 말했다.
“구경 좋아하는 성미는 안 변했소.”
“허허. 내가 사램이 이리 재금이 없능 기라. 우 순경 걸마가 해작질한* 날 궁류 현장에 가보고 단단히 마음 묵었거마는 또 구경에 밝혔제? 그저 죽은 듯기 있은 사램은 그래도 살아났는데 무신 일이 났능고 하고 궁금증을 몬 참아서 나가본 사램은 다 죽었거등. 밖에서 총소리가 나도 고마 가만이 있어라 카며 들앉아 있은 냄핀은 살아나고 그라는 냄핀 말 안 듣고 내 한번 보고 올 끼요 카고 나간 마누래는 총 맞아 죽었더라 이 말이라. 이 세상에 살아남을라모 바깥에서 난리가 나도 나는 모르는 일이요 카고 죽은 듯 엎디려 있어야 된다 카는 진리를 내 그때 절실히 깨달은 기라. 나서모 안 된다 카이. 작심삼일이라고 그 일이 울매나 오래됐다꼬 또 잊이뿌렀는지 내 참.”
좌석 버스에서 둘이 나란히 앉아 드디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도봉산 아래 동네까지 가는 동안은 꽤 오래 묵힌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이리 멀리 타고 가는데 뻐스비는 울매고?”
“삼백오십 원.”
“아따 뻐스비 한분 헐타. 울매나 살기 좋은 세상이고. 그란데 대학생 걸마들 데모는 와 해쌓노? 너거 아들도 대학생잉께네 니는 그 이유를 잘 알겄네.”
나는 그만 가슴이 콱 막히고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문조차 막히는 느낌 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안다고? 글쎄. 알기는 알 것이다. 그런데 왜 데모니 대학생이니 하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콱 막히고 내가 평소에 알고 느끼던 일이 뒤죽박죽 엉켜버려 도무지 정연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되는지 나 자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백일장에 참가한 미숙한 문학지망생이 원고지를 앞에 놓았을 때처럼, 공부를 덜 한 수험생이 시험 답안지를 잡았을 때처럼 앞이 캄캄해직는 것이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어느 때보다도 크고 강력하게 외칠 수 있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째서 당신이요? 정작 모든 것을 누리고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라 해야 할 사람들은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독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그들이 살기 좋은 세상에 사는지 어쩌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말이오.
그렇게 속으로 외치며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그의 말이 진담인가 농담인가 알고 싶어서 나는 사촌의 얼굴을 유심 히 살펴보았다.
그는 그의 몸집이나 걸음걸이가 풍기는 인상과는 달리 원래 속이 깊은 사람이니까 농담을 하고도 저런 내승을 떠는지 모른다. 내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그래 보는 것인지 모른다. 이번 교육 기간 동안 교육받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러나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정말 살기 좋은 세상에 사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술 더 떠서 차창 밖을 내다보며 동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차라리 나를 당황하게 했고 도대체 그가 정상적인 두뇌를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했다.
“서울 사람들 참 많기는 많다. 저 사람들 다 머 묵고 사노? 우리 촌사람들 한 분씩 서울 와서 쓰는 돈 가지고 잘 묵고사는 모양이라. 이분에 내가 와서 쓴 돈도 벌써 십맏 원 한 장은 된다 카이.”
무슨 산술이 저런가? 시골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저 많은 서울 사람들을 먹여 살리며 그가 쓴 돈 십만 원이 저 불가사리 같은 도시인을 해갈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먹는 갈비 한 대 값이 근로자들의 하루치 노임에 가까운 줄 그는 알고 있을까?
나는 그와 살기 좋은 세상과 살기 나쁜 세상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도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해서 말을 딴 데로 돌린다는 게 또 그놈의 공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 집 아이들은 공부 잘하요?”
그런 내 물음에 그는 잔뜩 기분 좋은 일이라도 만난 것처럼 씩 웃기부터 했다.
“공부 그거? 우리 아아덜 시험지는 쏘내기거마는.”
“쏘내기라니? 소나기 오듯이 할 때는 잘하고 못할 때는 또 너무 못한다 그런 말이요?”
그는 손을 홰홰 저으며 단호히 부인했다.
“어언지. 답이 하도 많이 틀리서 짝짝 그어놓은 기 쏘내기 기림 아이모 멋 이 겄노?”
나도 웃었지만 좌석 버스의 앞자리와 옆자리 사람들도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아 대한민국」 이란 노래가 흘러나왔고 내 사촌의 얼굴이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이 환해졌다.
“이분에 저 노래 억수로 불렀다.”
“교육받으면서?”
“하모. 노래도 부르고 아침마다 운동장을 및 바쿠씩 구보도 하고. 농사짓는 거만큼이나 힘들더라.”
역시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 뒤에는 짙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얼굴이 많이 탄 걸 보니 운동장깨나 돈 모양이요.”
“내 얼굴 탄 거는 고까짓 서울 햇빛 때문은 아이라. 논일 하제, 소 돌보제, 배달도 해야제, 지가 얼굴 안 타고 우짤 끼고.”
그의 행색 때문에 나는 항상 그가 우체국장이란 사실을 깜빡 잊곤 했다. 그때도 그가 말하는 배달이 우유 배달인 줄 알았던 것이다. 마침 소 기르는 이야기 끝에 나온 배달이 아니던가.
“배달할 우유가 있을 정도로 젖소가 많은 모양이구나.”
“지랄하네. 우유 배달은 무신 우유 배달? 우편배달이지.”
“아니, 우편배달을 직접 한단 말이요? 국장님이?”
“야아가 머라카노? 촌 우체국에 집배원 따로 두고 자시고 하다가는 머 묵고 사노? 내가 자전거 타고 횡 갔다 오모 될 거로.”
자전거라니 생각났다. 오토바이를 사놓고 기름값이 아깝다고 하도 오래 쓰지 않아서 오히려 그 비싼 오토바이가 녹이 슬고 고물이 다 되었다고 흉보던 의령 사람들의 말이.
“맙소사. 얼마나 오래 살 거라고 그렇게 사요? 이제 이쯤 되었으면 먹고 싶은 거 먹고 입고 싶은 거 입고 쓰고 싶은 데 좀 써요. 선진 조국의 우체국장님께서 그 행색이 뭐요. 나라 체면도 좀 생각해야지.”
나는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딱하게 생각하던 내 마음을 그렇게 털어놓고 말았다.
“와? 내 행색이 우때서? 속은 텅텅 비었는데 껍데기만 잘 싸모 머 하노? 안죽 멀었다. 장차 쓰고 싶은 데 쓸라꼬 묵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다 참는 기라.”
그러면 그렇지.
쓰고 싶은 데가 따로 있다는 그의 말은 왠지 나를 안심시켰다. 젊었을 때 그가 어떤 꿈을 품고 있는 것을 눈치 채게 되면 그가 금방 그 꿈을 이뤄놓은 것처럼 나는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든가 포기하는 눈치가 보일 때 비로소 나는 안도하곤 했는데 이제 그나 나나 다 같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야 그가 갖고 있는 꿈에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를 걸어보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내핍*이 맹목적인 인색이 아니라 꿈을 위한 준비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음흉하다 싶을 정도로 항상 황당한 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어느 날 그의 방 천장 가득히 독일어 변화 공식을 써 붙여놓고 반듯이 누워서 그걸 외고 있었다. 독일 유학이 목표라고 했다. 오십 년대 중반을 겨우 넘길 때였으니까 외국 유학이 쉬운 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의 학교 성적 이 특별히 좋아 무슨 파격적인 혜택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고 그때쯤에는 백부님의 사업도 사양길이어서 우리 사촌들 중 아무도 백부님의 도움을 받을 형편도 못되던 때였다. 그의 유학 꿈이 전혀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마치 선수를 뺏긴 것처럼 화가 났다. 공부라면 나 말고 누가 하느냐는 자만심 때문에 그의 작태가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숨기고 있는 묘책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구가 금방 독일로 떠나는 것처럼 질투심으로 속이 꼬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천장이 보기 싫어서 그의 방에 일절 출입하지 않았다.
수업료 미납으로 그만은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가 독일 유학 준비 때문에 정말로 상경한다 했을 때 나의 놀라움과 질투의 양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국 유학은커녕 서울 유학조차도 눈물을 삼키며 일이 년 후로 미뤄놓은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독일 유학 꿈이 전혀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가 천장에 독일어 변화 공식을 써 붙였을 때 이미 그는 마산에 피란 와 있던 어떤 종교계 인사로부터 언질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 이다.
그러나 그의 유학 꿈이, 서울 생활 한 달 동안 새벽마다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하여 반도호텔에 몰래 출입 했다는 추억담만 남겨놓고 끝날 줄이야. 군복무 관계로 유학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돌아왔을 때, 그래서 의령으로 낙향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 이다.
내 이야기가 거기까지 가자 판매소장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내 말을 낚아챘다.
“논설위원, 내 말 쫌 들어보소. 그때부터 국장이 우째 산지 아요? 여자들 화장품 가지고 의령군 내 구석구석을 행상 다니기 시작한 기라요. 촌 여자들도 화장은 하거등. 그때부터 쪼끔씩 돈을 모으기 시작하여 논도 사고 소도 사고 난중에는 우체국도 하게 되었지만 벌모 벌수록 꼼쟁이가 되어가는 기라. 한분은 체신청에 볼일이 있다꼬 부산에 가야 된다 카길래 나도 부산에 일이 있던 참이라 같이 안 갔겄소. 국장 일부터 먼저 보고 내 일은 난중에 보기로 했지. 체신청 현관 앞에 서더니 국장이 들고 있던 보자기를 풀더라 말이오. 그기 먼지 논설위원 한분 알아맞치 보소.”
그들에게는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인지 파출소장도 웃고 제 남편의 술타령에 화가 나 있던 판매소장의 처조차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마치 난센스 퀴즈 놀이를 할 때처럼 소장은 내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상대가 알아맞히지 못한 재미, 그래서 출제자 자신이 의기양양해지는 재미를 빼면 난센스 퀴즈의 진미는 없어지는 법이니까. 물론 나는 두 소장과 올케의 얼굴을 멍청히 둘러보기만 했다.
“알모 기가 찰 거로. 그기 구두인 기라. 깔깔 새거는 새건데 구닥다리 중에 그런 구닥다리가 없지. 신고 있던 쓰랩빠를 벗고 구두로 바꾸 신고 청사로 들어가면서 내보고 쓰랩빠 쫌 봐달라 카능 기라. 평생 구두 두 커리로 살아낸 사램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쓰랩바를 지키고 서 있으면서 두 커리도 많다고 내 생각했지. 운제 신겄노?”
나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나서 퉁명을 부렸다.
“구두로 바꿔 신을 건 뭐야? 슬리퍼 바람에 청사에 들어가면 누가 쫓아내나?”
“그거야 모리지. 공무원 품위라 카는 거 청사 안에서는 따지는지 우짜는지 내 겉은 촌놈이 알 수야 없잉께. 우쨌든지 우리 사촌 꼼쟁이 짓 하는 거는 의령 천지 모리는 사램이 없소. 당신 손으로는 백 원짜리 아이수쿠림 한분 사 묵은 적 없다 카모 내보고 거짓말한다 카겄제? 한분은 저거 집에 온 손님이 준 돈으로 저거 아들이 아이수쿠림을 사 묵는 거를 보고 아부지도 한분 묵어보자 카더마는. 한입 베 묵고 하는 소리가 내 참 기가 차서. 내 평생 요리 맛나는 거는 처음이다 카능 기라.”
“무슨 소리야? 아이스크림을 먹어봤다는 건 우리가 다 아는 일인데. 마산 대성동 우리 집에서 사이다 병과 바꿔 먹던 생각 안 나?”
나는 마치 고증학자처럼 어리석게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가 아이스크림을 먹었던가를 고증하려 했다.
두 사촌은 다 같이 마산의 우리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니까 그 당시 신마산을 누비며 아이스케이크 행상을 하던 노파에 대해 기억 못할 리가 없던 것이다.
그 노파는 항상 ‘아수께에. 아수께에. 달고 맛 좋은 아수께에’ 라 탄식처럼 외치고 다녔다. 우리들 모두의 백부님께서 경영하시던 사이다 공장, 그때쯤에는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그 공장에서 쓰는 빈 병으로 바꿔 먹던 아이스케이크가 당시로서는 세상에 둘도 없이 달고 맛 좋은 아이스케이크였지만 도대체 그것이 언젯적 맛인가 말이다.
판매소장의 처는 우리들의 잠꼬대 같은 옛날 이야기에 이젠 싫은 빛을 역력히 내며 그의 남편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판매소장은 그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특히 그의 처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성동이라 카이 생각나는데, 그 대성동 큰집에서 말이다. 내가 매일 밤 하도 늦게 들어온께내 하루는 큰형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한 기라. 내일부터 열 시 넘어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문을 열어주지 말자꼬. 그래서 다 같이 그라자꼬 약속을 했는데 고만 첫 번째로 걸린 사람이 눈지 알겄나? 바로 큰행님 자신인 기라, 바로 이 논설위원의 오빠 말이다. 그 유명한 법대를 졸업한 분이 법도 모리는지, 아니모 약속을 만들 때 당신만 예외로 하겠다꼬 속으로 작정했는지는 모리지만 문 열어라꼬 호통을 치능 기라. 법은 당연히 공평해야 될 거 아이가? 법을 지키야 하는 사램이 따로 있능 거는 아이거등. 높은 사램이나 낮은 사램이나 다 같이 지키야지. 행님은 누구보다 법을 아는 사램이니 처음에는 호통을 치시는 것도 장난인 줄 알았다꼬. 장난으로 만든 법이지만 지키는 시늉은 해야지 싶어서 우리는 아무도 문을 안 열었지. 행님이라 카더라도 좀 골탕을 멕여디리구 문을 열 작정이었는데 행님 쪽에서는 그 호통이 장난이 아니던 모양인 기라. 이놈들이 감히 어디라고 내한테다 법을 적용시켜 카는 생각이었던지 아니모 그 약속을 잊어뿌린 시늉을 부러 하시는지 불같이 썽을 내시면서 나무 대문을 발로 차더란 말이다. 울타리도 흔들리고 집도 흔들리고 온 동네가 들썩 했지. 그란데 우리 모두 우쨌는지 아나? 아이구, 장난이 아니고 진짜로 썽을 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모두 히죽이죽 웃던 얼굴을 똥 집어 묵은 상으로 바꾸고 서로 치다만 보는 기라. 인자는 무서버서 아무도 문을 열 용기도 없어지고 말이다. 우짤 끼고? 국장이 먼저 벤소깐으로 뛰어가더마는. 논설위원하고 큰누부가 이불 밑으로 들어가는 거를 보고 나는 목욕탕으로 뛰어 들어가 목욕솥 안에 숨었지. 거 안 있나? 일본식 목욕통. 나무 뚜껑을 딱 덮으모 깜쪽 같지. 그리 무서분 세상 처음이더라. 크 난리를 치는데도 안방에 계신 큰아부지하고 큰어무이도 우째 모린 척하셨는지? 아매 우리끼리 한 약속을 아시고 같이 손발 맞추줄라꾸 그라신 건지. 결국은 큰어무이께서 열어주섰지만 그 법은 그날로 없어지고 말았다꼬.”
판매소장과 내가 국장 이야기를 할 때는 파출소장과 판매소장의 처는 역정을 내면서도 그들이 아는 국장의 면모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끼어들기도 했지만 우리들의 마산에서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는 그들은 역력히 지루함을 나타내었다. 판매소장의 처는 아예 술자리를 걷어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고 파출소장은 오히려 나와 서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서울에서의 그의 추억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크의 의령 근무에 대한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굴러 왔지만 나도 원래가 촌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점을 실컷 표현하지 못해서 안달하며 판매소장의 처에게 술을 더 가져오라고 보챘다.
“소장님. 고마 치아이소. 소장님이 먼저 일어나시야지, 이라다가 밤새겠십니더. 우리 아아덜 아부지 좀 보이소. 저러다가 내일 일도 몬 칩니더. 우리 여자들도 잠 좀 자야 되고예. 고마 일어나 가이소.”
“아주머니. 다른 날 언제 내가 이런 민폐를 끼치는 거 보셨어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눈 좀 감으시고 술이나 더 가져오세요.”
“아이구 나는 싫습니더. 술 안 디린다꼬 설마 총은 안 쏘겄지예?”
내가 깜짝 놀라서 파출소장을 보았는데 그토 나를 흘끔 보고 난처한 웃음을 입가에 띠며 말했다.
“저 소리 듣기 싫어서 이곳을 빨리 떠나야겠어요. 우 순경 사건 이후 이곳 사람들은 마치 막가는 사람들처럼 겁 없이 저런 소리들을 하거든요.”
도심의 뿌연 매연 지대를 뚫고 도달한 도봉산 아래 마을의 공기는 서울답지 않게 깔끔하고 상큼하기까지 했다. 하늘은 하늘답고 구름은 구름답고 햇빛은 햇빛다웠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던 사촌의 말과는 달리 고모님은 바깥의 기척을 듣고 허둥지둥 나와 우리를 반겼다.
나는 고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의미심장한 낯색으로 국장을 돌아보았다.
내가 고모님 방문에 선뜻 나서주지 않을까봐 내게 거짓말했소? 그런 술책을 쓴 데 대해서 섭섭하게 생각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표정하기만 했다.
“이기 누고?”
고모님은 팔을 휘저으며 우리를 반기기는 하셨는데 전에 없이 이상한 점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기 누고?’ 란 말은 우리네 지방 사투리로 반갑다는 표현이지만 허공을 휘젓는 팔짓하며 어룽한 표정하며가 아주 낯선 것이었다. 고모님이야말로 재치 있고 날렵하고 똑똑한 노인이 아니시던가.
우리가 괴이찍게 생각하겠거니 짐 작하셨는지 고모님께서 먼저 그 점을 해명해주셨다.
“내가 백내장인가 하는 거로 앞이 안 보이서 이란다. 너거들 얼굴도 히꾸무리하다. 그라나따나 들어가기는 해야제.”
고모님 등 뒤에 서서 역시 히죽히죽 웃으며 우리를 반기는 고종 오빠를 보자 나는 기가 찬 나머지 속으로 버릇없이, 장님에 벙어리라, 한 세트가 잘 맞는구나 하고 이죽거렸다.
고모님이 시력을 잃지 않았을 때도 나는 병약한 노인과 벙어리 아들과의 장래가 하도 암담해서 연전*에 그들을 모델로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그것도 언젠가 한번 고모님께서 ‘내가 죽기 전에 저 웬수를 먼저 죽이야지’ 하던 말을 근거로 해서였다.
그 말을 할 때의 고모님의 목소리는 그냥 한번 그래 보는 것이 아닌 것 같았고 고모님의 기색은 절대로 농담하는 사람의 기색도 아니었다. 고모님의 그 결의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 참 좋은 방법이란 생각을 아주 잠깐 했고 곧이어 내가 살인을 결의한 것처럼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변명하듯이 여러 가지 의문을 품어보게 된 것이다.
과연 장담대로 고모님은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죽을 수 있을까? 그를 죽이는 길 외에는 정말 딴 길이 없을가? 도망가듯이 미국으로 가버린 그의 동생이 형님을 모시는 것은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까?
나는 그 결과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고모님의 죽음의 시기를 고대한다는 뜻일 것이었고 그것은 또한 나의 죄책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때에 내가 그들의 미래를 초설화한 것은 그 문제를 나 혼자 풀어보고 어느 정도 궁금증을 무마시키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그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비열한 궁금증만 잔뜩 품고 있는 나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의 도피법이기도 했다.
나는 소설 속에서 시집간 딸을 설정해놓고 저 웬수를 먼저 죽이고 내가 죽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그리고 그 딸이 외출 시마다 병석의 어머니께 신경안정제를 사다 드리는 것으로 은연중 살인을 사주하게 했다. 눈치 빠른 어머니가 그 약의 의미를 알아채고 당신이 잠을 청하는 약으로 쓰는 대신 모아두었다가 자신이 죽기 전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악들에게 먹여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이심전심으로 잘 진행되었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다. 퇴근해서 돌아온 딸이 집 안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고 모든 것은 끝났나 보다 했을 때 죽었을 줄 알았던 벙어리 동생이 한 주먹의 약을 누나의 얼굴에 집어던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어머니는 약을 모아두기는 했어도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으며 벙어리 아들이 그들의 음모를 눈치 채게끔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소설을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고 해서 내가 살인 음모의 혐의에서 풀려날 리도 없었고 욕된 삶이 죽음보다 과연 선일까 하는 회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벙어리 아들의 입장에서 그런 변을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리란 자신도 내게는 없었다. 내 윤리 의식이 소설의 마무리를 그런 그럴듯한 외양으로 맞춰놓게 했지만 나는 뭔가 무책임한 일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실을 말하라면 나 역시 벙어리 아들을 죽이고 싶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었고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귀찮고 보기 흉하고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싹둑싹둑 잘라 없애고 싶은 게 내 본색인 것이다. 가난뱅이도 없애고 불구자도 없애고 약한 자도 없애고, 잘 가꿔놓은 정원이나 잘 다듬어진 문장처럼 말썽스럽고 귀찮고 보기 흉한 군더더기는 다 잘라버리고 싶은 게 내 본색임을 문득문득 깨닫는 것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나 같흔 사람을 지도자로 삼는 사회를 상상해보았다. 보기 싫고 말썽스러운 모든 것들을 가두고 싶어 하고 죽이고 싶어 할 게 아닌가 말이다.
“백내장이란 말은 의사가 한 말입니꺼?”
좁은 방에 앉자마자 내가 따지듯이 물었다. 텔레비전에서 배운 지식으로 서툰 자가 진단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모. 날 병원에 데리다줄 사램이 없어서 뭉개다가 할 수 없이 저 웬수라도 앞세웠지. 저기 저래도 몬 찾아가는 데가 없다꼬. 안과 의사 하는 말이 너무 늦어뿌리서 치료하기 힘든다 카더라. 글라고 수술할 돈도 돈이지만 다 늙은 거 수술하모 머 하노 싶어서 고만뒀다.”
“수술하면 낫기는 낫는다 캅디꺼?”
“어언지. 고것도 확실치는 않다 카더라.”
고모님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국장은 여전히 힐난하는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이렇게 말했다.
서울 살면서 머 했노? 앞도 안 보이는 사램이 버버리* 앞세우고 다니거로 놔두고.
그러나 고모님에게는 그런 건 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고모님의 고통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니었고 벙어리 앞세우고 다니는 불편도 아니었다. 오직 오랫동안 말상대를 만나지 못한 사실만이 커다란 고통이었던 모양이었다.
고모님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엮어내시는 것이었다. 주로 옛날 이야기들이었는데 우리가 이미 아는 이야기도 하셨고 처음 듣는 이야기도 하셨다.
“죽을 날이 가차땄는지 우리 행님 생각이 부쩍 더 난다. 시상에 우리 행님 같은 사램이 또 있겄나? 저 웬수를 낳아놓기는 했는데 젖이 나와야제. 너거 어무이가 너거 언니 젖을 저 웬수한테 멕이줏다. 한 분도 싫은 내색 안 하고 너거 언니는 밀쳐두고 저 웬수 먼저 먹이더라 카이. 부처님도 그런 부처님이 없었능 기라.”
고종 오빠가 말의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나를 보고 머리를 주억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래 맞았어. 그 외엄마가 최고였어.
그가 똑똑하게 발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말은 ‘외아부지’와 ‘외엄마’ 였던 것은 내 부모님 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던 모양이다.
“아이구 지랄한다. 저기 저래도 너거 어메 이야기만 나오모 알아듣고 저란다.”
“요새도 일은 나갑니꺼?”
“하모, 야아가 안 벌모 우찌 묵고살끼고? 하루에 오천 원은 번다.”
“일은 무슨 일인데예?”
“머러 커더노? 악세사리라 카던가. 뿌로찌, 목걸이, 귀걸이 머 그런 거 맹그는 공장인데. 일도 잘하제, 지 월급이 시상에서 제일 많은 돈인 줄 알고 더 달라 소리 한분 하나, 부리묵기 울매나 좋겄노. 말깨나 하는 사램이 뒤를 봐주모 대우도 좋아지고 할 끼거마는 그거 한 가지가 아숩다.”
그때도 국장의 시선이 나를 힐난하는 것이었다.
성한 친척들이 배경 이 좀 되어주지 않고 멋들 하고 있었노, 그러는 것 같았다.
이야기하는 우리들의 얼굴을 히죽히죽 웃으며 번갈아 보던 고종 오빠가 팔목에 단단히 차고 있던 시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그가 차려 온 점심상에는 막 버무린 김치와 미역 냉국과 계란찜이 놓여 있었다.
눈도 보이지 않는 분이 취사는 어떻게 하며 이 반찬은 또 어떻게 된 노릇이냐고 묻는 내 말에 고모님의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눈치 하나는 말개서 내가 시키는 대로 잘 하더라. 차라리 내 눈먼 기 잘된 일인지 모르겄다. 천 가지 만 가지 내 손 아이모 안 되는 줄 알았더마는 이 없으모 잇몸이더라고 내 죽고 나도 혼자 살 수 있을 것 같다. 너거들도 알듯기 저 인간이 불쌍해서 내 집 안에서나따나 임금 대접 해줄라꼬 내가 울매나 애썼노. 이부자리며 입성*이며 음식은 내 딴에는 깔끔시리 해서 밖에 나가 몬 받는 대접 집에서라도 해줄라꼬 애썼다. 내가 해준 만큼이야 몬하겠지만 지 힘으로 밥벌이 하제, 지 손으로 밥해 묵제, 지 손에 한분 들어온 돈은 칼이 들어가도 안 내놓는 성질이니 사기당할 걱정도 없제, 인자 마음 놓고 눈감게 됐다. 내 손으로 저 웬수 죽이고 내 축을라 캤더마는 졀인 안 하고도 곱게 죽게 됐다. 하나님 이 돌보시느라꼬 내 눈멀기 했는갑다 싶어서 눈먼 거를 차라리 감사하게 됐다.”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국장 역시 그런 얼굴이었다.
고모님의 그 말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저질렀던 살인과 독선과 포악에 대한 힐책처럼 들렸고 그 죄질에 합당한 벌을 선고하는 판결문 같았다.
국장과 내가 고모님과 고종 사촌을 작별하고 나와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좌석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찻길 건너 시장에 볼일이 있는지 방금 작별하고 나온 고종 오빠가 찻길에 나타났다. 그때 마침 일반 버스가 우리 앞에 와서 섰는데도 우리가 타지 않은 것을 목격한 그가 우와 우와 소리치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내 손바닥에 방금 지나간 버스의 노선 번호를 적어 보이며 그게 맞는데 왜 타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는 시늉을 했다. 그 번호에 대시(-) 1까지 써 보이며 대시 1이 붙지 않은 것은 타면 안 된다고 가위표를 해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웃으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심한 듯 손을 흔들며 시장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국장이 사라지는 고종의 뒷모습을 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까 올 때는 살기 좋은 세상이라꼬 내 말했지만 우짠지 가시가 목에 걸리는 것 겉다. 그래도 내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 캐쌓는 거는 대학생 걸마들 데모한다는 말만 들으모 내 가슴이 철렁하기 때문인 기라. 지끔 이만큼이라도 사는 거를 다 뿌사부리모 우짜노 싶어서. 그 어렵던 시절 사촌도 생각나제? 월사금을 몬 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몬 탄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
“그때 고모님 댁에서 나와 그런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지막이 될 사람이 국장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노인들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었지. 유난히 얼굴색이 검고 음식을 먹지 못하긴 했어도 교육받느라 너무 피곤해서 입맛이 없어진 모양이라 생각했다니까. 그의 간이 그렇게 나빠져 있는지, 겨우 반년을 더 살고 말 사람인지 누가 알았겠어? 살기 좋은 세상인데 대학생 걸마들 데모는 와 하노 하더니 살기 좋은 세상 참 오래도 잘 살았다. 죽지나 않았으면 두고두고 잘 사는 거 파토 내기 싫어서 그러나보다 이해나 해주지. 그거 살고 말 줄 알았으면 나도 반박해줄 말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야. 살기 좋은 세상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나 자신도 반복해서 듣던 소리라 별로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 편이 오히려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 그런데 왜 국장은 그렇게 유별나게 살았대? 막연히 성격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면 너무 허무하잖아?”
“현금 오천만 원을 모아 장학 기금을 만든다 안 캤소? 고등학교 졸업장 몬 탄 기 하도 한이 맺히서. 의령 사람치고 그거 모리는 사램은 없거 마는.”
나는 또다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국장은 언제나 한 가지씩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장차 쓰고 싶은 데 쓸라꼬 묵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참는 기라’ 하던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우리가 잘 입고 잘 먹는 것으로 꿈을 성취한 인물이 된 것처럼 우쭐거릴 때 국장은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을까?
판매소장의 처가 빈 맥주병을 주섬주섬 방문 밖으로 내놓으며 탄식했다.
“요새는 암이 무신 감기맹키로 겉려쌓는다 카이. 그거 한 가지는 촌사람 도시사람 차별도 없더마는.”
그리고 말투를 싹 바꿔서 마치 마지막 선언이라도 하듯이 파출소장에게 단호히 말했다.
“아이구 인자 제발 가이소 고마. 아침에 장삿일 치르야 할 사람들이 술만 마시고 있으면 우짤 끼요?”
파출소장도 더 이상 뭉기적거릴 수 없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갔다.
파출소장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기척을 알자마자 나는 판매소장에게 참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아까는 날더러 왜 논설위원이라 불렀어? 입장 곤란하게.”
“히히히. 입장은 무슨 놈에 입장. 우리 촌사람 어깨 피고 살라모 그 정도 거짓말은 해두는기 이롭거등. 사촌은 그래도 논설위원 비스름한 기라도 안 돼요?”
『소설문학』 127호(1986. 6);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창비 1987)
김 만 옥
김만옥(金萬포) 1938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순례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60년에 대학 2학년생으로 4·19의 현장을 몸소 체험한 작가는 등단 이후 그 원체험과 부채감, 기억의 편린들을 도시 중산충의 시선으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주요 작품으로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혼적」 「보청기」 「그 말 한마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