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 제보가 왔습니다.
전역한 지 한참 된 아들을 둔 한 아버님의 하소연이었는데,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억울하다는 것 만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보를 주신 아버님의 아들 26살 이모씨는 올해로 제대한 지 4년 째입니다.
예비군 훈련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고 하는데요.
이런 이씨에게 대학원 개강을 앞둔 보름 전쯤.
국내 유명 보험회사 두 곳으로부터 거액이 적힌 고지서가 날아왔습니다.
D 화재 천 백 86만원, H생명 9백 만원.
'이게 무슨 황당한 고지서일까.' 이씨와 그 가족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고지서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 본 가족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씨가 자그마치 5년전.
군대에 갓 입대해 후반기 교육을 받고, 운전병이 되어 자대 배치를 받은, 과장 조금 보태 이병 계급장 오버로크 실이 빳빳하던 그 때!
실수로 발생했던 교통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5년 전 8월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이씨가 근무했던 00사단은 그 해 지독했던 가뭄의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햇볕이 불같이 뜨겁던 2005년 8월 16일.
이씨는 '두돈반'이라는 지프차보다는 좀 크고 커다란 군용 트럭보다는 작은 트럭에 물을 가득 싣고 초소마다 물을 배달해 주던 참이었는데요.
선탑자를 태우고 천천히 운행을 하던 이씨는 급커브 길에서 할아버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해 전치 6주의 상처를 입히는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문제는 군에서 가입한 보험에 있었습니다.
운전 가능 나이를 모든 연령으로 하면 보험료가 비싸다는 이유로 군대에서 보험을 가입할 때 운전자 연령을 만 21세 이상으로 한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몇 푼의 보험료를 이유로 수 많은 청년들을 졸지에 무보험 운전병으로 만든 거죠.
보험을 그런 조건으로 들어놨으면 그 조건보다 어린 나이의 장병들은 운전을 시키지 말든가요.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에 입대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전대를 잡은 이씨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보험 운전자가 됐습니다.
그래도 부대는 보험을 그렇게 한정해서 든 책임을 지고 책임보험보다 더 나온 금액에 대해서는 물어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운전 연령도 20세로 낮췄고요.
이씨는 민사부분인 배상과는 별개로 형사부분에 대해 군법에 따라 조사를 받았지만 과실이 경미해 기소 유예 판결을 받고 무사히 전역했습니다.
매년 8월 16일이 되면 그 때 그 사고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잘 해결된 이후에 전역했다'는 생각에 이씨는 마음을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씨에게 보험회사의 고지서가 그것도 2천만원이 넘는 금액이 적혀 날아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보험회사는 당시 할아버지가 무보험 운전으로 인한 상해에 대해 자기들이 배상해 준 2천 백여만원을 이씨가 물어내야 한다고 우깁니다.
'아무리 군인이었다고 해도 본인이 실수로 사고를 낸 것이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보험회사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다 보니 지난해 제대한, 일과 시간 외에 새벽까지 술 퍼먹고 운전병들을 개인 기사처럼 부려먹는 대장들 밑에서 2년 동안 복무한 제 동생이 생각나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습니다.
아니. 이씨가 군대에 가고 싶어서 갔습니까? 운전병 원해서 됐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보험가입 자유라도 있었습니까?
일단 한 번 참고, 보험사에 전화 걸기 전에 자문을 구한 변호사들의 의견과, 1995년 대법원의 판결을 들이댔습니다.
혹시 이씨와 같은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있을까봐 잠깐 적으면, "공무원의 직무상 위법행위가 경과실에 의한 경우는 국가 배상책임만 인정하고, 공무원 개인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나라에 소속된 군인이었고 실수로 낸 사고에 대해 개인더러 돈을 물어내라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되는 거죠. (중요한 것은 경과실입니다. 만약 음주나 고의로 사고를 냈다면 국가가 피해해 대해 배상한 뒤, 사고를 낸 공무원에게 구상권 청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보험회사는 자신들이 법적인 검토가 부족했다며 이씨에게 사과하고 청구를 취소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궁금증들은 남아 있습니다.
소송의 달인이자, 교통사고 관련법은 줄줄 꿰고 있을 보험회사가 정말 공무수행중 발생한 사고에 대해 개인이 배상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판례를 몰랐을까요?
실수로 청구한 건 이씨의 경우 뿐이고,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을까요?
거대한 보험사가 보낸 지급 명령에, 혹시 신상에 불이익이라도 갈까 두려워 돈을 내고 가슴앓이를 해 온 분들은 안계실까요?
진정. 모르는게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