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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첫째 단원(1-9)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심
둘째 단원(10-18) 누구인 줄 알았더면
셋째 단원(19-26) 그리스도가 오실 줄 아노니
4장 전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7) 하는 대화로 시작하여, 왕의 신하에게 “네 아들이 살았다”(50)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 문단의 내용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인데 주목해야 할 점은 이를 통해서 “예수”가 어떻게 증거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중심점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즉 그리스도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이를 중심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첫째 단원) 하시니, 유대인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 하자 주님은 “물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둘째 단원) 하시고, 여인은 “그리스도가 오실 줄 아노니”(셋째 단원) 하고, 대화의 초점이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지는 것이 본 문단의 구조입니다.
요한복음은 각 장의 서두에서 중요한 표적이나 사건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3장에는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만나신 사람 중에서는 최고의 인물인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 4장에서는 가장 비천한 여인들 중의 하나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로 증거되어 있는가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단원(1-9)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심
①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1-6).
2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7-8),
물을 긷는 일은 통상적으로는 아침 저녁 서늘할 때에 하는 법인데 “때가 육시”, 즉
ㄱ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 함이러라”(9) 합니다. 어찌하여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치 아니하였는가? 이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열왕기하 17장으로 가보아야만 합니다.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정복을 당한 북 왕국은 앗수르의 이주 정책에 의해서 혼혈(混血) 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당시,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자가 의아해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즉 당신은 어찌하여 다른 유대인들과 같지 아니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7백 여 년 동안이나 분열되어 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전조(前兆)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승천하시기 전 주님의 분부는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헹
둘째 단원(10-18) 누구인 줄 알았더면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10사) 하십니다.
ㄱ 주님의 말씀에는 두가지 요점이 있는데 첫째는 “누구인 줄 알았더면” 하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자는 예수님을, “누구라 고백하느냐, 무엇을 구할 것인가”에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ㄴ 답변은 “그가 생수(生水)를 네게 주었으리라”(10하) 하십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1-12) 합니다.
여자는 이렇게 물은 셈입니다. 가 당신은 야곱보다 큰 분입니까? 나 우리 조상 야곱은 이 우물을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주실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 주님의 말씀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ㄱ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3-14),
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7장에서 주님은 초막절에 모인 많은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을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사12:3-5) 합니다. 이 우물의 이름은 “구원의 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을 수 있도록 행하여 주신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요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6),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ㄷ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대화는 주님 편에서 “물을 좀 달라” 하신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여인 편에서 “이런 물을 내게 주사” 하고 요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영육의 답답함은 여기서도 재연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 알지 못했던 것을 사마리아 여인이 알 수가 있었단 말인가? 이런 답답함은 복음이 밝히 드러난 현대교회 내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데 더욱 답답함이 있는 것입니다.
5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 하십니다. 여자의 아킬레스건을 찌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심히 목이 마른 사람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다섯 남편을 갈아 보았으나 그 갈증은 가시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다섯 남편은 여인에게 각각 무엇을 약속했겠습니까?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명예를, 어떤 이는 권세를, 어떤 이는 쾌락적인 사랑을 약속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마실수록 더욱 목이 마를 뿐 그의 갈증을 해소시켜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ㄱ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 합니다.
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먼저는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왕상
셋째 단원(19-26) 그리스도가 오실 줄 아노니
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당신은 다 아시는군요, 그렇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ㄱ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하는 것이 아닌가? 화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문제로 비약이 됩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창세기 4장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받으심과, 받지 아니하심”으로 갈라집니다. 드림은 우리에게 있으나 받으심은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은 제사장이나 니고데모가 제기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듣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21-22) 하십니다. 중요한 점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인데 이는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시게 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예배가 더 이상 장소나 건물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모형(模型)으로 주어졌던 성전이 실체(實體)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대화는 더욱 진지하고 중심부로 접근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분명 “유월절 제사(예배)를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 가서”(신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리고 선지자로 예언케 하신 대로 구원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이냐? 그리심산에 세워진 성전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어주신 “구속”에 근거하여 드려지느냐 여부가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ㄴ 그래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3-24) 하고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할 때”라 하신 것은, 이제까지의 예배, 즉 짐승을 잡아 제사하는 예배는 참 예배의 그림자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끝이신 것이 아니라, “곧 이 때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는 메시아가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그 때가 바로 이 때다 너는 참 예배를 여기 이 자리에서 지금 드릴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ㄷ 주님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22) 하시는데, “너희와,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 업이
없도다”(왕상
중요한 점은 초대교회 내에도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자들이
있었고 현대교회에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하면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고후
7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 하고, 드디어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더욱이나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를 듣게 되고,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하는 소망과 이처럼 고귀한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대화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요한복음, 나아가 복음서 전체에서 이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누신 또 다른 예가 있었던가? 오늘날 강단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이런 신령한 대화들이 있는가 하고 자문하게 합니다.
ㄱ 어찌 더 참으실 수가 있으시단 말인가? 가려졌던 베일을 벗기듯,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26) 하십니다. 이는 4장에 있어서 결정적이고도 핵심적인 선언입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하시던 그 분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묻던 여인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하신, 그 분을 만나자 여인의 갈증은 비로서 해소되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다음 문단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묵상해 보겠습니다.
1. “누구인 줄 알았더면”에 대해서,
2.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에 대해서,
3.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