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과 함께보도실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가는계단 앞에서 軍帽(군모)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한 軍 將星(장성) 앞에 세워졌다.
?
그 장성은 대뜸 『朴鍾世 아나운서입니까?
나 朴正熙라고 하오』 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잠시 朴正熙 장군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朴장군이 직접 방송하시죠』 朴장군은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나라가 너무나 어지럽소.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서 북한
학생들과 만나겠다고 하지를 않나, 국회는 매일같이 싸움질만 하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래서 累卵(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軍이 일어섰소.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방송해 줘야겠소』
하면서 傳單(전단)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전단을 받아 재 빨리 훑어보았다.
그것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로 앞부분이
시작되는 革命公約(혁명공약)이었다.
혁명공약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로 마무리돼 있었다. 북한군이나, 여순(14연대)반란 사건 같은
정체불명의 군부대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나는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혁명공약이 적힌 인쇄물을 내게 건넨 뒤로도 朴正熙 장군은,
軍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몇마디 더 보태면서 나를 설득
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진지했고, 말에는 條理(조리)가 있었다.
그런 긴박함 속에서도, 위험에 처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사였을까, 朴正熙라는 「朴」字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종씨시군요」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억지로 참았다.
그러다 보니 떨리는 가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작은 여유도 생겼다.
나는 용기를 내, 『朴장군님이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朴장군은 『朴아나운서가 하시오!』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단호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라진 엔지니어를 찾아라 곧이어 내가 십년 감수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시각이 오전 4시 40분으로,
오전 5시까지는 단 2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엔지니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李錫濟(이석제) 중령
(뒤에 총무처 장관·감사원장)에게 『저 혼자서 방송을 할 수
없습니다』라며 엔지니어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방송국 건물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방송국에 들어와 있던 혁명군들은
"엔지니어를 찾으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지자 건물의
구석구석, 하다못해 공개방송실 의자 밑까지 뒤지며 난리를 피웠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방송국內의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의 담당 엔지니어인 한영식씨와 임시현씨는 우리가
아래층에서 혁명군의 亂入(난입)으로 떨고 있을 때, 2층의 主조종실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명동 쪽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방송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기술담당 직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군인들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키에 우락부락한 용모를 가진 중령 한 사람이
『아나운서가 하면 다 되는 것 아냐? 5시에 방송 안 나가면
당신 죽을 줄 알아!』하면서 「철커덕」 권총을
장전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는 나중에야 그가 玉昌鎬(옥창호) 중령인 것을 알았다.
그는 그 큰 군홧발로 복도를 쾅쾅 울리며 윽박질렀고,
나는 현기증이 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현장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동창 金基柱(김기주) 기자 (MBC 전무 역임)는
훗날, 그때 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자기까지 조마조마했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전 5시 5분 전, 시간이 그야말로 5분밖에
남지 않은 그 절박한 순간에 갑자기 아래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엔지니어가 돌아온 것이다. 헐레벌떡 2층으로 뛰어
올라오는 두 엔지니어를 보는 순간,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내 얼굴에 핏기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도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맞잡고「방송 상태」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지체 없이 메인 키를 올렸고,
남산연주소와 延禧送信所(연희송신소)까지
방송되는 打令(타령)이 남산연주소 전체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훗날 5·16 첫 방송 이야기를 쓴 혁명 주체 한 사람이,
이 타령이 울려 퍼진 상황을 묘사하면서 「朴鍾世를 잡아와
방송을 시켰더니 덜덜 떨면서 애국가를 틀어야 할 순간에
민요를 틀었다」고 써서 쓴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청취자를 안심시키려 菜根潭을 방송 그 무렵에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아나운서 혼자 器機(기기)를 조작하면서
뉴스와 음악 등을 방송했는데, 그날 5·16 혁명을 알리는 첫 방송은
7호 스튜디오로 불리는 작은 방송실에서,
내가 뉴스를 진행하는 메인 마이크 앞에 앉고 송영규 아나운서가 보조 자리에서
턴 테이블에 행진곡을 걸어놓고 기계조작을 해주었다.
내 앞에는 朴正熙 장군이 꼿꼿이 서서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金東河(김동하·前 마사회장) 장군,
李周一(이주일·육군 대장·감사원장 역임) 장군과 함께 金鍾泌(김종필),
李錫濟 중령이 서 있었다. 정문순 중령, 이형주 중령은 내 뒤의 작은
의자에 앉아 권총을 빼든 채 나를 감시했다.
타령에 이어 방송이
시작되어 애국가가 나가고, 그리고 5시 正刻(정각)
행진곡과 함께 5·16 혁명 방송이 시작됐다.
나는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張都暎』으로 끝나는 혁명공약
방송을 같은 자리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일단 성공적으로
첫 방송을 내보낸 뒤, 나는 李錫濟 중령과 의논해
혁명공약 방송 사이사이에 다른 프로그램을
넣어 가면서 방송을 계속했다.
李중령이 『청취자들을 너무 놀라게 하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해서 菜根譚(채근담) 등으로 엮은
「마음의 샘터」라는10분짜리 프로그램을 그 긴박함
속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방송했다.
오전 7시에는 「미국의 소리(VOA)」 방송도
그대로 받아서 내보냈다. 그때 「미국의 소리」에
가 있던 장기범 선배의 방송에서 혁명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대목이 나오자 즉각 중단했다.
사복에 카빈 총을 들고 지휘하던 金鍾泌 당시
金鍾泌 중령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검정 양복 차림이었는데, 한쪽 머리칼이
축 처져 내려온 데다가 손에 카빈총을 들고 군인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에서 본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자 같았다.
누군가가 金중령이 서울大 사대를 다녔다는
귀띔을 해주어서 친근감이 느껴지던 참인데, 마침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오전 4시 40분경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이곳 남산 KBS 방송국만 접수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연주소이고 방송이 발사되는 곳은
「延禧送信所」라는 곳이다.
그곳에서 자키(콘센트) 하나를 빼든가 스위치를
내리면 방송은 되지 않는다. 그곳을 빨리 챙겨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전했다.
金중령은 『그런 절차가 있느냐』며 깜짝 놀랐고,
서둘러 송신소로 군인들을 보내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延禧洞(연희동)에 있는 송신소로 향한 군인들이 阿峴洞(아현동)
언덕을 넘어 신촌역 부근을 지날 때 5·16 첫 방송은 전파를 탔다.
연희송신소에 군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혁명방송이 탈 없이 나간 것이다.
그날 연희송신소 담당 엔지니어는 서울大 동문으로
나와 인연이 많은 鄭溶文(정용문·前 한솔PCS 사장)씨였다.
그는 새벽에 방송 스위치를 올리고 나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방송이 나오는데 이상했던 것이었다.
난데없이 행진곡이 울려 퍼지고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방송이 나오자, 그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남산연주소로
연락을 해볼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방송 아나운서는
전날부터 같이 숙직을 하는 「朴鍾世」가 분명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닌 朴鍾世가 방송을 하는데, 스위치를
내릴 수도 없어서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생판 모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면 방송은 중단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가끔 鄭사장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혁명군은 방송국 접수 계획을 세우면서
처음에는 혁명공약을 방송할 아나운서를 외부에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로 여러 의견이
오간 끝에 청취하는 국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當直(당직) 아나운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송을 하자는 쪽이 우세해 결국
내가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방송국 당직을 택한 지혜가
혁명방송의 성공을 가져온 셈이 됐다.
엔지니어들,
달아나서 파출소에 신고 그 당시 나는, 나에게 식은땀을
줄줄 흐르게 했던 한영식, 임시현 두 엔지니어가 어떻게
극적으로 방송국에 나타나게 됐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사람은 2층
主조정실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바로 뒷담을 넘어 중구 筆洞(필동) 쪽으로 해서 명동까지
내달려 파출소에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관들은
「지금 KBS에 군인들이 쳐들어 와 총을 쏘아대고 있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무슨 소릴 하느냐』며
도무지 믿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방송시간이 다가오자 책임질 일이
생길 것 같아 조심조심 방송국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지금의 적십자사 근방에서 자신들을 찾는 군인들을 만나 한걸음에
방송국까지 오게 됐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 두 사람이
겁에 질려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혁명방송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혁명방송을 모두 끝낸 뒤,
신분증을 넣어서 텔레타이프실 밖으로
내던진 양복 생각이 나서 가보았다. 하필이면 양복은 텔레타이프용 기름통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신분증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양복은 세탁을 해도 기름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얘기를 들었는지 방송을
담당했던 李錫濟 중령이 나중에 양복을 몇 벌 보내 주었고,
소문이 퍼지자 훗날 유신고속 사장을 지낸 朴昌源(박창원) 장군도
양복 몇 벌을 보내 주었다.
『해외로 도피할 선박도 인천 앞바다에 준비』
라일락 꽃 향기가 몹시도 진하던 5월의 새벽에 나는
잠시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命運이 걸린 군사혁명이
바로 나의 입을 통해 전파를 타고 공식적으로 국내외에
선포되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던것이다.
남산연주소 2층에 있던 제7방송실은
그후 5·16 첫 방송 기념관이 되었다.
밑줄을 그은 原稿(원고)가 사진틀에 넣어져 벽에 걸리고,
그때 사용한 마이크와 당시 朴正熙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것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혁명공약이 인쇄된 전단을
받아들고 두려움 속에서도 失笑(실소)를 금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 전단의 앞면에는 혁명공약이 인쇄돼 있었고, 뒷면에는 소설이 인쇄돼 있었다.
5·16 전야에 종로구 안국동 光明印刷所
(광명인쇄소)에서 비밀리에 혁명공약을 인쇄하면서 사장
李學洙(이학수)씨의 지시로 한 면은 소설을 인쇄해
그 면을 위로 가게 쌓아놓았었다 한다.
소설을 인쇄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오전 9시까지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데, 강찬선씨가
가장 먼저 출근해서 교대를 해주어 나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