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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쿠스회(D) |
프란키스쿠스회(F) |
.경제적 독립-경제적 불안감 없음 .지적 열성, 포교 중심적, .문제에 대한 열정적 탐구 <주위의 시선 : 이들의 열정과 개방적이고 이성적인 탐구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 |
.배타적인 내재주의 .독특한 학문적 관심 <형이상학, 빛의 물리학> |
수도사들은 대학보다 속한 수도회에 충성심을 보이는 인문학부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열중
-> 직업적 자율성, 자기통제권을 지키려는 학문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협
o 도미니쿠스회의 A사상의 필요성 주장
학문애호가들이 아닌 이 교회의 지식인 기사들은 기독교의 적들과 싸우는 무기로 사용하
기 위해<적절하게 해석,‘수정된’>A의 형이상학, 과학적 저술들이 필요
o 서구 지성사의 중요한 교차점에서 종교적 열정과 지성적인 힘의 잠재적 결합
D회와 F회의 신학자들은 현대적 의미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아닌 열정적 보수주의자
라 칭함. 유럽의 각성과 되돌려 질 수 없는 시대적 조류는 이교도 철학자들에 의해 전개된
이성의 도구들조차 정통 종교의 장기적인 이익을 발전시키는데 이용 가능하다고 믿음
o 오베르뉴의 기욤 - [우주에 관하여]
- 주된 목표 : A가 분석한 자연세계와 성서에 기술된 선한 창조행위가 동일하다고 간주
- A의 형이상학을 이용 카타르 교를 논파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리 수립에 시도.
- 카타르교 사상에 대한 A사상에 의한 반박을 시도함으로서 A연구에 동기부여.
cf> A는 자연적인 우주 설명, 선과 악 모두 잠재적인 힘.
카타르 교는 물질은 악, 정신은 선 근본적이며 서로 상충하는 우주원리이며 각자
의 제일 원리이며 신을 함축.
- 어떤 의미에서도 실재자는 스스로 대항하여 “싸우지”않는다
- 자연적인 우주는 Uni-Verse : 단일한 실재자
☞카타르교의 반박: 그것이 하나이상의 기초원리나 원인을 가질수 있는가?
☞기욤:- 하나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통합된 체계로 봤을 때 드러나는 특징들이며 자연
의 모든 상반 자들은 공통된 어떤 근원적인 실재자가 있음을 함축한다.
- A는 그 실재자가 존재자 Being이며, 존재자와 상반되는 것은 비존재
자 Non-Being<존재하지 않는 것>임.
- 물질과 정신은 대립적이지 않고 조화로운 결합.
- 순수한 형상인 신은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존재자
<덜 완전한 실체들이 결함 있거나 사악하다는 의미가 아님>
- 우주의 모든 것은 그것의 진정한 형상,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고 그것의 구
조적 한계 내 에서 가능한 한 완전해지려는 과정 중에 있음
- 자연적 우주, 존재자의 세계는 전적으로 선함
- 악의 문제에 대하여
① A, 인간에 의해 깊이 뿌리박힌 타고난 결함이라는 죄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고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적게 사랑하는 경우처럼, 인간은 자연적인 충동을 조절하거
나 규제하지 못하는 경우에 잘못을 저지를 경우가 가장 많다고 생각
② 기욤의 악과 죄 <St. Augustinus적 결론 도출>
i> 악이 존재자의 한 형태가 아닌 존재자의 부재, ‘결여’라는것.
자연적 성장의 소산물이 아닌, 자연적으로 성장하지 못함으로서 얻어진 결과
<현대적인 유비로서, 인간성의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집착”>
ii> 죄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사용할 때 하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것이며
자연적인 질서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것이 아님.
자연적인 우주는 신, 자연이 의도했던 대로 사용할 때 선하지만, 훈련을 받지
못하거나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잘못 사용 시 약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
<ex: 성적욕구>
악은 인간의 작품이지 신의 작품이 아님.
St.Augutinus의 전형적인 죄 - 욕정이나 ‘현세욕’-> 신의 도움 없이 통제 불
가능한 금지된 쾌락의 욕구
o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 대한 묘사
- 자연적인 선성 ≠ 초자연적인 창조자의 선성
- 물질, 형상, 공간,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은 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우주라 생각지 않음
- 창조자가 모든 존재자들을 매순간 보살핀다는 생각에 동의치 않음
- 자연과 역사에 능동적으로 관여치 않는다고 생각
- 물질적인 우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주장
o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부동의 원동자
- 플라톤의 신적인 제작자보다 훨씬 더 비활동적인 passive 존재
- 스스로를 의식하지만, 인간에 대해선 무관심한 존재
- 자연 변화의 규칙적인 과정들을 야기하는 힘을 지닌 존재, 인격이 아님
※question
우주를 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실재자라고 생각하는 것과
신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는 독립적인 체계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세계의 영원성에 관한 논쟁 - 중세시대 과학과 종교에 심각한 논쟁 야기, 목적지에 따라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소름끼치는(?) 결과를 주게 됨>
①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 창조자와 창조된 피조물을 혼돈<우주와 뒤섞인 신>
i> 신 ⊂ 우주 : A에 의해 도출된 결론, 부동의 원동자는 실제 그 원동자 스스로가 동
기를 부여해주는 자연세계의 일부
ii> 신 ⊃ 우주 : 다비드 , 아말릭의 주장
iii> 신 〓 우주 : 순수한 자연 숭배, 기독교인들에 의한 이교도의 개종을 위해 전도
사를 보낸 이후 논란이 된 이설
☞기욤, 전통신학자들 수용거부
② 세속주의 - 우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신을 제거<실질적으로 우주로부터 제거된 신
>, 우주를 구성하는 사물들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은 그것들 자체의 본성에
내재하는 원리들, 법칙들에 따른 것.
창조자가 그것들을 만들고 그런 식으로 계속 유지하게끔 하기 때문이 아
님. 창조, 구원도 없다.
“시계 제작자로서의 신”이외에 다른 어떤 신은 없다.
o 두 가지의 견해를 다룬 페르시아의 신플라톤주의자* 아비세나
“유출 emanation”과정, 신성의 범람과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신의 우주 창조를 주장
*신플라톤주의
창시자는 암모니오스 사카스(175?∼242)이고, 대성자(大成者)는 플로티노스(205?∼270)이며, 그 밖에 아멜리오스 ·포르피리오스 ·이암블리코스 ·테오드로스 ·프로클로스 등이 잘 알려졌다.
만물의 본원인 ‘일자(一者)’로부터 모든 실재가 계층적으로 ‘유출’하여, 보다 낮은 계층은 그 상위의 것을 모방하며, 보다 복잡 ·불완전하다. 또 만물은 ‘관조(觀照)’에 의해 일자에 계층적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쓴다. 이 상하 두 방향에의 운동이 실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이 운동에 의해 감각적인 것을 벗어나 일자로 향하며, 이것과의 직접적인 합일, 즉 ‘탈아(脫我)’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희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은 형성기에 있던 그리스도교에 받아들여져 오리게네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등 교부(敎父)뿐만 아니라, 후의 그리스도교 사상에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02483]
☞ 아비세나에 대한 기욤의 반론 - 창조는 필연적이 아니며 신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고 세계는 유출의 산물이 아니며 “샘이나 분수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단지 그것이 나오기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것이라고? 아니다 신이 사물을 만든 것이다.
- “자연이라는 책”이 먼저 존재하고 외부에 머무르는 지성 & 의지의 소산물이 우주라
는 사실.
- 과학과 신학은 충돌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과학은 신학 없이는 불완전하다고 선언
- A의 자연철학 외에 성서의 계시와 교부들의 해석된 복음과 더불어 시작하는 성스러운
철학이 필요하게 됨.
o 1228, 도미니쿠스 수도회 - 사제들의 이교도 철학, 과학에 대한 연구 금지 법령 공포
<사제 들은 비밀리에 연구>
o 1242, 알베르투스 테오도리쿠스<Albertus Magnus* 파리대학의 최초의 독일인 신학교수>
- A적 사고에 관심
- 우주 전체는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창조자로부터 도출되지만, 개별자들에 대한 이해
는“오직 경험만이 확실성을 제공” 사물들의 실제 모습에 대한 이해는 스콜라적인 논리
학에 의한 도구적 사용은 한계가 있다고 함.
- 각각의 탐구영역은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연구 공간& 연구 방법이 있다
- 경험적인 연구, 논리적인 추론, 성서적인 해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진리들 간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Albertus Magnus, 1193?~1280.11.15]
슈바비아주(州) 라우잉겐 출생. 도미니코회(會)의 수도사였으나, 도중에 약 10년간 교회의 요직에도 있었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쾰른 ·파리 등 많은 도시에서 교육에 바쳤다. 신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수학 ·자연학 ·형이상학 등에 관하여 폭넓은 교양을 지녔으며,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서유럽으로 이입(移入)되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라틴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의도에서도 분명하듯이, 당시 가장 심하게 논란되었던 그리스철학과 그리스도교 관계의 문제에서, 전자의 특징인 이성적 탐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즉, 신학과 철학 사이에 명백한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철학이 지니는 자율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였다.
이성(理性)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이성의 한계를 깨달았던 그는 철학 분야에서는 이성으로 탐구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즐겨 자연을 택했다. 이를테면,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광물학 ·연금술 ·의학 등 광범위한 연구를 하였으며, 그의 사고방식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귀납적인 특징이 명백하게 보인다. 쾰른에서 가르치던 때의 제자 중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는데, 그는 스승이 마련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07577]
o 로저 베이컨*
(최초의 근대과학자, 그리스어, 아랍어, 스페인어,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다른 몇가지 언어습득을 전제로 한 A와 성서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 1250년대까지 프란키스쿠스 운동의 대표적 지식인)
<알베르투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베이컨의 의견>
동의 |
반대 |
-자연의 작용을 기술시 직접적인 경험을 대 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 -수학이 자연적인 과정을 이해하는데 유용. |
-자연과학과 기독교를 올바르게 조화시키지 못한 점. -필요한 것은 분석이지 단순한 기술이 아님. -시험할 수 있는 이론이지 단순한 일반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실험이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는 점. -지나치게 사색적일뿐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점. |
- 학문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작업
13C 자연을 바라보는 <‘과학적인’ 이란 용어가 근대에 의미하는 것과 같은>과학적 전통이 없었고, 단지 종교적인, 정치적인 방식으로만 할 수 있었음.
수학=창조자의 마음에로의 접근, 광학= 성령의 가장 순수한 표현
“모든 사물이 힘의 방사나 그 자체의 유사성을 통해 주변 대상들에 작용하는 막대한 힘의 회로망을 우
주라고 간주하는 신플라톤주의적 개념을 받아들임”
(French and Cunningham, op. cit., p. 230. Lindbergh, op. cit. p. 313)
베이컨 [Bacon, Roger, 1214 ?~1294.6.11]
서머싯주(州)의 일체스터 근처 마을에서 출생. 프란체스코회(會) 수도사로서 탁월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근대과학의 선구자로 평가되어 ‘경이(驚異)의 박사’로 불리었다. 옥스퍼드와 파리 양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照明說)에 영향을 받아 인식의 원천으로서의 신적(神的) 조명을 중요시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권위는 지식을 줄 수 없다고 하여, 학문상의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수학을 중시하고, 광학(光學)을 사랑하였다.
동시에 공론(空論)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 경험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그 방법으로서 경험적 방법, 실험적 방법을 중시하였으며, 철학에 경험적 방법을 도입하여 철학을 신학으로부터 구별하였다. 그는 또 연금술·점성술 등 근대과학의 전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 공학·역법(曆法)에 관한 독창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또한 그의 언어연구의 중요성은 성서의 비판적 연구의 선구가 되었다. 저서에 《대서(大書) Opus majus》(1733) 《소서(小書) Opus minus》 《제삼서(第三書) Opus tertium》 등이 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74611]
o D vs F 의 논쟁
- 1270 고조, 수십 년 지속
- 과학과 종교의 전쟁이 아님<갈등의 특징>
- 1260, 급진적 A집단 등장 이전까지 A연구자들은 반종교적 비난을 받지 않음.
- 사실상 중세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공유했던 신념이었으며, 갈등이 발생시 신앙이 이성 을 분명히 이
긴다는 신념은 과학적인 탐구에서는 제한적인 영향을 미침.
ex>지구축 중심 순환<14c 학교> vs "신은 움직여지지 않은 세상을 만들었다."[시편 92:1]
<이론의 승인 거부!>
※ D&F회의 중요 문제
① 종교적인 탐구방식과 과학적인<“철학적인”> 탐구방식의 고유영역과 경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② 이 둘 간의 건전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cf> T.Aquinas*
두 가지 지식영역을 어떻게 조화로운 하나의 영역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라고 제기, 논쟁의
격렬, “자연철학”은 여기서 머물게 됨.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3.7]
이탈리아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크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12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12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1268∼12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12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ae》(1266∼12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S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1259∼1264) 등의 교과서적 ·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 ·고귀 ·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 ·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출처:http://100.naver.com/100.php?id=155449]
o 보나벤투라*
-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일원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존재들은 신의 참여나 개입
없이 작용하는 그것들 자체의 원인과 결과를 갖는다. 라는 A의 주장, 부정.
- ‘세계의 영원성’ 부정<논리적 불합리성 주장>
- 신이 모든 자연적인 사건에 직접적으로 참여
= 신적인 원인이 각각의 자연적인 원인의 배후에서 능동적으로 작용
ex> 나뭇잎의 변화 (유기적인 성장 VS 신이 부여한 '종자적 Semina' 성향의 결과라는 입장을 취함)
*보나벤투라 [Bonaventura, 1221 ?~1274.7.15.]
토스카나 지방의 바그노레지오 출생. 프란체스코수도회에 들어가 파리대학에서 공부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교수 자격을 얻어, 모교에서 신학교수를 하였다(1248~11255). 1257년 프란체스코수도회 회장이 되어 수도회 조직 정비 ·강화 등에 힘쓰다가, 1273년 추기경과 알바노의 주교가 되었다. 새로 도입된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을 이해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 신비적인 사색을 존중하였다. 주요저서 《하느님께 이르는 정신의 여행:Itinerarium mentis in Deum》(1472)에는 철학에서 시작하여 신학 ·신비사상으로 나아가는 그의 사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482년 시성(諡聖)되었다.
o T. Aquinas
- 자연적인 원인에 초자연적인 원인을 덧붙이는 작업을 통해 물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어 선 안 됨을
주장
- A 자연철학의 문제점<부족한 점>
자신들의 본성에 따라 행동, 성장하려는 내적 성향을 지닌 창조된 모든 사물들의 존재가 전적으로 신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
- 창조는 시간 속에서 발생한 것이 아님
- 우주 전체에 대한 신의 영원한 지배와 시간 속에서 자연적인 원인들의 잠재성 사이에는 무모순
(‘순수한’ 과학자로서 자연을 연구하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의 내부에 머물 수 있음을 근거)
- T.A 연구 전반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논제
“은총은 자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
i> 종교와 자연과학 간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ii> 이성의 영역을 신학의 영역 깊숙이 확장하여 “자연 신학”을 만듦.
☞ 자연적인 이성을 사용해서 증명할 수 없는 교리 세 가지
① 무로부터 우주의 창조
② 삼위일체로서의 신의 본성
③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역할
①,②,③은 경험에 의해 도출이 불가능한 이 진리는 신앙에만 의존.
반면,
창조자의 불멸성, 완전성, 선성, 지식, 신의 존재에 대한 관찰된 자료를 분석, 일반화
는 인간의 이성 사용에 의해 도달할 수 있다고 봄.
- T. A는 보나벤투라에게
자연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 자연적 이성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해로운 과학, 해로운 종교를 만듦을 지적>
o 보나벤투라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개적 논쟁
->A의 자연철학연구 금지령을 철회하는 계기
o 사회 전반의 갈등과 연결된 대학 내부의 갈등을 창출하는 동기들
- 학생 & 교사들, 세부적인 삶을 규제하는 권력<수도사, 교회의 대리인들, 왕, 교사, 박사>의 일부가 된
다는 것.
- 학생. 교사들의 수도사들에 비한 재정적 열세
- 한때, 도미니쿠스 수도사는 이교도와 싸우고 프란키스쿠스 수도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허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세속적 출세의 야망을 포기하고 금욕적인 삶의 방식을 수용하
며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던 영웅
o 도미니쿠스*와 프란키스쿠스* 사망이후 - 수도회는 권력화, 세속화 과정
들어라, 들어라, 개들이 짖는다.
그 거지들이 마을로 온다.
어떤 이들은 누더기를, 어떤 이들은 들쭉날쭉한 천조각(프란키스쿠스 수도사)을
그리고 어떤 이들은 벨벳법복(도미니쿠스 수도사)을 걸치고서
*도미니쿠스 [Dominicus, 1170 ?~1221.8.6]
수도회도미니크회(會)의 창립자. 도미니코라고도 한다. 카스티야 지방의 명문에서 출생. 발렌시아의 주교좌성당(主敎座聖堂)부속학교에서 공부하고, 1199년 오스마의 주교좌성당 참사회원(參事會員)이 되었다. 1206년 친구이자 그 곳 주교인 디다쿠스와 같이 로마에 갔다 돌아오는 길인 여름, 남프랑스의 알비파(派) 이단자들에게 선교한 교황특사들과 몽펠리에에서 만나 그들의 실패담을 듣게 되었다.
디다쿠스는 이단자가 편력하며 설교하는 방법을 역이용, 청빈 속에서 편력 설교로써 선교할 것을 교황특사에게 권하였고, 스스로도 그 방법에 따른 선교운동을 전개하였다. 1215년 툴루즈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듬해 교황 호노리노 3세에 의해 도미니크 수도회로 인가되었다. 1234년에 시성되었다.
*프란체스코 [Francesco d'Assisi, 1182~1226.10.3]
프란체스코회의 창립자. 가톨릭의 성인(축일 10월 4일). 중부 이탈리아아시시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는 향락을 추구하였고, 기사(騎士)가 될 꿈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20세 때에 회심(回心)하여, 세속적인 재산을 깨끗이 버리고 완전히 청빈한 생활을 하기로 서약, 청빈 ·겸손 ·이웃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였다. 1209년 11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만나, 청빈을 주지(主旨)로 한 ‘작은 형제의 모임’의 최초의 수도회칙(修道會則)의 인가를 청원, 구두약속을 받은 다음 이 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에게 권유하여 여자를 위한 수도회(클라라회)를 설립케 하고, 다시 속인(俗人) 남녀를 위한 제3회도 조직하였다. 만년인 1224년에 자신의 몸에 성흔(聖痕: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옆구리와 양손 ·양발에 생긴 5개의 상처)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자애로운 인품과 그가 행한 기적은,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는데,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 되어 있다. ‘신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 불리고 있듯이, 《태양의 찬가》를 비롯하여 뛰어난 시도 남겼다.
o 1300,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 세속의 성직자들과 주교들이 반대해온 탁발 수도사들의 특권(전도, 고백성사, 매장관련 특권) 박탈
o 1318, 탁발 수도사들은 대학에 복종서약서에 서명
첫댓글 글자배열이 엉망입니다 약속을 잊고 있다가 방금 연락받고 어수선합니다. 다녀와서 정리하구 질문도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