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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출 도정기
신군부와 5공화국.
복학생이던 나는 주로 도서관에 상주하면서 불안과 희망을 번갈아 끌어안았던 것 같다. 숨죽이며 결사항전을 도모하던 동토의 상아탑 시국에도 나는 주로 공부에 파묻히는 도서관파였다. 그리고 졸업식 직전 공주사대 조재훈 교수님의 추천서를 들고 면접을 보기 위해 모범 대졸자의 복장을 갖추었다. 교문에 들어서자 함박눈이 내렸고 앞치마와 흰 모자를 쓴 소녀들이 유리창 닦다가 틈입자를 향해 동그랗게 내다보기도 했다.
키가 크고 카리스마 강한 교장 수녀님이 단칼에 결정하셔서 다음날부터 나는 알토란 여고생들을 가르치는 총각선생이 되었다. 유도혁 선배 이상국 선생 등과 하숙을 했고, 세상은 암울했지만 나의 청춘은 울분과 로망을 동시에 껴안으려 했다.
첫 보직은 윤리과 반공계.(빨간 색깔로 쫓겨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새로운 생활은 일단 만족이었으므로 지인들을 통한 소개팅은 모두 거절했다. 교복 자율화시대 인문계 여고생들은 착하고 예뻤으며 탈춤반 강승구 선생과 후배 이재무 시인이 수시로 방문해서 술상을 차리곤 했다. 불안과 젊은 피의 혼재의 시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즈음 삼민투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사태가 일어났다.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는 그 주장을 교사들은 대부분 이해하지 않았다.
“남의 나라 문화원을 왜 점령해. 이제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책도 못 빌리겠네.”
미즈심 선생님이 혀를 찼다.
“미국이 뭔 상관이야. 웃기는 애들.”
거구의 양선배도 맞장구치며 출석부를 챙겼다.
“걔네들이 우리보다 아는 게 있었을 거여.”
(지금은 망자가 된) 이 선생이 끼어들기도 햤다. 그러다가 송 선생님과 미즈심 선생님이 짧게 언쟁을 했다. 송은 이 상황을 자기 아들의 미래상에 오버랩시켰다.
“나 역시 내 아들이 저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면 당연히 막았을 거예요.”
“그렇죠.”
내 자식 염려에 모두 공감대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데, 송이 이어서.
“하지만 내 말을 어기고 올라가면 말할 겁니다. 나는 장한 아들을 두었노라고. ……난세에 무심한 우리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교직 3년차, 그해 6월은 아카시아가 절정이었고 매미소리가 더 아프게 울었다. 그 와중에 왠지 이 난세의 도정에 내가 포함될 것 같은 불안감이 스치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를 쫓겨난 것이다. 소심증의 우려가 현실화되면서 어쩌면 영원히 교단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일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대학 동기생 노병래 선생의 소개로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배갈을 비우면서 실업자 4개월의 공백을 마감했하는 결정을 내렸다. 골목길 3층 계단 눈 내리는 출근길이었던가. 대전시 은행동 골목길에서 검정고시 준비하는 여학생들이 튀김을 먹다가 오그르르 머리를 숙이자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가슴이 짜르르했다. 6개월 후 대전역 육교 옆 성지학원까지 양다리 걸쳤다. 고려학원에서 고입․대입 검정고시반과 공무원반을 가르쳤고 틈새의 시간에 성지학원에서 대입 종합반과 단과반을 뛰었다. 두 개 학원을 주당 50시간 이상 강의했는데 하루에 시내 버스를 여섯 번 내지 여덟 번 정도 탔던 것 같다. 그 바쁜 와중에도 다시 만난 칠판이 좋았는데 수시로 민중교육 해직 동지들을 만나 전의를 다듬으며 서른 초반에 진입했다.
민중교육지 사건의 김진경 시인이 감옥에서 나오던 날.
출소자의 대전 형네 집에 우르르 모여있다가 서울의 박해전 선배와 통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개로 동아일보사 임시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아일보 신문사는 광화문에 있었고 잡지사는 여의도에 있었는데 나는 출판부 쪽으로 소개 받았다.
면접을 보기 위한 6층 휴게실.
조부장님의 중재로 김국장님과 마주 앉았다.
- 숭전대학교 부총장이 누구요?
- 고범서 교숩니다.
그때는 지방 캠퍼스가 없던 시대였고 유일하개 그 대학만 두 개의 캠퍼스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박해전 형이 졸업한 숭전대 서울캠퍼스 출신인 줄 아는 것 같았고 나 역시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문사로 끼어들었고 교열부에서 수시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문장 첨삭에 빠졌다. 86년 말 애학투의 ‘건국대 사태’로 대학생 2000여 명이 한꺼번에 연행되던 절망의 도정이었었다.
동아일보사 진출은 동가식서가숙의 무대뽀를 작심하고 벌인 거사다. 주거지가 아예 없었으므로 퇴근 시간이 임박하는 오후 네 시가 되면 ‘오늘은 어디서 잘까’를 고민했다. 주로 술자리 마지막 대작자네 집에서 잤다. 어떤 때는 잠자리가 없어서 대전행 열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다시 서울행 새벽열차를 타기도 했다. 새벽 영등포역에서 천원 짜리 해장국으로 때우며 후두두 달리던 맛도 있었다. 나중에 ‘벗 전무용 시인→ 윤중호 시인→공학도 허정’ 등의 자취방을 전전하며 무시무시한 만원버스에 시달렸다.
날마다 술판이었다. 동아일보사 안기석, 김병희 기자 등이 잘 대해주었고 윤재걸 같은 명사 선배네서 두어 차례 머무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시국이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의 죽음이 6월항쟁의 분출구를 열었으나 직선개헌 이후에는 오히려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만약 양金이 단일화를 이루었다면 오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즈음 민교협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범대 늦깎이 졸업생 박명순을 만났고 나는 둥지를 틀었다.
다시 선 교단, 탄천중학교로 복직.
89년 4월 1일. 돌아온 탕아처럼 팬지꽃 피어있는 투시담을 짚으며 타박타박 걸었다. 공주에서 부여행 직행버스로 30분을 달려서 면단위 교정에 들어서던 날 나는 그냥 담담했다. 하늘을 향해 던지는 버드나무 연두빛,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아이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늘상 옆에 있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그래서일까.
‘여러분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수십 번 연습한 그 한 문장만 달랑 첫 인사로 던졌을 뿐이다. 시국은 여전히 격동의 소용돌이였다. 복직 한 달 뒤부터 전교조 교사들이 우르르 해직되기 시작하더니 여름쯤에는 1,500명을 단두대에 세우고 한꺼번에 목을 날렸다.
아들 강등현을 낳았다. 김준배 교장님이 그해 8월 종업식장에서 박종건 선생 유승철 선생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의 교사가 모두 아들을 낳았다고 치사하였다. 이상했다. 수업 중에도 문득 아들내미의 방싯대는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92년에는 딸 강주현을 낳아서 남매를 소유한 행복을 누렸지만 늘상 시국이 불안했다.
그 학교 5년 임기가 끝내려는데 ‘해직교사 원상회복 추진 위원장을 맡고나서 징계위원회에 출두하게 되었다. 1차는 도교육청이고 2차는 교육부였다.
- 선생님의 신분으로 왜 그런 행동을 합니까?
- 이 나라와 이 땅의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보았다. 징계위원들 옆으로 튀는 노랗고 파란 불꽃들의 파편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간절함의 토로와 현실은 늘 달랐다. 92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집중하며 개표요원으로 참석했지만 결국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학교를 떠나는 이임인사에서.
“여러분 미안해요.”
인사하다가 울컥 치밀면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헤어짐이 슬픈 담임 교실 1학년 1반 아이들도 펑펑 울었다.
소도시 공주여중으로.
소녀들의 학교로 전출가면서 기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교무실은 교실 두 칸 반 정도를 뚫어서 끝이 안 보일정도로 넓었다. 유지남, 유문상, 김홍철 선생 등 낯익은 얼굴들을 새롭게 만났다. 그리고 바빠야 잊는다는 마음으로 잰걸음을 누볐다. 전교조 집회와 보충수업 채우기, 창작 행위와 아이 키우기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소설집 ‘비늘눈’과 시집 ‘유년일기’를 출간했다. 나이 사십에 늦게 출간한 처녀 생산물로 베스트 셀러의 꿈에 부풀었으나 행운은 나를 비켜났다. 그 와중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정지상과 김부식’ ‘이규보와 이제현’ ‘랑구와 파롤’을 되새김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그러나 모든 교직 기간을 통 털어서 이 학교 제자들의 이름이 제일 가물가물한 게 아직까지도 미안하다. 같은 학교 이석동 선생과 제자 선생 맹계현을 중매 서서 부부의 연을 맺어준 게 가장 큰 성과랄까.
공주는 전보 경합 지역으로 10년만에 떠나야 하는 규약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9년차로 1년만 지나면 지역 만기가 차서 타시군으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이차구차로 공주중학교 발령이 났었고.
정원감축을 받아 공주중학교에서 딱 1년만 근무하게 된 것이다. 조미선 선생과 함께 (그니는 탄천중과 공주여중에 이어 같은 학교 옆자리에서 세 번째 근무했다.) 교무실로 들어서자 퇴임을 2년 앞둔 교감님이 ‘1년만의 전출’을 예고한 채 발령장을 들고온 교사를 답답한 표정으로 맞이한다. 연구부장 최상철 선생님이.
- 제가 유지남 친굽니다.
하는 바람에 잠시 헷갈렸다. 유선생보다 열네 살 더 많은 벗이란다. 아홉 살 연상의 그와 나는 깍듯한 존댓말을 주고받으며 살았다. 나는 1년만 지니면 떠날 것이므로 어느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지 못했다. 모처럼 만난 머스마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순식간에 1년이 지나고 다시 송별회 자리.
교무부장으로 자리를 바꾼 최상철 선배는 그야말로 밤톨 같은 예의범절로 1년을 지내다가, 정작 송별회 자리에서 술을 따르더니.
- 마셔라 쓰리랑카야. 너 참 어려웠다.
토로하면서 구멍을 팍 뚫었다. 그렇다. 나의 우울한 인상이 여럿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수컷들은 그렇듯 돌발성 비속어를 내밀면서 친밀 관계를 트기도 한다.
97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자는 인동초 김대중이다. 당선되자마자 전교조를 합법화시켰다. 대권 도전 4수생 시련의 역정이 싸그리 사라지고 일단 영광의 빵빠레만 터지는 듯 싶었다. 젊은 총리 이해찬이 교원 정년단축을 시도하는 바람에 교원들의 반발을 샀지만 기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역 만기 10년 케이스가 끝나고 마침내 아들 딸들과 헤어져 살아야 하는 시점.
서산 전출을 가면서 그나마 공주에서는 가장 가까운 고북중학교를 선택했다. 어느 새 칠판 앞에서 만나는 학생들보다 내 아파트의 핏줄들 쪽으로 몸이 기울던 40대 중반이었다.
고북중의 첫 회식 때.
40대 교감님이 전직원에게 2차를 쏘았다. 면단위 단란주점 탁자로 4홉 짜리 맥주병이 주르르 쌓였고 테이블 저쪽 화면에서 섹시 복장 여자들의 격투기 장면이 쏟아졌다. 나는 오로지 공주에 두고온 내 아들 딸 생각뿐이었다. 음악 소리를 뒤로 하고 노래방을 빠져나와 공중전화 박스에서 공주에 전화했다. 10살 짜리 아들이 받는다.
- 아버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지.
- …….
- 일주일 지나면 갈 테니까 파이팅을 외쳐. 응, 야아, 파이팅.
- 하이티힝.
아들내미가 기어가는 목소리가 아, 벼랑끝으로 잦아지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골 찻집의 안연옥 시인에게 전화를 하다가 ‘아들이 보고 싶어요.’ 하며 펑펑 울었다. 안연옥 시인은 ‘수화기 저쪽에서 터지는 그 울음소리가 아름다웠다’고 회고해서 오래도록 민망하게 했다.
공주로 가기 위해 모든 시간을 쪼개었다.
우선 공주에 있는 연수원에 길을 텄다. 국어과 연수나 한문 부전공 연수도 그때 받았다. 월요일마다 서산행 새벽 버스를 탔으므로 직원회의에 가까스로 세입하거나 지각이 다반사였다.
어쨌든 새 학교에 적응해야 했다. 시골 아이들 역시 만만한 선생을 골라 찍어서 민감하게 자극시켰지만 그때까지는 젊어서인지 가급적 감당하려 애를 썼다. 그즈음 노선숙 선생이 다섯 명의 여교사를 모두 전교조에 가입시켜서 체면이 서기도 했다. 소재지에서 국화 전시회를 참석했고 소풍 가서는 동네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곤혹스러워하면서 쬐끔씩 정이 붙기도 했다. 이 학교도 1년 만에 떠나야 했다.
서산여중은 큰 학교였고 연령대가 젊었다. 50명의 평교사 중 내 나이가 두 번째로 많았고 신규교사들이 바글바글해서 얼핏 대학원을 연상시켰다. 연구부장을 맡았다. 승진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 자리도 그럭저럭 견디며 술을 마셨다.
그러던 어느 아침 전화를 받다가 미끄러져서 인대가 끊어졌고 학교를 2개월 정도 휴직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달까. 덕분에 공주의 내 집에서 2개월간 쉬게 된 것이다. 어린 내 아들 딸은 아파트 열쇠를 따고 ‘학교 다녀왔습니다.’ 하고 외쳤다. 평소에도 빈 집의 열쇠를 따고 허공을 향해 무탈한 귀갓길을 보고했었고.
연구 기획으로 전교조 길준용 선생이 옆자리에 앉았고 천수만 고향 동기생 정태궁 선생과 함께 도비산과 간월도를 돌곤 했다. 주로 전교조 교사들과 술을 마셨고 퇴근 후 고향 동창 박양렬 김병수 등과 어울렸고 서울에서의 동창생 홍성관 선생도 자주 합석했다. 시집 ‘하이에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 소설집 ‘엄마의 장롱’ 성장소설 ‘닭니’를 출간하면서 ‘본격 소설을 써야 하나’ 갸우뚱하던 즈음이다.
6년만에 돌아온 공주시 유구중학교.
다시 서산에서 짐 보따리를 쌌고 벗 홍성관 선생이 유구까지 실어다 주었다. 아내가 처녀교사 시절 근무하던 곳이다. 직물공장이 사라지면서 학생들 숫자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폐교된 인근 신풍 중고등학교가 병합된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급격한 인구 감소다.
세월이 너무 빨랐다. 어느새 아들 딸이 중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후배 관료들이 절반을 넘어섰다.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노무현이었는데 보수 성향의 교사들이 틈만 나면 그를 씹어돌려서 부글부글 내 속을 끓였다. 산문집 ‘선생님 울지 마세요’ ‘성장소설 ’꽃 피는 부지깽이’ 산문집 ‘쓰뭉 선생의 좌충우돌기’를 발간했다. 그리고 5년 세월이 또 흘렀다.
공주공업고는 원래 유구공고가 바뀐 이름이다.
담벼락 너머로 이사하자 유구중학교 토박이 제자들이 절반 넘게 진학해서 처음부터 낯설음은 없었다. 게다가 도서관 보직을 맡아서 육십 평짜리 사무실을 통째로 얻는 행운도 있었다. 최적의 글 쓰기 공간에서 시집 ‘꽃이 눈물이다’ 성장소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를 출간했고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강의했다. 장년의 평교사 자리로 굳어지면서 골방에 박힐 즈음 대통령은 ‘4대강 공사’의 주역인 MB 정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들 딸 모두 20대 청년 대학생으로 컸으니 기십 년 세월이 쏜살처럼 흐른 것이다.
어머니가 넘어져서 골반 뼈가 부러지면서 다시 서산쪽으로 내신을 내게 되었다. ‘공립학교는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어서 좋다’는 카드를 활용하는 것이다. 반기는 공간은 많지 않으나 그런 반응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끓는 사랑 나누고 싶은 게 많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