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울민족
 
 
 
카페 게시글
┣ 구 려 연 방 - 九 夷 ┫ 스크랩 평로치청은 신라에서, 제나라는 당에서 건국했다
동방문자 추천 0 조회 50 07.09.16 16: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운영진이 팝업,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평로치청-신라, 제나라는-당에서건국 2006-12-07 11:33
카테고리 : 역사를 찾아서 http://blog.paran.com/daesilla/14501180
4) 평로치청은 신라에서, 제나라는 당에서 건국했다

◀ 고구려의 축조물로 날조된 오녀산성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高句麗의 드넓은 강역만 해도 高句麗가 원래부터 대국에서 출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수도라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환인시(桓因市)는 대체 무엇인가? 고작 五女山城, 桓因市가 高句麗의 영토라면 高句麗가 朝鮮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一粟이 滄海를 계승 했다고 우길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高句麗가 桓因市, 五女山城에서 출발한 나라라면, “옛 땅을 회복하자(復舊土, 多勿)”는 國是조차 내세울 수 없다. 桓因市, 五女山城 이전에는 無이기 때문에 멸망하자, 자멸하자는 소리 밖에는 안된다. 축소돼도 너무나 축소된 역사다.

高句麗를 대신해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新羅는 隋, 唐이라는 티벳고원 북부의 오랑캐까지 끌어들였지만, 高句麗는 더 강했다. 멸망한 해에 大震國(건국 당시는 後高句麗), 93 년만에 平盧淄靑, 96 년만에 齊나라(唐나라 내에서 건국했다)라는 이름으로 재건된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들이야 말로 자신의 역사를 잘 인식하고 있던 한민족이다.

平盧淄靑과 齊나라는 각기 다른 나라다. 平盧淄靑은 761 년 부터 817 년 까지 존속한 나라이고, 齊나라는 765 년에서 819 년 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唐은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다. 그러므로 山東省 전체와 河北省, 河南省, 安徽省(현대의 행정구역)을 다스렸다는 平盧淄靑은 新羅의 영토에서 건국한 나라다. 817 년 唐 玄王이 新羅의 선무군(宣武軍), 위박군(魏博軍), 무령군(武寧軍 : 張保皐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淄靑을 공격 했다는 대목도 실은 新羅와 平盧淄靑의 전투에 新羅의 속국 唐의 군대까지 동원 됐음을 말해준다. 新羅가 군사 3 만(?)을 동원하여 토벌했다는 기록은 명백히 平盧淄靑이 新羅 영토 내에서 건국된 나라임을 알려준다.

大興(光聖文皇帝) 45 년(782), 淄靑의 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唐에 항거하니 文皇帝가 장수를 보내어 전투를 지원 했다(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고? 太白逸史는 李氏朝鮮 중기에 쓰여진 책이다. 李氏朝鮮은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 중국 대륙을 明 등에게 주었던 탓에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濊貊族의 나라다. 李氏朝鮮 건국과 동시에 역사말살도 함께 이루어졌다.

李正己는 唐의 節度使가 아니었다. 唐이 아니라 新羅에 항거했다. 平盧淄靑이 있던 山東省, 河北, 河南, 安徽省은 下代 新羅의 영토였다. 大震國에서 平盧淄靑을 군사 지원했던 것은 李正己가 高句麗 출신(平盧淄靑이 지배한 땅은 원래 百濟 및 東夫餘 땅이고, 高句麗 땅이 되었다가 삼국 말에 新羅 땅이 된 지역이다. 百濟는 중국 대륙 東海岸과 山東半島를 멸망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平盧淄靑을 건국한 李正己가 高句麗人 이라서 高句麗人이 세운 나라로 분류되지, 주민 대다수는 百濟系라 할 수 있다)이고, 新羅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날조역사에 의하면, 平盧淄靑과 齊나라는 존속 연대와 영토가 대부분 겹친다. 齊나라 영토 山東地域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山東 이었다. 齊나라 체제하에서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齊나라가 唐의 영토에 세워진 나라임을 지적하고 있다. 齊나라 영토가 18 km² 밖에 안되는 것도 티벳고원 북부에 불과한 唐에서 일어난 나라이기 때문이다. 高句麗系 군인 1200 명을 집단학살 했다는 기록도 齊나라가 新羅 영토가 아니라, 唐의 영토 내에 건국된 나라임을 알려준다.

唐으로 간 高句麗人이 몇 명 안되는 것은 “齊나라 체제하에서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齊나라는 高句麗人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華夏族 등을 피지배계층으로 해서 건국한 나라였던 것이다.

“洛陽의 물자 보관소 하음(河陰)을 공습, 무려 150 만개에 달하는 창고를 불지른 뒤, 사저를 짓고 군부대를 상주시킨(師道使賊燒河陰倉斷建陵橋初師道置留邸於河南府 舊唐書)” 나라는 齊나라가 아니라 平盧淄靑이었다. 하음(河陰)은 高句麗 영토에 있었다. 다시 말해 新羅 영토에 있었던 것이다.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왕(諸王), 재추(宰樞) 이하 차별 있게 나누어 주었다(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以下有差 高麗史節要)

티벳고원 북부에 150 만개의 창고가 들어 가는가. 齊나라가 5 회 이상 공격해 唐王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는 洛陽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시 新羅의 수도 金城은 武漢이다. 山東省 전체와 河北省, 河南省, 安徽省까지 확보한 平盧淄靑 때문에 湖北省에 있던 新羅 황제 역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新羅皇帝가 피난가자, 唐王도 덩달아 피난 갔던가? 中奴는 平盧淄靑과 齊나라의 역사조차 마구 뒤섞어 놓았다.

淄靑의 존재를 알린 靑州 博物館 館長이 해임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역사스페샬에 방영된 이유로). 高句麗人들이 中土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면 절대 해임되지 않았다. 원래 중국은 수많은 이민족이 국가를, 심지어 통일국가까지 줄줄이 세운 나라다. 高句麗人들이 중국 내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보태진다 해도 중국에게는 아무런 수치도 되지 않는다. 平盧淄靑이 唐의 영토가 아니라, 新羅 영토에 건국한 나라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날조한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다면, 淄靑 운운 한다고 해서 겁내지 않는다. 아니 겁낼 수가 없다. 역사왜곡한 사실을 모르는데 어떻게 겁낼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아직도 李成桂와 朱元璋의 거래로 역사를 바꾸고 우리나라 영토인 중국 대륙을 차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韓國學者가 중국에서 유적을 탐사하면 경찰이 따라 붙는다. 廣開土境大勳跡碑, 舞踊塚...... 三國의 유적은 보존을 구실로 화학처리 한다면서 다 훼손한다. 중국이 왜 이 땅의 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시시때때로 수집해 가겠는가. 제 땅도, 제 문명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혹시라도 自國史를 알아내게 되면 대처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歷史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常識 위에서 성립한다. 동북아 일부만 차지한 高句麗가 동아시아를 호령할 수는 없다. 北魏가 高句麗人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王妃로 맞이하고, 高句麗 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애도의식을 거행한 것은 高句麗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었기 때문이다. 唐의 武則天이 孝昭帝의 붕어를 애도하느라 이틀씩 조회를 중단한 것도 新羅가 唐의 上國 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단고기가 후대에 가필되고 윤색됐다고 하면서 그 이유 한 가지가 1923 년에 泉男生(淵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淵蓋蘇文)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太白逸史에 실려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淵蓋蘇文 조부는 이름도 없는 종놈 이었단 말인가. 淵蓋蘇文의 집안은 대대로 최고 귀족 막리지(莫離支) 집안 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僞書라니. 우리나라 역사책은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들에 의해 엄청나게 분서됐다. 한단고기는 한단 역사책이 하나도 멸실되지 않은 新羅, 高麗 때 쓴 책과 李氏朝鮮이 감춘 궁중 내 한단 역사책을 보고 쓴 책의 합본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헛소리나 하고. 李氏朝鮮 말에도 한단 역사책은 51 종이나 궁궐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그걸 倭奴가 일본으로 빼돌렸고.

또 太白逸史 등이 후대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위서라고 하는데, 편찬 당시의 언어로 쓰지, 까마득한 옛날 언어로는 쓸 수도 없다. 언어는 변천한다. 옛날 언어를 편찬 당대의 사람들이 읽어낼 수나 있는가. 太白逸史 跋에 보면, “庚辰[1520 년. 李陌은 1520 년에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中宗 15 년이다. 그런데 太白逸史 跋에는 ”16 년 庚辰“이라고 쓰여 있다. 李陌의 착오다]에 내가 撰修官으로 뽑혔기 때문에 열심히 내각(內閣)의 비밀 서적들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읽고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찬하고, 이름지어 太白逸史라 하였다(後一十六年庚辰余以撰修官頗得內閣秘書而讀之乃按前稿而編次之名曰太白逸史)” 했지만,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한단고기를 편찬한 해는 1911 년이었다. 세련된 언어로 고풍스런 옛 글을 고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문자를 여러 번 발명했기 때문에 鹿圖文에서 加臨土로, 漢字로, 한글로 계속 역사책을 재편찬해야 했다. 필연적으로 편찬 당시의 용어로 쓸 수 밖에 없다. 과연 朝鮮이 朝鮮인가. 原國名은 쥬신이다. 한국도 환국(桓國)에서 나왔다. 그런데 桓國조차 원국명은 아니다. 神誌 赫德이 만든 鹿圖文이 우리나라 문자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편자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오늘날의 언어로 쓰고 있다.

日本史에는 604 년에 벌써 憲法까지 등장한다. 쇼오토쿠타이시(聖德太子)가 제정 했다는 17 조 헌법인데, 역사왜곡학 발흥 후에 가필한 것이다. 日本의 制憲憲法은 1889 년에야 나온다. 무려 1285 년이나 연대를 올린 것이다. 실제로 聖德太子가 법률을 제정 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律令時代는 세련(?)되게 法治時代라 바꿔 부른다. 그래도 日本이나 메국의 日本史 전공자들은 실증사학 이라며 다 인정한다. 하긴 나라 이름(倭)이 같다고 中國倭를 列島 倭史에 슬쩍 포개 韓半島에 倭가 있었다고 우길 정도니! 이런 온갖 오류에 다 눈감고 무조건 다 맞다고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오직 하나 오류라고 찾아내어 책 전체가 다 허구라고 매도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다. 하물며 그 誤流라고 지적한 것도 오류가 아닌 다음에야.

가필되고 윤색 되었다며 사소한 것 하나를 문제 삼아 민족의 역사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바로 日本이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해 왔던 韓國史 抹殺의 목적이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들이 지난 6 백여 년간 자행해온 한국사 말살의 목적이다.

기독교는 기원 전후에 발생한 종교다. 서기, 기원이라는 연호가 그들이 믿는 예수라는 인물의 태어난 날(추정으로 실제로는 기원전에 태어났다고 함)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기원전 7197 년에 성립한 나라다. 배달만 해도 기원전 3898 년에 개천한 나라다.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면, 후대에 성립한 기독교가 우리 것을 교리로 삼았다는 증거지,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本末까지 바꾸면서 주장하는 것은 한단고기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하는 억지주장 밖에 안된다.

他國史를 왜곡 하기에 혈안이 된 나라들이 곧잘 사용하는 수법 하나가 역사의 원인과 결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역사의 원인과 결말을 바꾸면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역사로 변한다. 그래서 역사왜곡하는 자들은 늘상 악의로 역사의 본말을 바꿔왔다.

 

日本이 우리나라에 朝鮮은 없었다며 근거랍시고 끄집어내는 말이 있다. 한웅을 부르는 호칭인 天王은 불교용어이기 때문에 배달도 없고 朝鮮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가자. 이 나라의 그런대로 배웠다고 하는 먹물들이 李氏朝鮮을 비호하려는 의도에서 인지는 몰라도 李氏朝鮮 이라고 말하면 일제하의 식민사관에 물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李氏朝鮮이 朝鮮이 된다는 말인가? 이는 우리 시원의 역사를 죽이려고 하는 倭奴들의 간교한 술책에 물들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배달은 기원전 3898 년에 개천했고, 佛敎는 기원후에 전래됐다. 석가조차 기원전 5, 6 세기의 사람이다. 우리나라만 기념하는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가 태어난 날이 아니고, 北夫餘의 시조 解慕漱가 개천한 날이며, 한웅이 탄생한 날이다.
☞ 부처님 오신날 참조

佛敎의 大雄殿은 大人 한웅을 모신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각이다. 佛敎는 우리나라 문화와 쉽게 융화되기 위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카톨릭교도 마찬가지다. 원래 카톨릭교는 우상숭배를 금지 했으나, 유럽의 기존 종교와 융합되어 동상 만드는 것이 카톨릭의 중요 문화로 변질됐다.

배달 한웅과 관련도 없다면서 우두천왕(牛頭天王)이니 하고 日本의 우두머리를 天皇이라 하는 것은 일본에 우리나라 문화가 그대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만 봐도 日本이 우리나라 식민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식민지에 역사책을 하사 했으니까, 日本이 628 년 이후의 일식기록을 모조리 베꼈다.

天皇은 배달, 朝鮮의 통치자에 대한 호칭이다. 日本은 호칭까지 우리나라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일본에서 天皇이 보편적인 호칭으로 정착한 것은 겨우 100 여년 전이다.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이전에는 미카도(御門), 다이리(內裏), 긴리사마(禁裡樣), 덴시사마(天子樣)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은 내내 교쿠(玉)라고 불렀다. 겨우 1889 년에 이르러서야 憲法의 공포에 의해 天皇으로 확정된 것이다.

헌법 초안 논의 당시 ‘고테이’(皇帝) ‘고쿠테이’(國帝) 등의 온갖 제안이 난무하고 헌법 공포 이후에도 1936 년 까지 외교문서에다 고테이와 Emperor라고 썼다(재미있는 일본⑩ 텐노(天皇)①, 주간한국).

메국과 日本이 그토록 좋아하는 實證史學에 의한다면, 그 옛날부터 天皇이라 불렀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日本書紀와 古事記도 조작하고 七支刀, 廣開土境大勳跡碑도 조작하는데, 그깟 동판이나 목간(木簡), 法典쯤 조작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천 수백 년을 우리나라 속국으로 산 日本이 우두머리를 天皇이라 부를 수는 없다. 軒轅도 태양의 아들 운운하다가 慈烏支 한웅의 정벌을 받았고, 中國倭도 日出國이라 하다가 高句麗 황제에게 내쫓겼다. 高麗도 거란에게 자국의 연호를 사용 하라고 강요했다. 天皇 호칭을 사용했다는 天武 때는 新羅의 충실한 속국 이었다. 上國은 皇帝가 다스리고, 屬國은 天皇이 다스린단 말인가. 天皇 이라는 것은 19 세기 역사날조 하면서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던 호칭이다.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강점했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말살에 그토록 광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문헌을 불태워 버린 現代版 焚書가 바로 이 땅에서 倭奴(李氏朝鮮과 明은 더했다)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 중 일부는 日本에 가져가 숨겨놓고 있다. 倭奴 宮內廳 도서관에다 숨긴 한단사서만도 실로 엄청난 양이라고 한다. 지금쯤은 비밀장소에 숨겼을 것이다.

日本이 ‘이제는 한민족이 자신들의 上古史를 알지 못하겠지’하며 안심하고 있던 차에 中國이 不法 占有하고 있는 遼西地域에서 최근 유적, 유물이 발굴되어 朝鮮史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日蝕記錄에서 三國의 강역이 중국 대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倭奴가 빼앗아간 우리나라 유물은 파괴되지 않고 日本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日本 또한 百濟人, 新羅人이 건너가 세운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倭奴(그리고 中奴)의 순수창작은 없다. 남연서(南淵書)라는 僞書를 만들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 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太古 이래로 東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나라는 배달, 朝鮮, 高句麗다. 겨우 배달,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치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日本의 神이나 天皇이 朝鮮을 지배 했으며, 때로는 日本의 神이 朝鮮의 神이 되거나 王이 되었고, 朝鮮의 王이나 貴族이 日本에 복속했다”는 우리나라가 日本을 지배 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日本王이 되고, 우리나라의 神이 日本神이 되고, 日本王과 貴族이 우리나라에 복속한 사실을 뒤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韓國의 문화재 약탈로 日本이 노린 것은 日本과 韓國의 뿌리가 같으며, 日本과 떨어지면서 못살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韓日史를 그대로 바꿔놓은 것이다.

倭奴民族은 절대 우리나라 역사서를 없앨 수 없다. 왜?
반쪽 이나마 그들(日本은 混血種族이다. 中國倭가 25.8 %나 차지하는 漢委奴이다) 조상의 역사이기도 하니까. 그거라도 없으면 倭奴民族이 무슨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지금쯤은 우리나라 上古史 문헌들을 마이크로필름에다 담아서 비밀장소에 보관해 두었을 것이다.

日本民族은 列島로 간 뒤 단 한 번도 문명다운 문명을 누리지 못한 인간들이다. 숟가락, 옷가지, 주춧돌, 기와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나라가 만들어 주었다. 정창원(正倉院) 보물이라는 것만 봐도, 식기에서 문방사우, 악기 등 줄줄이 新羅 것이고 百濟 것이다. 호류지(法隆寺), 고류지(廣隆寺), 그 안에 있는 벽화, 불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百濟 것이고 新羅 것이다. 다까마쓰(高松塚) 고분은 또 어떤가. 高句麗 고분이라 우기지만, 百濟 고분이다. 列島에 日本人이 산다고 해서 日本人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아, 하나 있다. 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 담징(曇徵)의 사불정토도(社彿淨土圖)가 불타서 그걸 日本人들이 다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컴퓨터로 曇徵의 壁畵를 재생해냈다. 壁畵는 高句麗人이 아니고, 百濟人이다.


▲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부여 정림사(定林寺)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 단의 기단(基壇)위에 5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에 써 있다는 대당평백제국(大唐平百濟國 : 大唐이 百濟를 평정함)碑銘은 최근에 발견됐다. 과연 소정방(蘇定方)이 쓴 낙서라면 천 수백 년간이나 발견되지 않고 우리가 모를 수 있는가. 사비성(泗泌城)이 있었다고 믿는 자리에 蘇定方이 내지성(奈祗城)을 정복 했다고 적혀 있다. 蘇定方은 자신이 어디를 공격하는 줄도 몰랐단 말인가.

百濟復興軍에 포위되어 배고픔을 참지 못해 人肉을 뜯던 야만인이 과연 한가하게 탑에다 낙서나 하고 있을 여유가 있었을까. 굶어 죽어가는 상황 에서도 新羅가 百濟를 멸망시킨 것을 도저히 참지 못했던 蘇定方과 그 부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한 짓 이었을까. 그 결의로 전투에 임했으면 포위 당하는 꼴은 없었을 텐데, 엉뚱한 데로 애국심이 발휘 되었던가?

百濟 멸망과 부흥 전쟁은 중국 대륙 동부와 발해만에서 있었다. 蘇定方도 중국 대륙 동부와 발해만에서 新羅의 三國統一 전쟁을 열심히 방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짓인가. 중국은 그렇게라도 해서 百濟를 唐이 멸망 시켰다고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실상 唐이 百濟 멸망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唐이 百濟를 멸망 시켰다고 우기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高句麗, 新羅, 百濟가 곧잘 하듯 왜 번듯한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것일까. ‘大唐’은 비석 세울 줄 몰랐던가. ‘大唐’이 하는 짓이 고작 남의 나라에 숨어 들어와 남의 나라 탑에 낙서나 하는 것이었던가. 大唐은 커녕 中國이 기를 쓰고 감추고 싶어 하는 小唐, 오랑캐 唐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는 꼴이다.

定林寺址五層石塔의 낙서는 제 주인나라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안간힘 이었던 倭奴가 새긴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문화재는 다 약탈해 갔으면서도 定林寺址五層石塔은 이 땅에 남겨둔 것이다. 倭奴는 韓半島에 泗泌城이 없고 奈祗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百濟 멸망 후 日本으로 건너간 百濟 유민이 가져간 역사책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大唐平百濟國 碑銘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히 百濟가 이 땅에만 있었다고 착각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百濟滅亡과 復興運動이 이 땅에서 있었다고 착각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日本도, 中國도 전혀 새로운 창작을 하지 않았다. 기존의 역사에 우리나라 대신, 중국을 집어넣었을 뿐이다. 5 세기 이전의 倭史는 中國倭의 역사이다. 이름이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日本史에 덧붙인 것이다. 그 외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중국 대륙에 있던 倭를 韓半島 남부에 옮겨놓고 任那日本府라 우기는 것처럼.

우리나라 역사가 곧 저들의 역사왜곡 재료라는 것이다.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목록보기 | 한문명최후의계승국 고려
스크랩하기 메일 인쇄 신고
수정  |  삭제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