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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적십자 대원으로 활동해
목숨 걸고 적십자 대원으로 활동해
생년월일: 1953. 8. 4(당시 나이 27세)
직 업: 승려(현재 부식납품업)
조사일시: 1988. 9. 6
개 요
승려의 신분으로 5·18을 맞은 이광영씨는 초파일인 5월 21일 차량이나 천에 구호를 쓰는 일을 했다. 또, 그날 오후에는 적십자 대원으로서 부상자를 후송하고 의약품과 혈액을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공수부대의 총에 맞았다. 고통과 좌절로 인해 자살도 시도하기도 했지만 반신불수인 몸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다니면서 5·18 부상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방황 속에서 승려가 되다
나는 전남 강진군 군동면 금사리 377번지에서 1953년에 태어났다. 우리 집은 논 3천 평, 밭 4천 평 정도를 가지고 생계를 꾸려가는 전형적인 농민의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못 했던 분이었으나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특히 아버지는 나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는데, 내 위의 형님이 공부를 계속 못 하고 일찍 생업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나는 고향 강진에서 중학교 과정까지 마치고 광주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 나는 문제학생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처럼 면 단위에서 자란 애들과 강진읍 단위에서 자란 아이들과의 갈등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하교 후에 소를 키운다던가, 동생들을 돌본다든가, 저녁 일을 도우는 등의 집안일을 도우느라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읍내의 학생들은 공부를 할 시간이 많아서인지 실력이 나보다 더 좋았다. 나는 그러한 생활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불만 내지 반항심을 은연 중에 가지게 되었다. 가정환경 때문이 아니라 읍과 면단위 학생들의 생활적인 차이로 인해서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드디어 싹트고 있었던 불만들이 터져 읍내 쪽 아이들과 패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상대편의 한 애가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일이 학교에 알려지자 처벌을 받게 되었는데 나는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때의 후회, 방황, 그리고 복잡한 심적 상태에서 불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어떤 선생님의 소개로 광주에 있는 전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광주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했는데 공부밖에 모르는 그저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상당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도시 아이들에 대해 갖는 일종의 열등의식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왜 하필 시골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1972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법대를 지원했으나 씁쓸한 패배의 잔을 맛본 채 재수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짐을 싸들고 곡성에 있는 태안사에 들어갔다. 재수생활을 위해 절을 택했던 것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교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수생활을 하면서 나는 불교세계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특히 연배의 스님으로부터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재수를 그만두고 결국 입산하게 되었다. 굳이 동기를 생각해 본다면 자연적 정취라든가 절의 분위기가 맘에 든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인생을 보람있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느끼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7개월 정도 입산하고 나서 계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밟고 법명 '진각'으로 계를 받았다(화엄사 큰스님인 도광스님이 계를 내려주었다). 내가 소속하고 있는 본절은 화엄사였는데, 나는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며 공부도 하고 스님들도 만났다. 그러면서 동국대 법대를 3년간 청강생으로 수료했다. 내가 입산을 하고 나서도 법학을 배운다고 주위에서는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배워두면 절에서 비록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복무는 육 군 보병으로 양구에서 마쳤는데 군승이 아니라 일반 군인으로서 생활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승려로서의 위치를 잊지 않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해인사의 선방에서 만난 성연스님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그는 송광사 출신이었다. 성연스님과 선방생활을 할 때 스님으로서의 마음가짐이나 수행방법 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였다. 광주에서 5·18을 맞게 된 것은 어쩌면 그를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증심사 주지스님이었고, 성연스님의 스승이었던 현광스님을 배웅하러 광주에 올라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나주 다보사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있었다.
동구청에 몸을 숨기다
80년 5월 14일 광주에 왔는데 21일이 초파일이었기 때문에 증심사의 바쁜 일정을 도와줄 겸 올라왔다. 나는 광주 증심사에 머무르면서 1백여 명의 신도를 맞이 하기 위한 부산한 움직임 속에서 성연스님과 같이 시장을 보러 다녔다. 시장은 주로 양동, 대인동 시장이었다. 나는 18일 이전까지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면서 나도 학생이라면 같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5월 17일 시장을 보러 나왔다가 뭔가 심상치 않게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느꼈다. 군인들이 곧 투입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18일도 역시 시장을 보러 나갔다가 노동청 앞, 전대병원 앞, 금남로 등지에서 데모하는 장면을 보았다. 군인은 보이지 않았고 경찰이 진압을 위해 최루탄을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바로 그날 계엄령이 확대조치되고 통금이 앞당겨졌다. 광주 시내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당시 사회적 상황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지 못했다. 다만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표되고 일부 승려들까지 구속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일종의 회의감과 환멸을 가지고 있었다. 5·18에 대해선 군부의 알력으로 일어났다는 것과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민중들이 항거하는 것이라는 정도로만 알았다.
19일 성연스님과 함께 또 시장을 보러 나갔다. 시간은 오전 9시 30분경이었을까? 시내 송학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옷을 입고 있는데 밖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나도 한번 해봐야지' 생각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금남로에 있는 시위군중은 수만에 가까웠다. 그런데 도청 쪽에서는 공수부대가 있잖은가. 그들 공수부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뭔가 필요하였다. 사람들은 보도블록을 깨기 시작했고 나도 목욕탕 앞에서 보도블록을 깼다. 공수부대와 투석전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시위군중을 향해 도청 쪽에 있던 공수부대가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던진 돌이 빗발치는데도 거리낌없이 진군해 오는 공수부대원들의 기세는 차라리 섬뜩하리만큼 무서웠다. 1개 중대 이상쯤 될까? 그들의 손엔 곤봉이, 머리엔 철모가, 등엔 M16 소총에 대검을 꽂고, 허리엔 수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야말로 무장군대, 자기 나라 백성을 죽이기 위한 무시무시한 무장군대였다. 나도 시위대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한일은행 사거리에까지 몰린 시위군중은 대략 1만여 명인 것 같다. 그런데 한일은행 쪽에서도 공수부대가 출현, 군중을 가운데에 두고 압축해 오고 있지 않은가? 결국 대치상태에 이르자 우리는 공수부대와 육박전을 벌이며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나는 겨우 도망쳐 옆에 있던 전남체육사에 뛰어들어 7-8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 셔터를 내렸다.
금방 그 일대가 평정되면서 공수부대는 확성기로 모두 자수하라고 협박하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공수부대는 셔터를 올리며 건물수색을 해오고 있었다. 얼마 후 드디어 우리가 숨어있던 가게 셔터를 군화발로 차면서 빨리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셔터가 부서지고 10여 명의 얼룩무늬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치면서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는데 거기도 숨을 곳은 없었다. 나는 재봉틀 커튼 뒤에 숨어 발동기 소리보다도 더 크게 쿵쿵 울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저벅저벅 2층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 한 놈이 올라와 '어서 나와!' 하고 소리쳤다. 가만히 있자 내가 숨어 있는 커튼을 휙 젖혔다.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어버렸다. 그도 씩 한번 웃더니 냅다 배를 걷어찼다. 거꾸러져 배를 움켜쥐는데 나의 목줄기를 군화발로 짓밟았다. 이어 다리고 어디고 발길질을 해댔지만 그래도 나는 용했다. 아니 목숨은 질긴 것이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살아 있었으니 거기서 잡힌 나와 다른 사람들은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3명이 1개조가 되어 연 행되어 밖으로 끌려나왔다.
거리도 역시 아비규환 그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연행되어 가는 젊은이들의 피로 얼룩진 모습은 정말 공포 그대로였다.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었다. 공수부대원은 우리에게 늦게 간다며 무조건 발길질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따라오던 젊은 청년이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뒤돌아보니 총에 꽂쳐 있는 대검으로 허벅지를 찔러버리지 않는가! 그것뿐인가. 쓰러지는 사람까지 개머리판으로 무차별로 짓밟아버렸다. '아! 저 짐승만도 못한 놈들. 아마 그 사람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리라.' 나는 무조건 앞장서서 걸었다. 그래야 덜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나타난 공수부대원들은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개머리판과 대검으로 사람들을 마구 찔러댔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짐승의 그것이었다.
"이 폭도 새끼들! 너희들 때문에 며칠을 굶은 줄 아느냐?" 이런 소리가 여기저기서 똑똑히 들렸다. 그때 다른 연행자들과 우리는 합세하게 되었고 거기엔 다 쓰러져가는 어느 젊은이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휘청거리며 겨우 걷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사람을 부축했다. 멀리 보이는 관광호텔 앞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있었다. 팬티만 착용하고 엎드려뻗쳐 있다가 군용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동구청 앞을 지나는데 연도에 서 있던 많은 군중 속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위계급을 단 경찰이 연행해 가는 공수부대원에게 항의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응급치료도 않고 연행해 가느냐. 저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곧 죽는다."
그러자 처음엔 거부하던 공수부대원도 사람들의 항의에 못 이겨 옆에 있는 개인병원에서 응급치료할 것을 허락했다. 내가 동구청 건물 안으로 그 부상자를 부축하여 들어가는데 아까 그 경찰이 내 귀에 대고 뭔가 속삭였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으나 자세히 들어보니 '빨리 뛰어!' 하는 것이었다. 나는 냅다 도망쳤다. 그러나 내가 도망칠 데라곤 건물 위층밖에 없었다. 곧바로 공수부대가 쫓아왔으나 시민들이 길을 막아줘서 나는 다행히 2층에 있는 어느 사무실로 무사히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에는 30-40명 되는 직원이 근무중이었다. 나는 다짜고짜로 '좀 살려달라'며 경위를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입고 있는 승복을 벗게 하고 대신 자기들의 근무복을 입혀주었고 머리엔 모자를 씌워 빈 책상에 앉게 해 같은 직원으로 나를 위장시켜 주었다. 잠시 후 공수부대원이 나를 찾으러 왔다.
그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분명히 이쪽으로 온 것 같다며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거기서 근무하고 있던 과장이 일어나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들 이게 무슨 짓이오? 우리는 국가의 녹을 먹으며 중요한 국가일을 하고 있는데 당신들 따위가 여기 와서 그럴 수 있소?"
그러자 그들은 가버렸다. 그때 과장은 몸집이 크고 호탕하게 생긴 분이었다. 몸집에 걸맞게 큰소리로 공수부대원의 기를 꺾었다고 생각된다. 알고 보니 거기는 동구청 세무 2과 사무실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들이 죽을뻔한 나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보고
점심때가 되자 금남로는 다시 시민들이 장악했고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집결하였다. 그 수많은 인파는 8차선의 넒은 금남로를 사람의 물결로 뒤덮었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짜장면까지 얻어먹고 다시 시민들과 함께 싸웠다. 가톨릭센터 앞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 가톨릭센터 측에 무엇인가 항의하고 있었다. 내용인즉 조금전 7-8명의 공수부대원이 가톨릭센터로 들어가 옥상에 있는 것이 시민들의 눈에 띄었는데 시민들은 그 공수부대원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가톨릭센터 측은 계속 발뺌하며 설득했고, 과격한 청년들은 정의와 평화의 상징인 천주교회의 전남본산인 가톨릭센터가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차고에서 몇 대의 차를 꺼내 불을 지르고 이어 셔터를 부수고 가톨릭센터 내부를 수색하여 7층에서 공수부대원을 생포하였다.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M16 소총 및 철모들을 밖으로 던지자 군중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 동안 당하기만한 시민들에겐 아주 크나큰 감격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헌데 젊은이들이 흥분에 못 이겨 그 공수부대원들을 7층에서 유리창 밖으로 내던지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도로의 수많은 군중은 모두 손을 내저으며 '우리가 저 자들과 같이 이성을 잃을 수 없지 않느냐, 우리는 끝까지 이성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못 하게 하였다. 결국 가톨릭센터 측의 거짓이 확인되자 센터를 불질러버려야 한다며 사무실 집기 등을 현관에 모아놓고 불을 지피려할 때 그 정보가 새어나가 대치하고 있던 공수부대 쪽에서 갑자기 최루탄 세례를 퍼부으며 진격해 왔다. 시민들이 일시 가톨릭센터로부터 밀려나게 되고 공수부대에 의해 다시 가톨릭센터가 장악되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들이 적어도 1백여 명은 잡혔을 것이고 상당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나온 천주교 자료에 따르면 당시 센터에서 7명의 시체를 찾아냈다고 말하고 있다.
오후가 되자 나는 시민관 쪽에서 싸웠다. 3시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을 지나다 마침 소변을 보기 위해 후문에 있는 변소로 갔다. 평소 붐벼야 할 변소는 싸늘한 분위기였고 건너편에 있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본관에서는 공수부대가 차량을 검문검색하는 모습이 눈에 띄어 이미 버스도 쉽게 이용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내가 변소에 들어선 순간 시멘트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젊은 시체가 눈에 띄었다. 머리가 으깨지고 온몸이 대검으로 난자되어 핏기없는 시신 이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광주사건으로 처음 목격하게 된 사망자였다. 사람이 죽은 것을 일생을 통해서 처음 보았던 것이다. 나는 감히 어떻게 해볼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 나와 시민들에게 떠들어대기만 했다. 이때 시민들은 어디어디서 시체를 보았다느니 하며 흥분이 고조됐다.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시내는 더욱 긴장감이 고조됐다. 어디선가 가끔 총소리도 들렸다. 공수부대가 어디선가 속속 들이닥치고 시위는 오후 늦게야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주요 도로, 주요 건물은 모두 공수부대가 장악,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적으로 간주, 무차별 연행해 갔고 시내는 다시 공포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나는 어떻게든지 광주를 빠져나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등을 완전히 통제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 가 나는 얼굴이 약간 찢어졌고 옷에는(공무원 사무복에 새마을운동 배지가 부착) 피가 얼룩져 있어 공수부대의 눈에 띄면 영락없이 데모대으로 몰릴 것이 뻔하잖은가. 그런데 다행히 4.5톤 트럭 운전수가 의자 뒤에 숨겨줘서 무사히 광주를 벗어나 나주에 머물며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았다. 나는 5월 20일 하루를 나주 다보사에서 보냈다. 가끔 라디오에서 광주상황을 들었지만 진실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날 MBC 방송국과 세무서가 시민들에 의하여 불탔다고 들었다. 나주 는 별다른 상황이 없었다.
21일 이날은 4월 초파일로 나에겐 특별한 날이었다. 광주 증심사에 있던 성연 스님과 연락해 오늘은 우리가 불교인으로서 광주상황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광주로 올라오는 길은 막혀 있었으나 나는 몇 명의 젊은이와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올라왔다. 이날 상황은 이미 통신이 두절되고 교통이 완전마비됐으며 시외곽지역이 봉쇄됨에 따라 나는 걸어서 광산대촌을 거쳐 서창을 지나 겨우 광송간 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구호를 써주신 할아버지
시내는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여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이중삼중으로 쳐놓은 저 편에서 타이어를 산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렀고 시내 곳곳에서 검은 연기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아세아자동차회사에서 탈취했다는 군용특수차량이 많이 보였고, 그 차에 탑승한 젊은 사람들이 머리띠를 동여맨 채 각목을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를 누비고 있었다. 나의 기분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시민들도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두 밖으로 나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마치 축제 분위기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딘가 모르게 아쉬웠다. 질서가 없는 듯했고 또한 주도하는 세력이 없는 듯 전혀 체계없이 즉흥적으로 모든 문제가 처리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누군가 주도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분위기에 휩싸여 들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낼 어떤 힘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서 우선 유인물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좀더 복잡한 일이었으므로 플래카드라도 달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사람을 구해야 했는데 젊은 몇 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쉽게 응해 주었다. 그러고는 간판집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니까 쾌히 응해 주었다. 그러나 천이 많이 필요했고 기동성도 요구되었으므로 지나가던 지프차를 잡아 사정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운전수도 좋은 일이라며 자기가 직접 운전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들은 차를 타고 양동 복개상가에 있는 이불집으로 갔다. 거기서도 아주머니들은 '잘 왔다. 우리도 뭔가 도와주고 싶었다'며 천을 다 가져가라고 하였다. 거기서 천을 구해가지고 양동시장 도로에 나와서 도로에 천을 펴놓고 일을 시작 했다. 페인트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에 있는 노루표 페인트에서 구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하여 페인트에다 휘발유를 섞어 쓸려고 하니까 원료가 녹지 않아서 잘 써지지 않았다. 페인트는 신나와 섞어서 써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작 업을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와서 구호도 말해 주는 등 같이 일을 도와주었다. 조원은 어느덧 30-4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나는 거기서 조장격으로 일했다.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학생들이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도청으로 모이자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홍안당한약방(?) 주인인 70세 할아버지도 오셔서 붓글씨를 써주었다. 그 할아버지가 붓글씨를 예전에 잘 쓰셨다고 적극 도와주셨다. 우리는 점심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일을 했는데 우리들 옆에는 시민들이 갖다준 빵과 음료수 박스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복개상가 다리를 통과하는 모든 차량에게 미처 플래카드를 달아주지 못하자 차에다 직접 페인트로 써주기도 했는데 대기해 있는 차량이 1백여 대나 줄서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업은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뿌듯했다.
그때 적었던 구호는 '계엄을 철폐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언 론자유 보장하라', '최후의 일각까지', '오호 통재라', '오후 3시까지 도청으로 집결' 등이었다
거의 모든 차량에 직접 다 쓰고 나니까 오후 2시 정도 되었다. 도청 쪽에서는 총격전이 한창이었다. 남아 있는 대원정리를 해보니 모두 10명, 우리들은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이제부터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일단 차를 타고 돌며 찾아보기로 하고 차에 탔다. 우리는 광주교도소 있는데까지 갔다가 한전 있는 쪽으로 왔는데 시내의 총격전으로 인해 곳곳에 차량들이 밀려 길이 막혀 있었다.
우리는 월산동 로터리를 지나 백운동 쪽으로 차를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타탕탕탕 몇 발을 갈겨댔다. 지나가던 여학생 한명이 가로수 아래로 마치 나뭇잎 떨어지듯 픽 쓰러지는게 아닌가? 나는 얼른 뛰어내려 그 여학생을 차에다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적십자병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응급실과 병실은 이미 꽉 차고 복도고 뜰이고 빈틈없이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의사는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환자들만 데려오면 어떡해요. 약품과 피가 부족하니 그것도 좀 구해다 주셔야 지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하고는 의사와 상의했다. 먼저 의사로부터 꼭 필요한 의약품의 품목을 신청받고 아울러 혈액을 수집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의복과 적십자 완장을 착용하고 들것 2개를 차에 실었다. 또 태극기 2개를 차 엔진 위에다 꽂고는 민간인 적십자 대원으로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봉사하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으며,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며, 민간인을 적극 보호한다는 등의 다섯 가지 항목을 선언했 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말 분주했다(운전수를 포함하여 5명이 지프차를 탔다).
약국과 개인병원 등에서 의약품을 수거하여 조달하랴, 산소통을 수송하라, 헌혈한 피를 각 병원 실정에 맞추어 전대병원,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에 보급하랴, 그러는 중에도 때때로 부상자를 실어나르랴, 정말 우리 몇 명의 대원으로는 그 일을 다 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많은 긍지와 보람을 느꼈다. 시민들의 호응은 너무 좋았다. 시민들은 가는 곳마다 드링크제, 빵, 요구르트, 김밥 등을 차에 실어주었다. 심지어 가난한 변두리 지역의 구멍가게 할머니까지 비닐봉지에 요구르트를 가득 담아주기도 했다. 약국과 병원의 호응도 좋았다. 약국에선 응급약품을 무상으로 내주었고 우리가 가지고 간 품목 이외의 약도 필요할 것이라며 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합병원을 보고 역시 마음이 흐뭇했다. 앞으로의 상황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의료인으로서 양심에 입각하여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적극적인 치료를 하여 주었다. 특히 기독병원 같은 데선 전직원이 비상사태에 돌입 10여 일간 퇴근도 하지 않고 손에 피를 적시며 의로운 활동하였다. 시내 약국을 거의 돌고 난 뒤 약이 부족하여 개인병원을 돌며 약을 구했다. 역시 쉽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딱 한 곳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양동에 있는 어떤 개인병원에 가서 좀 도와달라고 말했더니 한 마디로 약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침 같이 갔던 사람 중에 그 병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지하실 창고에 약이 많이 있는 것을 다 아니까 빨리 내놓으라'고 그래도 듣지 않자 밖에서 시민군이 가지고 다니던 총을 가져와서 병원 안에다 공포를 한 방 쏘며 협박조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 의사는 당장 창고의 문을 열었다. 약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 약을 차에 가득 싣고 각 병원에 보급했다. 지금 생각해도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헌혈하던 여학생도 죽다
적십자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그날 3시30분 정도에 지원동 정류소 근처에서 화순 쪽으로부터 온 차량에 탄 사람들이 인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나눠주는 것을 보았다. 아마 화순 쪽 무기고를 털었지 않았나 싶었다. 도청 앞에서 공방전이 있은 후에 일시 후퇴하는 때가 있었다. 우리 적십자 대원의 차가 들어가 쓰러져 있는 부상자를 3명 구해 온 적이 있다. 많은 부상자들 속에는 정재희씨도 그때 거기에 있었지만 못 보았고 우리가 구한 세 명의 부상자 중에는 박상철도 있었다. 그는 중학생이었는데 척추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즉시 병원으로 데리고 갔으나 전대병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독병원으로 데리고 가 응급치료를 했다. 조금만 시간을 지체했어도 그 애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그 일로 해서 상철이 부모님이 매우 고마워하신다. (현재 박상철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치료중에 있다.) 나는 환자수송을 위해 공수대들의 진지에도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들은 교도소 앞, 도청 앞, 조선대 정문 앞에 있었다. 우리가 가서 '환자들이 있으면 내달라'고 하면 공수들은 '통합병원으로 수송시킬 것이다'며 내주지 않았다. 나는 주둔지마다 민간인으로 보이는 시체들이 거적 등에 덮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시체를 트럭과 헬리콥터에 실어가든지 안으로 가져 갔다. 내가 그렇게 해서 목격한 시체들 만해도 몇백 명은 될 듯싶다. 나는 공수대 쪽에서 가지고 있던 시체가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헌혈된 피를 광주공원에서 수거하여 기독병원에 갖다주기 위해(당시 헌혈은 시내 각처에서 시민 자발적으로 행해졌는데 광주공원 앞에서 헌혈을 실시하면 다리 건너 현대극장 앞까지 두 줄로 서 있을 만큼 호응이 좋아 병원마다 피는 부족하지 않았다) 양림동을 지나가는데 어느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우리 차를 잡으며 '나도 헌혈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나요?' 하고 묻기에 어른들이 많이 하니까 괜찮다고 했으나 자기는 꼭 해야 한다며 매달 리기에 어쩔 수 없이 차에 태워서 기독병원에 데려다주었다. 이어 우리들은 전대 병원에서 병실이 부족한 관계로 미처 다 수용치 못한 응급환자들을 기독병원 등으로 분산 치료하게 하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를 싣고 기독병원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잖은가. 웬일인가 싶어 가보니 어느 여학생이 머리에 정통으로 총을 맞아 즉사한 것이다. '아니!' 나는 깜짝 놀라 다리를 휘청거렸다. 그 여학생은 조금 전 내가 실어다 준 헌혈하겠다던 그 여학생이 아닌가. 그 학생은 헌혈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다가 공수부대의 총탄에 쓰러졌던 것이다. 내가 병원으로 실어다주지 않았다면 그 학생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괴로 워하고 있다. 이제 도청은 시민군에 의해 탈환됐고 시내에 주둔한 공수부대는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넘고 땅거미가 질 무렵 우리 대원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공수부대는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시내 주요 건물에 배치되어 총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구조대원에게도 총을 쏘다
적십자병원을 가기 위해 광주천변 도로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아줌마들이 몰려 와 우리 차를 막으며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바로 앞에 있는 구시청 사거리에 총을 맞은 청년들이 5-6명 정도 있는데 아직 죽지 않은 부상자가 있어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가는 사람에게 마구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결국 구조할 사람은 적십자 대원인 우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적십자 완장을 차고 있는 이상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원 중에서 가지 말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우리는 가야만 했다.
차를 몰아 어느 정도 가니 아니나다를까 길가에 수명의 부상자가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골목으로 차를 대피, 부상자가 있는지 확인했더니 뒤쪽에 앉은 대원이 팔에 총을 맞았다.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총을 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치가 떨렸다. 잠시 대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그냥 골목으로 대피하자는 의견과, 우리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저 부상자들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만하자, 우리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소리냐. 그래도 저 사람들은 구해야 한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야말로 죽음을 눈앞에 둔 위태로운 상황에서 양심의 갈등이 너무나 컸다. 마침내 두명씩 의견이 나눠진 상태에서 기사 한 사람 말에 판결이 날 판이었다. 그런데 기사는 '좋다 한번 해보자'고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닌가. 우리는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다시 차를 몰고 그 죽음의 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일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가 5·18 때 기분과 대중심리에 휩싸여 싸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이 눈앞에까지 다가온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총에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 나갔다는 것,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특히 기사는 운전도 잘할 뿐만 아니라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몰아 부상자들에게 접근, 그중 한 부상자를 싣기 위해 내가 먼저 팔을 잡아올리는 순간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척추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비명를 지르고 그대로 쓰러졌다. 나의 귀에는 어렴풋이 총소리가 연이어 '타타타' 들리며 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뒤엉켜 들려왔고 차가 기독병원을 향해 허둥지둥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아파 비명을 계속 지르며 미처 올리지 못한 발을 올리려 했으나 그냥 차 밖에서 덜렁덜렁하는 것을 보며 '아! 나는 이렇게 죽어가는 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서도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어슴푸레 병원응급실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이 당시에 지프차에 탔던 5명 중 2명은 즉사하고, 2명은 부상당하고 운전사만 이상이 없었다).
22일 저녁 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총탄이 척추 허리부분(1-3)에 정통으로 맞아 중추신경이 절단되었다. 내 경우엔 왜 그리도 아픈지 수술이 끝나도 그 통증을 내 끈기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병실에서 내내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병원에는 병실이 모자라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하고 휴게실, 심지어 복도에까지 부상자들이 즐비했다. 마치 어느 전쟁터의 야전병원을 보는 듯 했다.
공포와 죽음을 딛고
27일 새벽 4시쯤 갑자기 총성이 새벽공기를 갈랐다. 거의 1시간 동안 총성은 끊이지 않았고, 그 총소리와 함께 어느 갸냘픈 아가씨 목소리의 가두방송이 들렸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계엄군이 쳐들어와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여기에 맞서 싸워 이깁시다. 전시민은 잠에서 깨어나 우리 자식과 우리의 가족을 지킵시다."
나는 무서웠다. 공수부대가 병원을 습격해 환자들을 싹 쓸어버린다는 말을 듣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들은 숨기에 바빴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그 후 보름 정도 지난 무렵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나왔고 조금이라도 적극 가담자로 판명될 땐 치료를 중단하고 연행해 갔다. 우리는 이렇게 끌려가 결국 죽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저 떨고만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행주(18세, 당시 광주상고 재학중)를 비롯, 수십 명이 연행되어 가고, 며칠 후엔 위로금이랍시고 경상자에겐 1백만 원, 중상자에겐 3백만 원, 사망자에게 4백만 원씩이 지급됐으나 그것마저도 적극 가담자에겐 지급되지 않았다. 나는 통증이 너무 심하고 하반신을 움직일 수조차 없어 죽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몇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병원 시트를 찢어서 그것을 침대 손잡이 고리에 묶고는 목을 잡아당겼으나 목만 아프지 죽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에는 간호하고 있는 성연스님과 상의해 절에 가서 자살을 실행하기로 결정, 퇴원을 요청했으나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를 지금 퇴원 시킨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완강히 거부해 어쩔 수 없이 몰래 침대차에 몸을 싣고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정문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다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또 한번은 퇴원을 한 뒤 혼자서 생활을 할 때였는데 통증이 너무 심하여 진통제를 70알 정도 먹고는 드러누웠다. 100알 정도가 치사량인데 가지고 있는 게 모두 그것뿐이었다. 그때도 죽지 않고 3일 후에 다시 깨어났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서 광주돕기 성금을 모금했고, 그 돈으로 우리를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 돈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병원에 강제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정부요로에 탄원서까지 제출하여 좀더 치료기간을 연장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내동댕이쳐지는 꼴이 됐다. 돈이 없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전라남도에서는 며칠 후 그 돈이 남아서 광주에 뜻있는 사업을 한답시고 운암동에 35억을 투입해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지 않았던가.
나는 막상 퇴원하게 되자, 그런 몸으로는 절에 들어갈 수 없고, 시골에 계신 부모 곁으로 간다는 것도 용납될 수 없어 위로금 나온 것이 조금 남아 그것으로 셋방을 하나 얻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빨래하고 밥해 먹고 대소변 보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휠체어도 타지 못해 굴러다니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는 중에도 통증을 이기지 못해 한 주먹씩의 진통제를 먹어대니 몸뚱이가 온전할 리 있겠는가. 5·18 부상 전 알고 지냈던 여자가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 얼마 후 일생을 같이하고 싶다는 얘기를 해왔을 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완강한 그녀를 피해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4-5개월 동안 서울로 잠적했으나 끝내 여동생을 통해 나를 찾아온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1982년이었다.
새로운 출발
1982년 8월 1일 '5·18부상자회'가 창립되었다. 온갖 탄압 속에서도 내가 부상자회를 결성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81년 5·18 제 1주기를 맞아 나는 YWCA에서 개최하는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그때가 내가 다친 이후 첫 외출이었다. 휠체어를 탄 나 외에 부상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상황이 상황이어서인지 분위기는 차가웠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 목사님 및 여러 인사들의 용감한 발언을 듣고 크게 감명받았다. 유가족들이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고, 보상문제, 진상규명, 독재정권 타도 등을 외쳐댔다.
그러나 정작 음지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에겐 누구 하나 언급하는 자가 없었다. 나는 그때를 계기로 우리 부상자 문제는 부상자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기 위해서는 부상자들이 뭉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휠체어를 밀고 다니며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우리의 현실을 강조, 뭉쳐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으나 모두 두려워하고 협조해 주지 않았다. 나의 움직임이 어느새 기관에 알려져 서부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와 협박과 회유를 하면서 어떻게든지 그만 두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없이 나 혼자 해보려니 너무나 어려움이 많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1982년 제 2주기 행사가 남동성당에서 열렸을 때 1주기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재현되자 나는 다시 한 번 부상자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떻게든지 결성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래서 이전에 알고 있던 무진교회 강신석 목사님의 지원을 받아 다시 부상자회의 조직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또 정보가 새어나가는 바람에 수 많은 탄압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정재희씨 등 뜻있는 분들의 참여로 수차례의 예비모임을 거쳐 드디어 부상자회 창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초대회장에 박석연씨, 부회장에 정재희와 임정하씨가 맡기로 했다. 나는 총무를 맡아 조직활동에 들어갔다. 부상자들이 모임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여론화되면서 경찰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우리의 활동을 저지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5·18 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불의에 항거하여 참다운 모습으로 싸웠던 그때의 그 정신으로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5·18 진상을 규명하고 우리들의 치료문제, 보상문제 등을 놓고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그 결과의 하나로 영세민에게 지급되는 의료보험카드를 지급받았으나 실제로는 치료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카드는 무료카드라 하나 법적으로 하루 치료하는 데 1천7백 원 어치의 치료밖에 할 수 없도록 못박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들 입장에선 도움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뒤이어 전남지역개발협의회라는 단체가 민간차원에서 위로금조로 유가족에게 1천만 원, 부상자들에게 1백-1천 만 원을 등급별로 지급했으나 그것마저 당시 적극 가담자에게는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유가족들에겐 망월묘지에서 묘를 이장하라는 조건으로 지급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모임을 와해시키는 데 이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 탄압만을 일삼은 독재정권은 5·18 행사를 비롯하여 각종행사, 정부요원이 광주에 온다든가 하면 그때마다 우리를 감시와 연금과 구속 등으로 억압했고, 나의 경우는 심지어 타지방의 산간벽지 사찰로 연금, 구금했던 것이 10차례가 넘는다.
적은 분명하다
나는 1988년 광주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민정당에서 스스로 조직한 인사들로 구성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증언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민화위에서 증언한 것은 이 기구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광주의 입장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5·18정신을 흐리게 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화위는 그 구성자체부터 잘못되어 있다. 심사위원회는 1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무원 2명, 변호사 2명, 교수 2명, 의학계 2명, 그리고 5·18 관련 단체에서 각각 1명씩 모두 4명이었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입장에서 그 진실을 밝혀낼지 의문이었다. 또 해낸다고 하더라도 얼마만큼 국민들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하겠는가. 이제 우리는 당시의 사실을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그 진상을 만천하에 규명하여 5·18이 이 민족의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정립되어져야 하며, 이를 민족적인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당시 사망자가 과연 몇 명인가, 부상자 또한 몇 명인가, 광주학살을 자행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또한 미국이란 존재는 광주학살만행의 측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등등이 밝혀지지 않고는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다.
사망자만 하더라도 정부는 1백91명으로 발표했다. 세상에 이런 날조가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이 의료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만 1백 91명이라는 숫자는 전대병원,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의 영안실에 안치된 사망자와 상무관에 안치된 숫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계엄군이 데려간 그 수 많은 시신은 다 어디에 두었단 말인가. 야산에서 무더기로 묻혀 있는 것을 찾아 낸 사례는 또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뿐인가. 기종도씨란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죽어나온 사건(기씨는 5·18 때 장례식 문제 등에 깊숙히 관련된 분으로 당국에서 시체를 청소차에 실어 화순 모처에 무더기로 매장해 버린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지 3개월 만에 갑자기 중태에 빠져 전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5일 만에 사망한 사건으로 아직까지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사건. 부인 박유덕씨 증언)으로 비추어 당국의 발표가 허위 였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주장한 사망자 2천여 명은 여러 가지 객관적 사실과 지난 1985년 국회에서 거론된 바 있는 [광주시통계연감]에 수록된 6월 한 달 사망자가 2천 6백 27명이라는 숫자에 근거한다. 광주시의 월평균 사망자 숫자 2백58명에 비해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 많은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다. 부상자 수도 마찬가지다. 당시 무서워서 집에서 몰래 치료한 자, 또는 개인병원 등지에서 치료한 자를 모두 합산하면 2천 5백여 명으로 추산되나 정부에서는 1천여 명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정부에서는 신고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종자의 경우에는 그 사실을 입증하라 하고, 부상자에겐 당시 상해를 입힌 군인의 관등성명을 함께 대라고 하며 일체 접수를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은 국회의 국정조사권이 발동되어 지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진상을 규명,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병행해서 5·18 관련자들과 종교단체, 재야, 인권운동, 언론단체, 정부관련기관, 정당 등이 참여한 명실상부한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거기에서 진상규명과 아울러 책임자에게는 응분의 법적 조치가 내려져야 한다.
피해자에겐 법에 의한 적절하고 충분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과 아울러 4.19의거 희생자와 아웅산사건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특별법을 제정하여 보훈대상자로 책정하여 예우해야 한다. 또한 폭도, 사회불순자로 매도된 광주시민의 명예도 당연히 회복되어야 하며, 모든 국민의 의혹과 광주시민을 비롯한 피해 당사자들의 불만이 불식되도록 진정한 차원의 광주문제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150만 원짜리 전셋방을 얻어 가정을 차린 후 만화가게 혹은 장사로 지금까지 생활해 오다가 지금은 아내와 부식납품업을 하고 있다. 자식은 딸만 둘 두었다. 큰딸 이름은 의미다. 7살로 유치원과 주산학원에 다니고 있다. 딸 이름을 '의미'로 지은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 였다. 한 가정을 이루는 데 주역할을 할 수 있는 딸이라는 점, 우리 가정이 이루어놓은 결정체로서 다른 가정의 딸보다 의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보다 중요한 점은 5·18 민중혁명의 의미를 되살리자 하는 뜻에서 '의미'라고 딸이름을 지었다. 둘째딸은 5살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여미'로 지었다. 나에게 있어서 두 딸은 아내와 함께 아주 중요한 나의 분신이라 여기고 있다. 나는 두 딸의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반신불구자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하루빨리 광주문제가 해결되고, 그리하여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꽂이 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갈 뿐이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