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년만에 보는 친구들
학창 세월을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있겠지만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제법 머리가 굵어지던 고등학교 생활이 평생 잊지 못하는 시절인 것 같다. 서로가 공감을 한 탓인지 실로 졸업한 후 육십년 만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소속된 반별로 반창회를 갖는 모임이 생겼다. 평소 자주 만나던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육십년 만에 처음 만나 보는 친구들도 있어서 감회가 깊었다.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때는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사정 등으로 모임을 회피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겉옷을 벗어 던진 나이라 거리감 없이 만나서 동심에 젖어 즐길 수 있는 용기들이 생긴 것 같다.
태어난 지 육십년이 되면 환갑이라고 하여 잔치를 했다. 즉 육십갑자를 다 돌고 다시 갑(甲) 자로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잔치다. 한마디로 귀천할 나이에 아직도 살아 있으니 장수를 축하하는 것이다. 육십갑자는 줄여서 육갑이라고 하는데 통상 육갑을 한다고 하면 생년월일을 가지고 길흉화복을 간단히 헤아려보는 일을 일컫는 ‘육갑을 짚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삭막해진 탓인지 ‘병신 육갑 떨고 있네’라는 욕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즉 이 말은 본래 ‘병신이 육갑한다’ 는 뜻인데 제 인생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신이 어찌 남의 인생을 논하는 육갑을 짚는단 말인가 하는 비웃음이다. 그처럼 자기 주제나 분수에 넘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이렇듯 육십갑자만 해도 오랜 세월인데 20년 가까운 학창시절을 지나고 나서 다시 육십년 세월이 흘렀으니 고희도 지나고 산수에 이르러 얼굴을 마주하다 보니 주름진 얼굴이나 백발은 고사하고 아예 그마저 닳아 없어졌으니 어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겠는가. 풍상을 견뎌온 큰 바위 얼굴들이 신선과 같아서 경외감 없이 대하기가 어렵고 서먹했으나 이심전심으로 마음만은 동심이 되어 모두가 해탈한 웃음을 나눌 수 있었다.
술도 한잔 들어가니 분위기도 따뜻해지고 그 새 취흥까지 돋는다. 눈은 게슴츠레해지고 어깨동무하고 청춘가인 노래 가락도 한가락 하다 보니 어느새 어르신들이 철수야 영호야 하며 아이 동무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력이 쇠해짐을 느끼고 피로가 몰려오며 의식조차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철수야 너 언제 이렇게 늙었냐 하다가 아니 영호야 너 언제 왔냐 하고 헷갈린다. 말하다가 눈을 감고 귀로 듣다가 눈을 떠 보니 내가 저승에서 내려와서 이승에 있는 친구들과 해후한 것 같기도 하고 저 친구가 저승에서 내려와 옆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취생몽사인지 하기야 이 나이에 이승과 저승을 구별하여 구태어 산자와 죽은자를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종이 한 장 차이의 경계선에 이르렀는데.
(2024-4 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