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 곽중철
최근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 활동 일부를 촬영한 TV와 인터넷의 동영상을 보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최초의 한국 대통령’을 보는 감회를 느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미 의회와 유엔 총회장에서 영어로 연설한 예는 있지만 그의 성격상 원고 없는 즉석 영어를 하지는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CNN 회견 등에서도 직접 영어로 임했지만 독학 영어, 외운 영어의 한계를 벗지 못해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의문은 “과연 일국의 대통령이 외교무대에서 자국어를 마다하고 영어를 남발해도 괜찮은가? 나라의 위신이 뭐가 되는가?”이다. 분명한 사실은 대통령이 상대외국인들과의 일상 대화에서마저 일일이 통역에 의지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좁아졌고, 우리나라도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특히 영어는 이제 외국어라기보다는 국제공용어(lingua franca)가 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영어 사용을 백안시할 수만은 없음이다.
이 대통령은 뉴욕에서 투자설명회를 할 때 텔레 프롬터(연설 원고가 나오는 투명판)를 이용해 영어 연설을 했다. 기초적인 R과 L, P와 F, B와 V 발음이 불안하게 엇갈렸지만 의미의 전달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의 대통령이기에 그의 말은 어지간하면 이해된다. 못 알아들으면 손해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이해하고 박수를 쳤다.
이 대통령은 코리아소사이어티 만찬 연설 도중 잠시 이름을 잊었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에게 "Why don't you ask me know-how to win the primary?”(왜 나한테 경선 승리 방법을 물어보지 않느냐)라고 했다. 또 같은 행사에서 축사를 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는 "He lost a job two years ago, and going around the world and find a job in UN"(2년 전 직장을 잃고 세계를 돌아다니다 유엔에서 일자리를 하나 찾는다)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문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 방미 기간 중 ‘이명박 영어’의 백미는 캠프 데이비드 도착 직후에 발휘되었다. 골프 카트에 막 타려는 순간 부시가 “You want to drive?”라고 물었고, 이 대통령은 즉각 “Can I drive? I will try”라고 했다. 이동 중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더 나아가 “Who is guest(누가 손님인가)?”라고 조크를 던지는 순발력도 놀라웠다.
그 다음날 정상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러 걸어 나오면서 먼저 회견장에 나와 김윤옥 여사 옆에 앉아있던 로라 부시 여사에게 손짓하며 “Good morning, Laura”라고 외친 넉살은 수많은 해외 여행과 과거 1년 간의 워싱턴 연수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영어 농담이 분명히 남을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기자회견의 모두 발언 중간에서 비록 우리 말이지만 주한 미군 규모 동결 합의를 설명하며 부시 대통령의 동의를 구한 것도 노련한 커뮤니케이터의 모습이었다. 부시도 기다렸다는 듯 ‘정확한 말’이라고 맞장구쳤다.
사람이 같은 말을 할 때, 같은 말로 의사를 통할 수 있을 때 그 만남의 효과는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작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IOC 총회에서 올림픽 공식언어인 영어와 불어로 연설한 것이 동계 올림픽을 평창으로부터 뺏아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필자는 아직도 믿고 있다.
이 대통령의 이번 방미 성과가 컸다면 그의 영어 실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이제 우리나라도 ‘영어 잘 하는 대통령’ 덕분에 정상 외교의 성과도 배가될 수 있다는 희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대통령이 현재의 영어 실력에 자만하지 말고 좀 더 정확한 발음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조기 유학이 아니라 ‘자신감과 꾸준한 실전을 통한 연마’가 영어 학습의 비결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주기를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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