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40주년을 보내면서
최 봉 호
사십 년 전 공릉동 연립주택 이 층에 신혼집이 마련되었다. 당시 연립주택은 대개 지하실에 난방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내는 연탄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이 층에서 지하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르내렸다. 연탄가스가 독했을 터인데 가스에 중독되지 않아 다행스럽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 내 모든 가구가 같이 쓰는 중앙 집중 형 난방방식이나 아니면 개별 가정마다 기름보일러를 사용해 연탄 쓸 일이 없는데 당시에는 많은 집에서 연탄을 땠던 시절이었다. 이 집은 아버지가 마련해주었는데 천구백만 원을 지불했다. 이집에서 육 년 거주했고,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결혼한 더움 달인 오월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세금 등을 공제하고 십칠만 오천 원이었다. 보너스가 있었던 달에 비해 조금 적었다. 결혼한 후 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시계추처럼 직장을 다녔다. 단지 일탈이라면 직장동료들과 술자리를 갖는 것과 주말이면 산행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자정 넘어 한명 또는 두 명 지인을 집에 데려가면 투덜거리면서도 큰 불평 없이 술상을 보아준 것도 생각난다. 아내는 그런 나의 행동에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고 매달 받아오는 공무원 월급으로 군말 없이 생활을 이끌어 갔다.
아내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서는 집을 손수 돌보았고, 아들이 택시에 치어 정강이뼈가 부러졌을 때엔 침착하게 대응을 해 수술이 빨리 이뤄지도록 조치했다. 조금 늦었더라면 후유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나는 딸이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몰랐으나, 아내는 딸을 과학고등학교로 진학하게끔 했다. 그 결과 카이스트까지 가게 되었으니 성공작이라 할 수 있겠다.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할 때는 아내가 제비뽑기를 잘한 덕에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를 갔다라고 생각한다. 군대를 공군으로 가게 한 것 또한 당신이었다.
그렇게 아내는 집안일을 꾸려나가면서, 남편에게도 잔소리도 별로 하지 않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몇 개 실수를 범하지 않았었나 싶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산부인과에 가보질 못했다. 뭐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술 약속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굉장한 서운함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대전으로 이사 오기 전 석계역 부근 아파트에서 전세를 얻은 적이 있었다. 계약은 내가 했는데, 이사는 아내 주도로 이뤄졌다. 퇴근 후 늦은 저녁때 술이 조금 취한 상태에서 아파트 호수를 몰라 아내에게 물어 집에 간신히 들어갔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가 정부 3청사 이전에 따라 서울 생활을 접고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이때가 98년이었으니 벌써 이십 년이 넘는다. 정년퇴직은 대전청사에서 맞이하였다. 퇴직 후 아내의 말투가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느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사 잔소리와 짜증이 늘어났다. 나이가 들면 여성에게 남성호르몬이 많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내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를 몰라도 많이 몰랐다. 아내는 공릉동에 살았을 때 섭섭했던 일을 지금 얘기한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십 년 전 일을 끄집어낸다. 이제 와 어떡하라고. 이미 지난 일인데. 다 나의 업보려니 여기지만 참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제 나는 정년퇴직을 했고, 애들은 둥지를 떠났다. 세월 가는 건 못 이긴다고 아내와 나는 모두 이순을 넘겼다. 팔이 저리다면서 고지혈증 약을 먹고, 코와 발이 차가워 잠이 안 온다고 말할 때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별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내가 현직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범하게 넘겼는데, 최근엔 아내 신경이 예민해지지 않았나 싶다.
아내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 것은 많은 부분 나의 잘못이 크다. 정년퇴직 후 삼식이가 안되려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잘 안 된다. 정년이란 일을 그만두라는 메시지이다. 돈 버는 일에 더는 기웃거리지 않는 게 좋겠다. 이런 변화기에 아내의 격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격려의 말보다 가끔 가시가 돋은 말을 하면 서러움이 든다. 부부간은 촌수가 없어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부부간도 말조심할 필요가 있다. 매사 상호 조심하고 격려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게 좋겠다. 나이 들수록 ‘빠 삐 따’를 하라고 했다. ‘(모임 등에) 빠지지 말고, (사소한 일에) 삐지지 말고, (매사) 따지지 말라’는 신조어이다. 특히, ‘삐 따’가 잘 안 된다. 코로나로 인해 좁은 집에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빠삐따’를 실천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이제 결혼생활 은혼식(25년)은 이미 지났다. 십 년 후면 금혼식(50년)을 맞이하게 된다. 사십 년 전, 다른 얘기는 기억이 나질 않으나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는 날’까지 잘 살라는 주례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