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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에 있는 돌하르방 (나의 미래 자화상을 미리 보는 느낌?)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의 돌하르방은 오래전부터 아이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말이었는데
1971년 제주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정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툭 튀어나온 동그란 두 눈, 굳게 다문 입,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 머리,구부정한 자세에 한쪽 어깨는 치켜올리고 굳게 움켜쥔 두 손으로는 배를 감싸안고 있는 제주의 돌하르방. 구멍이 숭숭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터라 생김새만큼이나 질감도 독특한 돌하르방은 제주도의 상징이자 간판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돌베개 -
삼성혈(三姓穴)은 제주도 사람의 전설적인 발상지이다.
삼신인 [三神人 :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이 이곳에서 동시에 태어나 수렵생활을 하다가 우마(牛馬)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 3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되었으며 탐라왕국으로 발전하였다고 전한다. 탐라 전설도 삼삼(3신인+3공주)한 스토리텔링이다.
나의 시조 김알지(경주김씨)의 탄생설화는 경주의 시림(始林) 나무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어 이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 났다고 한다. 금괘(金櫃)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로 했다고 하고 알지는 신라 말로 ‘아이’를 뜻한다고 한다. 삼성혈은 세개의 구멍이 옴파로스(배꼽)고 나의 옴파로스는 금수저란 뜻인데...
매체에서 보던 용두암 사진이 실물보다 훨씬 실감이 나는 아이러니한 느낌이다. 너무 멀리서 본 탓일까?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매체 사진의 용머리는 파도와 바람에 마모돼 형체가 어렴풋했다. 지구 온난화도 한 원인이라고 했다. 20~30년 후에는 더욱 초라해질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 와중에 남이포에 우뚝 서있는 선바위가 문뜩 떠오르는 건 무슨 연유일까?
제주도에 있는 말고기 전문식당. 그 이름도 독특하다. 말고기를 처음 먹는 이들은 반드시 '제주 조랑말'을 먹어야 한단다. 고로 옛말에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망아지를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 했다.
그만큼 제주는 말이 성장하기에 딱 좋은 땅이란다. (말고기 시식은 다음 기회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4.3의 정의]
레드 콤플렉스가 다른 게 아니다. 안에서 만들어진 공포는 삶을 파괴한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이 삶의 유일한 정의가 되버린다.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대신 애꿎은 이웃을 빨갱이로 지목해야만 했던 4.3의 아픈 과거사도 있다. 바로 이 공포가 사람들을 광기의 시대로 몰아댔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사람들은 대거 자원입대를 했다. 애국심? 아니, 바로 이 공포 때문에...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한 해병대가 대부분 제주도 출신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건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들은 4.3으로 붙은 빨갱이 딱지를 떼어내기 위해 극성스레 빨갱이 사냥을 해댔다. 그것만이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여 빨갱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제주역사 다시보기, 이영권 -
시대적 아픔을 생각할 때 우리 고향 출신 이문열 작가가 생각난다. 20대 후반에 아버지를 관념적으로 살해했다고 표현한 이문열은 시대와 본인을 차단한 것이 ‘연좌제’였다고 밝혔다. 4.3의 아픈 과거와 이문열의 아픔도 분단의 역사가 가져다 준 시대적 아픔의 산물이다.
‘제주적인 것’을 단일한 것으로 규정하려 할 때 거기에는 다양한 가능성의 지점들을 해석의 편의를 위해 폭력적으로 획일화하려는 욕망이 개입될 수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기라는 시공간 속에서 제주는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역사적 변수와의 상관 속에서 인식되어 왔다. 때로는 외세에 저항한 항쟁의 경험지로서,
제주 4·3을 겪으면서는 ‘절멸’을 통해서라도 반공국가 수립의 역사적 과제를 성취해야 하는 곳으로, 그리고 한국전쟁기에는 육군 제1훈련소로 상징되는 반공의 최후 보루라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심상으로 덧칠되었다. 비유하자면 하나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에 수많은 덧칠이 더해지면서 ‘제주’라는 지역성이 구축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 김동현 -
해안도로를 비를 따라 무작정 차를 몰았다. 종달리에 있는 우도 도항선 대합실이 있는 바닷가에서 차를 세우고 바다를 배경으로 떠나 온 여행의 나른한 기분을 느껴본다. 안개비가 없었더라면 저 수평선 끝에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일텐데...
- 안개비 내린 종달 고망난돌쉼터에서 -
어슴프레 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저녁 무렵의 때가 주는 낮과 밤의 경계, 물과 흙이 만나는 접점에서 안개 너머로 흐릿한 수평선 끝의 모호함, 바다 바람의 상쾌함, 비가 온 뒤 풀내음새의 청정함, 신이 빚은 듯한 신비한 돌바위들... 이러한 자연 풍광과 안개에 젖어 홀로 자리를 지키는 돌쉼터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피아의 구분이 사라지고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온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개가 일순간에 섬을 뒤덮는다.
하늘도, 바다도, 오름도, 초원도 없어진다.
대지의 호흡을 느낀다. 풀꽃 향기에 가슴이 뛴다.
안개의 촉감을 느끼다 보면 숨이 가빠온다.
살아 있다는 기쁨에 감사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끼니 걱정도 사라진다.
곰팡이 피어가는 필름 생각도, 홀로 지내는 외로움도 잊는다.
촉촉이 내 몸 속으로 안개가 녹아내린다.
숨이 꽉꽉 막히는 흥분에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이 기쁨, 그래서 나는 자연을 떠나지 못한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이 순간만큼은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
- 비자림로를 달리다 -
드라이브길로 넘 좋아서 도착 첫날 비오는 날에 차로 달려보고 오감이 호강하는 듯하여 다음 날 성산포 가는 아침길에도 굳이 비자림로를 경유하게 되었다. 참고로 도로 좌우에 있는 나무는 비자나무가 아닌 삼나무다. 비자림로 이름은 이 도로의 끝자락에 비자림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도로란다.
"여행을 즐기는 이들은 길 위에 널부러진 정체성을 찾으려 무척이나 애를 쓴다. 제주여행을 다니는 이들도 그러지 않을까. 사실 여행은 그래야 한다.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그 지역의 정체성을 알려는 노력이 먼저여야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이 무진을 그토록 찾은 이유도 바로 자신에 대한 정체성 때문이었다." -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김형훈 -
남이 보는 나의 정체성이 아닌 내 자신만의 오롯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을려고 그만한 노력을 했던가? 도대체 나다운 건 무엇이고 나답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것일까?
다녀오겠습니다. 이 한마디 던져두고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나도 모르는 길을. 푸른 섬에서 날마다 울고 웃었다. 나의 삶은 설렘과 두려움이 버무려져서 알 수 없는 맛이 났다. 가끔 아팠고, 많이 걸었고, 삶은 지속되었다. 바다와 바람, 오름, 외로움, 그리고 당신과 함께. - 푸른 섬, 나의 삶, 조남희 -
흙 냄새, 풀 냄새와 유자향 비슷한 상큼한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한다. 길을 걷자 훌쩍 자란 비자림 속의 비자나무 잎사귀가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고 있다. 세월이 빚은 나무 지붕이 바람에 흩날린다.
숲은 광속의 시대에 느림을 대변합니다. 숲은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빈 마음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숲을 찾는 묘미는 바로 그 ‘느림과 비움’에 있습니다. - 숲-보기, 읽기, 담기, 전영우 -
우리의 정체성은 ‘제주’라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상징체계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변 세상으로부터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자연은 우리에게 공간의식과 정체성을 제공합니다. 우리의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일치의 경험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따라서 제주의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서 살고 있는 ‘제주사람’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 도대체 ‘제주의 정체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강정홍 언론인 -
성산일출봉은 지금은 제주 해안 끝자락의 산이지만 본래 '성산도'라는 섬이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의 천재시인 백호 임제(林悌)는 '남명소승(南溟小乘)'에서 '성산도(城山島)'는 마치 한 떨기 푸른 연꽃이 바닷가에 피어난 것 같다'라고 기록했다. 성산도는 매립으로 제주도와 이어지면서 성산일출봉이 되었다.
제주도를 ‘삼다도(三多島)’라 부르는 건 돌·바람·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新삼다도’라 할 만하다. 가는 곳마다 자동차와 중국인, 호텔이 많아서다. 참고로 三無(삼무)란 제주에는 도둑·거지·대문이 없다고 하여 나온 말이다.
바다를 보라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
응당 너희들이 평일에 바라던 것보다 이상을 주리라
- 육당 최남선 -
6월 유채꽃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잡아서 사유지 유채꽃밭 사진 한장을 멀찌기 비켜나서 찍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향후 100년 후 제주가 지향해야 할 제주의 핵심가치로 '청정'과 '공존'으로 제시하였단다.
구호보다 실천하는 제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 참! 내 인생의 핵심가치는 정해진거라도 있는가? 있다면 실천하고 있는가?
인생이든 여행이든 목적지가 얼만큼 남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중요하다. 부족한 서로를 의지하면서 걷다 보면 그 어떤 결과를 만나더라도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새삼 생각난다.
선녀바위
외돌개처럼 생긴 높이 30m, 둘레 15m의 선녀바위가 솟아 있는데, 용왕의 아들이 이곳에 내려온 선녀에게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그자리에서 선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어려 있다. 주위에 삼성혈에서 나온 산신인과 혼례를 올린 세 여인이 목함을 타고 도착하였다는 황노알이 있다.
등대에서 바라 본 Glass house
정동향을 향해 손을 벌린 기하학적 형태에 태양의 정기와 바다 바람을 담아 낸 건축명소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타다오의 작품이란다. [1F: Zippo뮤지엄/四季苑, 2F:민트(전망대 레스토랑)] 건물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아쉽게도 풍경이 건물에 가린다.
코발트블루 빛의 드넓은 바다,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솟아 있는 전설의 ‘선녀바위’, 다정하게 손을 잡고 한가로이 돌담길을 걷는 연인들.섭지코지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 제주 낭만 여행, 김미경 -
제주의 여름 꽃은 파스텔 톤의 은은한 자태를 자랑하는 소담스러운 수국이다. 6~7월 꽃을 피우는 종달리에 있는 수국길에는 신부가 든 웨딩 부케처럼 생긴 둥근 꽃들이 풍성하다. 수국의 꽃말은 진심,변덕,처녀의 꿈이다. 조금만 건조해도 말라버리기 때문에 수국의 꽃말은 변덕이다. 하지만 적합한 환경에서는 오래 피어있기 때문에 진심이라는 꽃말도 있단다. 나의 성질과도 닮아있는 수국이기에 더 눈길이 간다. (내 성격은 나도 모른다)
어느 하나에 진득하니 몰입하지 못하고 방방곡곡 바람처럼 떠돌았다. 내 안에서 부는 바람을 어쩌지 못해 전국을 떠돌다가 바람 타는 섬, 제주에 정착했다. 제주의 바람에 홀려 20년 동안 바람을 쫒아 다녔다.
자갈밭에 씨 뿌리고 거두어도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무자맥질한 늙은 해녀들의 강한 생명력을, 바람을 이해하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눈,비,바람에 시달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와 풀을 지켜보며 강인한 생명력을 닮으려 했다. -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 중에서, 김영갑 -
우린 이곳 제주도를 꿈꾸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곳 제주도의 해녀들은 이어도를 꿈꾸며 이곳 제주도의 삶을 버텨왔다.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녀들이 있었기에, 어쩌면 우리가 제주도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고단한 삶으로 누군가의 낭만을 지켜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이 예전만큼 들려지지 않는 것은, 이제 그런 제주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한때의 청춘들을 견디게 해준 그 제주도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
관광객들은 섬을 떠나면서 마을의 평화를 한 움큼씩 가슴에 담고 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져왔던 도회지의 스트레스를 몽땅 섬에 남겨놓고 빠져나갔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
제주도는 수평선으로 존재한다. 언제나, 바라보는 이의 시선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수평선은 제주사람에게는 트임이 아닌 막힘의 금이다. 제주여자들은 남편을 앗아가고 생애 내내 물질 해야하는 바다를 미워하는데 머물지 않고 눈물속에서 그 바다를 평생 키운다. 그 눈물속에서 忍苦의 세월을 출렁이는 법을 가르쳐주는 바다로 부활한다. 바다로 나가 소식없는 사람들을 향한, 속을 까맣게 태우는 그리움으로 제주사람들이 수평선 너머에 만들어 놓은 '이어도'는 그렇게 부활한 제주바다의 한 표상이다. -경향신문, 양경모기자 -
첫댓글 제주도와 첫 만남은 이틀 사이에(6.12∼6.13) 이루어졌다. 제주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계획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자연스러운 여행을 하고 싶었다. 첫 만남이라 그런 지 아직도 제주앓이를 하고 있다. 특히 제주도에서 만난 최해우친구에게 귀한 대접을 받고 와서 마음의 고마움과 더불어 빚으로 남아있다. 더 궁금한 여행기는 http://blog.naver.com/starshine867 놀러와서 댓글도 남겨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