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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르멜산 성모 재속 맨발가르멜회 원문보기 글쓴이: 장미비
엔까르나숀 수도원 (Convento La Encarnac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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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다소 해이해진 수도 생활보다 더욱 엄격한 봉쇄생활을 원하는 수녀들을 위하여 아빌라에 성 요셉 수녀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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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데레사 수도원 (Convento Santa Ther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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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 대성당 블로그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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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빌라 대성당 내부
아빌라 대성당 중앙제데
아빌라 산페드로성당
산 페드로 성당 내부
아빌라 산토마스성당
아빌라 산토마스 성당 내부
아빌라 산비센테 성당
아빌라 산비센테 성당 출입문
아빌라 산비센테 성당 출입문 조각
아빌라 성벽
아빌라의 옛 시가지와 성벽 밖 성당
수백 년 동안 에스파냐 가톨릭 신앙의 성채 역할을 담당해온 아빌라. 성녀 데레사는 이 도시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했고, 수도원 몇 곳을 지었다. 이슬람교 세력과의 경계 지역에 세워진 아빌라는
견고한 요새 도시란 느낌을 준다. 황량한 대지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시가는 투쟁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난공불락의 성채로 보인다. 아빌라는 에스파냐 북부의 기사들이 이슬람교도와
싸우던 전초 기지로 건설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난공불락의 성채
“아빌라는 1년의 절반을 겨울이 지배하며, 모든 것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화강암 성벽, 화강암
보도석, 화강암 성당, 눈이 쌓이고 북풍한설에 얻어 맞은 화강암 산. 이렇게도 자연의 맹위에 노출되고
황폐해진 땅에 아직 생명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다.” 1876년에 아벨라
(아빌라의 옛 이름)를 찾아온 독일인 미술 연구가 카를 유스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이 가톨릭 신앙의 성채를 발판 삼아, 에스파냐에서 가장 친숙한 성녀 데레사는
16세기에 카르멜 수도회 개혁 작업에 나섰다.
아다하 강 오른쪽 기슭에 자리잡은 어둡고 차가운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는 레콩키스타의
확고부동한 상징이며, 지금도 그레도스 산맥 옆에 있는 황량한 미개척 고원을 지키고 있다.
완벽하게 보존된 성벽
그리스도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의 최전선이 경계를 접하고 있는 아빌라에는 카스티야 사람들이
다시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에 지은 특징적인 건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아빌라는 ‘기사’라고
불린 에스파냐 북부 출신의 경건한 귀족들의 도시이자 중세 유럽 최대의 요새 도시였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깃발 아래 그리스도교도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탈환하려고 했던 레콩키스타의 확고
부동한 표상이었던 것이다. 전체 길이 2.5km, 최대 너비 3m, 평균 높이가 12m인 성벽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고, 지금도 엘살바도르 대성당과 수많은 귀족 저택 등 역사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는
지역을 에워싸고 있다. 옛 시가의 면적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유명한 수도원이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은 성벽 밖에 짓게 되었다.
요새를 지으라고 명령한 사람은 레몽 드 부르고뉴로, 그는 아빌라를 이슬람교도에게서 탈환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사위였다. 공사는 1091년까지 계속되었고, 탑 88기와 성문 9개가 들어섰다.
성벽은 로마 속주 시대의 자취인 돌담을 덧씌워 구축했는데, 기본 구조는 직사각형이다. 수비가 약한
동쪽 성벽을 보강할 목적으로 이 곳에 시토회 양식의 대성당을 지었다. 벙어를 목적으로 세워진 이
대성당은 창이 작고 장식도 최소화하였다. 변두리 땅 아빌라가 이슬람교도를 비롯해 수많은 적과
겨루는 싸움터가 되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은 성벽을 따라 다니는 전설을 통해 전해진다. 아군 병력이
열세에 몰리자, 남장한 부인 부대를 조직해 도시를 지킨 히메나 브라스케스 같은 영웅 전설이 있는가
하면, 공포로 얼룩진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아라곤 왕 알폰소 1세의 인질이 되려고 성문을
빠져 나간 70명의 기사는 왕명으로 목이 날아갔고, 그 머리는 ‘라스엘벤시아스’란 곳에서 펄펄 끓는 기름
속에 던져졌다. 그 뒤부터 그 곳을 ‘불운의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요새 기능을 가진 아빌라 대성당 (Avila Catedral)
로마의 식민도시 아빌라에서 비롯되는데, 사도 성 베드로의 제자가 전도한 곳이다. 714년의 이슬람 점령에서부터 11세기 말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전쟁까지 양 세력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11세기 후반에 국왕 앙퐁소 6세의 사위인 우 르고위 백작 라이문도가 도시를지 배하는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고 북부 로부터 그리스도교도를 끌어들였으며, 1090년부터 9년에 걸쳐서 2,000명 을 투입하여 높이 12m, 평균 너비 3m, 둘레 2,526m의 시벽으로 도시를 완전히 둘러쌌는데, 타원형 탑이 88개소, 성문이 9 개소가 있었다.
1120년경에 주교좌가 설치되었으나 대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착공하여 16세기에 완성됨으로써 명실공히 리지외 교구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당은 시벽의 반원형 탑을 형성, 시벽 밖을 향해서 무게있게 자리잡고 있어, 요새의 본진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아빌라 대성당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대데레사가 출생한 곳에 세워져 있음은 물론, 일찍이 갈멜 수녀회를 중심으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서 수도자의 엄격한 규율과 경건한 생활이 널리 알려졌으며, '성인들의 아빌라'라는 소문과 함께 수도자가 늘어났고,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분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재이주 시대 초기에 지은 대성당은 성벽과 연결되어 있다. 대성당 후진은 성벽이 탑을 이루는데, 보통
‘엘시모로’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파사드 옆을 고정시키는 튼튼한 탑 1기가 요새다운 모습을 강조하며,
시대 배경을 보여 준다. 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도기 건축으로,
12세기 초에 순수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기 시작했다. 1157년이 되자 부르고뉴 출신의 명공 훌첼이
작업을 맡게 되었다. 그는 피레네 산맥 저편의 새로운 예술 경향에 밝았으며, 이 대성당에 고딕 범주로
간주될 수 있는 요소를 끌어들였다. 작업은 14세기까지 계속되어 완공되었다. 파사등 옆에 달린 탑
하나는 지금까지 건설되지 않았다. 대성당 내부에는 훌첼이 만든 앰뷸러토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앰뷸러토리는 공간을 교묘하게 처리해 작은 예배실을 들여놓을 만큼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줄지어 늘어선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수한 기둥에 따라 2개의 보랑으로 나뉜다. 또한 늘어선
기둥은 지붕 구실을 하는 리브 궁륭의 리브를 받쳐 준다. 제단 안쪽 중앙에는 아빌라에서 태어나 1445년에
죽은 ‘엘 토스타드(불에 타 죽은 남자)’라고 부르는 주교 알폰소 데 마드리갈의 무덤이 있다.
그 시대의 박식한 인물이자 인격자였던 마드리갈을 기념하는 묘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그의 모습을 그린 빼어난 설화석고 조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 묘비는 조각가 바스코
데 라 사르사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중앙 제단 장식벽의 디자인, 그리고 그 아래쪽에 있는 설화석고
성궤도 바스코 데 라 사르사의 작품이다. 이 제단 장식벽은 지금 에스파냐에서 볼 수 있는 제단 장식벽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다. 이 제단 장식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극적 장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여러 명의 화가가 제작에 관여했다. 그 가운데 페드로 베르게테가 유명한데 그는 1499년부터 세상을 떠난
1503년까지 제작에 종사했다.
귀족의 대저택
아빌라는 16세기에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1세에 대항해 일어난 코무네로스 반란 때 앞장섰던 도시 가운데
하나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지은 저택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도시 남쪽에는
13~17세기에 지은 7개의 주거군으로 이루어진 ‘다비라 저택’이 있다. 이 저택은 아빌라 건축사의 작품집을
이룸과 아울러 아빌라에 연고가 있는 귀족의 역사로 얼룩졌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는 ‘데아네스
저택’의 아름다운 파사드는 르네상스 양식이며, 안뜰에 있는 아치는 고딕 양식이다. 이 곳에 전시된
가구류를 통해 아빌라 귀족 계급의 생활 양식과 풍요로운 삶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레콩키스타가 완료되고
재이주가 끝나자, 아빌라는 차츰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550년에 설립된 대학이 1807년에 폐쇄되면서
아빌라는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