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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 도통사 孔敎支會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를 중심으로 -
이정희
<국문초록>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서양의 종
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날로 확장되는 반면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조선
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암울한 시기다. 이 시기 조선의 유교 지식
인들은 위기감과 함께 유교를 부흥시켜 국권회복의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孔敎
運動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한 곳은 진주 硯山의
道統祠와 산청 丹城의 培山書堂이다.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은 惠山 李祥奎
(1846-1922)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 설립은 眞庵 李炳憲(1870-1940)이 각
각 주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의 성리학 이념과 체제에 젖어 있던 당시 유림계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숭상 방식이나 공교운동 추진 방식, 주자학을 비판
하고 금문경학을 수용하는 데 대해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산서원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봉향 방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지를 철회하고,
또 경남지역 서원과 향교에도 배산서당 공교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섬으
* http://dx.doi.org/10.14381/NMH.2015.06.30.46.95
** 경상대학교 도서관 사서. lejehe@g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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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당초 혜산과 진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유교부흥운동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
다. 비록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공교운
동은 경남지역의 학문적 역량과 문화적 자신감을 전국 및 동아시아에 충분히
과시한 활동이었다. 혜산과 진암이 그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 공교운동을 유교부흥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더욱 심도 있게 지속적으로 재조명 하여야 할 것이다.
주제어 : 공교운동, 혜산 이상규, 도통사, 진암 이병헌, 배산서당, 유교부흥, 유교
복원, 숭정학, 금문경학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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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Ⅰ. 서론
Ⅱ.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형성과 전개
1. 道統祠의 孔敎支會 설립
2. 배산서당의 朝鮮孔敎會 설립
Ⅲ.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좌절
1. 도통사 孔敎支會의 좌절
2. 배산서당 朝鮮孔敎會의 좌절
Ⅳ.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좌절 원인
1. 성현 배향 방식의 이견
2. 남명·퇴계 우열론 시비
3. 진암 학문의 이단성 성토
Ⅴ.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공교운동 비교
Ⅵ. 경남지역 공교운동의 의의
Ⅰ. 서론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변기였다. 서양의 종
교가 국내로 유입되어 날로 확장되는 반면에 유교는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조선은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암울한 시기다. 이 시기 조선의 유
교 지식인들은 유교를 부흥시켜 국권회복의 돌파구로 삼고자 하는 孔敎運
動1)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진주 硯山
의 道統祠와 산청 丹城의 培山書堂이다.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은 惠山 李祥
奎(1846-1922)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 설립은 眞庵 李炳憲(1870-1940)
이 각각 주도하였다.
먼저 혜산에 관한 연구는 그가 남긴 漢詩2)와 歷代千字文을 문학적·국어
학적으로 연구하여 왔으나3), 그의 공교운동에 관한 소개나 연구는 많지 않
1)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 유교를 종교화하기 위한 운동을 ‘孔敎運動’ 또는 ‘孔子
敎運動’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는데, 본고에서는 편의상 ‘孔敎運動’으로 용어를
통일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2) 유기철, 惠山 李祥奎 詩 硏究, 경성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3) 洪允杓, 「歷代千字文과 서부 동남방언」(어문연구회, 국어학논총), 1985.
申景澈, 「歷代千字文 硏究」(상지대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95호), 1986.
박용식, 「경남의 언어」(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경남학 32), 2011.
李政喜, 「惠山 李祥奎 歷代千字文 간행 연구」(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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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편이다.4) 반면에 진암은 經學思想·孔敎運動·孔敎思想 등 다방면으로 연
구가 이루어졌다. 경남지역 유학자 중 南冥 曺植(1501-1572) 다음으로 활
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중 진암의 공교운
동에 관하여도 벌써 수편의 논문을 통하여 연구가 이루어졌다.5)
반면에 도통사 孔敎支會 설립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이는
2004년 이전까지 도통사 孔敎支會가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암
의 공교운동 연구 선구자이자 진암의 학문연구에 일생을 천착한 금장태도
도통사의 존재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면이 있다. 금장태는 한말 일
남학 33), 2012.
김예니 외, 「19세기 후기∼20세기 전기 경상 방언을 반영한 문헌어의 음운 현상
연구」(국어학회, 국어학 71), 2014.
4) 황영례, 安淳煥의 儒敎 宗敎化 運動과 鹿洞書院,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오이환, 「일제시기의 덕천서원」(동양철학 제32집), 2009, p.192-199.
李鍾洙, 「李祥奎와 道統祠 孔敎支會」(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大東文化
硏究 제85집), 2014.
5) 진암의 공교운동 관련 연구 논문은 아래와 같다.
金裕澤, 韓國 孔子敎에 關한 硏究, 成均館大學校, 1984.
劉準基, 「眞菴 李炳憲의 儒敎改革論」(韓國史硏究會, 韓國史硏究 47호), 1984.
鄭奎熏, 眞庵 李炳憲의 儒敎改革思想과 孔子敎 運動에 關한 硏究, 韓國精神文
化硏究院, 1984.
崔昌學, 近代 韓國 儒敎의 變化論理와 改革運動에 관한 硏究, 成均館大學校,
1991.
李相星, 「眞庵 李炳憲의 儒敎 改革論과 孔敎運動」(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
논집 4집), 1995.
홍원식, 한주학파의 공자교 운동, 啓明大學校 韓國學硏究院, 1999.
금장태, 한국근대유교와 종교운동,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0.
금장태, 「李炳憲의 批孔論에 대한 반박과 민족주의적 역사인식」, 韓國宗敎學硏究
會, 2002.
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예문서원, 2003.
박미라, 「이병헌의 孔敎운동에 나타난 神道論 연구」, 동양철학연구회, 2004.
박미라, 李炳憲의 사상과 民族宗敎의 관계에 대한 연구, 修德文化社,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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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기 유림단체 현황을 소개하면서 도통사 공교지회에 대한 언급이 없었
고6), 2003년 도통사를 소개하는 각주에서 도통사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鄭萬祚 교수의 도움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硯山의 道統祠는 1913년 창
립되어 진주시 대평면 하촌리 547-2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남강댐 공사로
인해 1995년 진주시 나동면 유수리 724로 이전되었으며, 孔子를 主壁에 모
시고, 朱子를 配享하며 安文成公을 從享하여, 8월 27일 孔誕日에 제향하며
3位의 影幀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진주의 뿌리, 진주시 간행, 69쪽 참
조).7)
도통사 孔敎支會의 존재가 학계에 소개된 것은 2004년 이후이다. 2004년
황영례는 竹儂 安淳煥의 유교 종교화운동과 鹿洞書院을 연구하면서 연산 도
통사와 녹동서원과의 연관 관계를 처음 거론하였다.8) 또 도통사에 관한 독
립된 논문은 아니지만, 2009년 오이환은 일제시기 德川書院을 연구하면서
도통사 설립부터 좌절까지의 과정을 포괄적으로 소개하였다.9) 그러나 도통
사 연구는 이후에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도통사에 관한 단독 논문으
로는 2014년 이종수에 의해 연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10) 이처럼 도통사
와 배산서당의 공교운동은 개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연산 도통사 공교지회는 배산서당 조선공교회 보다 6년 앞서서 창설
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교지회다. 그러나 진암의 유교 종교화운동의 거점인
배산서당과 불과 30리 거리에 있는 연산 도통사의 종교운동과 연계한 상호
종합적인 고찰은 초기단계에 있는 실정이다.
6)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와 전통(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p.40.
7) 금장태, 유교개혁사상과 이병헌, 예문서원, 2003.
8) 황영례, 安淳煥의 儒敎 宗敎化 運動과 鹿洞書院,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9) 오이환, 「일제시기의 덕천서원」, 동양철학 제32집, 2009, p.192-199.
10) 이종수, 「李祥奎와 道統祠 孔敎支會」, 大東文化硏究 Vol.8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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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혜산과 진암의 공교운동 연구 성과를 참고하
여 일제시기 경남지역 공교운동의 전개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형성과 전개
경남지역에서 공자의 사당을 지어 공자의 화상을 받들고 숭모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다. 조선 중기 진주출신 유생 孔仁博(1547-?)이 1639년 중국
곡부 궐리에 가서 吳道子가 石刻한 공자의 화상을 모사하여 돌아와 경남 진
주시 사봉면 봉곡리에 闕里祠를 건립, 공자의 화상을 봉안하고 매년 2월 공
자 기일과 8월 공자 탄신일에 봉향례를 지냈다. 그 후 봉향례가 중단되었다
가 1922년 후손 孔在善이 경남지역 曲阜孔氏 후손과 경남지역 유림의 여론
을 모아 궐리사 터에 다시 공자의 영정각을 중건하여 봄·가을로 봉향하였다.
1925년에는 공자의 사당을 지속적으로 받들기 위해 尊聖契를 조직하고
閔哲勳·許穳 등을 都廳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존성계에 가담한 인물의 명부
인 闕里祠儒契案을 간행하였는데, 진주와 함안을 중심으로 한 경남전역에
서 887명이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11) 궐리사와 존성계는 경남지역
곡부공씨를 중심으로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존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과
儒契였다.
경남 통영에서는 유교의 모범이 될 文蹟을 수집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새
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許侙과 郭漢一 등이 조선 유
교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유교의 교육제도·도덕규범·이단배척
론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 이를 1902년에 편집하여 1903년 경남 통영에서
大東正路를 간행하였다. 공자를 존숭하는 문제, 유교 교육기관인 太學의
제도, 우리나라 儒賢의 귀감이 되는 언행, 서양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판
등 네 가지를 문헌적으로 정리해 한국 유교를 새롭게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11) 孔重權, 尊聖契, 晋州 寺奉 關里祠, 19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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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말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교 전통의 계승과 진작을 추구하
는 집약된 의지를 보여주려고 하였다.12)
경남 함안과 진주에서는 공자의 일대기를 고찰하여 이를 연대기 형식으로
엮은 책의 출판이 유행하였는데, 그것이 곧 孔子編年이다. 공자편년은
본래 중국의 胡仔가 편찬 간행한 책으로, 胡舜陟의 序文이 더해져 1887년 狄
子奇가 浙江書局에서 간행하였다.13) 그 후 이 책이 국내로 유입되어 1893년
진주 촉석루 彰烈祠에서 공자편년이 간행되었고14), 또 1904년에는 咸安
槐山齋에서 趙昺奎가 공자편년을 간행하였다.15) 다시 1915년에는 진주
연산 도통사에서 안명식이 공자편년에 朱子와 安子의 연보를 추가하여 孔
子編年朱子年譜安子年譜를 合刊하였다.16)
闕里祠를 건립하고 尊聖契를 조직하고 大東正路와 孔子編年을 간행
하는 사업은 모두 공자를 숭상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는 공자의
후손과 경남지역 유림의 의지가 반영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아직 孔敎運動
이라고 부를 만큼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경남지역에서 유교의 종교화운동은 1917년 혜산이 주도하여 경남 진주
硯山에서 공교지회를 창립하고, 1923년 진암이 주도하여 경남 산청 배산서
당에서 조선공교회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17)
이 중 경남지역의 대표적인 공교운동인 진주 연산 도통사 孔敎支會와 산청
배산서당 조선공교회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2) 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大東正路 해제 및 금장태, 東西交涉과 近代韓
國思想(한국학술정보, 2005) pp. 326-333. 참조.
許侙 等編, 大東正路刊役時同苦錄 참조.
13) 狄子奇, 孔子編年.
14) 矗營 彰烈祠, 孔子編年.
15) 趙昺奎, 孔子編年.
16) 安明植, 孔子編年.
17) 이종수, 「李祥奎와 道統祠 孔敎支會」, 大東文化硏究, Vol.85, 2014, p.323-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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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道統祠의 孔敎支會 설립
도통사 공교운동 주도자는 혜산이다. 혜산은 1846년 경남 고성군 무양리에
서 覺圃 濟權과 김녕김씨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나 性齋 許傳(1797-
1886)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혜산은 침체된 家學을 부흥시키기 위해
1880년 성재 문인이 많이 거주한 서부경남, 곧 산청군 신안면 묵곡리에 이주
하였다. 경호강 가에 學而齋를 건립하고 강학과 子姪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海閭 權相迪, 月皐 趙性家, 后山 許愈, 果齋 張錫藎, 俛宇 郭鍾錫, 南川 李道默,
月淵 李道樞, 勿川 金鎭祜, 前川 金麟洛, 一山 趙昺奎, 霞峯 趙鎬來, 素窩 許巑,
素山 李相福, 默宇 文正郁 등 당시 서부경남지역 성재학파 名儒와 폭넓게 교
유하였다.18)
만년에는 도통사를 창건하여 공자·주자·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유교 부
흥운동을 적극 펼쳤다. 1921년 1월 18일 병세가 위독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되자 손가락으로 ‘崇正學’ 세 글자를 써서 弟子와 子姪들에게 유언으로 남기
고 별세하였다.19)
혜산이 강조한 ‘숭정학’은 ‘闢異端’과 함께 병용되는 말로, 이는 正學을 숭
상하고 이단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正學은 주자성리학을 가리키
고, 異端은 주자성리학이 아닌 모든 사상을 포괄한다. 주로 陸王學으로 불리
는 陸九淵·王守仁의 心學과 함께 넓게는 도가, 불가를 비롯하여 천주학 등이
포함된다.20) 특히 천주학은 조선후기 들어서 邪學의 대표적인 것으로 인식
하였다. 혜산의 ‘숭정학’은 곧 천주교를 배척하고 주자성리학을 숭상한다는
18) 이상규, 惠山集 卷之十五, 「家狀」“屋後有嚴惠山 桐江帶其前 赤壁控其後 府
君甚愛賞焉 與諸族創學而齋 築風詠臺詠歸橋于其傍 植松竹桑栗 日逍遙于其間 士
友稱惠山處士 此府君之樂山水也 一時名勝 如權海閭相迪 趙月皐性家 許后山愈
張果齋錫藎 郭俛宇鍾錫 李南川道默 月淵道樞 金勿川鎭祜 金前川麟洛 趙一山昺
奎 趙霞峯鎬來 許素窩巑 李素山相福 文默宇正郁 爲最善 此府君之所從遊也”.
19) 盧相稷, 小訥先生文集 卷之三十八, 「通仕郞義禁府都事惠山李公墓碣銘」 참조.
2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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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이다.
혜산은 조선말 일제초기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으로 유교가 피폐해져 가
는 현실을 근심하여 이를 타개할 방법으로 공교운동을 추진하였다. 안향이
고려 말 성리학을 도입하여 각종 폐해로 가득한 불교를 배척하고 공자와 주
자를 받들어 세도를 바로 잡았듯이, 혜산도 국운이 기울어가는 현실에서 孔
子․朱子․安子(安珦)를 함께 숭상하고자 하였다. 곧 안향이 불교를 배척한 것
과 마찬가지로 혜산도 천주교를 배척하고 주자성리학을 正學으로 받들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異敎가 滔天하여 綱常이 墜地”21)하는 현실에서 혜산은 전
통적인 正學를 고수하기 위하여 공자․주자․안자를 받들어 도통사 설립을 창
안하였다. 도통사 건립 과정은 안명식이 1961년에 간행한 道統祠誌에 상
세하게 수록되어 있는데, 도통사지를 중심으로 도통사 건립과정을 살펴보
면 아래와 같다.22)
도통사에서 공교운동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1909년 겨울에 晦軒安先生
實記를 重刊하여 順興安氏 재실인 硯山齋에 소장하면서 부터다. 實記의 중
간에는 晦軒의 후손들과 南川 李道黙, 惠山 李祥奎, 霞峯 趙鎬來, 驥汀 鄭圭
錫, 芝山 安孝鎭 등이 참여하였다. 모두 진주 및 산청, 함양지역에 거주하는
성재학파 유림들이었다.
1910년 9월 15일 菜禮를 행하고, 儒案을 만드니 많은 선비가 호응하였다.
이에 서부경남지역 유학자들은 晦軒을 尊崇하는 것에서 감회를 받아 공자와
주자를 받들어 正學을 興起할 것을 제창하였다.23) 이리하여 회헌이 고려시
21) 安明植, 道統祠誌, 「道統祠誌序」, 1964 참조.
22) 도통사 건립 과정과 내용은 安明植의 道統祠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도통사의 창건 과정을 정리해 둔 논문으로 오이환의 「일제시기의 덕천서
원」이 있다. 도통사 공교지회 건립 과정은 이종수의 「李祥奎와 道統祠 孔敎支
會」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도통사 공교지회 건립 과정은 위 두 논문의 도움
을 많이 받았다.
23) 李道樞, 南川集, 「行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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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유교부흥을 위해 실천한 사례를 援用하여 惠山 李祥奎․霞峯 趙鎬來․南
川 李道黙․芝山 安孝鎭․驥汀 鄭圭錫은 晦軒의 후손들과 함께 진주 연산에 도
통사를 건립을 추진하였다.
1913년 2월 3일 霞峯 趙鎬來가 「道統祠造成時通各道各郡校院儒林文」을
작성하여 유림들에게 배포하였다. 10월에는 연산재 뒤편에 3간의 影幀閣을
건립하였다. 안향이 만년에 孔子와 朱子를 모시던 故事를 追念하여 영정각
중앙에 공자를 봉안하고, 東壁에 주자를 西壁에 안자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이를 ‘道統祠’라 명명하였다. 또 도통사 초대 講長에 李道默, 契長에 閔致良,
齋長에 李祥奎, 都檢에 沈宜奎․趙鎬來, 道廳 幼學에 安孝鎭을 선출하였다.24)
1915년 가을에는 진주 연산 도통사에서 安明植이 孔子編年과 朱子年
譜, 安子年譜을 合刊하고. 1917년 봄에는 安孝鎭·尹憲燮·安承一을 중국
궐리로 파견하였다. 안효진 등은 도통사에서 간행한 孔子編年朱子年譜安
子年譜와 함께 그 서문 및 안향의 신도비문 작성을 위촉하는 도통사 유림
대표의 서신 각 1통을 곡부에 전달하였다. 안효진 등은 궐리에 머무르는 동
안 연성공 孔令貽의 종숙부인 孔子敎 總理 孔祥霖으로부터 도통사에서 간행
한 孔子編年朱子年譜安子年譜의 序文을 받았으며, 귀국한 후 연성공이 지
은 서문 및 안향의 신도비문도 우송받았다. 孔子敎 總理 孔祥霖이 도통사 孔
敎支會를 창립할 것을 건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돌아올 때 孔子敎
誌와 孔敎總章程 등을 보냈다.
光明閣의 建築과 三賢의 編年과 年譜를 刻板한 비용은 전액을 하동군 북
천면 옥정리에 사는 朴弼鍾이 巨額을 부담하였고, 도통사 祭器는 혜산이 마
련하였다. 도통사 건립 및 공교지회 설립에는 혜산의 각별한 노력이 있었다.
청사초롱 한 쌍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이 번 釋菜 때 매달아 同文堂 獻官
所를 비추게 하고, 다음날 아침 舍菜 때에도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竹溪詞」와 「道東曲」을 미리 익히게 하였다가 獻酌할 때에 노래하게
24) 趙鎬來, 道統祠誌, 「道統祠造成時通各道各郡校院儒林文」, 1964, p.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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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십시오. 제사를 마치고 나면 五經 및 四勿箴 본 편을 강론하여 선비의 거
동을 엄숙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光明閣 단청 일을 마쳤는지요. 나머지는
그대들에게 맡깁니다.25)
이 글은 혜산이 안명식에게 보낸 간찰이다. 도통사 석채일이 다가오자 어
둠을 밝힐 청사초롱을 직접 만들어 두고, 아이들에게 「竹溪詞」와 「道東曲」
을 익히게 하고, 五經 및 四勿箴을 강론 할 것과 광명각 단청하는 일까지 세
세하게 관심을 갖고 부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궐리에서 보내온 12종
의 서적과 83종의 도서를 추가로 구입하여 萬卷室에 비치하였다.
도통사의 운영 조직으로 會長 1인, 副會長 1인, 總理 1인, 副總理 6인, 經理
13인, 協理 16인, 約正 65인, 贊成 19인, 評議 55인, 掌儀 19인을 두었다. 각
道에는 約正 1인, 講長 1인, 契長 1인을 두고, 각 郡에는 贊成·講長·契長 약간
명을 두었고, 도통사 사당에는 堂長 1인, 講長 1인, 契長 1안, 堂任 3인을 두
었다.26) 이로써 조선을 대표하는 공교지회로서 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통사에서는 孔敎大會를 개최하여 「孔敎支會規例」를 반포하
고, 孔敎支會 職任을 확정하였으며, 전국 팔도에 規例를 배포할 것을 결정하
였다. 도통사 공교지회는 공자 탄신일인 1917년 8월 27일 「中華闕里孔敎總
硯山道統祠同文孔敎支會趣旨書」․「孔敎支會規例」․「闕里孔敎總道統祠支任
員」을 작성하여 전역에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공교지회는 정식으로 설립이
확정되었다.
도통사 조직의 주요 임원은 아래와 같다.
25) 이상규, 惠山集 卷7, 「與安台元」 “淸紅紗燭籠一雙預製 今番 釋菜時 懸照於同
文堂 獻官所翌朝又用於舍菜時爲好 使少年預習竹溪詞道東曲歌詠于獻酌時 享畢
講五經及四勿箴本篇 俾肅儒儀且可 光閣彩雘已至畢役耶 餘在良遂”.
26) 安明植, 道統祠誌, 「孔敎支會規例」, 1964 참조.
姓 名職責(兼職) 前歷居住地師承
李祥奎會長前都事山淸 默谷성재문인
李道默講長幼學山淸 沙月성재문인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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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사 본부의 임원은 대개 산청, 함안, 의령 등 서부경남지역 성재 문인
이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2,241명의 유림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27)
2. 배산서당의 朝鮮孔敎會 설립
배산서당의 공교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진암이다. 진
암의 본관은 합천, 字는 子明, 호는 眞庵 또는 白雲山人으로, 경상남도 함양
에서 태어났다. 진암의 생애와 활동은 俛宇 郭鍾錫(1846-1919) 문하의 동
문수학한 秋帆 權道溶(1877-1963)이 지은 진암 行狀과 그의 문집 등을 통
해 상세히 알 수 있다.28)
진암은 청년기에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 때 寒洲學
派 인물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이 때 1913년 東三省
孔敎會를 설립한 大溪 李承熙(1847-1916)도 만났으며, 또 勉庵 崔益鉉
(1834-1907)을 만나 시국과 학문을 논란하기도 하였다. 또 호남의 蘆沙 계
통의 학자들과도 黨色을 초월하여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러나 거세게 밀려오는 서구 근대 문물의 영향으로 진암은 지식인이 시
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의식전환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안목을
해외로 돌려 서양의 역사와 철학서적을 읽고, 또 康有爲의 變法思想에 대하
여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05년 한 ・일 을사보호조약이 성립되자 일본 당국에 그 부당성을
27) 安明植, 硯山道統祠儒案 참조.
28) 배산서당 조선공교회 설립에 관한 내용은 금장태의 논저를 대부분 참고하였다.
閔致亮契長前正言山淸 特里-
李祥奎齋長前都事丹城 默谷성재문인
沈宜奎都檢前校理山淸 漢濱-
許 巑都廳幼學宜寧 慕義성재문인
李鎭仁成造幼學丹城 默谷성재문인
安彙成監董前主事咸安 玉悅-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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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서울에서 영어를 익히고, 또 미국
인 알렌이 상해에서 발행하는 萬國公報를 읽으며 국외의 새로운 지식을
넓혀 나갔다.
45세 되는 1914년 정월에 西遊의 길을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20여일
을 머물면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孔敎會 등을 방문하여 그 곳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공교회 잡지를 통하여 중국의 유명한 인사들이 공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론을 보고, 유교를 기독교와 대비하여 「儒敎는 宗敎와 哲學이
合一한다는 宗敎哲學合一論」 일편을 써서 유교가 미신을 배제한 무상의 종
교임을 역설하였다.
그 후 북경을 떠나 곡부에 가서 孔子敎 總理 孔祥霖을 방문하고 공자의 유
적을 참배하였다. 진암은 공상림의 주선으로 4월 하순에는 홍콩으로 가서
마침내 오랫동안 갈망한 강유위를 만나 자신의 견해를 토론하였다.
진암은 이후부터 12년간 5회에 걸쳐서 중국을 내왕하면서 강유위를 수 차
례 만나 시국과 유교에 관련한 문제를 토론 하고 지도와 격려를 받았다. 강
유위의 지도와 영향 아래 공교운동의 이론을 정립하여 나갔다.
진암이 배산서당에서 공교를 개창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9세 때인 1918
년에 이르러서다.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을 배향한 道川書院이 賜額을
받자 그곳에 같이 配享되었던 淸香堂 李源(1501-1569)과 竹閣 李光友
(1529-1619)를 따로 배향하기 위하여 1771년 배양마을에 德淵祠를 세웠
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덕연사마저 훼철되고 말았다.
경남 산청 단성의 배산에 사는 친족인 李炳昊와 동생 李炳洪이 진암에게
찾아와 조상을 받드는 사당을 짓는 일을 제시하자, 진암은 밤낮으로 오직 공
교를 보존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몰두해 있었던 만큼 文廟를 설립하여 敎祖
인 공자만을 높이는 뜻을 간직한다면 자신도 이 일에 종사하겠노라고 제안
하여, 마침내 문묘 설립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 해 9월 진암은 배산에
문묘를 건립하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영남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퇴계 종
가를 방문하여 설득하였다. 먼저 퇴계의 12세손 起巖 李中業(1863-1921)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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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찾아갔으나 반대하자, 다시 퇴계의 13대 종손 霞汀 李忠鎬(1872-1951)
를 찾아가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모친상을 당하고, 1919년에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이 소요에 휩싸였다. 진암은 居喪 중에 경전과 역사연구에 몰두하여 유
교 개혁의 이론적 체계를 세운 儒敎復原論을 이 때 완성하였다. 진암은 공
교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제도적으로 유교부흥을 위해 문묘를 설립하여 敎祖 공자를 존숭할
것을 결심하였다.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는 조선시대 국가기관인 성균관
과 향교에만 설치할 수 있었다. 그가 배산서당을 세워 공교를 전파하기 위해
서는 민간에서도 民立 文廟를 설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된다고 생
각했다.
둘째, 공자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으로 문묘에 공자
聖像의 진본을 받들고, 공자 경전의 진본을 구해서 봉안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 곡부 대성전에 있는 공자의 진상을 모사하여 배산서당 문묘에 봉
안하였다. 또 통용되고 있는 古文經 유가의 경전과 주석이 眞善한 것이 아니
므로 진선한 경전을 확보하여야만 유교 본래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고 인
식하였다. 진암은 궐리를 방문하여 공자 후손으로부터 공자 진상과 배산서
당 朝鮮孔敎會 설립 공인을 얻고, 또 강유위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통용되
던 古文經과 달리 今文經을 구입하여 새로 지은 배산서당에 비치하였다.
셋째, 진암이 배산서당에 문묘를 설립하여 공교운동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하는 계획이 국내에서 공인받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 도산서원의 협조와 중
국 궐리의 협조가 절실함을 알았다. 따라서 퇴계의 종손 이충호와 친밀하게
교유하면서 지속적인 협조를 요청하여 승인을 받아냈다.
진암은 도산서원의 협조와 공자 후손의 협조로 공자의 聖像을 얻어 배산
서당에 봉향할 수 있었다. 진암이 중국의 방문하였을 때 해외의 신진 동포,
특히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강유위를 위시한 중국의 여러 학자들, 그리고
곡부의 연성공부 및 孔門의 여러 석학들이 많은 지원과 찬성을 해 주었다.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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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진암이 발의하고, 지역 유림들이 합심하여 儒敎復源을 위한 文廟,
道東祠, 講堂을 지어서 培山書堂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에는 공자의 眞像을
그려와 文廟에 단독 배향하고, 道東祠에는 퇴계, 남명, 청향당을 배향하고,
옆에는 죽각을 從享하였다.
그러나 진암이 1922년에 지은 歷史敎理錯綜談의 내용이 유교를 민족주
의적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남지역 유림의 강한
항의가 일어났다. 결국 배산서당 조선공교회는 창립과 동시에 역풍을 맞아
좌절되고 말았다.
배산서당 儒會 發起人은 대략 15명 내외로,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29)
성 명 생졸년 자 호 본관 문집 거주지 사승 비고
李忠鎬1872-1951 恕卿霞汀眞城禮安 上溪退溪13대 宗孫
朴圭浩1850-1930 瓚汝沙村密陽沙村集丹城 沙月면우문인 제명 탈퇴
金在洵1856- 孝克西磵商山丹城 法勿면우문인 제명 탈퇴
金錫九慶州咸陽 甁谷
李炳憲1870-1940 子明眞庵陜川眞庵集咸陽 松坪면우문인
柳違佑
曺庸相1870-1930 彛卿弦齋昌寧면우문인
李韶久舜成
權相纘1857-1905 慶七于石安東于石集山淸 立石면우문인
朴在九1859- 春汝三湖泰安晉州 三岐면우문인
鄭文燮1859-1929 周聖我石東萊我石集咸陽 栢坪
趙顯珪1877- 孝謹咸安晉州 召南면우문인
盧普鉉1881- 誠之雲谷豊川咸陽 玉洞면우문인
權秉鐸乃警小竹安東丹城 江樓
李炳元1878-1956 章瑞陝川丹城 培養면우문인
河載華1860-1937 復卿與人軒晉陽晋州 士谷면우문인
이 중 沙村 朴圭浩와 西磵 金在洵이 중간에 제명 탈퇴함으로써 주도자는
대략 13명 내외다. 이들의 거주지는 진주, 산청, 함양 등 서부경남지역이 주
29) 崔兢敏 編, 俛門承敎錄, 경상대학교 도서관 <남명학고문헌시스템>, 한국국
학진흥원 <유교넷> 등 참조.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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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이룬다. 또 학파별로는 대부분 면우문인들이다.
Ⅲ.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좌절
1. 도통사 孔敎支會의 좌절
통사 공교지회는 건물, 영정봉안, 기물 구비, 서적 출판 및 보유, 조직 구성
등을 갖추어 1917년에 창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도통사 공교지회
는 좌절되고 만다. 도산서원에서 1918년 10월 24일 통문을 보내 도통사의
聖像 봉향 방식에 불만을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통문은 도산서원
원장이 도통사를 비롯하여 진주향교 및 각 서원으로 보낸 것인데, 먼저 도통
사 측이 공자를 봉안하면서 顔子․曾子․孟子․子思의 네 配位를 폐하고 주자와
安子만을 배향한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며, 三條辨文을 지어 따진 것이다.
그 세 가지 조목의 첫째는 도통사가 安珦의 사당인지, 문묘인지를 묻고,
안향의 사당이라면 그 안에 공자를 모실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둘째는 先聖
賢三種年譜라는 명칭이 부당함을 지적하여 공자의 생애를 ‘年譜’가 아니라
사마천의 史記처럼 ‘世家’라 일컬어야 함을 주장ㅏ였다. 셋째는 先聖賢三
種年譜의 첫머리에 곡부 孔祥霖의 序文을 실었는데, 안향 이전의 인물들은
거론하지 않고 안향 이후는 모두 안향의 학맥으로 서술된 사실은 글을 쓰는
바른 사례가 될 수 없으며, 세 聖賢으로 공자․주자․안향을 병렬하고 있는 것
도 사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영남의 도산서원이 도통사 공교
지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도통사가 安珦의 사당인지, 文廟인지를 묻고, 만일 안향의 사당이라
면 그 안에 孔子를 모실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도통사는 과연 안선생의 사당인가? 아니면 先聖의 文廟인가? 만일 안선생
의 사당이라면 私廟의 내에 先聖을 참람하게 봉향하는 것은 부당하다. 대개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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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享하는 도는 높은 분이 낮은 사람을 거느릴 수는 있어도, 낮은 사람이 높
은 분을 당겨서 봉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안자 증자 맹자의 사당 내
라도 先聖 여러 공의 위패를 참람하게 봉안할 수가 없다. 진실로 先聖을 봉
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별도로 그 위에 文廟를 설치하는 것이 옳다.30)
둘째는 先聖賢三種年譜라는 명칭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先聖賢三種年
譜는 孔子編年朱子年譜安子年譜를 가리킨다. 공자편년은 본래 중국의
胡仔가 편찬 간행한 책이다. 1915년 안명식이 주자와 안자의 연보를 추가하
여 공자편년주자연보안자연보로 合刊한 것을 가리킨다. 공자의 생애는
‘年譜’가 아니라 사마천의 사기에서처럼 ‘世家’라고 일컬어야 함을 주장하
였다.
「先聖賢三種年譜」라는 명칭이 과연 제공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
가? 대개 성인이 지은 경전은 역대로 경전의 뜻이 매우 삼엄하다. 중국 四庫
全書 書目에 근거해 본다면 史는 經 다음이고, 子와 集이 또 그 다음이다. 그
러므로 漢나라 太史公이 孔子世家 帝王世家를 서술하였다. 나란히 史部에
넣은 年譜는 곧 唐宋 이후 문집중의 별도 목차에 불과하다. 제공은 곧 孔子
世家편을 年譜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곧 뒤에 반드시 공자가 지은 太易과
春秋도 공자의 문집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經의 의미가 과연 어디에 있겠는
가?31)
셋째, 「先聖賢三種年譜」의 첫머리에 곡부 孔祥霖의 序文을 실었는데, 안
30) 李炳憲, 李炳憲全集 上, 「北游日記」 “三條辨文中節抄 一. 道統祠果安先生祠
耶, 抑先聖之文廟耶. 如曰安先生祠, 則不當越奉先聖於私廟之內, 盖享奉之道, 尊
能統卑, 卑不得援尊故, 雖顔曾孟子之廟內, 不堪越奉先聖諸公,苟眞欲奉先聖, 當
另設文廟於其上可也”.
31) 李炳憲, 李炳憲全集 上, 「北游日記」 三條辨文中節抄 “一. 先聖賢三種年譜之
稱, 果非諸公之所自命耶. 盖聖人所自作謂之經, 歷代尊經之義甚嚴, 據中朝四庫全
書目錄, 則史次於經, 子集又次之, 故漢太史公述孔子世家與帝王世家, 幷列已入於
史部, 所謂年譜, 則乃唐宋以後, 文集中別目也. 諸公乃以孔子世家編爲年譜, 則後
必有以孔子所作大易․春秋爲孔子文集者矣. 尊經之義, 果安在乎”.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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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이외의 인물들은 거론하지 않고 안향 이후의 모두 학자를 안향의 학맥으
로 서술한 사실은 글을 쓰는 바른 사례가 될 수 없으며, 세 성현으로 공자․주
자․안향을 병렬하고 있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우리 동방에서 先聖으로 높여 받든 것은 이미 삼국시대 설총·최치원·최충
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어져 왔다. 모두 안선생 이전으로부터 고려말에 이르
러 포은 정선생이 실제 동방 理學의 시조가 된다. 韓朝에 이르러 5선생과 그
뒤 여러 선생, 혹 포은의 사숙에 전하고 혹은 전하지 않는 학문을 창도하였
다. 지금 3종의 연보 卷首 여러 공은 궐리 故 공태사 霑선생의 글이다. 안선
생 이전 곧 비록 설총 최치원 제현을 비록 거론하지 않더라도 논의 이후는
곧 비록 역대 여러 先正의 성명을 일일이 거론하여 안자의 일맥의 傳으로 삼
았으니, 글을 받을 즈음에 혹 典故에 어두워 망령된 뜻으로 말을 만들어 스
스로 허령된 모습인가? 이는 우리 동방연원의 적통에 마땅하지 않을 뿐만아
니라 결코 문자상으로 청구하는 定例가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 공자와 주자
를 병렬하고자 한다면 그 반드시 당연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32)
이 도산서원 통문을 계기로 중국 曲阜와 경남지역 유림으로부터 지지가
끊기게 되었다. 또 도통사 공교지회의 수장인 혜산이 1922년 별세하자 도통
사는 공교운동의 구심점을 잃게 되어 결국 공교지회는 제대로 활동을 해보
지도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다.
2. 배산서당 朝鮮孔敎會의 좌절
진암은 오랜 기간 강유위의 지도 아래 유교복원에 관한 이론적 체계를 갖
32) 李炳憲, 李炳憲全集 上, 「北游日記」 三條辨文中節抄 “一. 吾東之尊奉先聖, 已
自三國時代, 薛弘儒俟, 崔文昌俟, 崔文憲公, 上繼而作, 皆在安先生以前, 至高麗之
季, 圃隱鄭文忠公, 實爲東方理學之祖, 逮韓朝則有若五先生(本錄各具諡與號及姓
諱), 其後諸先生(本錄上同), 或傳圃隱之私淑, 或倡不傳之學, 今於三種年譜之卷首
諸公, 圖得闕里故孔太史少霑先生之弁文, 於安先生以前,則雖薛崔諸賢原不擧, 論
以後則雖歷代諸先正單擧姓諱, 以爲皆得安子一脈之傳, 無乃受文應副之際, 或昧
於典故妄意造語, 自虛體貌歟, 是不惟爽於吾東淵源之的統,決非文字上請求之定例
也. 以此而直欲與孔朱幷列, 則未知其必當乎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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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 나갔다. 진암은 자신의 이론과 이념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강유위를
통해 금문경학을 입수하고, 곡부로부터 聖像을 봉안해 오고, 배산서당 내에
문묘를 건립하는 등 1923년 배산서당에서 성공적으로 공교운동을 추진했
다. 그러나 좌절의 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공교를 신봉하기 위해서는 곡부의 인준이 절대적이었다. 따
라서 도통사와 배산서당은 각각 곡부 孔廟에 모셔진 공자의 聖像을 모사하
여 봉안하고, 공자의 적손으로부터 추인을 받는 것이 절실하였다. 국내에서
는 영남의 도산서원이 유림계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진암이 궐
리 공부와 소통하기 위해 안동의 도산서원을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였으나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충호는 도통사 創祠 碑文을 써주기도 하
고, 또 배산서당에 대해서도 진암이 궐리 공부와 연결할 수 있도록 架橋를
놓아주기도 하였다. 처음 이충호가 도통사 創祠 碑文을 지어 줄 때만 하여도
도통사는 단지 공자의 성상을 모시고 주자를 봉안하고 안향을 배향하여 유
교를 진흥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으로 보인다. 배산서당에
공자의 성상을 모시고, 또 퇴계와 남명 등 선현을 우열에 관계없이 배향한다
는 의미에서 적극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도통사와 배산서당 모두
도산서원의 지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도산서원이 도통사 지지를 철회하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
인이 있었다. 먼저, 도통사는 공자-주자-안향으로 연결한 점, 공자-주자-안
향을 같은 사당 내에 봉안한 점, 퇴계를 봉안하지 않은 점이 불쾌했던 것으
로 보인다.
따라서 진암은 도통사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배산서당은 도통사처
럼 공자-퇴계, 남명을 같은 사당 내에 봉안하지 않았다. 이는 도산서원의 지
적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자는 文廟에, 퇴계와 남명은
문묘 아래 道東祠를 별도로 건립하여 봉안하였다. 그러나 도산서원에서는
문묘에 공자를 봉안하고, 별도로 도동사에 퇴계와 남명을 봉안하는 데는 동
의하지만, 늘 남명을 먼저 일컫고 퇴계를 남명 뒤에 일컬은 점, 퇴계는 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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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현에 오른 인물이고 남명은 문묘에 오르지 못했는데 같이 봉안한다는 것
이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도산서
원은 중국 궐리에 편지를 보내 공자를 모시는 방법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지
지를 철회하게 하였다.
조선 중기 내암 정인홍이 퇴계와 회재 이언적을 문묘에서 제외하고 남명
을 문묘에 배향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도산서원과 덕천서원 간에 그 앙금이
길이 남아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도산
서원에서 남계서원에 통문을 보내 이 문제를 우회 성토하였다. 이로 인해 남
계서원 등 지역유림도 등을 돌리게 되어 결국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공교운
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진암은 배산서당에 조선공교회를 설립 운영
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더 이상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접고 경학연구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Ⅳ. 경남지역 孔敎運動의 좌절 원인
1. 성현 배향 방식의 이견
우리나라 文廟는 大成殿을 비롯한 東廡·西廡 등 제향 공간과 명륜당을 비
롯한 東齋·西齋 등 교육 공간으로 크게 나뉜다. 大成殿은 大成至聖文宣王 孔
子를 主壁으로, 曾子·孟子·顔子·子思子 등 四聖을 좌우에 配享하고,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哲, 宋朝 6賢, 그리고 우리나라의 薛聰·崔致遠·李滉·李珥를
비롯하여 18賢을 從享하고 있다. 또 성균관 대성전의 先聖賢 位牌 奉安 순
서도 문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 그림은 경남 산청에 있는 단성향교의 성현위패 봉안도이다.
단성향교의 성현 배향방식은 공자를 주벽으로 삼고, 공자의 문인, 정이·주
희·주돈이·정호·증자·맹자·안자·자사와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좌우에
배향하고 있다.33) 지방향교의 성현 배향 방식은 문묘나 성균관의 대성전과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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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大同小異하다.
그러나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주도하였던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경우
는 문묘나 향교의 성현 배향 방식과 상당히 달랐다. 아래 그림은 도통사의
성현 위패봉안도이다.
도통사의 경우를 살펴보면 硯山齋 상단에 사당인 도통사를 별도로 건립하
였다. 공자를 주벽으로 삼아 공자의 영정을 주향하고, 주희의 영정을 배향하
고, 우리나라 성현은 안향의 영정만을 종향하고 있다. 정이·주돈이·정호·증
자·맹자·안자·자사를 모두 제외하였고, 우리나라 18현도 모두 제외하여, 학
문의 도통이 공자-주희-안향으로 이어졌음을 상징하고 있다.34)
먼저 도통사가 회헌 안향을 숭상하게 된 배경은 도통사가 건립된 硯山齋
가 순흥안씨의 재실이기도 하지만, 회헌 안향이 처했던 고려말기나 혜산이
33) 단성향교, 丹城鄕校誌, 회상사, 2008, p.865 참조.
34) 안명식,도통사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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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했던 조선말기나 시대상황이 유사하
였다. 곧 고려말기로 접어들면서 불교의
병폐가 사회 전반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기 시작하였다. 회헌은 대외적으로 원나
라의 침략 등으로 인해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고, 사상적으로 불교가 성행하는
시대에 살았다. 회헌은 고려사회에 만연
한 불교의 병폐를 목격하고 이를 개선하
고자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유교를 받아들였다. 대외적으로는 성리학이
라는 새로운 이념을 수용하고 대내적으로 유교교육과 정치를 시행하는 등
국익을 위한 정치활동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 성리
학이 국교로 자리 잡도록 기초를 놓은 것이다. 당시 경남지역 유학자, 곧 혜
산은 일본의 침략과 서양 기독교의 성행이 고려말 안향이 처했던 시대와 동
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늘이 성인을 낳으시어 道의 大統을 성인에게 부여하였다. 대개 本性을
따라 도를 닦음으로서 천하 후세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를 세우셨다.
아! 수많은 이들이 오고 갔지만 오직 孔子만이 우뚝 솟아 道統의 祖가 되
셨다. 孔子 이후로 일어난 자들이 단지 전술하거나 闡發하는 것일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文公 朱子가 성인이 천 오백년 후에 태어나 道를 발명하고 전술
한 공이 지대하다. 文成公 安子(安珦)가 朱子 44년 후에 태어나 그 학문을
首倡하고 闡發시키는 功 또한 지대하다. 安子는 일찍 말하기를 “孔子를 배
우고자 한다면 마땅히 朱子를 먼저 배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朱子
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먼저 安子를 배운다면 거의 門路를 잃지 않
을 것이다. 目下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奇變異說이 다투어 일어나 八域의 유
학자들은 聖學이 무너질까 두려워하고 있다.35)
35) 李祥奎, 惠山先生文集 卷2, 「道通祠儒案序」 “天之生聖人, 以道之大統付諸聖
人, 蓋欲率性而修道, 立人極於天下後世也. 嗚呼! 往萬來億, 惟孔夫子蘶然爲道統
之祖, 後夫子而作者, 特傳述焉闡發焉而已. 是以文公朱子生於聖人千五百年之後,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 117 -
따라서 조선시대 사회이념인 성
리학의 기강을 바로 세워 기울어가
는 세도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공자․
주자․안자를 봉향하여 유학자들이
사상적 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혜산은 유학을 창시한
공자를 道統의 시조로 보고, 이후
에 주자가 공자의 도통을 계승하였다고 하면서, 고려시기의 회헌 역시 공자
와 주자의 학문을 들여와 그 도통을 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향이 주자학
을 들여와 고려말기 불교의 병폐를 일소하게 되어 조선시대에 공자와 주자
의 道가 밝아져 문명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혜산은 근세
에 서양종교가 유입되어 성행하게 되어 文明의 道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고 파악한 후, 회헌이 주자학을 들여와 불교를 배척한 실례를 따라 異敎를
물리치려고 하였다. 혜산은 이 방법이 바로 공자․주자․안자를 숭상하는 것이
라고 주장하였다. 회헌이 공자와 주자를 숭상하던 방법을 모방하여 당시의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문화와 유교를 계승․발전시켜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공자․주자․안자를 숭상하고 공교지회 창립하게 된 것이다.
다음 배산서당의 경우를 살펴보면 아래 그림과 같다.
배산서당은 공자를 배향한 사당인 文廟, 남명·퇴계·청향당·죽각을 배향한
사당인 道東祠, 강학 공간인 講堂의 3단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도통사는 공
자-주자-안향을 도통사에 함께 배향하였는데, 배산서당은 정이·주희·주돈
이·정호·증자·맹자·안자·자사 등 중국의 현인을 모두 제외하고 공자의 영정
만을 유일하게 문묘에 주벽으로 獨享하였다. 그리고 문묘 아래에 별도로 도
能發明其道其傳述之功大矣. 文成公安子, 後朱子四十四年而生, 能首倡其學其闡
發之功亦大矣. 安子尝曰: ‘欲學孔子, 當先學朱子.’ 今之欲學朱子者, 必先學安子,
則庶幾不失其門路矣. 目今世局奇變異說競作, 八域章甫懼聖學之將墜”.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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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를 건립하여 남명·퇴계·청향당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죽각을 종향하였
다. 이는 진암이 공자만을 유일신으로 받들고자 한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단성향교, 도통사, 배산서당 세 그림을 살펴보면 문묘, 성균관 대성전, 향
교와 도통사, 그리고 배산서당에서 공자와 선현을 배향하는 방식이 판이하
게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산서원은 도통사가 안향만을 배향한 점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배산서당
의 경우는 우리나라 18현을 제외하고, 문묘에 종사된 적도 없는 남명을 퇴
계와 함께 배향한 점, 영남의 많은 선현이 있으나 합천이씨 문중의 청향당과
죽각을 배향한 점은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산서원 및 경
남지역의 서원과 향교로부터 비판을 면할 수가 없었다.
2. 남명·퇴계 우열론 시비
아래의 편지는 퇴계의 12세손 李中均(1861-1933)이 1927년 이충호를
대신하여 진암에게 보낸 편지다.
뜻밖에 편지를 받고 공경히 살폈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수레가 있어 衍聖
公府會의 일을 논의하게 한 것이 계해년(1923년) 3월이었는데 답장이 온 것
은 지금(1927년)이니, 어찌하여 이렇게 늦었는가? 그 회의 내용에 종종 그대
의 불쾌한 어구가 가 포함되어 있으니 어찌 다 말을 하겠는가 마는, 一方 유
림은 ‘右冥而左退’라고 하니, 그대가 말하는 一方은 어느 방향을 가르켜서 말
하는 것인가? 또 퇴계와 남명을 한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
고 지금 ‘右冥而左退’는 남명의 위치를 앞에 두고자 하는 그대의 뜻을 알 수
있겠다. 어찌 천하 만세의 공의가 그러한가? 처음 그대가 나에게 의견을 보
낼 때 더불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뒤로 오면서 도리어 진실로 실천할 수 없으니 의심이 많이 간다.
그대에게 돌려보낸 책자에 이어서 배산서당 修契 및 대표의 명함을 찾아보
니 오히려 헤아리지 않았으니, 이는 매우 지극한 일이다. 가령 회의사항을 쫓
아보니 비루함을 보여 또한 마땅히 한마디 말이 있었고 5년 뒤에 비로소 그
대의 뜻을 드러내었으니 크게 알 수 있겠다. 이 이후로는 마땅히 각자 높이는
바를 높이고 각자의 견해를 지켜 천하 만세의 공의를 기다릴 뿐이라네.36)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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衍聖公府會의 일을 논의한 것이 1923년 3월이었는데 답장이 온 것은
1927년이니 많이 늦었다고 하고,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논의 중에 듣
기 거북한 말이 있는데,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심지어 한 쪽의 유림들이 ‘右
南冥左退溪’라고 하면서 남명을 퇴계보다 앞세우고자 하는 입장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대가 一方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 어느 쪽을 일컫는 것이냐고 따
졌다.
또한 퇴계와 남명을 한 곳에서 같이 享祀하자고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右南冥左退溪’라고 한 것은 남명을 上位에 두고자 하는 것으로 그대
의 뜻을 알겠다고 하였다. 따라서 뜻이 같지 않으면 같이 相從을 하지 않는
것이니,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또 회의한 지 5년이나 지나 편지
를 보내오니 그대의 뜻을 알겠고, 天下萬世의 公議를 기다려 각기 견해를 지
키고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충호는 처음에 성현을 존모하는 마음에서 진암의 공교운동
에 협조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공자를 높인다는 명분하에 남명을 더 숭상하려
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곧 이충호는 자신이 진암의 목적에 이용
만 당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진암이 경상우도 쪽의 의견만을 일방적으로 따
라, ‘右南冥左退溪’라고 하여 남명을 퇴계보다 더 숭상하는 것이 불쾌하였던
것이다. 또한 공자를 문묘에 봉향하고, 퇴계와 남명을 나란히 道東祠에 봉향
하는 것도 부당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충호는 진암에 대한 지지를 접고 결
36) 李中均, 東田潛士遺稿 卷7 「答李炳憲」(代宗君忠鎬作, 1927) “意表承領 尊亟
審. 有北上之輈 兼寄示衍聖公府會議事項 乃癸亥三月日也 寄示何至此之晩也. 其
會議內 座下之種種未安語句 何可盡言而至曰 一方儒林右冥而左退 欲南冥之居先
意. 座下之所謂一方 指何方而言也. 退溪南冥之一堂同享 已非其宜而今右冥而左
退 欲南冥之居先 座下之意 其可知矣. 而奈如天下萬世之公議 何哉. 始座下之來見
我也. 意以爲可與相從 不無商量區處之事 後來却實不踐言 多有可疑. 旣還送所來
冊子 繼而追覓培山修契及代表名啣猶不料 其至此之極也. 使會議議事項趁 卽寄示
鄙亦當趁卽一言而五年之後 始乃寄示座下之意 大可知矣. 自今以後 第當各尊所尊
各守所見 以待天下萬世之公議而已”.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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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선언한 것이다. 또 이충호는 곡부에 편지를 보내 퇴계와 남명을 동시에
봉향하는 것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배산서당에 합천이씨 문중의 선조인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배향하는 것은 당시 경상우도지역 書院·鄕校·儒林으로부터 거부감을 받았
다. 이로 인하여 진암의 공교운동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또 이중균이 1927년 이충호를 대신하여 곡부에 보낸 편지에서도 曲阜 衍
聖公府中에 보낸 편지로 진암이 1923년 3월에 衍聖公府會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오로지 유교를 발전시키고 교조를 존숭하여 세계문화를 증진시키는 것
은 정당한 일이지만, 배산서당 道東祠에 退溪와 남명을 봉안하는 일에 秘書
長이 퇴계는 동방의 儒宗이라 위패에 마땅히 先賢退陶李子라고 하고 남명은
본래 문묘에 종사된 인물은 아니나 陞廡牌面이라 한다 하니 이는 한 경우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였다. 곧 퇴계는 18현에 陞廡된 인물이고, 남명
은 陞廡되지 않은 인물인데, 동시 같은 곳에 봉향하는 것이 불편하였다.
또한 진암이 남명의 학문을 추존하여 ‘右南冥左退溪’라고 하니, 어느 곳에
서 나온 의견인지 알 수 없어 가히 놀랄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배산서당의
일을 듣고 편지를 보낸다고 하였다.37)
전 조선시기를 걸쳐서 퇴계는 儒宗으로 독보적 추앙을 받아왔다. 그런데
도통사는 퇴계를 제외하고 안향을 중심으로 숭상하면서 공교를 펼치고, 배
37) 李中均, 東田潛士遺稿 卷7 「與曲阜衍聖公府中」(代宗君作, 1927) “某學識疎
淺 不敢與知於儒論 蟄伏以自遣. 今因本國培山李炳憲獲接癸亥三月衍聖公府會議
事項 專爲發展儒敎尊崇敎祖 欲增進世界文化 方當大道榛蕪之日 此是正當合做底
事. 凡有彛性者 孰不爲之欽仰萬萬哉. 第於培山道東祠 尊奉退溪南冥兩先生而秘
書長議曰 退溪爲東方儒林之宗牌 面宜題以先賢 退陶李子 若南冥 本非陞廡之賢
雖陞廡牌面之稱 恐不可一律槩施. 此言稱停李炳憲獨以南冥之不陞廡 歸之以黨論
無援且極推尊南冥之學而 曰自中州漢宋以來 不可多見. 又曰儒林多右冥而左退 此
未知何等意見 可駭也. 某在初時 亦嘗與此人爲培山事 略有商議後 乃覺其挾私妄
行 貽書責諭 絶不相通者 已久矣. 以故 癸亥春 會議事項 始乃於五年後 得見而其
挾私妄行 比舊益甚 此可知. 某之不復干涉此事而聖公府之亦見欺於此人 推可知
矣. 萬加照察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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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당은 퇴계보다 남명을 우위에 두고 공교를 펼치려고 하니 도산서원으로
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충호가 도통사에
대하여 創祠 碑文을 지어주고, 배산서당에 대해서는 진암이 공교를 펼칠 수
있도록 중국 孔府에 간찰을 써서 주선해 주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그
러나 두 곳의 흐름을 간파하고는 지지를 철회하고, 孔府나 도통사의 형태를
비판하고, 또 영남의 여러 儒所에 부당함을 호소하는 通文을 보내게 되었다.
도산서원의 명분론에 입각하여 경남지역 유림이 도통사와 배산서당을 공격
함으로써 결국 공교운동은 추진력을 잃게 된ㄴ 것이다.
3. 진암 학문의 이단성 성토
이중균이 100여 條에 걸쳐 자신의 經典과 처세, 공부하는 자세에 대하여
수필형식으로 쓴 글인 「漫草」가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華夷論
으로 역사를 論斷하면서 세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에서도 도산서
원 입장에서 진암의 공교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이병헌이 편찬한 歷史敎理錯綜談談 서두에서 伏羲氏를 東國人이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어찌 이 說이 황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
는 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자는 단지 공의 한 글자를 알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힘써 자기의 사사로움을 구제하고자 저 오랑캐를
미화하고 中華를 욕보이고 陸象山을 높이고 朱子를 욕하였으니, 모두 한 일
에 얽매여서 나온 말의 요지이니, 많이 이야기하기에 부족하다.38)
「만초」는 자신의 입장을 순서 없이 적은 글이기는 하나 이중균의 현실인
식과 학문관을 통해 도산서원의 견해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
록이다. 이중균은 진암의 견해를 황탄한 견해라고 하면서, 이는 사사로이 夷
38) 李中均, 東田潛士遺稿 卷9 「雜著-漫草」 “李炳憲歷史敎理談編 首以伏羲爲東
國人 此人豈不知此說之自歸荒誕者哉乎 然而爲此者 只緣不識公之一字 力欲濟己
之私 彼其美夷而陋華 尊陸而罵朱 皆一事串來 語旨也 不足多辭”.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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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높이고 華를 천하게 하는 것으로 華夷論의 관점에서 비판하였다.
진암은 유교의 성격을 정의하면서 ‘유교는 공자의 교’이며, 또한 공자는
‘오로지 하나이며 둘일 수 없다는 소위 獨一無二之敎主’로서 섬기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래의 유교는 공자 이전의 요순 이래로부터의 성
인은 물론이려니와 공자의 제자들이 모두 제례를 드리는 대상인데 비해, 진
암은 오로지 공자만이 공자교의 존숭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
다.39) 따라서 배산서당에서는 공자만을 모시고, 공자의 제자나 그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주자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주자성리학
에 바탕한 유교신봉을 그는 구파니 향교식 유교라는 말로 비판하였으니, 기
존의 주자학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반발을 직면하게 된 것이다.
Ⅴ.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공교운동 비교
지금까지 경남지역에서 공교운동을 주도한 연산 도통사와 산청 배산서당
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도통사 孔敎支會와 배산서당 朝鮮孔敎會를 도표로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39) 이희재, 공자학 권20, 「일제하 李炳憲의 공자교운동의 성과와 좌절」, 한국공
자학회, 2011, pp.151-175 참조.
구 분 孔敎支會朝鮮孔敎會
거점 道統祠培山書堂
소재
위치
진주시 대평면 하촌리 547-2(진양호
에 수몰)
진주시 나동면 유수리 724(1995년
移建)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2
대표 인물 惠山 李祥奎(1846-1922) 眞庵 李炳憲(1870-1940)
출생 거주
1846년 固城郡 固城邑 武陽里 출생
1880년 山淸郡 丹城面 黙谷里 移居
1870년 咸陽郡 屛谷面 松平里 출생
사승 관계 性齋 許傳(1797-1886) 문인 俛宇 郭鍾錫(1846-1919) 문인
소속 학파 性齋學派(性齋門人) 寒洲學派(俛宇門人)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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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맥 연원
李滉·曺植-鄭逑-許穆-李元祿-李夏
鎭-李瀷-安鼎福-黃德吉-許傳-李祥
奎(近畿南人學脈)
李滉-金誠一-張興孝-李時明-李玄
逸-李栽-李象靖-鄭宗魯-李源祚-李
震相-郭鍾錫-李炳憲(嶺南南人學派)
창건 년도
1889년 硯山齋 건립
1917년 도통사 건립
1917년 孔敎支會 창립
1461년 道川書院 창건
1787년 도천서원 사액서원이 됨
1771년 德淵祠 건립, 청향당·죽각 별
도배향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919년 배산서당 건립
1923년 3월 朝鮮孔敎會 창립
중심 인물
南川 李道默(1843-1916)
霞峯 趙鎬來(1854-1920)
晦岡 安明植(1889-1967)
芝山 安孝鎭(1855-1943)
驥汀 鄭圭錫
霞汀 李忠鎬(1872-1951)
沙村 朴圭浩(1850-1930)
西磵 金在洵(1856- )
眞庵 李炳憲(1896-1940)
弦齋 曺庸相(1870-1930)
于石 權相纘(1857-1905)
三湖 朴在九(1859- )
我石 鄭文燮(1859-1929)
雲谷 盧普鉉(1881- )
與人軒 河載華(1860-1937)
창건 계기
1909년 李道黙 晦軒安先生實紀重
刊
李承熙의 影響, 康有爲의 저술 탐독
배산서당 건립
배향 인물
道統祠 主壁: 孔子(BC 551-BC 479)
配享: 晦庵 朱熹(1130-1200)
從享: 晦軒 安珦(1243-1306)
※ 道統祠에 합동 配享
文 廟 主壁: 孔子(BC 551-BC 479)
道東祠 配享: 南冥 曺植(1501-1572)
配享: 退溪 李滉(1501-1570)
配享: 淸香堂 李源(1501-1568)
從享: 竹閣 李光友(1529-1619)
※ 文廟와 道東祠 분리 配享
핵심 이념
儒敎 復興(崇正學 관점, 교육사업, 서
적 간행,
聖像 奉安, 聖賢 尊慕, 유교의 종교화)
儒敎 復原(今文經學 연구, 聖像 奉安,
聖賢 尊慕, 유교의 종교화)
공교 실천
도통사 건립
공교지회 설립
공자-주자-안향 배향
배산서당 건립
조선공교회 설립
공자-퇴계-남명-청향당-죽각 배향
공교 목적
유교 부흥을 통한 윤리 회복
유교를 통한 민심 결집과 국권회복
고루한 유교 개혁을 통한 혁신추구
유교의 종교화를 통한 현실개혁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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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
공교운동을 위한 전국적인 조직망
구축
각종 서적 간행
공교운동에 대한 풍부한 이론 확립
국제적인 감각과 폭넓은 인맥 및 교류
주요 문헌
惠山先生文集, 道統祠儒案, 道統祠
誌, 華行日記, 冷泉及門錄
李炳憲全集, 東田潛士遺稿, 中華遊
記, 俛門承敎錄
현실 인식
문중역사 정리: 惠山志感錄 간행
교육 교재 편찬: 歷代千字文 간행
풍속 기록: 汶上風謠 간행
子姪 교육: 學契 조직, 재실 및 사당
건립
포교규칙 수정 진력
일본 수상에게 탄원서 제출
조선총독에게 탄원서 제출
민립 문묘 건립
창건 1917. 8. 27. 1923. 9. 19.
진행 과정
硯山齋 창건
1909년 李道黙 晦軒安先生實紀
중간
1913.10-1914년 도통사 건물 3칸
창건
1917년 3월 芝山 安孝鎭 궐리 다녀옴
1917.8.27. 「中華闕里孔敎總會硯山
道統祠同文堂孔敎支會趣旨書」, 「孔敎
支會規例」, 「闕里孔敎總會道統祠支會
任員錄」 반포, 孔敎支會 창립
1920년 공교운동 주도권 培山書堂으
로 넘어감
1922년 惠山 李祥奎 別世
1922 4. 문묘 및 도동사 營建 착수
1923. 1. 문묘와 도동사 준공
1923. 9. 朝鮮孔敎會 창립
서적 간행
1909년 晦軒安先生實紀 重刊
1915년 孔子編年朱子年譜安子年譜
合刊
1917년 硯山道統祠儒案
1937년 華行日記
1956년 順興安氏族譜
1961년 道統祠誌
1964년 道統祠誌
1916년 中華遊記
1919년 儒敎復原論
1921년 歷史敎理錯綜談
1921년 吾族當奉儒敎論
1922년 歷史敎理談
1924년 孔經大義考
1926년 詩經附注三家說考
1926년 書經傳注今文說考
1927년 禮經今文說考
1928년 易經今文說考
1932년 辯訂錄
중국 방문 방문 기간: 1917.2.14.-1917.03.19. 1차 방문: 1913. 1. 14.-1913. 5. 23,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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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윤달)
방문자 대표: 芝山 安孝鎭
방문 기록: 華行日記(1937년 간행)
2차 방문: 1916. 6. 7.-1916. 11. 21
3차 방문: 1920. 3.-1920. 4. 21
4차 방문: 1923. .-1923. 9. 18
5차 방문: 1925. 2. 2.-1925. 8. 24
방문자 대표: 眞庵 李炳憲
방문 기록: 中華遊記(1916년 간행)
곡부 후원 孔祥霖, 孔令貽孔祥霖, 孔令健, 孔德成
참여
규모
2,241명(硯山道統祠儒案 수록) 약 15명(北游日記 참조, 儒案 없음)
활동 무대 고성, 김해, 산청, 서울
함양, 산청, 서울, 안동 도산서원, 중
국 瀋陽, 北京, 曲阜, 上海, 杭州, 香巷
건물 구조
道統祠(合祀), 同文堂, 硯山齋, 光明
閣, 萬卷室
文廟, 道東祠, 講堂(3단 구조)
현판 휘호
道統祠 扁額: 孔令貽
同文堂 柱聯: 孔德成
培山書堂 懸板: 康有爲
落成 祝文: 白凡 金九, 성재 李始榮,
우천 조완구, 白巖 朴殷植
대표 順興安氏(晦軒 安珦) 陜川李氏(淸香堂 李源, 竹閣 李光友)
제향 일자 매년 8월 27일 每年 3월 上亥日
특징
곡부의 공인 및 지지
孔子 외 朱子 배향
崇正學의 관점에서 古文經學·朱子學
존숭
향교식 유교에 가까움
초기 곡부와 도산서원의 공인
강유위, 김구 등의 지지
孔子만 유일하게 존숭, 弟子 및 朱子
배격
今文經學 숭상 및 朱子學 비판
기독교식 유교에 가까움
공격 도산서원, 배산서당 도산서원 및 경남지역 유림, 서원, 향교
후대 영향
安淳煥이 1930년 경기도 시흥에 鹿
洞書院을 건립하여 유교의 종교화 운
동을 재전개함
합천이씨 淸香堂竹閣 門中에서 관리
매년 釋奠禮 거행
사진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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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도표를 살펴보면 도통사와 배산서당은 유교를 종교화하여 유교를 부
흥하고자 하는 목적은 일치한다. 그러나 그 주체나 방법 등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공교운동을 주도한 학파를 분석해 보면 연산 도통사는 혜산을 중심으로
한 南川 李道默(1843-1916)·霞峯 趙鎬來(1854-1920) 등 性齋 許傳 문인
인 性齋學派가, 배산서당은 진암을 중심으로 한 弦齋 曺庸相(1870-1930)·
于石 權相纘(1857-1905) 등 면우 곽종석 문인인 寒洲學派(면우학파)가 주
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혜산은 退溪 李滉-寒岡 鄭逑-眉叟 許穆-李元祿-
李夏鎭-星湖 李瀷-順庵 安鼎福-下廬 黃德吉-性齋 許傳으로 이어지는 近畿
南人學脈이고, 진암은 退溪 李滉-鶴峰 金誠一-敬堂 張興孝-李時明-葛庵
李玄逸-密庵 李栽-大山 李象靖-立齋 鄭宗魯-凝窩 李源祚-寒洲 李震相-俛
宇 郭鍾錫으로 이어지는 嶺南南人學脈이다.
공교운동을 주도한 문중을 살펴보면 연산 도통사는 晦岡 安明植과 芝山
安孝鎭을 중심으로 한 진주 연산의 順興安氏 直長公派 硯山門中이고, 배산
서당은 산청 단성의 진암과 친족인 李炳昊, 동생 李炳洪을 중심으로 한 陜川
李氏 淸香堂竹閣 문중이다.
공교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진주 연산 硯山齋에서 1909년
晦軒 安珦과 관련된 역사기록인 晦軒安先生實紀를 重刊하면서 도통사 건
립을 모의하였다. 晦軒이 孔子와 朱子를 존모했던 故事를 援用하여 도통사
를 짓고 공자·주자·안향을 그 사당 내에 봉안하였다. 배산서당은 원래 三憂
堂 文益漸을 배향한 道川書院에 淸香堂과 竹閣을 배향하였으나, 도천서원이
사액되면서 德淵祠로 독립하였다. 진암은 大溪 李承熙가 먼저 만주에서 孔
敎를 펼치고, 강유위의 孔敎 관련 저술을 읽어 공교운동의 열의가 있었는데,
산청 배양에 배산서당을 지으면서 문중의 권유와 진암의 평소 공교사상이
결합되어 공자·퇴계·남명·청향당·죽각을 배향하고, 이를 계기로 공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공교운동의 목적을 살펴보면, 도통사의 경우 혜산은 서양의 異敎가 국내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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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성행하는데 반해 유교는 날로 피폐해져 감을 통탄하여 崇正學의 관점에
서 교육사업과 서적 간행 보급사업을 펼쳤다. 그 후 도통사를 통해 공교운동
을 조직화 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배산서당의 경우는 진암이 儒敎 본래의
모습을 復原하기 위해 공자의 사상 원류에 가까운 今文經學을 강유위로부터
도입하고, 공자의 聖像을 중국 궐리로 부터 그려와 봉안하고, 유교의 활성화
를 위해 유교를 기독교식으로 종교화하려도 하였다.
도통사와 배산서당은 성현을 배향하는 방식도 달리하였는데, 도통사는 공
자·주자·안향을 도통사에 함께 배향하여 공자-주자-안향으로 이어지는 성
리학의 도통을 강조하였다. 당시 유림계에서 공자와 주자를 절대적인 성현
으로 추앙하였으나, 안향만을 공자와 함께 배향하여 반감을 샀고, 또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 까지 많은 유학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退溪나 一蠹
등 쟁쟁한 18선현을 배제하고 安珦만을 단독 배향한 점, 또 공자의 일대기
를 엮어 간행하면서 ‘世家’가 아닌 ‘編年’이라 명명하여 주자와 안향의 年譜
와 합쳐 간행한 점 등으로 儒林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결국 도산서
원에서 중국 闕里에 반박 편지를 보내게 되었고, 도산서원과 중국 孔府의 도
통사 지지철회로 이어졌다. 이로 인하여 도통사 공교운동은 추진력을 잃고
1920년 공교운동의 주도권을 培山書堂으로 넘기고 말았다. 1922년 惠山 마
저 別世하자 도통사는 더 이상 공교운동을 추진하기 어려워졌다. 배산서당
은 도통사의 경우를 他山之石으로 삼아 배산서당 내에 文廟를 별도 설치하
여 공자를 단독으로 배향하고, 그 아래에 道東祠를 건립하여 남명, 퇴계, 청
향당, 죽각을 별도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문묘에 공자만 배향하고, 성리학의
이념적 祖宗이라 할 수 있는 주자를 배향하지 않는 점은 유림과 서원 향교
등으로부터 진암의 사상을 의심하기에 충분하였다. 또 도산서원에서 퇴계는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의 한 인물이고 남명은 문묘에 배향되지 않은 인물인
데 도동사에 남명과 퇴계를 동시 배향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또 배산서당에
서 두 인물을 호칭할 때 늘 남명을 앞세우고 퇴계를 뒤에 거론하는 것도 불
쾌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도통사에서 안향을 모신 사당에 공자와 주자를 배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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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하는 것을 문제 삼았듯이, 배산서당도 청향당과 죽각을 배향하는 것이 경
남지역 유림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도산서원이 이 문제를 남계서원과
경남지역 서원 및 향교에 통문을 보내 공론화함으로써 경남지역의 서원과
향교에서 공격하여 결국 진암의 공교운동도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Ⅵ. 경남지역 공교운동의 의의
혜산과 진암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제 병탄당하고, 유교가 몰락해 가는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성현의 道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유교를 부흥
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을 몸소 실천한 선각자였다. 처음에는 도산서원
에서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공교운동에 적극 찬동하였다가도 공교를 실천하
는 방법상에 있어서 당시 유림의 반발을 샀다. 당시 주자학일변도의 성리학
이념과 체제에 젖어 있던 당시 유림계에서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의 성현 숭
상 방식이나 공교운동 추진 방식, 주자학을 비판하고 금문경학을 수용하는
태도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에서는 중국 공부에게 편지를 보
내 도통사의 유교종교화 방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지지를 철회하게 하
고, 또 경남지역 서원과 향교에도 통문을 보내 배산서당 공교운동의 문제점
을 지적함으로써 당초 혜산과 진암이 추구하고자 했던 일제 강점기 유교 재
건을 통한 유교부흥운동이 결국 실패하였다.
비록 공교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혜산의 경우 일제시기 경남지역에서
2,200여명에 달하는 전국적인 유림을 규합하여 공교운동을 추진하였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또 진암의 경우 한중일 3국을 넘나들면서 석학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유교의 복원, 그리고 유교의 종교화와 유교부
흥이라고 하는 원대한 꿈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결국 풍부한 이론과 저술만
남긴 채 모두 실패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공교운동은 경남지역의 학문적 역량40)과 문
화적 자신감을 전국 및 동아시아에 충분히 과시한 활동이었다. 혜산과 진암
일제시기 경남지역의 孔敎運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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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남지역 공교운동은 변화를 거부하는 영남 유림의 반발로 인해 실패하였
지만, 이후 또 安淳煥이 계승하기도 하였다. 안향의 21세손인 竹儂 安淳煥
(1871-1942)이 1930년 9월 경기도 시흥에 鹿洞書院을 건립하고, 都監이
되었다. 이 때 도통사 임원 중 安孝鎭 등은 안순환의 朝鮮儒敎會 창립임원이
되기도 하였다. 진주 연산 도통사와 동일하게 공자와 주자, 안자를 봉향하였
다. 또 1930년 군벌간의 전투로 인하여 공자의 유적이 훼손되자, 죽농은
1931년 전국 조선 유림 8,425명의 聯名으로 衍聖公에게 위문서를 작성하여
직접 곡부를 방문하여 후손을 위로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曲阜聖廟慰安事
實記 간행하고, 또 곡부 방문기인 「慰安儒生入魯日記」를 남기기도 하였
다.41)
또 경남 의령 출신의 유학자 沈相碩(1909-1986)의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重齋 金榥(1896-1978)의 문인으로, 1933년 유교 종교화를 위한
전교사 양성과정인 조선유교회에 녹동서원 제1회로 경남대표로 선발되었
다. 그는 입학부터 졸업까지 조선유교회의 유교종교화 운동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鹿洞日記를 남기기도 하였다.42) 죽농과 심상석의 조선유교회 활
동은 연산 도통사 공교운동으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규모와
제도는 도통사와 배산서당을 능가하는 규모와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하였
다.43)
40) 조선말기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성재 허전의 문인록인 冷泉及門錄에는
514명의 제자가 수록되어 있다. 또 조선말기 서부경남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면우 곽종석의 문인록인 「俛門承敎錄」에 780인의 제자가 기록되어 있다. 또 면
우의 문인으로서 진주 인근에서 일제시기와 근대까지 살다간 晦峰 河謙鎭
(1870-1946)과 重齋 金榥(1896-1978)의 문인 수는 각각 175인, 943인에 달한
다.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의 문인이 대체로 340인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조
선말기 경남지역 학문적 역량과 융성을 파악할 수 있다.
41) 安淳煥, 曲阜聖廟慰安事實記 참조.
42) 沈相碩, 鹿洞日記 참조.
43) 황영례, 安淳煥의 儒敎 宗敎化 運動과 鹿洞書院,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南冥學硏究 제4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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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몰락해 가는 일제시기 성리학적 명분론의 집착을 버리고 전국의
유림이 단합했다면 일제의 유림 회유정책과 친일화 정책을 배격하고 전국민
이 단합하여 국권을 되찾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
려말 몽고의 침입과 핍박에 맞서 전 국민이 마음을 일치단결하여 팔만대장
경을 조성함으로써 왜적을 물리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기 경남지
역 공교운동은 유교를 통한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인정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더욱 심도 있고 지속적으로 재조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투 고 일 : 2015년 05월 10일
심사기일 : 2015년 05월 20일~06월 04일
게재확정 : 2015년 06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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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in Japanese
Colonial Period on Gyeongnam Region
Lee Jeong-Hee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Library>
The time from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beginning of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an era of confusion and sudden changes.
While western religions came into the Korean Peninsula and expanded
congregation, Confucianism was shrinking and Joseon Dynasty lost its
sovereignty by Japanese imperial invasion. It was a gloomy era. During
this era, with a sense of crisis the confucian scholars of Joseon
Dynasty eagerly developed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inside and outside the Korean Peninsula to revive Confucianism as a
breakthrough of sovereignty recovery.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the regions of Gyeongsangnam-do
province in which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was developed
the most were Dotongsa of Jinju Yeonsan and Baesansedang of
Sancheong Danseong. At Dotongsa, Hyesan Lee Sang-kyu(1846-1922)
and at Baesansedang, Jinam Lee Byung-heun(1870-1940), each led the
movement.
However, the confucian scholars of those days who were hard
trained with Neo-Confucianism` s ideas and systems of Chu-tzu felt
greatly antagonized by the way of respecting sages, the way of
developing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the effort to
criticize Neo-Confucianism and accept Chinwenhsueh of Dotongsa and
Baesansedang.
Dosanseowon withdrew its support indicating the problems of
Dotongsa and Baesansedang` s way of respecting sages and seowons
and hyanggyos in Gyeongsangnam-do province also began pointing out
the problems of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of Baesansedang
which led to the failure of The work of Renaissance on Confucianism
movement Hyesan and Jinam pursued.
Although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in Gyeongsangnamdo
province failed,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the movement was an
activity which showed off academic competence and cultural confidence
of Gyeongsangnam-do province nationwide and to the East Asia.
Hyesan and Jinam played leading roles.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 in Gyeongsangnam-do province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should be recognized as a way of independence movements through
the work of Renaissance on Confucianism and its historic meanings
should be shed new light in depth.
Keywords : The movement of Confucius religion(공교운동), Hyesan Lee
Sang-kyu(혜산 이상규), Dotongsa(도통사), Jinam Lee Byung-heun(진
암 이병헌), Baesansedang(배산서당), The work of Renaissance on
Confucianism(유교부흥), The work of original state on Confucianism
(유교복원), Chinwenhsueh(금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