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데 진도 일부 사람들이 사명당이 진도 첨찰산에 오게 된 것은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을 스승으로 흠모해서 스승을 찾아 진도에 왔던 길이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고 하는 얘기가 있었다.
소재가 사명당보다 29살 더 위이라서 스승이 될만도 하다. 그래서 자료들을 찾아 사명당과 소재의 행적을 아래 그림처럼 년도 표시를 같게 한 표를 내가 직접 만들어서 두 기록을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소재 노수신의 진도 유배기간에 사명당 행적과 겹치는 동선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래는 노수신에 관한 군지(郡誌)와 인명사전에 근거한 기록 내용이다. **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75세까지 살음.
노수신의 본관은 광산, 홍(鴻)의 아들로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이재(伊齋),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명종 2년(1547) 이조좌랑 때 을사사화로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있었던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으로 죄가 더하여져 명종 2년, 1547년에 진도로 이배되었고, 명종 20년(1565)에 괴산으로 다시 옮겨지기까지 19년 동안 진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4년 뒤인 1565년 선조 즉위 후 귀양이 풀려 직제학이 되었다.
노수신은 명종·선조 때의 명신으로, 20세 때 박사로 뽑혔으며, 27세에 이언적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크게 완성하였다. 중종 38년(1543)에 문과의 초시·회시·전시에 연달아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며, 퇴계 이황과는 같이 독서당에 뽑혀 학문을 통해서 서로 친근한 사이였다. 진도에 있는 19년 동안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크게 성과를 거두어‘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라고 부른다. 또는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인 1552년 지산면 안치에 초옥삼간을 지어 스스로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를 연구한 끝에 인심도심변주를 개작한 한편 대학장구 및 동몽수지를 주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시를 지었다. 그는 진도에 있는 동안 읍내나 지산면 방면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진도에서 현지처(우씨)를 두어 계래(戒來), 계난(戒難), 계후(戒後) 3형제를 낳았다. 지산면 안치리는 소재의 후손들이 일군 노씨마을이다. 명종 20년(1565) 또다시 충청도 괴산으로 옮겨졌으며, 그 후 선조 2년(1569)에 누명이 벗겨져서 홍문관 직제학이 되고 부제학·이조판서·대제학·우상을 역임한 후,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이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여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을 추천했다하여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파직되는 것으로 그쳤다. 진도의 문화 개발에 공헌이 컸던 관계로 봉암서원(鳳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