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의 생생한 증언으로 상당부분의 궁금증들이 해소되었다. 다만 그 증언중에 안타까운것은 아직도 오르간을 사용하고있다니...
그 무거운 오르간 옮기느라 발 무지 많이 찍혔다. 후배들은 그런 아픔속에 살지 않기를 바랬는데(요즘은 반마다 하나씩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2반또는 3반정도가 같이 사용했었잖냐)
*****참고자료*****
1. 단체기합받을때 자기는 안빼줘서 무지 억울해했다는 회원중의 한사람인 P씨의 증언으로는 나하고 같이 단체기합빠진 유일한 사람이 바로 현장취재로 나를 기쁘게 한 양희였단다.
2. '''우리의 김양희 기자'''는 그바닥에서 말없고 얌전하기로는 항상 입에 오르내리던 친구였다. 어느새 이렇게 입담이 늘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잠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친구들을 좀 많이 초대했다.
양희도 초대하기로 했다.
수홍: "양희야 내일 내 생일인데 집에 놀러올래?"
양희: ***끄덕 끄덕*** (대사없이)
이것이 양희와 나의 유일한 대화였다.
나는 양희가 말을 못하는 줄 알았다.
기억들을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93년 대학새내기 시절 얼떨결에 만난 강재 은영이 진아 와 같이 많은 기억들을 얘기하고 또 얘기했었는데도 아직 얘기해야 할 기억들이 너무 많이 남은듯한 느낌이다.
거국적인 부산에서의 모든 회원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진다. 어떤 얘기 보따리들을 풀어놓을것인지 ....
양희의 취재에 도움을 주신 양희 어머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 알차고 다양한 소식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