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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리 (上部, 下部, 內部, 下洋, 巨族)
삼랑리 "거족마을"
7. 삼랑리(三浪里)
응천강(凝川江)이 낙동강(洛東江)에 흘러드는 강변마을 이다. 옛날부터 삼랑진(三浪津) 나루터가 유명하였고, 김해군(金海郡)과 강을 건너 마주보며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대로(大路)와 접속하는 수운(水運)의 요충지였다.
세 갈래의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거센 곳이라고 하여 삼랑(三浪)이란 지명이 생겼는데, 주위의 경관(景觀)이 빼어나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삼랑루(三郞樓)라고도 함)가 있었고,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는 민씨 오형제(閔氏 五兄弟)의 오우정(五友亭)이 건립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 중기(高麗 中期)의 고승 원감(高僧 圓鑑)이 지은 삼랑루시(三浪樓詩)와 조선조 초기(朝鮮朝 初期)의 문인부사 안주(文人府使 安宙)의 오우정시(五友亭詩)가 지금까지 남아있고, "삼랑곡(三郞曲)"이 라는 음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조 후기(朝鮮朝 後期)에 이 동리(洞里)는 경상도(慶尙道) 삼조창(三漕倉)의 하나로 후조창(後漕倉)이 설치된 곳인데, 지금의 하부 부락(下部 部落)을 중심으로 한 일대이다. 당시는 밀양(密陽), 양산(梁山),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 인근 7개 군현의 조세(租稅)를 징수(徵收) 보관(保管)하고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운반(運搬)하던 한 도회(都會)로서, 차소(差所), 선청(船廳), 통창(統倉), 고마창(雇馬倉), 객주집 여인숙 등의 건물이 즐비했으며, 선주(船主), 조군(漕軍), 색리(色吏), 고자(庫子), 관노(官奴) 들의 활동 무대였다.
지금도 이 동리에는 조창(漕倉)에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으며, 마을 뒷편 고개 마루에는 당시 관계 관원들의 송공비(頌功碑) 등이 여러 기(基) 서 있다.
근대 이후 육로교통(陸路交通)의 발달로 조창(漕倉)이 없어지고, 새로이 경전선(慶全線)의 낙동강철교(洛東江鐵橋)가 가설된 후에는 낙동강역(洛東江驛)이 마을 앞에 생겼다. 그 전 선창가에는 삼랑진(三浪津)나루터가 복구(復舊)되어 이웃한 도요진(都要津)나루, 오우진(五友津)나루(일명 뒷기미나루), 석제진나루 와 함께 김해 생림면(金海 生林面)과 밀양 상남면(密陽 上南面) 사이에 수운(水運)의 요지(要地)가 되었다.
이 동리(洞里)의 동쪽에는 응봉(鷹峰)(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송지리(松旨里)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에는 야산과 들판을 가로질러 미전리(美田里)와 경계를 이루었다. 동리 서남쪽에는 응천강(凝川江)이 낙동강(洛東江) 본류에 흘러드는 넓은 하구(河口)를 바라보며, 상남면(上南面) 외산리(外山里)와 경계를 지었고, 남쪽에는 도도한 낙동강 너머로 김해 생림면(金海 生林面)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거족(巨族), 뒷기미, 상부(上部), 하부(下部), 내부(內部),하양(下洋) 등 여러 부락을 아울러서 삼랑진(三浪津)으로 법정리를 삼았다.
(1) 상부(上部,윗마)
이 동리의 윗쪽에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응천강(凝川江)과 낙동강(洛東江) 물이 합류(合流)하는 하구(河口)의 모서리에 있는 부락인데, 마을 앞에 백사장(白沙場)이 넓다. 본래는 부락이 넓었으나,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통에 침식이 되어 지금은 매우 작아졌다. 옛날 후조창(後漕倉)이 이 동리에 있을 때는 저점(邸店) 거리로서 매우 번창했다고 한다.
○ 뒷기미(後浦山,五友津,五友亭)
상부(上部)와 거족(巨族) 부락 사이 갯가에 있는 작은 부락이다. 뒷기미란 뒷쪽 갯가에 있는 뫼라는뜻인데 부락의 북쪽 산등성이를 가리킨다. 옛날 후조창에서 보면 뒷쪽 갯가에 위치하고 산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으로 뒷개뫼(後浦山)에서 온 말이다. 언던 위에 여흥 민씨(驪興 閔氏)의 재사(齋舍)인 오우정(五友亭)이 있으므로 오우정이라는 지명으로도 통하고 있으며, 아랫쪽 나루터를 뒷기미나루 또는 오우정(五友亭)나루라고 한다.
오우정(五友亭)은 성종(成宗)때 점필제 선생의 문인(門人)인 욱재 민구령(勖齋 閔九齡)이 1510년(中宗 5) 경에 옛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일정(一亭)을 짓고, 아우인 경재 민구소(敬齋 閔九韶), 우우정(友于亭) 민구연(閔九淵), 무명당(無名堂) 민구주(閔九疇), 삼매당(三梅堂) 민구서(閔九敍) 등과 함께 다섯 형제(兄弟)가 베개를 나란히 하여 기거(起居)하면서 학문(學問)을 닦고 우애(友愛)를 실천하던 곳이다. 후일 고을 사림들이 민씨오우(閔氏五友)의 덕행(德行)과 효우(孝友)를 기리어 오우사(五友祠)를 세웠고, 뒤에 삼강서원(三江書院)으로 높이어 사향(社享)을 해왔으나 189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해방후에 서원(書院)을 복원(復元)하고 오우정(五友亭)을 중수(重修)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흔히 민씨재실(閔氏齋室)이라고 한다. 현재 마을 앞 강변에 도로가 나 있고 수돗물을 끌어올리는 양수장 시설(揚水場 施設)도 있다.
○ 당집(堂)
상부(上部)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있는데 당집 안에 손장군(孫將軍), 박장군(朴將軍)의 화상(畵像)을 모셔 놓고 있다. 매년 정월 14일날 밤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는 삼랑리의 5개부락 주민들이 합동으로 치성을 드려 왔으나, 요즘에는 상부(上部) 부락(部落) 단독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당모랭이
상부(上部) 마을에서 뒷기미나루터로 가는 산 모롱이인데, 당집밑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 서창가(船艙邊)
낙동강(洛東江) 인도교(人道橋)를 중심으로 한 강 가의 모래밭을 말한다. 옛날 후조창(後漕倉)이 있던 시절 이 모래밭 물 가에는 크고작은 배들이 많이 정박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근 고을에서 거두어 들이는 조세곡(租稅穀)이 배에 실려 이곳에도 모여들었고, 다시 통창(統倉)에 보관(保管)해 두었다가 큰 배에 옮겨 싣고는 낙동강으로 내려가 남해(南海)를 거쳐 서해(西海)로 북상(北上)하는 뱃길의 시발지(始發地)였다. 또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굿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매년 정월 열나흘 날 저녁에 이곳 산 위의 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내고 난 뒤에 선창가에서 굿판이 벌어졌는데 열흘에서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는 김해(金海), 밀양(密陽)을 비롯하여 인근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여와서 북새통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았다.
○ 뒷기미고개
상부(上部)마을에서 뒷기미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옛날 삼남(三南)의 중요한 교통로(交通路)의 하나이다.
○ 조창만댕이(漕倉頂, 조산만댕이)
상부(上部) 마을과 내부(內部) 마을 사이에 있는 산꼭대기를 가리킨다. 만댕이란 말은 산꼭대기를 말한다.
○ 마방터(馬坊址)
상부(上部) 마을 가운데에 있는 지명인데, 옛날 이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이 말을 매어 두던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
○ 비석껄(碑石街)
상부(上部) 마을 가운데의 마방터에서 뒷기미로 가는 고갯길의 입구에 있는 지명인데 비석이 많이 있다고 부쳐진 이름이다. 지금도 5, 6기(基)의 옛날 수령들의 송덕비(頌德碑)가 남아 있으나 얼마전 까지 10여 기(基)의 비석(碑石)이 서 있었다고 한다.
(2) 하부(下部, 지점거리, 각거리, 선창아랫마)
이 동리(洞里)의 아래쪽에 있다 하여 상부(上部) 부락(部落)과 대칭(對稱)하여 부르는 지명으로, 옛날 후조창(後漕倉)의 중심 지대이다. 지금의 낙동강 철교 아래쪽 강 가에는 선창이 있었고, 그 안쪽에 객주집, 여인숙, 난전 등이 즐비하여 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속칭 지점거리 또는 각거리라고도 했는데 그 후 소전거리와 삼랑진(三浪津) 큰 장으로 개발되었다.
○ 하양
하부(下部) 부락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낙동강 아랫쪽에 강폭이 가장 넓어 바다와 같다고 하여 하양(下洋)이란 지명이 생겼다. 상부(上部), 하부(下部)와 마찬가지로 옛날 후조창(後漕倉)에 드나드는 배를 매어두는 선창가 부락이다. 지금은 강가에 상록원(常綠園)이라는 유원지(遊園地)가 개발되어 원근(遠近)에서 관광객(觀光客)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다.
○ 낙동강역(洛東江驛)
삼랑진역(三浪津驛)에서 분기점(分岐點)을 이룬 경전선(慶全線) 첫번째 간이역(簡易驛)이다. 본역(本驛)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이 곳에 역(驛)을 설치한 것은 옛날 후조창(後漕倉) 때처럼 낙동강(洛東江) 수운(水運)을 이용함이 편리한 인근 고을의 조세(租稅) 곡물(穀物)을 우선 이 곳으로 집결시켜 다시 철도편으로 각지에 수송(輸送)하기 위해서이다. 후조창(後漕倉)의 폐지와 거의 동시에 설치된 간이역(簡易驛)이라 할 수 있는데 수십 년전 어느 여를 밤에 마을 청년 9명이 역(驛) 구내 철로를 베고 잠을 자다가 전원이 기차에 깔려 참변을 당한 기록을 간직하고 있다.
○ 각거리(邊街)
하부(下部) 마을 앞 강변에 있는 길거리를 말한다. 옛날 삼랑후조창 시절에 이 길거리에는 여인숙과 주막 점포들이 즐비했다. 강가에 있는 거리라 하여 갓거리가 변음(變音)되어 생긴 지명이다.
○ 뚝밑에들(堤下坪)
하부(下部) 마을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낙동강 가에 제방 아랫쪽 들판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소전거리(牛市場, 三浪場)
상부(上部) 마을과 하부(下部) 마을 사이에 있었던 소장터이다. 옛날 조창거리에 성시(盛市)를 이룰 때는 원근에서 소의 매매(賣買)가 가장 활발한 곳으로 삼랑장이라고도 했다.
○ 낙동강 무지개다리(洛東江虹橋)
경전선(慶全線) 철도(鐵道)의 낙동강(洛東江) 위에 놓인 철교이다. 철교 난간의 아취 모양이 무지개 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랑나루터(三浪津址)
지금의 하부(下部) 마을 철교를 중심한 아래위쪽 강 가를 말하는데,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과 연결되는 큰 나루터 중의 하나이다.
○ 통창골(統倉, 통작골)
내부(內部) 마을 일대를 가리키는데 옛날 삼도(三道)의 수군통제영(水軍統制營)으로 납부(納付)하는 조곡을 보관하던창고인 통창(統倉)이 있었다고 하여 통창 또는 통작골이라 했다.
○ 일자동네(一字洞)
버들섬(柳島) 제방 안쪽에 일자(一字)로 늘어서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 터골(址谷)
하양(下洋) 마을 뒷쪽에 있는 골짜기인 안쪽에 봉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절터골 줄여져서 터골이라 한다.
○ 행강모랭이
구낙동강역(舊洛東江驛)이 있었던 곳이다. 옛날에는 낙동강 본류가 이 모랭이 앞으로 흘렀는데 물이 매우 깊어 명주실 꾸리를 몇 개를 풀어도 딸려 들어갔다는 설화가 있다.
(3) 내부(內部, 안동네, 안마)
이 동리의 안쪽에 있는 부락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으로 일명 統倉 또는 통작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후조창(後漕倉)의 관원(官員)이 공무(公務)를 보던 차소(差所), 선주(船主)들이 집무(執務)하던 선청(船廳), 색리(色吏)와 관노(官奴)들이 유숙(留宿)하던 집, 그리고 여러 채의 창고(倉庫) 등이 들어서 있던 마을이다. 통창(統倉)이란 이곳에서 징수(徵收)한 7읍(邑)의 조세(租稅)를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곧 통영(統營)에 납부하기 위하여 보관하던 창고를 말하는데, 통창골 또는 통작골이라고도 했다. 마을 뒷편에서 상부(上部) 부락으로 통하는" 조창산등이"에는 조세 징수에 공로가 많은 관원들의 송덕비(頌德碑) 유애비가 지금도 여러 기(基) 서 있다.
또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는 조세(租稅)를 실어나르는 선박들의 뱃길이 무사하도록 기원하는 별신굿을 올렸는데, 이 때에는 상·하·내부의 여러 부락이 합동하여 성대한 마을 제사(祭祀)와 행사를 거행했다.
구한말(舊韓末)에 큰 부자인 의관(議官) 박기섭(朴夔燮)과 주사(主事) 박인봉(朴仁鳳)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소작인들에게 호세(戶稅)와 도조(賭租)를 경감(輕減)해 주어 마을 사람들이 감사하여 송덕각(頌德閣)과 시혜각(施惠閣)을 각각 건립한 일도 있다.
(4) 거족(巨族, 큰제비, 거제비, 巨燕)
이 동리의 북쪽 응천강(凝川江) 가에 있는 저습지대 마을이다. 지금과 같이 강변 제방이 견고하지 못했을 때는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여 마을 전체가 침수되는 일이 잦았다. 때때로 부락민들은 마을과 들판에 침수가 되지 않도록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올리기도 했다.
옛날 어느 해에 마을 사람들이 제물(祭物)을 차려 놓고 수해(水害)가 없도록 동신(洞神)에게 제(祭)를 올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큰 제비 수십 마리가 제상(祭上) 위를 빙빙 날아다니면서 구슬프게 우는 통에 참제한 동민들도 서러움에 겨워 함께 울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별다른 수해(水害)를 당하지 않고 농사를 잘 지으며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큰 제비(巨燕)가 지켜 주는 마을이라고 하여 동네 이름을 "큰제비"라고 한 것이 "거제비"가 되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거젭" 또는 "거족"으로 바뀌어 거족으로 표기하고 있다.
근대에 사인(士人) 안인신(安仁信), 안경목(安景穆)이 입촌(入村)하여 광주(廣州) 안씨(安氏)가 살았다.
○ 진연대
화성동(火城洞)과 거족(巨族) 마을 경계 지점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이다. 진연대는 그 맨 윗쪽의 봉우리를 말한다.
○ 야시바우골(狐岩谷)
진연대 다음 동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이곳에 여우 모양의 바위가 있어 「야시바우」라 했는데 골짜기의 지명으로 바뀐 것이다.
○ 잘태기
대신(大新) 마을에서 거족(巨族) 마을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인데, 산의 능선이 잘룩하게 낮아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팔밭골짝(掘田谷)
잘태기의 남쪽 거족(巨族) 마을에 소속된 골짜기의 이름인데, 옛날에 산지를 개간한 팔밭이 많았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불선방우(點火岩)
거족(巨族) 부락 팔밭골 남쪽 등성이에 있는 바위인데, 이 바위밑에 촛불을 켜 놓고 치성을 드린 곳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 공동산만댕이(共同山頂)
거족(巨族) 부락 팔밭골짝 동남쪽에 있는 산봉우리 이름이다. 이 산에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조장군미(曺將軍墓)
거족(巨族) 부락 공동산(共同山)만댕이 남서쪽에 있는 나즈막한 봉우리 이름이다. 이곳에 김해(金海) 출신의 조장군(曺將軍)이라는 분의 묘(墓)가 있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청룡등(靑龍嶝)
조장군(曺將軍)미 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인데 거족(巨族) 마을 왼쪽을 감싸고 있다 하여 좌청룡(左靑龍)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물포골(水浦谷)
거족(巨族) 부락 청룡등(靑龍嶝) 너머에 있는 골짜기이름인데, 낙동강이 범람할 때 물이 밀려드는 골짜기라 하여 지어진 지명이다.
○ 큰새미(大泉)
거족(巨族) 마을 가운데에 있는 샘을 가리키는데, 오래된 두 개의 샘 가운데 큰 것을 말한다.
○ 당산나무껄(堂木街)
거족(巨族) 마을 남쪽 청룡등(靑龍嶝) 끝 부분에 큰 당(堂)나무가 서 있는데,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이 머물러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나무가 서 있는 주위를 당산나무껄이라고 한다.
○ 닷섬지기들(五石坪)
거족(巨族) 마을 당산나무껄 앞들의 이름이다. 옛날에 닷섬직이 논뱀이가 있었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 돌치미나리(石蹄津, 돌굽나루, 도께들, 석진나루)
본래(本來)는 거족(巨族)에서 상남면(上南面) 배죽 마을로 건너가는 나루터의 이름인데, 지금은 부근의 들 이름으로 바뀌었다.
석제진 곧 돌굽나루, 도께나루 석진나루로도 불리었으나 지금은 나루가 없어지고 부근의 들판이 지명을 이어오고 있다.
○ 민벌굼티기
돌치미나리 위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밋밋한 벌판에 움푹 들어간 곳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쟁피납굼티기(菖蒲坪)
민벌굼티기에서 마을 쪽으로 이웃해 있는 들 이름인데, 옛날 이 부근에 창포가 많이 자생했다. 쟁피는 창포(菖蒲)의 사투리이다.
○ 양달(陽達)
거족(巨族) 마을의 양지쪽 마을을 가리킨다.
○ 음달(陰達)
거족(巨族) 마을의 음지쪽 마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