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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월간 중앙입니다.
현 국제정세를 살짝 본다는 느낌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기행문형식의 재밌는 글입니다.
단 글 마무리부분에 나오는 정치적인 관점은 보시는 분의 정견에 적합치
못 할 수 있으니 그부분은 배재하시고 읽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해 특정 정치단체를 비방하거나 특별한 정치적 목적으로
올린 글은 아닙니다.
게시판활성화를 위해 좋은 글이나 재밌는 글 많이 올려주세요
월간중앙에서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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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2004년 대만의 현실
Written by 김경일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조폭들이 중화기(AK 47 기관총과 수류탄 등)로 무장해 가고 있다.
2. 새로운 교육제도의 시행으로 학생들의 우울증이 심각하다.
3. 집권당의 부패가 심각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4. 출산율 저하로 노령화와 함께 노동 시장의 유소년 노동자 문제가 대두하고 있다.
조사 결과, 집권당의 부패 악화가 41%로 1위, 학생들의 우울증 문제와 조폭들의 무장 문제는 19%, 18% 등으로 각각 2,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설문 내용이 무척 낯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의 설문 내용은 타이완의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타이완 국민들을 대상으로 지난 8월 초 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육제도나 집권당의 정치 문제는 그렇다 쳐도 조폭들의 AK 47과 수류탄은 좀 과한 것 아닐까? 외부인인 필자가 보기에도 상당히 과해 보인다. 그러니 그 사회 당사자들의 불안감은 얼마나 더해 갈까? 얼마나 그것이 심각한 문제였으면 설문의 1번 항목으로 올려 놓았을까?
그건 그렇고, 웬 난데없는 타이완 르포인가? 독자들은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조금 이야기해 본다.
필자는 1980년대에 타이완에서 석·박사 과정을 통해 갑골문을 배웠다. 헤아려보니 한 9년의 세월이었다. 그 뒤 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후에는 여름·겨울 방학마다 중국 전역을 배낭여행으로 다녀 보았다. 연구로, 또는 사업을 하는 가족들로 인해 90년대는 거의 중국만을 드나들었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썰렁한 타이완’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중국을 좀더 알기 위해서였다.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하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필자는 스스로가 ‘중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만은 안다. 그리고 하나 더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타이완만큼 중국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도 한 2년 머물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일본도 가끔씩 들러보았고 캐나다나 유럽 학자들을 통해서도 중국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타이완이 중국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중국보다 더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데이터도 그렇고 복잡한 문화 현상들의 맥을 제대로 짚어 내는 전문가들도 그렇고. 어설프게 친한 친구보다는 원한 맺힌 적이 나를 더 깊이 꿰뚫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지금 두 지역은 한판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근처에서는 미 7함대도 어슬렁거리고.
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리고 중국 이해를 좀더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타이완을 다시 한 번 가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7월 14일, 드디어 다시 JKS(장제스: 蔣介石)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헤아려 보니 약 7년 만이다. 친구가 밴을 가지고 나와 있다.
“헤이, 니 메이 삐엔러!(야, 너 하나도 안 변했다!)”
우리는 거짓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오래 사귄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우리도 미소와 서툰 거짓말을 주고 받았다. 즐거웠다. 그리고 더웠다.
“그런데, 거리가 전혀 변하지 않았네. 재건설이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데.”
“후후, 돈이 있어야지. 요즘 누가 타이완 인프라에 투자하겠어?”
“타이완, 돈 많잖아?”
“빈털터리 됐어!”
JKS 공항에서 타이베이 시내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리는 물론 타이베이 시내 전체도 뭔가 활력을 잃은 듯한 느낌이다. 잔치가 끝난 부잣집처럼 어딘지 썰렁하다. 1980년대 말 국민소득 1만 달러를 가볍게 뛰어넘고 90년도에는 2만 달러를 향해 달려가던 그 쌩쌩한 모습이 없어졌다. 어디로 갔을까? 예상치 못한 분위기였다. ‘이 정도까지 되었나?’
“퇴근 시간인데 차가 별로 안 막히네. 역시 하버드까지 나온 타이베이 시장 마잉주(馬英九)가 일을 잘하는 모양이지.”
“일을 잘해? 하하, 그게 아니고 이제 차차 알게 되겠지만 타이베이 사람 수십 만이 상하이로 미국으로 빠져나갔어.”
저녁을 사주겠다며 친구가 시먼딩(西門町) 회전 초밥집으로 데려간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이다. 역사가 오래된 그런 대로 번화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런데 간판들을 보니 일본 스타일 일색이다.
“여기 완전히 고베 뒷골목이네.”
“음, 요즘 타이완 사람들 중 조금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은 일본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어 가고 있어.”
“전에는 그래도 중국의 오리지널 문화가 타이완에 있다고 큰소리치고 했잖아?”
“지금 타이완은 완전히 정체성의 위기에 빠졌어. 구심점을 잃었지. 중국도 아니고 타이완도 아니고. 그래서 문화적으로 유사한 일본 문화에 빠져 들고 있지. 아, 요즘은 한국 연속극 때문에 한국도 좋아해.”
“中國이 타이완의 즙 다 빨아갔다”
회전 초밥집에는 손님이 한 50명 빼곡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15분 정도 기다린 끝에 자리를 얻었다. 이모작, 바다, 다양한 과실 등으로 타이완에는 원래 먹을 거리가 넘쳐흘렀다.
먹을 거리는 여전해 서울의 회전 초밥보다는 종류가 훨씬 풍부했다. 값을 보니 서울 가격의 60~70% 정도였다. 음식값이 너무도 쌌다. 또 ‘Made in China’의 싼 생필품들 때문인지 거리의 물건 가격도 저렴했다.
“도시는 썰렁해 보여도 먹을 거리는 풍부하고 값도 싸네.”
“타이완의 흥청망청 시대는 끝났어. 이제는 그저 먹고 살면 감지덕지지. 예전 같은 거품은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사람들의 생활이 더 검박해진 모습이다. 원래 겉으로 꾸미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이번에는 분명 뭔가 절박함이 묻어 난다. 친구 집에 들어서니 이전에 살던 그 집 그대로의 모습이다. TV도 소파도 마루 바닥도….
“타이완 정말 많이 변했구나.”
“중국 때문이지. 중국이 타이완의 즙을 따 빨아갔어.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은 해외로 이민을 갔고, 그렇지 않고 비즈니스를 하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상하이 등지로 갔지.”
원래 30명 정도의 직원을 두고 사업을 하던 친구의 회사에는 직원이 5명만 남아 있었다.
“그냥 먹고 사는 거지.”
그러고 보니 외제 승용차만 몰고 다니던 친구인데 공항에 끌고 나온 차의 옆구리가 받혀 찌그러진 채였다. 돈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지금 직원들 한 달에 3만5,000원(우리 돈 약 120만원) 정도 밖에 못 주는데, 의료보험도 안 해 주는데도 감지덕지야.”
한때 타이완의 임금은 아시아 최고였다. 타이베이 시내가 마비되도록 노동자 시위가 격렬했던 화려한 과거가 있었다. 그러자 노동집약 산업들, 그러니까 인건비로 먹고 사는 기업들 대부분은 중국으로 생산설비를 뜯어 옮겼다. 결과는 40, 50대의 심각한 실업. 현재 타이완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 산업은 IT산업과 금융업종뿐.
대부분 치열하게 재교육을 받았거나 미국 등지에서 공부하고 온 30, 40대가 새로운 샐러리맨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거리에 나가 보면 알겠지만 포장마차 천지야. 몇 년 전에 이 골목엔 가게라곤 없었는데 지금은 곳곳에 세븐 일레븐이야. 퇴직금 털어서 사장 된 거지. 나는 그래도 아주 행운아야.”
이 친구 역시 상하이에 전 재산, 아니 빚까지 얻어 올인했다가 10년 만에 모든 설비를 버려두고 나왔다.
“상하이에서 친구를 잃었네. 속임수와 속임수의 딜. 난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돌아왔지. 미련은 없네.”
타이완 사람들 비즈니스의 특징은 정직한 데 있다. 그리고 비즈니스의 룰대로 비즈니스를 한다. 그들은 경찰서, 소방서, 세무서, 시청 위생과 직원들이 비즈니스에 간섭하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철저한 심부름꾼일 뿐이다. 청렴한 정부와 부지런하고 성실한 타이완 상인들이 만들었던 것이 타이완의 경제적 성공이었다.
필자가 아는 한 타이완 상인들은 거의 탈세를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국가의 세금 관리 시스템이 거의 완벽해 일반인들의 사소한 탈세는 원천 봉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이완에 머무르는 동안, 거의 매일 아침 일간신문을 5, 6개씩 편의점에서 샀다. 그때마다 점원은 신문을 계산기 컴퓨터로 스캔했다. 모든 신문에 바코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10원짜리(우리 돈 350원) 신문에까지 바코드가 찍혀 있단 말이다. 한국 일간지보다 더 두꺼운 일간지가 350원이라니, 또 그것에 바코드를 찍어 놓다니. 우리 사회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또한 아무리 작은 물건을 주고받아도, 웬만한 구멍가게에서도 전국적으로 일련화된 번호의 영수증을 건네준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 그 영수증의 번호를 추첨해 200만 원(우리 돈 약 7,000만 원)의 상금을 준다. 물론 그보다 적은 액수의 상금들도 있고. 우리식으로 쉽게 설명하면 물건 판 영수증이 로또복권이 되는 셈이다. 끈질김, 성실함, 그리고 섬세함은 타이완 사회를 묘사하는 일반적인 수사들이다. 그 모습의 일단을 이 로또 영수증은 잘 보여 준다.
통역을 하면서 많이 느껴 보았지만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인들과 기질적으로 맞는다. 조용하고 약속에 철저하고. 때문에 중국에서의 비즈니스를 힘겨워하는 타이완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물론 상하이에만 45만이 넘는 타이상(臺商)이 살아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파트 밖으로 오토바이들 소리가 요란했다. 밤이 깊어 가면서 우리들의 대화도 깊어 갔다. 처음의 농담들은 점점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우리들 목소리보다 크게 들리고 있었다.
르포를 위해 타이베이의 이 친구 집에서 머물렀는데 직원들과 직접 대화해 보라며 회사 직원들과 함께 가는 여름 피서에 초대했다. 아침 7시, 타이베이 기차역에서 만났다. 모두들 허름한 옷차림에 저마다 물병을 들고 있다. 필자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옷과 밥이 비슷해야 한다. 말이 닮아야 함은 물론이고.
기차는 타이완 동북부 해안선을 따라 달렸다. 무궁화호 수준보다 조금 못해 보인다. 하지만 청소는 잘되어 있다. 약 3시간 뒤 화롄(花蓮)에 도착했다. 속초쯤 되는 곳이다. 태양이 무척 컸다. 하지만 이층버스 에어컨 성능도 만만치 않았다. 숙소에 도착했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감사가 나온다. 이런 곳이 있다니.
중국서 실패하는 타이완 사업가 줄이어
초록빛 산이 겹겹으로 서 있었다. 역시 산은 멀리서 보아야 산이 된다. 늠름한 모습이지만 초록이 너무 강해 조금은 야해 보인다. 발 앞에는 고운 잔디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멀리 잔디가 끝나는 곳에 잎이 넓은 나무들이 산등성이까지 뻗어 있다. 온통 초록이다. 하지만 채도가 달랐다. 햇살을 받는 잎새들의 모습이 달라서일까? 모네의 그림이 언뜻 떠오른다. 그 잔디 한 구석에 통나무집들이 서 있었다. 역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림 속에 내가 있었다.
통나무집 옆에는 일본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지은 식당이 하나 있었다. 노릇노릇한 생선튀김을 먹었다. 고산족 집주인이 봄에 야생 오디를 따다 설탕에 절여 만들었다는 밑반찬이 너무 달았다. 해서 얼음물을 좀더 들이켰다. 검붉은 오디를 먹고 투명한 얼음물을 마셨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숲이 가득했다. 숲은 곧 하늘 위로 떠오를 모양이었다.
그 곳에서 친구 회사의 한 직원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는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며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우리 돈 120만 원짜리 일자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집안에 그 돈이 유일한 수입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은 중국이었다.
한때 타이완 산업의 주류는 의류·신발·PC조립 등 이른바 노동집약 산업이었다. 80, 90년대의 ‘Made in Taiwan’시대를 통해 제2의 일본이 될 듯한 나라였다. 하지만 인건비 상승으로 기업들은 중국 남부의 샤먼(厦門), 둥완(東莞), 상하이 등지로 흩어져 갔다. 타이완에서 30명의 직원을 쓰던 인건비로 200명의 직원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동의 질이 달랐다. 또 중국 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난 때문에 경영권을 잃고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투자 초기에 융자를 해주었다가 생산이 궤도에 오를 무렵 융자를 끊어 저절로 나가떨어지게 하는 방법이 가장 고전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말이 통해도 체제가 다르면 의사소통은 되지 않는 법, 뇌물 훈련을 덜 받은 타이완 상인들은 새로운 학습을 거부했다.
그리고 귀환. 또 직원이 많아진다고 일감이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 시장의 파이 크기는 변함이 없다. 결국 타이완 기업끼리의 출혈 경쟁으로 많은 사람의 신분이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타이완에서 가장 신뢰도를 인정받고 있는 경제 잡지 최근 호를 보니 중국, 홍콩, 타이완 기업 1,000개의 도태율이 무려 15.7%에 달했다. 2003년도 통계인데 결국 중국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 7개 중에 1개꼴로 망했다는 이야기였다. 미국 지가 조사한 미국 내 500대 기업 평균 도태율 5.2%의 거의 세 배가 넘는 수치였다. 그만큼 나가떨어지는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타이완 향해 ‘전쟁 불사’ 공언하는 中國
타이베이로 돌아와 중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 교포를 만났다. 타이완에서 태어난 교포 2세였다. 2~3개월에 한 번씩 타이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때문이었다. 식사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타이베이의 강남 톈무(天母)의 한 일식집이었다. 톈무를 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거나 타이베이 최고의 부자들이다.
미국인 학교와 일본인 학교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새파란 야자 가로수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깔끔한 보도블록이 여기가 꽤 비싼 동네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식당 정원의 대나무는 정갈했고 연못물은 맑았다. 두꺼운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이름도 모르는 해물을 먹다 그 아내에게 물었다.
“왜 같이 중국에 가서 생활하지 않나요?”
“중국은 싫어요. 생활이 불편하고 생각이 맞지 않고. 아이들 교육도 문제고….”
중국에 사는 기러기 아빠들은 타이완의 또 다른 사회문제였다. 중국에 트는 또 다른 임시 둥지, 아내들의 딴 생각 등등…. 타이완은 내면적으로 크게 흔들려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들 기러기 가정들 때문에 타이완은 산업을 잃어 가면서도 나름의 소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부를 옮겨 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2003년 통계로 흔히 말하는 국민소득이 약 1만2,000달러. 이전보다 4,000달러 이상 줄었다)
일자리 유출은 심각하지만 돈은 그나마 회귀하고 있는 셈이었다. 연어처럼. 다행이었다. 더구나 중국에 진출해 있는 타이상들의 기업이 타이완 주식시장에 상장할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인민폐와 타이완 NT 달러는 대만해협을 합법적으로 왕래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미사일만 곁들이지 않으면 그것도 괜찮지 싶다. 하긴 타이베이 한복판의 린썬베이루(林森北路) 골목에서는 인민폐를 살 수도 팔수도, 심지어 송금까지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명동 암달라 골목에서 북한 돈을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얼마나 재미있는 대만해협의 긴장인가!
또 다른 자료를 보니 중국·타이완·홍콩 세 지역의 영향력 있는 40대 기업 중 절반인 20개가 타이완 기업이었다. 나머지 20개 중 중국이 10개, 홍콩이 10개씩을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그 20개의 타이완 기업들 대부분은 IT기업으로 ‘설계는 타이완, 제조는 중국, 판매는 세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하지만 타이완 정부는 이들 IT기업이 가진 기술들이 중국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온갖 제재를 다 하고 있다. 언제까지 가게 될지 모르지만 천수이볜 정부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결국 타이완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뢰할 만한 연구 단지다. 그것에 상처를 입히게 되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중국의 타격으로 변하고 만다.
이런 판국임에도 중국은 타이완과의 전쟁 불사를 외치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못해도 독립선언은 못 봐주겠다는 강경파들의 으름장은 결국 행동으로 옮겨질까? 타이완처럼 좋은 무기 시장을 포기하지 않을 미국이기에 결국 중국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게 될까? 모두들 역학 계산이 분주하다. 불쌍한 건 소시민이다.
“이 상태로 가면 중국이 때릴 겁니다. 저 애들만 불쌍하게 되겠지요.”
한 타이완 기업인은 곁에 있는 중학교 1학년 딸을 보면서 심각하게 답했다. 정말로 전쟁이 날 것 같으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해서였다. 신문과 TV를 통해 계속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니 60% 이상의 타이완 국민들이 3년 내에 전쟁이 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 중 약 35%는 결사항전을 할 것이라는 결과도 보인다. 결사항전이라….
對中 긴장 고조시킨 천수이볜의 ‘독립선언’
타이베이에서 며칠을 지낸 뒤 가오슝(高雄)으로 갔다. 아시아에서 부산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물동량이 드나드는 항구가 타이완 남부의 가오슝이다. 현재 천수이볜 총통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하다.
타이완 독립 정서가 가장 짙은 항구도시였기에 사람들도 만나고 야시장도 기웃거리면서 자료들을 챙겨 보았다. 타이완 방 언을 사용하지 않고 중국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를 쓰면 외지인에게도 성질을 내는 도시로 변해 있었다. ‘예전엔 순박한 도시였는데….’ 정치란 그래서 책임이 무거운 거다.
그 가오슝에서 이틀을 지낸 뒤 다시 아침 일찍 타이베이로 출발했다. 자동차로 4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창 밖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고속도로가 넓어진다. 이상할 정도로 넓어진 고속도로의 중간에는 보호막이 없다. 그 대신 너비 약 2~3m, 길이 10여 m씩 되어 보이는 줄들이 그어져 있다. 자동차들을 위한 표지는 분명 아니었다.
“활주로야. 오늘 새벽에도 작전이 있었지.”
운전을 하던 친구가 지나가는 말처럼 일러준다. 부동산업을 하던 친구였는데 이제는 묘한 실업가가 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해결사다. 타이완에 새로 등장한 직업 중 하나로 타이완, 중국 양쪽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을 도와 급할 경우 양쪽을 오가며 일을 봐주는 신종 업종이다. 마침 일이 없다고 흔쾌히 운전을 해 주었던 것이다. 오가는 내내 미안했다.
“부동산시장 다 죽었지?”
“부동산? 타이베이 시내에 가 봐, 빌딩마다 텅텅 비었어.”
하긴 빈 것은 타이베이 빌딩만이 아니었다. 가오슝의 아파트, 우리 나라 대전쯤에 해당하는 타이중(臺中)에서는 도심에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보였다. 약간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아파트는 오래 전부터 매매가 끊겼고.
한때는 활기로 넘치던 도시들이었다. 거리마다 웃음과 이야기꽃이 가득하던 곳이 타이완이었는데 지금은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첨단 산업을 중심으로 기회를 잡은 사람들의 생활과, 산업 아이템의 교체기에 도태된 사람들의 생활이 극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중간 지대는 없었다.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정말 실존하는 파도였다. 많은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바뀌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절약, 그것은 자존심까지 상하게 만드는 듯 보였다.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이재민들이었다.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보는데 활주로가 끝날 줄 모른다. 얼핏 보아도 몇 ㎞는 족히 되어 보인다. 문득 박대통령 당시 전투기 이착륙 훈 련을 위해 경부고속도로 한 부분을 넓혀 두었던 곳이 떠올랐다. 수원 근처였던가….
전쟁이라….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전쟁까지 해야 하다니. 타이완 테러분자들이 중국에서 제일 높은 88층짜리 상하이 진마오(金茂) 빌딩을 들이받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펄펄 뛸 필요가 있을까? 타이베이에 자기들보다 더 높은 101층짜리 빌딩이 서 있는 것이 배가 아파서 그런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타이완의 독립선언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헌법 수정 때문이다. 타이완이 헌법을 수정해 독립을 명문화하는 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 베이징의 입장이다. 천수이볜 총통이 선거용 구호로 독립을 내세울 때만 해도 베이징은 참아 주려 했다. 그런데 아예 헌법을 고쳐 타이완 독립국을 만들 계획을 구체화해 가자 베이징의 인내가 극에 달한 것이었다. 베이징 사범대 교수와 있었던 해프닝이 기억 난다. 세계 각국 교수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지 아마.
“중국의 지식인들은 타이완의 독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타이완 독립? 어디서 감히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거요. 그런 표현은 사용 자체가 허용되어서는 안돼요. 한줌 털 같은 것들, 당장에 미사일로 박살을 내버려야지!”
듣던 필자나 함께 있던 프랑스·캐나다 학자들이 다 머쓱할 정도로 그 교수는 거품을 물었다. ‘음, 단어조차 용납이 안 되는 거구나.’
하긴 베이징에서 타이완을 생각하면 참으로 하나의 점처럼 느껴질 뿐이다. 미사일 한두 개로 쑥밭을 만들 수 있을 듯했다. 꺾어 놓고 천천히 정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베이징에 있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을 듯했다. 타이베이 101층 짜리 빌딩 안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즐기는 단란한 가족들을 본 일이 없다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안에 들어앉은 타이완 최정예 화롄(花蓮) 공군기지(중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높은 산맥 때문에 곡선을 그리는 미사일은, 갑자기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는 한 기지에 떨어질 수 없게 되어 있다. 미국 무기상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곳이다)를 보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도 있을 듯하다.
타이완과 대한민국의 닮은 점
그러면 왜 타이완은 국제 정치학자들의 비유처럼 ‘진공 상태에서의 심호흡’이라는 막무가내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고 있는 것일까? 헌법 몇 글자 고치기 위해서 왜 나라의 운명을 걸려는 걸까?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에 세운 중화민국의 헌법에는 링컨의 사상을 기초로 한 ‘民有, 民治, 民享’(민유, 민치, 민향-국민이 소유, 국민이 통치, 국민이 누림)의 여섯 글자가 들어 있다. 그런데 현재 집권당인 민진당(民進黨)은 이 항목을 다음과 같이 고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由臺灣人民, 在臺灣, 爲臺灣(유대만인민, 재대만, 위대만-타이완 인민이, 타이완에서, 타이완을 위해)’.
헌법 수정 목표 시기는 2006년이다. 헌법이 이렇게 되면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이 아님을 선포하는 꼴이 된다. 흔히 말하는 타이완 독립선언이란 바로 이 구절의 변경에서 출발하게 된다. 대륙에서 흘러 온 중국 본토 정치인들에게서 벗어나 타이완 본토 사람들끼리 살겠다는 뜻이 된다. 결국 타이완은 11개의 한자에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중국 본토에서 흘러 든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면 안 되나?’ 먼발치에 선 우리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다 같은 한국인인데 열린우리당하고 한나라당하고 합쳐서 정치 좀 잘해보면 안 되나?’만큼이나 황당한 질문이 된다.
물론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출생 배경이 다르지요. 하나는 민주화하면서 모진 고문에 감옥살이까지 했던 사람들이고 다른 한편은 유신 독재에 5공, 6공까지 가미된 정당인데, 따라서 정치적 가해자였는데 대화가 되겠어요?”
사실 타이완의 민진당과 국민당의 관계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관계와 기가 막힐 정도로 닮아 있다. 이 이야기를 조금 해 보자.
때는 1947년 2월 28일이다(국민당 정부가 공식적으로 타이완으로 완전히 옮겨 온 시기는 1949년). 공산당에 쫓겨 타이완으로 흘러 든 국민당은 제 버릇 뭐 못 준다고 국민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그들은 타이완 본토 사람들에 대해 인종 차별적 태도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은 대륙 본토 출신의 점령군이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언 때문이다. 타이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패잔병인 국민당 군인들은 자격지심에서인지 타이완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현재 천수이볜 총통은 공식 석상에서 노골적으로 타이완 방언을 쓴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담배 밀수를 하던 한 여자를 검거하면서 길바닥에서 그녀를 개 패듯 한 것이 발단이었다. 곁에서 보던 타이완 사람들이 그 동안 쌓인 감정도 있고 해서 군인들을 몰아붙이자 당황한 군인들이 총을 쏘고 말았다. 엉뚱하게 무고한 시민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분노한 타이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사태를 대하는 장제스의 태도는 지혜롭지 못했다. 패잔의 장수는 다 그렇게 조급한 건지 그는 잔인한 진압을 명령했다. 광주 5·18과 비슷한, 아니 훨씬 처절한 유혈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이 내용을 좀더 알고 싶으면 ‘비정성시’라는 영화를 보면 된다).
국민당은 이 사건을 기화로 타이완의 모든 지식인들을 정리했다. 죽일 자는 죽이고 가둘 자는 가두었다. 잔인했다. 당연히 타이완 지식인들의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난다. 그 결과는 체포, 투옥, 계엄 그리고 끝없는 의문사…. 그 와중에서 국민당은 바닷가의 작은 섬에 있는 루다오(綠島-녹색 섬) 교도소에 정치범들을 집단 수용하게 된다. 우주로부터의 격리였다. 하지만 세월마저 파도 속에 가두어 둘 수는 없는 법. 1988년 장제스 총통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죽으면서 타이완에는 봄이 왔고, 92년에는 계엄령적 법령(계엄령 자체는 87년 풀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정치 인물이 바로 천수이볜이다.
노무현, 그리고 천수이볜
천수이볜. 1950년 생. 출생신고가 늦어 5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는 인물. 타이완 법대 출신. 변호사를 꿈꾸었지만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독재 정권하의 정치적 불평등을 목도하면서 인생항로가 바뀌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트럭에 치여 반신불수가 되고, 그 역시도 목구멍이 포도청인 법관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이런 과정은 열린우리당의 골수 당원들의 인생 역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니 자세히 쓰지 않아도 될 듯싶다.
세월이 흘러 타이완에는 정당이 하나 더 탄생하게 된다. 장차 장제스와 장징궈가 사라진 국민당을 대체할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민진당이다. 민진당 안에는 불행한 역사가 만들어 낸 정치적 전과자들이 가득했다. 열린우리당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당을 위해 녹색 깃발을 만들었다. 녹색 섬 ‘루다오 교도소’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 안에서 만들어진 정치 스타가 바로 천수이볜이다.
독자들은 이제 왜 천수이볜 총통이 독립을 부르짖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천총통이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은 중국이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흘러 든 국민당 정권 철권통치의 검은 그림자다. 그 폭압정치에서 비롯된 과거로부터의 상처를 끊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현실부정인 셈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끊고 타이완 내에 남아 있는 친일파, 아니 친중파 정당 국민당의 잔재를 말려 버리면 민진당의 집권은 영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줄기를 막은 뒤 물을 말려 물고기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원대한 계획이다. 멋진 아이디어처럼 보인다. 그 몇 마리 물고기를 다 잡고 난 뒤의 일이 좀 끌끌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독재의 탄압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타이완의 운명은 타이완 사람들 스스로 결정짓자.”
이 얼마나 참신한 구호인가? 타이완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 구호로 그는 2000년 5월 총통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04년 3월 20일, 그는 독립과 민족 자주의 구호로 다시 한 번 총통에 당선되었다. 두 방의 총성과 함께 국민당 출신 후보 롄잔(連戰)을 불과 2만표 차이로 물리치고. 총성 한 방이 더 울렸다면 3만표 차이가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슬아슬했다. 선거 바로 전날인 3월 19일,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사라진 총잡이의 등장이 없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 흥미로운 것은 천총통을 둘러싼 타이완 정치 현실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외세에 의해 휘둘려 온 역사를 끝내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사회를 이루어 보자는 정치 컨셉트는 묘하게 닮은꼴이다.
역사를 잘라낼 수 있다는 발상이 비행기로 불과 두 시간 반 거리의 공간을 두고 두 위정자의 머리에서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단순한 재미 이상의 음미할 만한 구석이 있다. 마음에 안 드는 역사를 끊어 치우고 말끔하게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은 충동은 정치적 후진국 대통령들 모두가 겪게 되는 정치적 입덧인 모양이다. 기어코 출산은 하게 되고 말 일이다. 태아가 건강해야 할 텐데….
장징궈가 리덩후이를 후계자 삼은 이유
닮은 점은 또 많다. 둘 다 법을 공부했다. 둘 다 독재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유격 훈련을 받았다. 나이도 엇비슷하다. 수하의 동지들이 대부분 넬슨 만델라와 같은 고독을 맛보았다. 둘 다 외세 배제, 자주 독립을 외친다.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로 무장한 것도 닮았다. 자주를 외치다 미국에, 중국에 코가 깨지는 과정도 똑 닮았다. 논쟁과 말싸움을 즐긴다는 것도 꼭 닮았다.
민진당 내에서 자기들끼리 부르는 천총통의 별명은 ‘산만한 아이(過動兒)’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묘하게 닮은 것이 하나 더 있다. 천수이볜 총통도 노무현 대통령처럼 정치적 DJ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았다는 점이다. 아니 DJ가 언제 타이완 정치까지? 좀더 이야기를 듣기로 하자.
1988년 마지막 독재자 장징궈가 죽자 타이완 국민들은 울었다. 1986년 당을 결성한 민진당 사람들도 울었다. 하지만 울음의 성격은 물론 달랐다.
그런데 장징궈는 생각이 깊은 독재자였다. 그는 부총통으로 리덩후이(李登輝)를 지목한 뒤 그를 길렀다. 미국 코넬 대학의 농업 경제학 박사 출신이었다. 정치는 상치(商治)라는 철학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리덩후이는 완전한 타이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내에는 대륙에서 건너온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는 학자풍의 리덩후이를 오랜 시간 데리고 있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닦아 주었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 장징궈의 깊은 배려가 있다. 언젠가는 타이완 사람이 타이완을 통치해야 한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 미숙한 나라에서는 독재정치만이 경제 개발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확신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실제로 1978년 아버지를 이어 총통이 된 후 세계의 역사가 증언하듯이 타이완은 비약적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된다. 또 그가 죽은 뒤 그의 러시아인 아내 장팡량(章方良) 여사는 생활비가 없어 타이완 국민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아프게 한 적이 있었다. 낡은 책상과 가족사진 한 장만을 아내에게 남긴 것은 조금 심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어쨌든 가만히 생각해 볼수록 장징궈는 묘한 독재자였다. 정치적 잣대로 미워만 하기에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야릇한 사내였다.
장징궈가 집권한 10여 년 동안 타이완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1960년대 150달러이던 국민소득은 그의 집권 후 2년 뒤인 80년에 2,300달러로 15배의 발전을 이룬다(물론 아버지 장제스 시대로부터 축적된 결과다). 같은 시기 한국의 국민소득은 80달러에서 1,597달러로 변해 있었다. 당시 장징궈는 중소기업 육성을 통해 개미처럼 벌어도 산을 만들 수 있음을 믿었고, 그보다 조금 이른 시대의 독재자 박정희는 큰 놈 몇 놈 길러서 나라를 일으키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부정부패 없이 착실히 가면 언젠가는 부자가 된다는 것이 장징궈의 신념이었지만 떡고물 좀 흘려도 크게 놀자고 밀어붙인 것이 박정희였다.
장징궈가 길러 낸 리덩후이 역시 경제에 매진했다. 머릿속에 경제만 들어있던 사내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겐 축복이었다. 1990년대 초 리덩후이는 장징궈가 건네준 8,000달러 국민소득을 밑천으로 1만 달러의 허들을 넘는다. PC로 쌓아 올린 개가였다. 그 탄력으로 타이완은 2만 달러를 향해 달려갔다. 외환 보유고는 8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정치 얘기 꺼리는 젊은이들
그 후 동남아 모두가 얻어맞은 IMF마저 피하면서 타이완은 새로운 경제 기적을 이루었다. 모두 리덩후이 집권 12년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이 리덩후이의 엉성한 말솜씨를 비웃기는 했어도 경제에 대해서만은 별 말들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 등장한 전, 노, 김, 김의 업적들은 모두가 아는 바다.
단단한 경제 기반과 함께 리덩후이는 자신의 모든 정치권력을 이용, 민진당에 정권을 넘겨준다. 분명 국민당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그는 막판에 천수이볜을 막후에서 돕는다. 기가 막힌 배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타이완은 타이완 사람에게’라는 장징궈와의 약속을 지켰다. DJ가 노무현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듯이. DJ 없는 노무현 대통령이 없듯이 리덩후이 없는 천수이볜 총통도 없는 것이다.
가오슝에서 타이베이로 올라오는 동안 필자는 천수이볜 총통과 노무현 대통령의 닮은 점을 죽 짚어 보았다. 묘했다. 갑자기 웃음이 솟아오른다.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도 똑 닮은 듯했기 때문이다. 경제보다는 역사와 민족에 매달린 결과였다. 천총통의 경제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모두들 고개를 젓는다. 역시 법과 경제는 다른 모양이다. 하긴 학과를 괜히 나누어 놓았겠는가!
“김 교수, 당신은 현재 지구상에 둘 남은 분단국가 모두에서 살아 본 사람이야.”
멍하니 생각에 잠긴 필자를 향해 운전을 하던 친구가 불쑥 말을 던진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정말 타이완은 독립이 가능한 걸까? 한반도의 통일처럼 토론으로나 가능할 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 같은 것이 아닐까?
타이베이로 돌아온 뒤 이번에는 젊은이들을 좀 만나려고 타이완 대학 앞으로 갔다. 시내에서 약간 동남부 쪽으로 치우친, 그러니까 서울의 잠실쯤에 위치한 곳이다. 역사를 말해주는 빛 바랜 담장, 그 위로 솟아 있는 푸른 야자수들. 타이완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술집과 당구장은 보이지 않는다. 서점들과 팥빙수 집, 그리고 국수 집, 물만두 집, 전자제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글쎄요. 우리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네요. 독립이니, 전쟁이니 하는 일들은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요.”
타이완 대학 앞 50년 된 허름한 팥빙수 집에서 만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정치 이야기를 애써 피한다. 팥빙수 안의 과일들은 상큼했건만 이들 토목과 대학원생들은 목석처럼 답이 시원치 않다.
“정치 이야기 마음대로 해도 되나요, 여기는... ?”
“되긴 하지만…. 글쎄요. 별로 관심이 없네요.”
“나는 전쟁이 난다고 봐. ‘닭을 잡아 원숭이를 겁준다(殺鷄驚)’는 고사성어가 있잖아. 독립은 중국이 용납할 수 없을 거야.”
“천총통 총격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 ….”
“글쎄요. 당은 아닐 것이고 개인의 열광이 지나쳐 만든 사건일 거예요.”
“국민당은 자작극이라고 하던데.”
“… ….”
말을 돌렸다.
“취업은 어때요? 한국은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인데.”
“아, 취업은 그런 대로 좋아요.”
갑자기 대답이 활기를 띤다.
“좋아? 우리 친구들이 타이완 대학 출신이라 그런 거 아닌가?”
“천총통 경제 관리 능력은 어때요?”
“부하오!(不好!) 물론 글로벌적으로 안 좋기는 하지만 잘 못해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전체적으로 한국 젊은이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태도들에 거품이 없어 보인다. 표현들도 야무지고.
팥빙수 집을 나와 서점으로 들어갔다. 전공 서적도 살펴보고 잡지들도 들춰 보았다. 조용했다. 시원하고. 밖은 36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어권 베스트셀러들의 번역본이 없다는 점이었다. 힐러리와 클린턴의 자서전이 원서로 팔리고 있었다. 타이완 대학 앞이라서 그런가 해서 다른 곳에서도 확인해 보았지만 대부분 원서로 팔리고 있었다.
“타이완은 현재 세대가 빠르게 나뉘고 있어요. 타이완 독립을 원하는 극소수의 지식인과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교육 수준이 높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 따라서 그런 책을 볼 사람은 원서로 읽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번역을 해도 읽지 않을 사람들이지요.”
한 친구가 들려준 분석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에는 원서로 읽기에는 실력이 부치지만 관심은 살아 있는 문화적 중산층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 된다. 다행이다.
“현재 타이완에는 상하 계층 혼혈인구가 28%가 되고 있어요. 농촌의 남자들은 주로 월남·태국·인도네시아·대륙 여자들과 결혼하고, 대도시 여성들은 외국인들과 국제결혼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앞서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중국과의 경제 결합으로 인해 타이완 사회의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중산층이 사라져 버렸다. 이민, 중국 진출 등으로 중산층이 타이완을 대거 이탈하면서 사회 구조가 급격하게 변한 탓이었다.
“‘독립’은 정치적 구호일 뿐”
타이완에 약 13일간 머무르는 동안 네 개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타이완 전체 상황을 정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았다. 일단 정치인은 배제했다. 장사꾼을 찾기로 했다.
“현재 타이완 경제 구조의 90% 이상은 중국과 맞물려 있어요. 독립이니 뭐니 하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요, 그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절대 이름을 쓰지 않기로 약속하고 한 실업가를 만났다. 비즈니스로, 강연으로 타이완 사회에서 한참 활약 중인 40대의 중견 실업가였다. 표준어인 푸퉁화, 타이완 방언, 영어를 모두 편안하게 사용하는 인물이었다. 미국·타이완·홍콩·중국 어디나 제 집 안마당 같은 사람이었다. 하긴 대부분 다 그런 사람들이지만.
“이름을 올리면 인터뷰를 할 수 없소.” 그는 못을 박았다. 한국에서 나오는 잡지라는 데도 이름은 절대 안 된단다.
“현재 타이완 거리에서 민진당 욕했다가는 맞아 죽어요. 국민당 사람들은 그저 묵묵한 스타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만큼 적극적이고 격렬해요. 총격 사건까지 만들면서 판을 뒤집은 걸 봐요.”
그는 총격 사건이 민진당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4년 3월 19일, 선거 바로 전날 일어난 천수이볜 총통후보 저격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들어 ‘3·19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조사를 진행 중이지만 국민당은 그걸 쇼로 보고 있다. 필자도 관심이 있어 TV·신문·잡지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 내용을 좀 알아보았다. 정치적인 사건이 늘 그렇듯이 돌발적인 우연들이 사건 안에 잘 배치돼 있었다. 물론 증거는 없었다. 훗날 알게 되겠지.
“선거 막판 여론조사로는 국민당이 완전히 이긴 판이었어요. 그런데 19일에 총격 사건이 터졌고, 밤중까지 공식 브리핑이 없었어요. 시중에는 국민당이 저격을 했다는 루머가 파다했고. 그러던 중, 거의 자정 무렵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지요. 그런데 묘한 건 그 사태로 비상근무를 해야 하는 특수 요원들은 투표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숫자가 10만 명이 넘어요.”
그의 이야기는 10만 이상의 숫자가 투표에 참가했다면 결과가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긴 표차가 불과 2만 표에 불과하니. 게다가 현재 또 재검표 요구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니 한동안은 어수선할 수 밖에 없겠다.
타이완의 ‘도전’과 대한민국
국민당 입장에서 3·19 총격 사건은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도 직접 한 자작극’이다. 해서 국민당은 미국 조야에 ‘총알 게이트’라는 책을 만들어 뿌리고 있다. 이를 두고 민진당에서는 ‘늘 그랬듯이 양놈에게 고자질이나 해대는 국민당’이라며 또다시 타이완 독립 정서에 불을 지르고 있다. 타이완 독립 정서는 일반적으로 가오슝 등 타이완 남부 지역과 학력이 낮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타이완 독립을 위해 총까지 맞으며 고군분투하는 천총통의 모습에 남부 지역 사람들은 높은 투표율로 격려했다.
“나는 하카 사람(객가 사람-객가란 중국어 客家를 한자 발음으로 읽은 것이고, 하카란 객가 사람들 스스로의 방언을 나타낸 표기다. 흔히 영어권에서는 Haka로, 한자권에서는 객가로 표기한다)이오. 하지만 타이완에서 태어나 타이완의 물을 마시며 자랐고 타이완의 쌀을 먹고 컸소. 또 중요한 건 국민당의 젖을 먹고 살아왔다는 거요. 따라서 타이완과 국민당의 존재는 하나의 실체요. 잘라서 이해할 수가 없소.”
“그럼 국민당을 지지하시나요?”
“장사꾼은 그런 것 없소. 나는 어느 쪽도 아니오. 중요한 건 편안하게 살게 해주는 것일 뿐이오.”
“…….”
“정치는 게임 아니오? 상대가 있는. 밀고 당기면서 공간을 만들고 거기서 이익을 찾아내고 그래야지. 괜한 국민들 녹색과 남색으로 구별해 놓고 싸움이나 시키고(앞서 말했듯이 민진당은 녹색을 자기 색깔로, 국민당은 남색을 자기 색깔로 정해 놓아 흔히 녹색파, 남색파로 불린다. 멀리서 보면 그게 그거지만).”
“보면 미국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는 듯한데.”
“물론 미국을 끌어들여 국내 정치에도 이용하고, 중국과의 실랑이에도 사용하면서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고 있지. 미국을 갖고 노는 거지, 사실은.”
글쎄, 미국을 정말 갖고 노는 나라가 있을까? 미국도 그걸 다 알면서 역이용하는 거겠지.
“타이완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뭐 희망이 있겠소? 이건 나라도 아니에요. 그저 자식들 돈 버는 능력이나 만들어 주고 후딱 이 땅 떠야지.”
“당신 정도의 수준을 갖춘 타이완 사람들의 생각이 다 비슷합니까?“
“다음에 내 우리 클럽 사람들 소개시켜 줄 테니 직접 들어보시오.”
그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인 이야기라 글로 쓰기는 좀 그렇다. 하지만 타이완이 위기에 직면한 것은 사실로 느껴졌다.
전통 산업 기반의 중국 이전으로 인한 중장년 실업 사태, IT 등 첨단 산업기술의 중국으로의 유출, 그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과 격심한 빈부격차, 타이완 독립이라는 전쟁을 판돈으로 한 정치적 올인, 그로 인한 민심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 그리고 떠나가는 지식층과 부유층.
타이완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자료를 찾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섬뜩섬뜩 하곤 했다.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중국 경제학을 하는 교수를 한 분 만나 타이완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거 남 이야기 아니에요. 타이완은 우리와 산업구조가 사실 똑 같아요. 대기업 몇 개 다르지. 한국도 조만간에 그런 상황이 와요. 아니 벌써 오고 있잖아.”
무모한 것이겠지만 천수이볜 총통이 오죽하면 그런 구호를 내걸었을까? 역사 속에서 중국 근처에 있던 나라치고 수난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독립에 성공한 나라 또한 없었다. 결국엔 모두가 함몰하고 말았다. 천수이볜은 그 점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무모한 도전을 결심한 거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도전은 비로소 도전이 되고 있는 것이고….
그 도전이 지금 한반도에도 다가오고 있다.
첫댓글 공 박사, 이런것은 자료실과 대학원 홈페이지에도 올릴만하오...
우리의 현실을 미뤄 볼 수 있는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