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학교 교육과 광덕 큰스님
松山茂根|전 중앙승가대학 학장
1.
1969년부터 1971년까지 출가 본사인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선찰대본산 범어사 교무국장의 소임으로 있을 때 일이었다.
당시 주지로는 모든 분야에 탁월하셨던 능가 큰스님이셨고, 총무국장은 벽파스님, 재무는 선용스님께서 맡고 계셨다. 당시 광덕 사형님께서는 결재권 밖의 한주(閒主로) 계셨으나 사중에 큰일이 생기면 의당 앞장섰다. 당시 범어사에는 원로산중회의가 있었는데, 중요 사안은 주지스님을 비롯한 소임자들이 산중 대덕스님들을 모시고 고견을 들어서 결정하는 원융 결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물론 당시 소임자들은 이 산중원로회의 결정사항들을 최우선적으로, 일사불란하게 받들었다.
그때 광덕 큰스님께서는 이 원로회의에 참석해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명철한 의견과 견해를 발표하셨다. 그리고 대중스님들의 수행에 조그마한 불편이라도 있을까 항상 주의를 기울이셨고, 하루가 다르게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변화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대비하기 위하여 출가 수행자(스님)들의 자질향상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2.
1970년 겨울, 찬바람이 산중을 휘몰아치던 어느 날, 저녁예불이 끝나고 사형님께서 나를 당신 방으로 부르셨다.
“아우님, 대중 시봉하시느라 수고가 많겠구먼. 강원에는 강주스님을 비롯해 학인 스님들이 수학하는 데 불편은 없던가요?”
“예, 불편한 것이야 어디 없겠습니까만은 강주스님의 덕화와 학인 스님들의 양해가 있어 수업은 물론 법당 소임이나 도량 청소며 대중 운력 등에도 전례 없이 협조가 잘 되고 있습니다.”
“다 아우님이 시봉을 잘하시는 덕분이구만.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절에 출가해 있는 사미들이 중학교만 졸업하고 절에 온 사람들이 많아. 지금 사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이다, 수출진흥사업이다, 관광사업이다 해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어. 따라서 사회 수준도 매우 높아지게 되었단 말이지. 그런데 앞으로 지식 수준이 높아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리가 포교를 하려면 우선 스님들의 사회교육 수준도 높아져야 하거든. 그래서 우리 절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들어온 사미들을 내가 이사로 있는 해동고등학교에 보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좋은 생각이긴 하시지만 저 혼자 동의를 한다고 해서 결정될 문제도 아니고, 팔송에서 범어사까지 아직 대중교통이 들어오질 않으니 통학문제도 난제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자네 혼자 동의해서 될 일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주지스님과 다른 삼직 스님들께도 동의를 얻도록 노력하기로 하고, 교통문제는 차를 하나 사서 팔송까지 운행하면 거기서는 대중교통이 있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야.”
이렇게 대화를 끝내고 나는 큰스님의 방을 물러 나왔다.
아마 내가 교육담당의 소임을 맡고 있기 때문에 먼저 나에게 말씀하신 것 같았다. 나는 사형님의 말씀을 토대로 안건을 만들어 종무회의에 상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지스님을 비롯하여 삼직 스님 거의가 난색을 표했고 또 몇몇 분들의 반대는 매우 강도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학교를 보내려면 학교 갈 때는 교복을 입어야 하고 절에 돌아오면 승복을 입어야 하니 우선 이런 부분이 사내의 다른 대중분위기에 안맞고, 또 주지스님도 승용차가 없는 터에 일천(日淺)한 사미들의 학교통학 때문에 재정이 어려운 사찰에서 차를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기보다는 매우 곤란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차를 산다고 해도 비포장 도로라 비만 조금 오면 길이 골이 깊게 파여 그때그때 길 닦는 일도 어려운 상활이다. 그리고 운전기사도 있어야 하고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우스운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 절집 분위기는 어린 사미들에게 사회교육 시켜 놓으면 속퇴한다는 우려 때문에 사미일수록 가능한 절에서만 가르치고 싶어하는 생각들이 많았을 때였다. 이런 인식들이 절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으니 더더욱 광덕 큰스님의 제안은 성사되기 어려웠다.
나는 이러한 여러 상황을 사형님께 그대로 보고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형님께서는 거기서 굴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주지스님은 물론 교육시키자는 안이 이미 사중 종무회의에서 부결되었기에 나는 다시 안을 작성하여 회의에 상정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개별적으로는 모두 사형님께 동의를 했으면서도 공식회의에 정식으로 안건이 상정되자 참석자들은 동의도 반대도 없이 묵묵부답으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침묵만 지킨 채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때 주무국장인 나는 다시한번 동의를 유도하고 일일이 거명하여 사전에 사형님과 약속하고 동의한 내용을 발언해서 가까스로 완전 동의도 아닌 전체적인 수긍이라고 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입장을 얻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학교교육에 대한 소임자들의 묵시적 동의를 통해 사형님의 교육계획이 앞으로 한 발 내딛게 되었다. 그 결과 우선 중학교를 졸업하고 절에 들어온 적령기의 사미들과 또는 나이가 좀 있어도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미들을 선발했다. 물론 입학 절차나 여러 가지 준비는 사형님께서 몸소 뛰어서 처리했다. 그리고 조그마한 화물차를 하나 사서 뒷부분을 개조하여 어린 사미(학생스님)들을 팔송까지 태워다 주고 저녁이면 태워오는 새로운 교육불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려운 사중 형편을 생각하여 사형님께서는 해동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설득하여 사미들 전원에게 수업료를 면제받게 했다. 그때 범어사에서 다닌 학생 수는 5~6명으로 기억한다.
그 후 스님께서는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에 문화대학원 원장으로 있는 도업스님께 부탁하여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그런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결과 현재 중앙승가대학 교수이며 총장실무대행까지 지낸 정인스님 등, 종단의 인재들이 길러지게 되었다. 이제 그때 공부한 여러 분들이 종단 발전을 위해 각기 제자리에서 열심히 정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사형님의 남다른 선견지명과 인간애를 다시 보게 된다.
그 당시 범어사에서 실시한 교육사업은 그때의 불교집안 정서로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물론 경제적인 여러 곤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학교 교육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장애가 훨씬 컸다고 생각한다. 범어사의 인재양성 불사는 그때의 제반 사항으로 봐서 광덕 큰스님이 아니었다면 이루어낼 수 없는 크나큰 교육불사였고 인식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작지만 그때 적령기의 사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은 일[佛事]을 통해 인식(대중의 생각)을 바꾸는 범어사의 특별 수행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3.
그 후 스님께서는 1971년에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취임하셨다. 처음 총무원장은 청담 큰스님이셨다. 청담 큰스님의 갑작스러운 열반으로 석주 큰스님께서 총무원장의 소임을 맡으셨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교육에 대한 주무부장도 아니면서 또 하나의 큰 교육불사를 시작하셨으니, 그것이 종립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승가학과 설치였다.
그 당시 불교대학에는 인도철학과가 있었으니 불교를 전적으로 공부하기에는 과 특성상 어려웠고, 또 불교미술학과에서는 불교미술 외에는 불교학 개론을 배우는 정도였으며, 유일하게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학과는 단지 불교학과 한 곳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있어서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입학이 불가능하였다. 대부분의 학생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일반 학생이었고 스님들은 고작 한두 명 입학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한두 해 전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출가한 사미승들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출가한 지 5~6년만 되어도 학교 들어가기가 어려운 지경이어서 종단적인 폭넓은 교육을 시키기에는 매우 곤란한 입장이었다.
통합종단 출범의 삼대불사는 역경. 포교. 교육이었으나 이 중 교육불사의 길이 막혀버리거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교육불사의 길을 만들기 위해 총무원장 석주 큰스님과 총무부장이신 광덕 사형님, 당시 동국대학교 총장 서돈각 박사, 재단이사장과 이사 스님들이 안을 낸 것이 출가자(스님)들만 다닐 수 있는 학과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승가학과이고 오늘날 선학과의 전신인 것이다.
이 승가학과에는 예비고사를 치른 정규학생 20명과, 그 외에도 청강생 제도를 두어 승가학과 1기 입학 때는 무려 33명의 스님학생들이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 교육불사를 광덕 큰스님께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확신하는 것은, 그때 나도 승가학과 1기에 지원하였고 1차로 종비생 선발시험을 총무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면접도 총무원에서 하였는데 면접하는 장소에 총무원장 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총무부장이신 광덕 사형님께서 면접을 직접 맡았다.
총무원에서 종비생 선발 시험 결과에 따라 학교(동국대)에 추천만 하면 다닐 수 있는 제도였다. 이런 모든 일을 사형님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내가 직접 볼 수 있었고, 또 그때의 응시 당사자였기 때문에 승가학과 설립은 광덕 사형님의 역할이 단연 컸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4.
그 후 스님께서는 총무원 소임을 그만 두시고 불광사 건립과 포교에 열중하셨고, 또한 거기 불광사에서도 불교계의 모범적인 유치원을 개설하여 잘 운영하셨다. 그리고 학생(초.중.고.대학)들이 독립된 법회설립과 여러 가지 이름의 장학금 지급에도 부지런하셨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역시 광덕 사형님께서는 교육불사에 무척 헌신적이고 정열적으로 임하셨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직 교육을 통해서 종단의 앞날을 내다보고 또 우리 불교계의 미래를 열어나갔던 점을 생각하면 사형님께서는 명실공히 통합종단 이후 교육불사의 선구자이시면 또한 오늘날 종단 교육제도의 초석을 놓은 분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이 밖에도 사형님의 높은 법력은 나의 사량으로는 미처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이다. 사형님의 인간적인 자상하심이나 타인에 대한 깊은 배려, 근면.절약정신 같은 뛰어난 덕성은 다른 어른들이 집필할 것으로 알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범어사나 종단교육에 대한 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못난 사제의 도리를 조금 하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빙산일각의 것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속환 사바하소서.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2001년 인천 보각선원에서
무근 분향 합장
첫댓글 미래를 보시는 밝은 안목과 교육정책에 부단히 애를 많이 쓰신 큰스님의 행장에서 나름 한생각이 이는것은 어둠을 벗어나는데도 학이 있어야 이해가 빠를거라 그리도 애쓰신듯 해서 마음이 쨘해져 옵니다..예비고사 단어가 대학을 형편상 포기하게 만든 그때를 더올려주네요..공부는 길이 있을땐 해야합니다..참으로 크고 크신 우리 큰스님,마하반야바라밀.._()()()_
범어사에서의 교육불사를 그 당시 이해해 주시는 스님들도 많이 계시지도 않은데 이끌어 가시려면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만 먼 미래를 보고 배움의 길을 열어 주시고 배움의 중요성을 보신 큰스님의 혜안이 오늘날의 조계종을 이끌 수 있는 힘이 되었네요. 밝은 지혜로 나아가는 하루 되길~~~~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스님의 법력이 높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교육은 백년을 내다보는 불사라고 햇는데 이제 그 꽃을 피울 때가 되었나 봅니다. 광덕의 꽃이 활짝 피어 열매를 맺기를 ...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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