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수행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는
올바른 이해(정견/Right Understanding)라는 것이 있다.
깨어있기 수행의 목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도
올바른 이해 중의 하나이다.
내가 깨어있기 수행에 입문한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이해(사견/Wrong Understanding)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수행을 열심히 하면 더 이상 고통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몸을 입고 이생을 사는 이상 고통을 없앨 길을 없다.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만 받는 것은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다 잡아 실망을 극복했다.
세 번째 진리가 바로 이것에 대한 것이다.
해탈이 가능하며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그것도 이생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나는 생각이지 않은가!
몇 년 동안 나는 근처 천주교 대학에서 동양종교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주로 십대로서 근처 천주교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대부분 전쟁이 없는 시대에 독실한 부모 밑에서
가족과 함께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온 학생들이었다.
내가 불교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고통 받는다는 개념을 설명했을 때
이들은 모두 의아해 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고통이라는 개념을 따로 설명해야만 했다.
고통 받는다는 것과 그 끝냄이 가능하다는 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핵심이다.
이에 관련해서 붓다가 직접 어느 제자에게 한 말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는 한 제자가 붓다에게 따졌다고 한다.
우주론이나 철학 같은 것은 왜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불평이었다.
그러자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 가지만을 가르치러 왔다. 고통과 고통의 종식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그 어떤 것이 있어 기쁨을 준다 해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우리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원하는 때가 너무 많다'는 논리를 펼치자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다.
대게가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불교에는 기쁨이 없어 보인다는 의견을 내놓으며 물었다.
“불교도들도 생일파티를 하나요?”
나는 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고통 받는 상황을 찾아내느라 고심했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여러분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나요?”
그러자 학생들은 이렇게 대꾸했다.
“고통 받는 게 그런 거라면 알 것 같아요!”
나는 이 젊은이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좀 서글펐다.
내가 사악한 서양 마녀처럼 보이지 않기만을 바랬다.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에 첫 번째 진리와 두 번째 진리는 얼른 지나치고
서둘러 세 번째 진리를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행복하게 사는 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열정적이고 깨어 있으며 다감하고 맡은 일에 열중하며
사물에 대한 관심을 쏟으면서도 허우적거리지 않는
넉넉한 마음을 키우는 것도 실제로 가능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정도가 아니다.
신나는 소식이다.
-<실비아 부어스타인/이론과 실천/생각보다 쉽다 중에서...>-
첫댓글 '나는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도 그만 받는 것은 가능하다'....~~ 공부하면 할 수록 불법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 ~ 이것이 붓다의 마음이구나 ! ~~ 라고 알게되고... 고통에 소멸과 더 나아가 인정,수용, 자비로 갈수 있다니...수행하면 이생에서도 얼마든 행복하게 살수 있다죠..신나는소식입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 정도가 아니다. 신나는 소식이다" ^^ 와. 마지막 구절이 정말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