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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사무소에 11월 24일 열리는 용인문화원주최 "반계 유형원실학사상 학술대회"에서 제1주제로 발표할 반계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이라는 원고 입니다. 많은 즐정을 부탁드립니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정신과 그 교훈
정구복 (반계실학사상연구소 소장)
1, 머리말
오늘 磻溪 柳馨遠(1622~1673)이 영면하고 있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서 실학을 일으킨 그 분의 정신을 처음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즉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던가에 대한 조명이 아니라 그의 저술에 관통하는 정신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이를 현재의 우리들의 삶에 어떤 점을 계승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실학의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2년 전 반계숭모회의 회원 여러분을 만났을 때부터 반계의 어떤 점을 우리는 계승하여야할 것인가가 앞으로 제가 연구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해 왔다. 그의 정신을 계승할 때 우리는 수백년을 건너 뛰어 넘어 그 제자가 될 수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 차이가 너무나 크므로 그의 모든 것을 계승할 수는 없다. 본고에서는 우리가 계승하여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책은 그의 연보나 행장 족보 등에는 70여 종의 책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전하고 있는 책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가 35세 때에 쓴 동국여지지라는 인문지리서(9권)과 31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20년 만에 완성한 반계수록 26권이다. 그의 문집은 현전하지 않는다(주1). 그의 학문성향을 경세치용학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경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세학은 성호와 다산에 의하여 계승 발전하였다. 그의 제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과 사상을 ‘성호학’이라고 칭하여 그가 살았고 묘소가 있는 안산에서 성호학회가 조직되고 성호학회지가 45권이 나온 바 있다. 또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경우 ‘다산학’이라는 명칭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고 있고 다산학백과사전이란 엄청난 편찬물을 내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학자마다의 학문을 학파로 칭하는 성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학을 이처럼 쪼갤 경우 너무나 분파적일 것이라는 형식논리만이 아니라 적어도 학파라고 하면 인간적 계승관계보다는 학문방법의 차이가 엄정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이고 그를 현창하려는 점에서 지역과 문중이 결합한 학문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오늘 토론회에서 심도 있게 토론해주기 바란다.
2. 반계 유형원은 어떤 사람인가?
2.1 시대배경
조선시대는 많은 국민이 궁핍하여 생활을 유지함에 두 가지의 큰 어려움을 당하였다, 하나는 자연재해로 가뭄이 장기화되거나 전염병이 유행함으로 당하는 재난이었다. 흉년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식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식생활을 해결함이 최우선 순위에 들었다. 농업기술이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으나 장기의 가뭄을 견뎌낼 방도를 찾지 못했다. 다른 하나의 어려움은 법제의 잘못으로 인하여 당하는 것이었다. 개인이 내야할 군포를 못 내고 도망을 치면 이를 친척과 이웃사람에게 부과하여 마을 전체의 사람이 도망을 가는 사례가 생기는가 하면, 향리와 서리에게는 일정한 보수가 책정되지 않아 조세행정 등에 엄청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되었다. 일반 백성은 교육과 관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노비신분은 혈연에 의하여 대대로 신분이 세습되는 신분제 사회였다. 이 시대를 우리가 중세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계수록은 후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을 제시한 법제적 개혁안이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전국의 토지의 3분의 2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재정이 대단히 어려웠으며 국민의 생활의 궁핍은 참혹했다. 더구나 대륙에서는 명청이 교체되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조선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실학은 대체로 이처럼 국내문제와 국제문제가 엉킨 상황에서 일어난 새로운 학문이었다.
2.2 그의 일생
유형원은 전 국토와 전 국민이 미증유의 심각한 전쟁피해를 당한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후 20여년이 지난 162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에는 청나라 10만 기마병이 순식간에 서울 점령하다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40여일간 항쟁하였으나 버틸 수 없어 마침내 왕이 삼전도에 가서 항복한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어서 동양문화의 종주국이었고,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구원해준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래서는 그는 명나라 중흥에 도움이 될 만한 무사 200명을 훈련시키고 명나라를 중흥시킬 방책을 글로 쓴 바 있다.
국내적으로는 만신창이가 된 전후 사회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와 허약한 나라의 국가체제를 어떻게 강화 안정화할 것인가 즉 국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가 그의 학문적 주제였다. 이를 당시 경세학(經世學)이라고 했다.
그의 아버지 유흠(1596~1623)은 문과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인조 초에 모든 관리가 탐내는 예문관 검열이라는 사관직에 임용되고 이어서 세자 시강원 설서라는 중직을 맡아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북인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광해군 복위운동을 꾀한다고 하는 무고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자살했으니 반계의 나이 두 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5살 때에 외숙인 태호 이원진(1594~1665)과 고모부 동명 김세렴(1593~1646)에게서 공부를 했다. 두 분은 모두 당시 학문적으로 유명한 학자였고, 고위 관직을 지냈다. 이원진은 탐라부사를 지냈고, 김세렴은 일본통신사, 함경도 관찰사, 이조판서를 지냈다. 두 분이 유형원에게 글을 가르쳐주면 즉석에서 외우고 이해함이 깊어 앞으로 큰 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10살 때 쯤 유가의 4서3경, 중국의 역사서, 제자백가의 학문을 두루 읽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한문 습득 능력을 갖추었다. 그의 학문의 본령은 유학이었다.
그가 현실구제책을 학문적으로 연구해야겠다고 뜻을 세운 것은 그의 나이 30세 때가 아니라 15세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부안 우반동에 내려가 부안김씨에게 개간한 농장을 팔 때 그는 장손으로서 증인란에 서명하고 있다(주2). 이 때 그는 매매문기의 초고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다(주3). 부안의 왕래는 그가 관료로 나가 치국하는 길을 포기하고 학문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부안에 내려갈 때에 그 넓은 만경 평야, 김제평야를 보면서 그 넒은 땅을 몇 사람이 차지하여 일반백성은 땅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아침 일찍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가서 조상님께 인사하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책을 읽고 좋은 내용은 메모해두고 한 밤중에도 좋은 생각이 나면 벌떡 일어나 기록해 두었다. 우리나라 법제를 새롭게 구상한 혁명적 대개혁안인 반계수록을 30세에 저술하기 시작하여 20년간 다듬고 수정하여 불후의 명저를 썼다. 그는 31세 때에 일찍이 가보았던 부안으로 내려가 연구에 전념했다. 그가 내려가게 된 배경에는 23세 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2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으며, 30세 때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3년 상을 치렀다. 이에 그의 주위에는 어른이 모두 돌아가셔 부인과 함께 32살 때에 부안으로 내려갔다. 그가 이거한 곳은 부안현 입석면 하리 우반동이었다. 이에 자신의 호를 그 마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내 이름을 따서 반계(磻溪)라 칭하였다(주4).
그가 부안으로 이사간 것은 관료로 나가 치국하는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안정된 국민의 생활과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제도의 연구에 전념하려는 뜻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전국의 지리를 정확이 알기 위하여 서울에서 부안으로 오르내릴 때에도 다른 길을 택하였고, 일생동안 전국의 각처를 여행하면서 지리적 지식을 넓혔다. 그는 고대의 중국문헌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사회경제적인 측면의 자료를 열심히 탐독하는 학자였고, 현실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방책을 연구함에 일생의 노력을 바쳤다.
그는 부모, 조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서 그의 좌우명 중 하나가 부모를 모실 때에 얼굴빛을 부드럽게 할 것으로 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약을 지으려 한의사를 찾아 갔을 때 그의 얼굴 모습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평소 거만했던 한의사가 공손하게 대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부모가 돌아가신 후 맛있는 음식을 얻게 되면 항상 부모님, 조부모님을 생각하곤 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그는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모르는 사람에 대하여도 따뜻한 배려를 했다. 34세 때 서울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충남 아산 신창에서 사람과 말을 가득 태운 배가 전복하였음을 보았다. 이에 그는 상류에서 배 두 척을 끌어내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게 하였는데 5-6인은 이미 죽었고, 가슴에 온기가 있는 사람을 자기들의 옷을 벗어 입히고, 죽을 끓여 먹이는 응급조처를 하여 다음날 살아난 사람이 9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흉년이 들면 곡식을 풀어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원금과 이자를 받지 않았으며, 자기 집 아이들로 하여금 나이 많은 노비에게 공손하게 대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웃에 대한 이런 따뜻한 마음은 그가 부안에서 죽어 가매장했다가 용인의 아버지 묘소 아래로 이장을 하는 날 사슴 100마리가 슬피 울었다는 일화가 우회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그는 52세에 죽을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었고, 자기가 한 말을 반드시 지켰으며, 좋은 일을 찾아서 행했다. 그의 좌우명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공부하기, 의관을 정제하고 높은 곳을 똑바로 바라보기, 부모 섬김에 부드러운 얼굴 갖기, 부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기 등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묘에 가서 선조들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고 나서 하루 종일 책을 읽었고, 하루가 가면 오늘도 허송했구나 탄식할 정도로 시간을 아껴 썼다.
자신의 묘소는 부모님의 묘소 아래인 용인의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정배산에 모셔졌고, 영조 29년(1753년) 그에게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세자시강원 진선이라는 직을 추증하고 이해 묘비는 당해 지방관인 죽산부사와 인근 선비들이 돈을 모아 마련하였고 비문은 일찍이 왕명에 의해 그의 전기를 지은 홍계희(1703~1771)가 지었다(주5).
또한 그가 살았던 부안지방의 선비들이 생전에 그를 큰 스승이라고 칭했고, 사후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숭모하여 동림서원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2.3 그의 저술 두 가지
그는 35세 때에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지를 종합한 동국여지지 9권을 집필하였다. 이는 전국의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이 성종 대에 편찬되고 중종 대에 보완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간행되었으나 이 책이 지방의 현실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은 필사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에 원본이 전하고 있고 현재는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지방사 연구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책이다. 이 지리책에는 서술원칙을 기록한 상세한 범례가 실려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가 우리나라 국토와 전국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국토를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의 국토에 대한 깊은 애정은 각 군현의 지리적 사정과 역사를 함께 파악하게 하였다(주5). 후일 동국여지지를 널리 알린 전라도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1712~1781)이 우리나라 산맥과 강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산수고를 집필하고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문화를 깊이 연구함에 큰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동국여지지의 각 군현 조에는 그 군현의 토지의 총면적을 기록하는 란을 공란으로 두었다. 당시 토지 단위는 수확량 기준의 조세부과 기준인 결부제(주6)에서 반계수록에서 반드시 개혁되어야한다고 강조한 절대면적 단위인 경무법의 실현을 기대하고 후인이 써 넣기를 바랬다.
그가 31세에 쓰기 시작하여 49세에 완성한 반계수록은 26권이다. 사회개혁안이 13권이고 이에 관한 이론적 근거로 들은 고설(攷說)이 13권이다. 이 개혁안은 경제, 행정, 교육, 인선, 재정, 군사, 정부조직 등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을 모두 마련하였다.
이 개혁안은 고금의 지혜와 제도를 모두 관통하고, 토지 분급의 대상을 전국의 전 국민으로 한 점에서 가위 혁명적 개혁안이었다. 기득권층의 토지소유, 인재육성, 관료 선발제도 등을 과감히 혁파하여 모든 국민이 각자 자기의 노력과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여 그 결실을 먹을 수 있는 즉 “만인무불득기소(萬人無不得其所)하는 사회를 이루려는 개혁안이었다.
그 핵심은 당시 유일한 소득원이었던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이에 대한 세금과 군역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하며 군사제도를 운영하자는 공전제도(公田制度)였다. 또한 한 번의 시험으로 인재를 발탁해 관료로 충원하던 과거 제도를 개혁하여 교육과 인선제도를 일치시켜 초급학교, 중등학교, 대학에서 교육되고 상급학교로 추천된 사람을 관료로 선발해 쓰자는 공거제도(貢擧制度)였다.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적인 그의 개혁안이었다.
3. 반계의 실학정신
3,1 전 국토와 전 국민을 사랑함
그는 전국을 여러 차례 여행하며 지리를 익혔고 또한 금강산 등 유명한 산을 유람했다. 이는 자연 전국의 국토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가졌다. 각 군현이 너무 작게 쪼개지고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군현의 경계를 넘어 설정된 군현도 있었다. 이를 그는 군현제 개혁안으로 썼고, 전국의 각 군현의 인문지리적 현상과 문화를 동국여지지에 담았다. 이에는 당시 사림들이 새롭게 편찬한 지방읍지의 내용을 많이 참고하여 수록하였다.
또한 반계수록의 전제 조에서 토지의 분급을 왕실과 관료, 서리 향리, 일반 농민, 상공업자, 노비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종래 고려조의 전시과나 조선조의 과전법이 관료와 왕실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의 관심이 전 국민의 생활안정을 배려한 것이다. 이는 전 국민을 사랑한 결과라고 해석해야할 것이다.
3.2 천리의 구현
그는 모든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보는 성리학의 신봉자였다. 하늘의 이치는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려주고 악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만물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평무사는 땅의 이치도 마찬가지이고, 인간의 성품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하늘은 모든 사람을 덮어주고, 땅은 아무리 무거운 물건도 모두 자신의 몸 위에 실어주고 있다. 하늘은 해와 달이 매일 같이 정기적으로 운행함을 살피고 네 계절의 순행과 기후를 변화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이치는 거짓과 속임이 없다고 했다. 인간도 천리 즉 그러한 어김없는 자연의 질서, 그 원리를 타고 나서 불쌍한 사람을 돌보며, 남에게 덕을 베풀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예를 지킬 줄 아는 착한 성품을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졌다고 믿었다. 인간에게는 사욕(私慾) 개인적 욕심이 있어 불완전하다. 사욕을 억제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당시 일반 사람들의 삶과 국가의 운영은 그처럼 착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굶어 죽어갔으며, 국가의 각종 세금과 부역의 징수에 시달리다 못해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났으며, 많은 사람이 출생하면서부터 교육과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는 이런 현실적 문제는 천리가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현실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간의 통치제도의 모순점을 개혁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이는 후대의 법제가 지배층의 사욕으로 제정되어 이를 근본부터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양반들의 수족이었고, 경제적 부의 재산이었던 노비의 신분세습제를 천하의 악법이라고 했다. 당시 조선 사회의 기본법인 경국대전도 폐법으로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폐법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왔다고 했다. 이런 현실적 부조리는 천리에 어긋난 것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천리가 구현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3 본말(本末)-체용(體用)론
현실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사건 하나하나를 해결하는 방식보다 근본적인 것을 찾아서 개혁하면 작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면 그 말단의 문제는 자연히 쉽게 해결된다는 논리이다. 이는 당시의 철학인 성리학에서 기본원리인 본체와 그를 작용으로 생긴 현상을 ‘용(用)’이라고 본 것과 일치한다. 우주와 인간의 본체는 ‘이(理)’와 ‘기(氣)’이며, ‘용’은 모든 현상, 개별적 사물 등으로 파악했다. 모든 존재는 기로 이루어졌으나 그를 존재하게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을 ‘이(理)’라고 했다.
또한 당시 부를 창출하는 근본은 토지에 있다고 보았다. 농업이 천하의 대본이라고 하듯이 토지를 경작할 수 권한을 모든 국민에게 고루 고루 나누어주고 이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여 그 세금으로 국가의 예산을 집행하며, 그 토지에 군역차출을 매기면 군인의 일정한 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토지를 실제 면적단위로 파악하는 경무법으로의 개혁을 강조했다. 근본에서부터 캐되 끝까지 수미일관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반계수록은 시종과 수미가 일관된 개혁안이라는 점에서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4, 강목(綱目)론
그물을 당길 때 사용하는 벼리의 큰 줄을 강이라고 하고 그물의 눈을 목이라고 한다, 여기서 강목은 그의 개혁안에서 조목 조목 상세히 규정한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는 비유하기를 천평과 같은 저울이 그 눈금이 정확히 매겨지지 않으면 저울 구실을 할 수 없고, 자가 눈금이 정확하지 않으면 자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선비들은 지방 수령이나 행정관으로서 직책을 맡으면 그 구체적 내용을 모르고 이를 향리나 서리에게 맡겨버림으로써 행정이 문란해짐을 들고 있다. 법이나 개혁안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원리만 선언적으로 강조하면 이는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수록에는 구체적인 조항을 세밀하게 설정하였다. 이는 당시 선비들이 대체만을 논하고 세세한 규정을 등한시하며 오직 음풍영월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3.4. 시공(時空) 초월론
그는 왕도(王道)와 정치의 근본은 고금에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백성을 위한 공평무사의 정치는 상고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유가에서 흔히 말하는 선왕의 정치, 요순의 정치를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현실개혁론을 주장하면서 그의 원리적 고찰은 역사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다, 옛 것에서 많은 지혜와 정보를 얻었다. 그가 역사의 시간을 초월한 것은 기본 원리를 논한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당시 성년 남자 1인에게 40여두락(1경)의 토지 경작권을 준다고 할 때 전국의 인구수, 전국의 토지면적의 총량, 그리고 당시 한 가정의 가족이 꾸려가야 할 소득량, 그리고 한 사람이 경작 가능한 토지면적 등 다양한 현실적 파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는 원리는 중국의 상고 주대의 정전법에서 찾아낸 것이다. 또한 공간적으로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구분을 넘어서 이론을 이용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전국의 각도별 파악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정보는 동서양을 구분할 필요가 없으며 세계적인 모든 정보를 활용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자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4. 실학정신을 계승하는 길
백암면은 용인시 처인구로 아직 개발의 물결이 닥치지 않은 농촌지역이고 이 지역의 주산업은 농업이다. 백암면은 한국 농촌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문제점을 함께 모두 가지고 있다. 용인시는 현재 100만명이 넘는 거점도시가 되었다. 용인시의 수지구와 기흥구는 산업사회의 여러 현상이 밀려와 전통마을은 거의 사라지고 난개발의 도시가 되었으며, 원주민은 밀려나거나 그 발언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처인구는 용인시의 80%의 면적을 가지고 있으나 인구는 24만명으로 세 개의 구에서 아직 파괴되지 않은 지역이다. 오늘날 농촌은 고령화사회로 접어들었고 연영별 인구에서 백암면은 유아 및 청소년이 매년 급감하고 있고, 농촌에 살면 결혼이 어려워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고 있는 현상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반계가 오늘의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직접 가르쳐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백암면 사람들이 깨어날 수 있는 정신력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반계는 生居扶安하고 死居龍仁하여 용인에서 영원히 쉬고 있다. 3년 전에 반계숭모회 이사 34명이 반계의 제자임을 선언한 바 있고 매년 벌초를 해주고 백암의 행사가 있으면 무사히 끝내게 해달라고 묘소에 가서 고유제를 지내며 백암의 발전의 길을 찾고 있다. 반계가 일생동안 전체 국민의 생활을 위한 방책연구에 일생을 바친 공로를 이곳 주민들이 높이 사고 있다. 반계의 이런 정신은 백암의 발전을 위해 성실한 농민을 뭉치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 백암을 사랑하고 이 곳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희생적 삶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반계는 백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고장을 사랑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일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백암 사람들에게 주체의식, 주인의식을 가지고 마을을 아름답게 꾸미고, 인정이 넘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 것을 격려해주고 있다.
반계숭모회 사람들은 농업을 6차산업으로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생산과 가공 판매 과정을 합리화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방법과 길은 세계적인 모든 정보를 모아 선택할 것을 반계는 말해주고 있다. 세계의 모범 농촌개발 경험을 우리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반계가 고금회통, 시공을 초월한 연구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협과 축협을 농민이 중심이 되어 농민을 위한 기관으로 만들어 농민의 경제력을 확충하려는 노력도 경주하고 있다. 백암 농민들은 기부를 기꺼히 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부행위는 학교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는 백암의 훌륭한 전통으로 키워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백암면의 농촌에는 어린 아리의 울름소리가 그친지 오래된 듯하다. 소, 돼지의 울음소리만이 아니라 어린이 울음소리가 마을에서 들리도록 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농업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하는 농업은 공무원이나 기계를 다루는 직업보다 더 의의 있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앞으로 이곳 농지에 가장 적절한 농작물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이곳에서 어떤 나무를 길러내야 좋은지 임업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한다. 이런 연구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전문대학을 유치해도 좋을 것이다. 지방의 개혁운동은 이곳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굳이 명문 대학의 학위는 이제 그 가치가 크게 소멸하고 있다. 학교는 단순히 청소년의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평생교육을 위한 농민교육기관이 되어 지역사회 개혁의 중심 기능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의 손자손녀들이 이곳에 와서 살고 싶어 하게 마을에 사사사철 꽃이 피고 시와 노래와 춤이 넘쳐 나오고 울창한 산림을 가꾸어 삼림욕을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정답고 즐거운 ‘희망의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백암에는 한택식물원이라는 엄청난 보고, 대장금 촬영장 등 중요한 박물관이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즉 ‘싸운드 업 뮤직’과 같은 영화가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 진한 인간의 정을 담아 노래와 춤, 시 그림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곳 젊은이들 중 이런 고향을 만들고 발전시켜 우리나라 수천년의 농업 전통을 살리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겠다는 뜻을 세움(立志)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계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지금 세계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백암이 지리적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곳에서 건실한 뜻을 세우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면 이곳에서 반드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백암의 정미천에서 장래 한국을 이끌어갈 용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5. 결론
현재 농촌으로 귀농하는 기업농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농업은 5000년전 단군조선으로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역사에서 중심적 기간산업이었다. 그래서 “농업은 온 天下의 가장 큰 근본이라고 여겨왔다(農者 天下之大本). 한국민의 식새활은 물론 주택과 의복 등 생활품 일체를 생산해냈다. 국가의 중공업화 정책으로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우리는 매년 되풀이 되는 식량 기근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으며, 수십년 전부터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한국의 농촌은 제 자리 걸음을 하였고, 많은 농민이 도시로 나가 도시의 비대화를 낳았다. 농촌에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친지 30여년이 되고 있다. 한국민족이 지구상에서 없어질 위기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 또한 도농간의 경제적 부가 심각한 격차를 낳게 하였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는 것은 문화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현재 농촌을 어떻게 발전시켜야할 것인가는 비단 이곳 백암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다. 전국토의 균형발전이 이 시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가 본주제의 요지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된 이후 여러 차례 헌법 개정이 있었으나 이에는 ‘농업이 기간산업으로 국가에서 육성 보호되어야한다’는 조문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다. 이제 내년의 헌법 개정에는 반드시 이런 규정을 넣는 운동을 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개혁안을 낸 반계정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길이다.
이번 백암에서의 실학에 대한 학술행사는 전국에 퍼지는 농민운동의 횃불을 올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농촌운동이 성공하려면 부녀자, 행정가, 교육가, 전주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 이는 상호간의 신뢰를 가지고 사랑하며 항상 상호의견 교환을 하여 좋은 의견을 따르는 협동심이 필요하다.
백암의 농업혁명, 농촌혁명이 성공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반계가 자신과 가족보다는 국가와 전 국민을 위해 헌신한 정신은 농촌만이 아니라 도시인에게도 귀중한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201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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