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시작될 무렵 봉정암으로 오르는 고행길로 유명한 깔딱고개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만난 산행자는 사진촬영을 해 주던 60대 아저씨 한사람 뿐이었는데, 가파른 아래쪽에서 소근거리는 커플의 해드램프가 깜박인다.
깔딱고개를 힘들게 넘어와 불이 밝혀진 봉정암 초입 종무소로 들어서니 종무원들과 먼저 온 산꾼들이 보인다.
예약을 않고 왔기에 걱정스러워 합장하며 종무실 책상 앞에 있는 50대 중년여인에게 1박을 물으니 1만원을 받으며 '남, 지혜전 1층 2호 2번'이라는 쪽지를 건네며 먼저 공양하란다.
음, 역시 하산하던 산꾼들 전언대로 방이 남아도는가 보군.
배고프고 힘들었던 예전에 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섞여 싱겁고도 밍밍한 미역국에다 김치를 얹어 한그릇의 밥을 훌훌 말아 먹었다.
비록 성에 안차는 허접한 저녁이지만, 이 춥고 밤늦은 시간에 낑낑대며 밥을 지어먹지 않은 것만도 큰 혜택인지라 큰 고마움을 느끼며 베낭을 메고 아랫쪽 건물을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
나에게 배정된 방 안에는 쪼그려 자야만 가능한 줄이 그어진 비좁은 공간이 있었지만 아직은 대여섯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어 무척 따뜻하고 널널하다.
잠을 청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지라 잠시 몸을 녹였다가 발자국 눈길을 걸어 경내 반대편에 있는 화장실을 찾아 밖으로 나섰다. 8부능선에 자리한 외딴 곳인지라 밤공기가 살을 에이듯 춥다. 속 내용은 냄새나는 자연친화적 화장실인지라 한기를 참고 소스라치게 용무를 마친 후 온기로 가득한 종무소로 들어서니 30대 후반(?)의 젊은 스님이 방을 배정한 종무원 보살과 얘기를 나누고 있어 미소를 띠고 다가가 합장했다.
"스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참선하는 늦깎이 학승인지라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하며 몸에 벤듯한 하심(下心)을 표한다.
"우리민족의 종교인 무속까지 용납한 역사를 지닌 한국불교가 굴러온 돌같은 기독교에 사회적 기득권을 뺏긴 이유는 불교의 기본교리도 모르는 보살중심적인 기복신앙이 판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젊은 스님들이 생각하는 세상관을 알고싶어 조심스레 물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이론에 불과한 불교교리를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을 구하는 불자의 참길이 아닙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이치를 모르고 어찌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만 정확히 알아도 부처님을 향한 기복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도 알텐데 말입니다. 미신적인 '오직 예수'식의 예수교처럼 '오직 부처님'하면 정작 근본도 모르고 뜬구름을 잡는 어리석은 중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세인들의 지탄을 받는 웃기는 조계종 총무원의 감투싸움이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고..."
"수행에 전념하는 이판승이 못되고 일하는 사판승이 된 스님들은 세속에서 대리만족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탓할 필요는 없겠지요."
"참 편하시군요. 수행이 깊은 남방불교 스님들은 산중에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 불자들을 계도하며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보더라도 사판승들이 날뛰는 어지러운 한국불교는 분명 개혁되야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고 하늘은 하늘의 뜻이 있듯이, 인연법에 따르는 존재마다 도리가 다르겠지요. 소승은 그저 대오각성하신 선각들처럼 구도와 참선의 길을 갈 뿐입니다..."
차거운 찻물을 데우면 힘차게 끓듯이,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니 열띤 대화는 심도가 깊어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모처럼 기개 넘치는 젊은 스님과 불교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눠본 나는 특별히 모시는 절도 따로 없는 얼뜨기불자이기에 절에 왔으니 예불은 해야되지 않겠냐 여기며 뒷편 계단 위에 있는 법당으로 올라갔다.
아, 그런데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전혀 다른 봉정암 대웅전... 두세명의 불교인이 예불하는, 촛불이 타고 있는 조용하고 썰렁한 불당 안에는 있어야 할 불상이 없었다. 중앙엔 불상 대신 방석이 있을 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오층석탑 방향의 벽이 뻥 뚫린 뒷 배경은 유리로 되어 있어 창밖이 훤히 보이는 특이한 구조다.
양산에 있는 불보사찰 통도사처럼 불상을 모시지 않은 이유는 이곳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을 가진 암자기 때문이라는데... 일찌기 부처님도 열반하실 때 제자들에게 그러셨지 않은가. "(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정진하여 자등명 법등명 하라"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의 참모습이라 내심으로 찬탄하며 이런 멋진 성소를 마련한 봉정암을 위하여 삼보에 해당하는 시주를 한 후 108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 예전에 저질렀던 모든 어리석은 행위를 참회합니다.
2. 현재 행하는 언행들이 선하고 지혜롭기를 발원합니다.
3. 미래의 모든 일들에 부처님의 가피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한 부자가 되고, 칭송받는 성공한 인생이 되고, 선행없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일반적인 기도의 기복(祈福)이란 사실 엄밀히 말해 (미신을 타파한)위대한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이 관여하는 분야가 아니라, 업식이 각각 다른 각각의 '나'가 스스로 이뤄야 할 본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結果)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온 말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
예불을 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누운 나는 피곤한 몸임에도 뜻하지도 않은 상념 속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힘든 내일의 일정 탓에 오늘 밤 잠을 꼭 자둬야 하는 상황에서 잠을 못잔다는 것은 지독한 고통.
자고로 범인은 잡념이 많은 법이다. 잡념을 물리쳐야할 절간에서 잡념 속을 헤메는 것은 내가 범부중생에 불과하다는 증표!
언듯 적막한 산상에 새벽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한없이 들리자 잡념에 빠진 내 영혼 또한 종소리에 감겨 삼라만상을 한없이 헤메인다.
새벽 예불 전에 28번 범종법음을 울려 일체중생이 다 함께 성불하기를 염원한다는 새벽종소리!
어린 시절, 마음을 뺏어가는 드라마 속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어렴풋한 그런 종소리가 잡념에 빠진 내 영혼을 울린다.
지심귀명례 서건동진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 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冥熏加被力 願共法界 諸衆生 自他一時 成佛道).....
잠을 잤는지 못잤는지도 모르고 늦게야 일어난 나는 내 손과 팔이 퉁퉁 부어있어 흠찟 놀랐다. 얼굴까지 부어 있다.
이런 일은 생전에 없었는데... 걱정하는 나를 보던 옆자리 어른이 손을 달라더니 지압을 해 주신다. 산에 오를 때 잠깐 사진을 찍어주시던 분.
"혹시 한의사 아니십니까?"
하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며 종암동에서 대대로 전해온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70대임에도 50대같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건강체질에 깊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운동삼아 매년 철따라 이곳을 찾는다고 하시며 내 체질엔 무슨 무슨 약초가 좋으니 참고하라신다.
한겨울 설악산은 맹추위가 대단하다. 나는 네팔에서 사가지고 온 야크털모자에 두툼한 방한복으로 무장하고 베낭을 메고 다시 종무소로 올라 또 싱겁고도 밍밍한 미역국에다 김치를 얹은 아침을 의무적으로 말아먹은 후 언덕 위에 있는 오층석탑으로 향했다.
나보다 먼저 온 몇개의 발자국이 백설 위에 선명하다.
백설이 만건곤한 내설악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바위언덕 위에 세워진 볼품없는 이 탑이야말로 봉정암의 주인공!
신라 644년, 지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모셔와 창건했다는 봉정암의 1300여년된 사리탑은 한국의 5대적멸보궁 중 하나!
이 탑 안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것이라면 월정사 적멸보궁처럼 국보와 같은 대접을 받을만한데, 집을 짓기 어려운 바위 위에 세워진 탓인지 간단한 목제울타리와 석제 복전함이 설치됐을 뿐 아직도 10년 전의 자연모습 그대로다.
한마리 산새가 뽀로로 날아와 복전함 위에 든 쌀봉지를 쪼으며 모이를 찾는다.
탑만 달랑 세워졌던 한 이십여년 전에 불교의 의미도 모른채 이곳에서 108배를 했던 기억이 새로워 나는 하얀 눈 위에다 자리를 잡고 또 다시 108배를 한 후에 온 산야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에서 오세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험하고 가파른 길이라 출입금지에다 벌금을 메긴다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하지만 그곳을 뚫고 올라온 발자국이 몇개 보여 나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뚫고 무단으로 금줄을 넘어 조심조심 벼랑길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눈 쌓인 겨울산이라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녀자들도 오르는 등산로를 위험하다며 막아놓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무개념한 처사를 조롱하며 무단으로 내려 가니 야릇한 쾌감마저 든다.
가파른 철계단으로 이어지는 길을 한참 내려가다가 이 계절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멋진 비경을 발견하고서 나는 연신 탄성을 질러대며 맘껏 셧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년말연휴임에도 불구하고 공해를 유발하는 인기척이 없는 신비롭고 장엄한 설악산에 안겨 홀로 유유자적 한다는 것... 그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설악산이 외로운 나에게 베푼 찰라적이지만 영원에 이르는 우주적인 특혜 아니겠는가!
첫댓글 무더운 여름날입니다.
더위를 잊고 잠시 한기가 서릿발같은 설악산의 기운을 담아왔으니 망중한을 즐겨 보십시오. ^^
봉점암을 세번 다녀와야 소원 성취가 된다고 합니다마는
대단하시네요 태산거사님
멋집니다
저는 한 열번 이상 다녔는데 아직도 욕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도량인 봉정암의 은혜를 모르고 산토끼처럼 슬쩍 지나치고 만 나그네같은 행보 때문이라 소원성취완 상관없기 때문이겠지요. ^^;;
산행기-2는 저녁에 찬찬히 볼께요 ㅎㅎㅎ
갑자기 무모한 생각이 듭니다.
겨울에 봉정암에 가고 싶다는..ㅎㅎ
겨우 한번 갔다온 이력으로는 무리일건데..
눈 내리는 봉정암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ㅎㅎ... 한번 결행해 보시지요.
진짜 산행은 자고로 한적한 겨울산입니다. ^^
많이 변했습니다
봉정암 숙박이 1만원이라
30어전 전 겨울에 가보곤 아직까지 못 가본 봉정암입니다
태산님 글 읽으며 그 때를 잠시 돌아봅니다
스님께 아이젠부터 벗으라는 호통에 움찔했던 기억이 ...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_()_
ㅎㅎㅎ 인간을 옭죄는 인법이 헐렁했던 옛 시절이 좋았지요.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은 변하고야 마는 苦海 아닙니까... -,.-;;
봉정암
저는 시월에다녀왔는데
지금두봉정암미역국에
오이세쪽이 생각날때가있어요
저는참맛있게먹었는데
쪽잠자다가어느보살님배낭이
배위에떨어져서 놀래일어나
사리탑에서 기도하던기억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봉정암 다녀왔는데 웬지 힘들거나 할때 한번 가야지..하면서도
쉽게 실천이 어렵더라고요
감사합니다 태산님
저희 무심정사 항상 사랑해주시고
하시는일 원만성취되시기를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홧팅~~~
글도 잘쓰시고 사진도 잘 담아오시고
이 더운 여름에 눈속의 봉정암 잠깐이라도 더위가 날아간듯 합니다.
지난 5 16일에 봉정암 사리탑에 부처님 반광을 보셨는지요.?
신심이 나던데요.
10번을 채우면 하고 세운원이 물거품이 되고 겨우 6번 지금은 못가겠는데요.
감사합니다. 공덕으로 성불하소서. _()_
태산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겨울 봉정암 산행기-1,2 재밌게 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예전에 산행할 때 설악산 봉정암에 수차례 참배한 기억을 되살려 주셔서 감사드리며, 님은 진정한 산 사나이 이십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