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백 번 천 번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입으로 사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실천의 옷이 입혀져야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이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사랑은 비로소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된 사랑이어야 진짜 사랑입니다. 찬양을 구상하는 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은 사람들의 입에서 불러져야 진짜 찬양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로 사랑하는 것이나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이나 사랑을 연구하는 것 등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화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를 약 이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참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길이 없어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러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믿음은 역사를 지향하고, 소망은 인내를 지향하나, 사랑은 수고를 지향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이 땅에서의 숭고한 사랑은 십자가에서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새로 어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후 일 년 동안 사랑에 관한 설교만 했습니다.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솔직히 모든 성도들이 그만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일년 동안 가르친 것을 점검하기 위하여 크리스마스 전날 아내와 함께 거지처럼 꾸미고 몇몇 교인들의 집을 다녀 보았다고 합니다. 장로님 집에 가서 "떡 좀 주쇼"라고 하니 그 장로님은 재수 없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권사님 댁에 가서도 퇴짜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만 기가 죽어 교회를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이 교회 안에서만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은 교회 내에서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실제의 삶에서 사랑이 행동화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은 혀끝에 있고 진정한 사랑은 손끝에 있다." 희생 없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고, 분노 없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듯이, 실천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은 어떠하십니까? 실천이라는 옷을 입은 사랑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