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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전사들의 북유럽 신화여행
지은이: 강응천
출판사: 금호문화
읽기 전에
원시적 생명력을 키워온 북유럽 신화의 힘
유럽의 신화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럽. 문명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말은 거의 공식처럼 쓰이고 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등 기라성 같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리스 로마 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리스 로마 신화만 있고 독일 신화, 영국 신화, 프랑스 신화는 없을까? 이 나라들이
다 근대에 들어와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들의 조상인 게르만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게르만 신화는 있을 게 아닌가?
물론 그렇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민족들에게도 신화가 있듯이 게르만족에게도 신화는 있다. 이 게르만족의 신화를 사람들은 북유럽 신화 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켈트 신화와 더불어 유럽의 3대 신화를 이룬다. 이렇게 되면 많은 분들이 혼란을 느낄 것이다.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들이 있는 유럽의 일부일
뿐인데 왜 하필 게르만인 전체의 신화를 북유럽 신화라고 부를까? 그리고 켈트 신화란 것은 또
무엇인가?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이 세가지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전,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살던 것으로 추측되는 유목 민족이 인도와 이란, 남유럽 등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각각 그리스와 로마를 세웠다. 이들이 후세에 전한 신화가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명이 한창 꽃피고 있을 무렵 유럽 대륙에는 갈리아 지방(현재의 프랑스)을 중심으로 켈트인이라는 기마 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케사르에게 정복당해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4세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는 게르만파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영국 일부와 아일랜드로 밀려났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앵글로색슨에 맞서 싸운 켈트인의 용사들이었다. 이 아서왕 이야기를 비롯하여 전사 코난,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 등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켈트인의 신화를 켈트 신화라고 한다.
켈트인을 밀어내고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인은 본래 북유럽에 살다가 중부 유럽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도 영국의 베어울프 이야기나 독일의 지크프리트 이야기를 파생시킨 자기들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명의 유산과 접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본래의 게르만 신화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게르만 신화가 유럽 문명사회에 다시 알려진 것은 9세기부터 시작된 바이킹의 활약 때문이었다.
바이킹은 게르만 대이동 때 북유럽에 남아 있던 게르만의 일파로 노르만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들 고유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원형대로 유럽
사회에 전해주었다. 바로 이렇게 바이킹이 간직하고 있던 게르만 신화를 북유럽 신화라고 한다.
또 이 신화를 기록한 문헌들이 대게 노르웨이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노르웨이 신화라고도 한다. 그
러니까 북유럽 신화는 영국과 독일의 게르만인도 다 같이 공유하던 게르만 신화의 한 분파인 동시에 오늘날에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게르만 신화인 셈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신화를 낳은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켈트인, 게르만인은 다 같이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따라서 4천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와 이란으로 이동한 아리아인과도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도 신화와 이란의 페르시아 신화도 앞의 세 신화와 형제지간의 신화라고 할 수 있겠다. 단, 인도유럽어족 가운데 러시와와 동유럽에 사는 슬라브인은 동방정교회에 워낙 강력하게 동화되는 바람에 고유의 신화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2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만인이 살던 중부유럽 일대를 여행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로마인은 요일에 다 신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는데 게르만인도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목요일을 로마인은 주피터의 날 로 불렀고 게르만인은 토르의 날 로 불렀다. 공교롭게도 주피터와 토르는 똑같이 천둥과 번개의 신이었다.
그런데 자기네 고유의 신화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존중하는 현대 유럽인도 유독 요일에 관해서만은 고유 관습을 버리지 않고 있다. 영어로 목요일을 일컫는 Thursday는 바로 토르의 날 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화요일(Tuesday)은 티르의 날, 수요일(Wednesday)은 오딘의 날 , 굼요일(Friday)은 프리그의 날 로 모두 북유럽 신화 속의 신에서 유래한 이름들이다. 수요일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오딘이란 신을 영어로는 웨덴(Weden)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단 하나 토요
일(Saturday)만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업신 새턴(Saturn)을 요일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저서<<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 신화를 로마 신화와 비교하여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현존하는 가장 오랜된 북유럽 신화 관련 문헌자료이다. 타키투스는 퇴폐와 향락에 빠져 있던 로마인에게 게르만인의 소박하면서도 강건한 기풍을 소개하고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 고대 게르만인의 특징을 반영해서 그런지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세련된 맛보다는 꾸밈없고 직선적인 태도로 원시적인 생명력과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 보여준다.
북유럽의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에는 다 같이 신과 거인의 대결 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대결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서두에 불과한 데 비해 북유럽 신화에서는 기둥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거인들이 지배하는 무질서한 우주를 신들이 타파하여 질서있고 조화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신과 거인의 공멸, 그리고 이 세상의 완전무결한 파국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둘째, 그리스 신들은 말 그대로 불사신이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신도 죽는다. 그것도 최고신인 오딘이 한 마리 늑대에게 잡아먹힐 정도로 참혹하고 수치스럽게 죽는다. 이런 지독한 신성모독은 북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의 세계를 끔찍해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인간의 수호자인 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세상인데 한낱 미물인 인간의 삶이야 오죽하랴!
셋째, 그리스 신화가 비교적 밝고 현실긍정적인 데 비해 북유럽 신화는 어둡고 비관적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살던 현실 세계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고대 북유럽인은 언제 이 끔찍한 현실이 끝나고 살 만한 미래 세상이 오는가에 더 신경이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는 신과 거인의 공멸, 즉 현세의 완전한 파국 뒤에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겨울이 만물의 생명을 앗아간 뒤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듯 푸르른 생명의 땅 위에 펼쳐질 날을 북유럽인은 기다리고 있었다.
넷째,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북유럽 신하에는 인간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스 신화가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되면서 인간을 위한 신화로 다듬어진 반면, 북유럽 신화는 자연의 힘을 한없이 우러르고 두려워하던 원시시대의 세계관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다섯째, 북유럽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와 같은 문화 영웅이 없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문화 영웅인 프로메테우스와 가장 유사한 북유럽의 신화의 인물은 로키이다. 프로메테우스처럼 로키도 거인족의 일원이고 머리가 좋으며 신들의 뜻을 거슬러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신들이 독점하던 불을 훔쳐다주고 기술을 가르쳐준 것과는 달리 로키는 신들에 대한 시샘과 악으로 인해 신들에 대드는 이유없는 반항자 일 뿐이다.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은 오딘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에도 오딘의 이름을 딴 예물시계가 나오고
TV광고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잘 생긴 신사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낸다. 이윽고 신사가 여인에게 다가온다. 여인은 짐짓 의아해하는 표정 속에 은근한 기대를 살짝 감추고 있다. 그러나 신사는 오딘(Odin)'이란 글자가 아로새겨진 결혼 예물시계를 보여주며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최고신의 이름을 빌려 시계의 품격을 높이려는 취지는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이 광고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신화 속의 오딘은 부인도 있고 자식도 많지만 매력적인 여인의 유혹을 받고 그렇게도 도덕군자연할 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소한 북유럽 신화에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품광고 이야기를 꺼냈지만, 실제로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듯한 인물과 소재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 거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여러 명의 난쟁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토에 웅거하고 있는 거인, 태양을 뒤쫓는 무시무시한 늑대, 세상의 한쪽 끝에서 쇠를 달구고 있는 난쟁이,
용의 피에 목욕하고 불사신이 된 사나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 등등...
유럽의 민담과 전설과 동화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한 이런 이야기들의 부리를 따라가다 보면 북유럽 신화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북유럽 신화는 그런 소재들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훨씬 원시적이고 원색적으로 다룬다. 신과 거인이 충돌하여 세상을 끝장내는 충격적인 결말이 예고되고 있는 만큼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본능과 욕망의 극단을 향해 줄달음친다.
우리는 이러한 북유럽 신화를 접하면서 단정하게 잘 짜여진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또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후예답게 세련되고 지성적인 유럽인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될 것이다. 북유럽 신화 속에 드러나 있는 고대 게르만인의 원시적이니 생명력과 정신은 오늘날 유럽인의 피 속에 연면히 흐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다.
부정적인 예를 들어보면 2차대전이라는 파국을 도발했을 당시 독일인 사이에는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랙(신과 거인의 최후의 대결)이 유행처럼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과 사상의 혁명은 북유럽 신화가 보여주는 강한 투쟁의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구가 유럽인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국내에서 출간된 신화 관련 책들을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제목에 그리스 신화가 들어간 책은 100종을 훨씬 넘는 반면 북유럽 신화나 노르웨이 신화 가 들어가 있는 책 제목은 없다시피 했다. 이건 지나친 편식이 분명하다. 지금가지 누누이 말한 것처럼 유럽 3대 신화 중 하나인 북유럽 신화는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균형 감각과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고전이다.
단, 필자는 노르웨이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북유럽 신화를 담고 있는 원전들을 직접 읽을 수는 없어서 이들의 영역본, 일역본과 여러 가지 참고서적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전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북유럽 신화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참고한 자료들을 토대로 필자가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줄거리 전개에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첨삭을 하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들은 소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가 우리 나라에서 읽을 만한 고전의 하나로 자리잡아 좀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북유럽 신화 소개서와 해설서가 잇따라 나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 신들의 왕, 오딘
오딘, 거인을 죽여 그 시신으로 우주를 창조하다
거인과 신이 세상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최초로 태어난 생명체는 거인 이미르였다. 하늘도 땅도 없던 시절, 이 세상의 반쪽은 온통 서리뿐이고 나머지 반쪽은 온통 불뿐이던 시절에 거인 이미르는 태어났다. 완전히 상극인 서리와 불 사이에는 기눙가라고 불리는 틈이 있었고, 이틈에서 만난 서리와 불은 온화한 중립지대를 형성했다. 바로 그 중립지대에서 거인 이미르가 태어난 것이다.
불을 만나 녹아내린 서리에서 태어났으므로 이미르와 그의 자손들을 서리거인 이라고도 부른다.
극과 극이 만나 빚어진 생명체라서 그런지 거인족은 성질도 사납고 생김새도 흉칙했다. 그들의 얼굴은 흑갈색이고 귀는 크게 늘어졌으며 손끝은 독수리 발톱처럼 생겼다. 털이 나 있어야 할 곳은 대머리처럼 빤빤했고 매끈해야 할 곳에는 털이 나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눈동자를 가졌고, 숨결은 거칠었다.
이미르에 뒤이어 얼음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우아하게 생긴 암소 아우둠라였다. 이 암소는 배고픈 이미르에게 젖을 먹이면서 자신은 얼음을 핥았다. 암소의 부드러운 혀끝에서 서서히 녹아내린 얼음속에는 아름답고 건장한 생명체가 마치 냉동인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사흘에 걸쳐 진행된 암소의 달콤하고 우아한 혀놀림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과도 같은 생명체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 서리거인보다도 작지만 잘 생겼고,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내! 그 사내의 후손 가운데 최초의 신이 나올 것이다.
어떤 방법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사내는 아들 보르를 낳았다. 보르는 거인족의 여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오딘, 빌리, 베라고 했다. 신들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최고신 오딘이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오딘과 그의 형제들은 사납고 추한 거인족이 싫었다. 그들은 또한 물과 불밖에 없는 황량한 세상이 싫었다. 궁이 끝에 그들은 우서 거인족의 우두머리인 이미르를 죽이기로 했다.
찬서리 내리던 어느날, 그들은 낮잠을 즐기던 이미르를 얼음 벌판으로 끌어내 온뭄을 난도질했다. 칼에 찔리고 도끼에 찍힌 거인의 몸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남극의 얼음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듯 거인의 피는 태초의 우주를 순식간에 뒤덮어버렸다. 이 핏물에 휩쓸려 모두가 비명횡사했고, 단 한 쌍의 거인 부부만이 몸을 피했다.
이미르의 시체를 떠메고 기눙가의 중앙으로 간 삼형제는 거인의 어머어머한 주검을 재료로 삼아 태초의 틈새 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이미르의 살을 떠서 고르게 폈다. 이것이 육지가 되었다. 다음에는 난도질을 당하고도 부러지거나 상하지 않은 뼈들로 울퉁불퉁한 산과 언덕을 만들었다.. 으스러진 거인의 이와 턱, 그리고 뼈 부스러기는 대지 위에 고루 뿌려 돌과 바위, 모래를 삼았다.
다음으로는 대지를 둥글게 둘러쌀 바다를 만들 차례였다. 이것은 따로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르의 몸에서 흘러나와 거인족을 몰살시킨 피는 대지 주위에 고이면서 거대한 바다가 되었고, 거인 몸 이곳저곳에 남아 있던 피는 호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너무나 넓고 깊기 때문에 장차 태어날 어떤 생명체도 그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서리와 불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우주가 윤곽을 갖춤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속 빈 나무줄기에 몸을 의지하여 익사를 면한 거인 부부가 있는 한, 위협적인 거인족은 다시 번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딘은 고심 끝에 이미르의 눈썹을 봅아 대지의 한쪽 끝 해안을 따라 철책처럼 심었다. 그리고 이 눈썹 울타리 안쪽을 요툰헤임이라고 부르고 거인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살도록 했다. 일종의 국경선인 셈이었다. 그 국경선 바깥족 대지는 푸르르며 햇살이
따사롭고 먹을 것이 자라는 축복의 땅이었다. 오딘은 이 당을 미드가르다라 이름지었다.
땅과 바다가 완성되자 삼형제는 대지를 지붕처럼 덮어주는 하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방법을 숙의한 끝에 이미르의 두개골이 하늘감으로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이미르의 두개골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되 그 네 귀퉁이가 대지의 끄트머리와 맞닿도록 했다. 그리고 훗날 난쟁이족이 탄생하자 그 가운데 네 명을 골라 각 귀퉁이에서 대지의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이 난쟁이들은 각각 동, 서, 남, 북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지를 덮은 이미르의 두개골이 남쪽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가리는 바람에 대지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래서 형제는 불나라에서 튀어오르는 깜부기불들을 잡아채 하늘에다 달아매었다. 해와 달과 별들은 이렇게 해서 천지를 비추게 되었다. 어떤 별은 하늘에다 붙박아놓았고 어떤 별은 일정한 궤적을 따라 하늘을 돌도록 하였다. 한편 이미르의 두개골에서 떨어져 나온 뇌는 하늘에 던져올려 운치 있는 구름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거인 이미르의 주검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과연 평화롭고 안전할 수 있을가? 더구나 자신들의 조상이 오딘과 그 형제들에게 난도질당한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거인 부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지 않은가? 이미르의 죽음은 1회전에 불과할 뿐, 신과 거인 사이에 벌어질 죽음의 대결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오딘,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다
오딘과 형제들은 어느날 자신들이 창조한 새로운 세상을 흐뭇한 마음으로 감상하며 미드가르드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의 끄트머리인 어느 바닷가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뿌리뽑힌 채 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하나는 물푸레나무였고 다른 하나는 느릅나무였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이 나무들이야말로 축복의 당 미드가르드에 살 새 생명의 재료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합심하여 물푸레나무로는 남자를, 느릅나무로는 여자를 만들었다.
맏형 오딘은 이들 남녀에게 생명의 기운을 주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