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종로3가서 쓰러지다.
넌픽션 기록자: 조정래
우리 할머니는 이쁘셨다. 덕분에 나도 할머니를 닮아 이마가 반듯하다. 할머니는 일평생 할아버지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시거나 다투신 적이 없으시다.
나는 경안고등 마지막 공납금을 내지 못하여 일생 좋은 추억으로 남을 졸업식도 가지 못했다. 8남매 중 유일하게 고졸을 했으니 도시에 나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서울 올라갈 차비가 한 푼도 없었다.
마침 할머니가 희재 난 끝무리 고추를 감나무 옆 아랫방에서 다듬고 계시길래, "할매, 그 고추 나 주면 안돼? 팔아서 서울 갈 차비 하게." (할매와 손자는 정이 깊으니 존댓말을 사용치 않았다.)
그러자 할매는, "좋은 고추는 너 아바이가 팔아 묵고, 이 고추는 희재가 나서 팔아도 돈도 안되고, 글코 이 고추로 겨울 김장 해야 된다!" 하셨다. 하여, 내가 웃묵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자, 할머니는 그 희재 난 품질 나쁜 고추를 마다리 자루에 퍼 담으시더니, "그래, 이거 풍산장 가서 팔아서 서울 올라갈 차비 하거라!" 하시면서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서울 올라가거던 우째든동 단디 해서 굶지 말고 살아라!" 하셨다.
나는 그 품질 나쁜 희재 난 고추를 읍내까지 어깨에 메고 걸어가서 팔아 겨우 서울 올라올 차비만 마련하여, 안동역에서 기중 싼 입석표를 끊어서 고향을 떠났다.
그 당시 완행열차도 힘들었는지 죽령재를 넘을 때 단숨에 못 넘어서 다시 풍기역까지 뒤로 물러갔다가 다시 힘을 가속하여 죽령재와 치악산 따비굴을 허기진 기적소리를 내면서 넘었다. 도시로 떠나는 열차 손님들은 저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반 근심 반으로 우울한 표정들이었는데, 드디어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지게꾼, 아이스케키 장사, 껌 파는 할머니, 담배 놓고 야바구 하는 장사, 풀빵장사, 구두딱기... 나처럼 보따리 하나 들고 갓 시골서 올라온 듯한 사람들로 붐볐다. 역광장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왜냐하면 당장 그날 밤 잠 잘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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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이 쌀을 사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 자연 굶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새 몸도 야위어졌다. 어느 날 종로 라디오 학원 가다가 심한 복통과 하혈로 길거리에 쓰러졌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웅성거리고... 눈을 뜨니 걸인들이 쓰러지면 보낸다는 시립병원이었다.
그 당시 몸무게가 53k, 키가 175cm인데, 그 키에 몸무게가 53k면 한창 나이에 먹지 못해 소위 "뼈만 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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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고 전자과를 나오지 않고도 내 노력으로 전자이론을 독학하여, 미국 전자 제조 공장에서 2명 채용하는 데에 몰렸던 공고나 대학 전자과를 나온 수백 명을 제치고 취직하고, 또 전자 전공을 한 사람들을 제치고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미국 L1비자를 받아서 캐나다 벨리에 있는 RadioShack의 근무를 시작으로 그 후 택사스 포트워스,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톤, 다시 벨기에 나뮈르, 프랑스 릴이라는 도시서 근무하고, 다시 미국 RadioShack 본사에 근무까지 하게 된 안동 촌넘이다.
그 당시 유럽 근무 시 내 연봉은 현대, 삼성보다 월등히 높은 대우를 받았는데, 자가용은 4만k만 되면 자동적으로 새 차를 주었고, 자가용 기름값도 주고, 집은 정원에 골프 연습을 해도 될 정도로 넓고, 전화료까지 회사가 부담했고, 특히 유럽 월급 외에도 국내 월급도 100% 받고, 보너스는 연 900% 받았으니, 단연코 국내 대기업을 넘어 상위 1%급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이다.
외국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곳은 벨기에다. 귀엽고 불어 잘했던 딸 현지, 세상없이 착했던 아들 현범이, 그리고 알뜰한 아내와 네 명이 스위스, 이태리,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스페인… 절기마다 여행 다니고, 참 행복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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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하였는데, 오랜 외국생활 접고 서울 돌아와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내가 허기로 쓰러졌던 종로3가 청계천변이다.
지난해 위 내시경 검사 때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어르신, 전에 위궤양으로 고생하신 적 있느냐?”고 묻길래, 종로3가서 쓰러질 때 하혈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 위가 크게 구멍이 난 것인데, 이렇게 큰 위 흉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소나무도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면, 부러진 자리에 관솔 공이가 생긴다. 그후 나무가 쓰러져서 썩어도 아문 상처 고베이는 썩지 않는다. 그래, 나는 젊어서 영양실조로 위장에 구멍이 난 흉터를 갖고 살아 온 사람이다.
오늘 춘절이 좋아서 아침 일찍, 54년 전에 허기로 쓰러졌던 그 자리에 가서 선비가 탐매하는 심정으로 어려운 고비 잘 넘기고 살아온 내 자신에 감사 하면서 탁료 한잔 하고 청계천 물을 멍하니 보는데... 문득 나는 나름 출세를 해서 외국서 잘 먹고 살면서, 정작 김장에 사용하려던 희재 난 고추를 덜컥 손자에게 주시어서 손자가 서울행 열차를 타게 해 주신 할머니에게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단 만 원의 용돈도 못 드리고, 출세한 손자 보여드리지 못한 불효를 어찌 할 거나! 어찌 할 거나!!!
이 땅의 아날로그 세대는 누구나 다 서울 출세 길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이 땅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다 허기진 추억이 자신이 걸어온 한 시련 두 시련 무명바지처럼 처연하게 지워지지 아니하고 가슴속 깊이 남아 있고, 나이 들어 외로운 혼자만의 시간에는 그 잊고 싶은 무명바지를 다시 꺼내 입고는 자신도 몰래 무명바지에 눈물을 떨구게 된다.
늙어 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정래 2024년 4월 6일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