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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주석
그리스도의 중재를 위한 기도(요한복음 17:1-5)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의 기도의 배경(1절).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실 때 그리스도는 깊이 있는 기도를 많이 하셨다(때로 그는 밤을 세워 기도하셨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처럼 완전하게 기록된 것은 다른 곳에는 없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이 기도를 하신 시기. 그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즉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송별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는 그들이 듣는 가운데 기도를 하셨다. 즉 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 이 기도는 설교 후에 하신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실 말씀을 전한 다음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하셨다. 우리는 말씀을 전한 후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또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마른 뼈들을 향하여 예언한 에스겔은 "생기야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기도하였다. 설교는 기도로 끝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가 증가되는 것이다.
(2) 이 기도는 만찬을 나누신 뒤에 하신 기도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곧 만찬을 위한 음식을 나누시고 이에 합당한 말씀을 하신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말씀을 지킬 힘을 주시도록 끝으로 이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3) 이 기도는 일종의 가족 기도였다. 그리스도에게 제자들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는 모든 식구들 앞에서 기도로 본을 보이셨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의 입장을 띄고 식구들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창 18:19) 다윗이 아들의 입장에서 그의 식구를 위하여 축복하셨고(삼하 6:20) 그들을 위하여 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4) 이 기도는 작별 기도였다. 우리가 친구들과 작별할 때 기도로 작별하는 것이 좋다(행 20:36).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작별은 기도에 의하여 성별되고 아름답게 승화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죽으면서 12족장에게 축복하였고, 모세는 죽으면서 12지파에게 축복하였다. 여기 본문의 예수는 임종하시면서 12사도들에게 축복하셨다.
(5) 이 기도는 자신의 희생을 위한 준비 기도였다. 그는 죽음의 대가를 치루심으로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가호와 축복을 베풀고자하시었다. 그리스도는 지금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기도하셨다. 이 기도에 힘입어 우리의 모든 기도도 효력이 발생되는 것이다.
(6) 이 기도는 그의 중재하심의 모본이 되는 기도였다.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휘장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신다(하나님 나라를 의미함). 그리고 영광을 입으신 거기서는 그가 지상에 계셨을 때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낮추사 아버지께 간구하시지는 않는다. 하늘에서 그는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여 아버지에게 인간들을 위한 중재를 하신다. 거기서 그는 모든 그의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은덕을 내리실 것을 간청하시는 것이다.
2. 그의 간절한 희망이기도 하시는 외적인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는 먼저 번처럼(11:4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간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자세를 갖춤으로 정신을 집중하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러한 자세를 취하사 기도를 성별하셨고 기도를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기도의 정당성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기도할 때에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봄은 의미 있는 일이다(시 25:1). 예전에 하늘을 향해 Sursum corda - 즉 너의 마음을 들라는 말씀은 기도를 위한 부름의 말씀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우리의 소망을 그리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간구한 바 좋은 것들을 받기를 기대해야만 한다.
Ⅱ. 기도의 첫 부분.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내용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기도한다. "그는 눈을 들어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만 해야 하듯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하고 그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기억하자. 양자의 영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로마서 8장 15절,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도록 가르쳐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그에게 나아갈 자유가 있으며 그를 믿을 근거가 있는 셈이며 그러므로 그에게 큰 기대를 가져도 좋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거룩한 아버지"로(11절) 또 "의로우신 아버지"(25절)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대단히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의 지시나 또는 위로를 얻기를 바랄 때 그 소원에 합당한 명칭을 붙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좋다.
2. 그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시다. 그렇지만 한편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도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셨기 때문이었다"(마 3:15). "구하라. 내가 너에게 주리라"(시 2:8)는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하였다. 그가 자기 몸을 바쳐 사신 바된 것을 또 간구해야만 하셨다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한 아무 공로도 없이 죄만 지은 우리가 어찌 받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만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이 사실은 기도의 가치를 앙양시켜 준다.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통신 수단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하늘과 의사를 소통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실은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또한 "빈궁한 자의 기도"도 멸시받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우리를 감싸 주시는 그분에게도 자신을 위하여 간청할 필요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중재자로서의 그의 명예로운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였다. 그는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같은 방법 즉"기도와 간구"(히 5:7)를 이용하셨다. 그도 이렇게 간구하셨으므로 그는 우리의 간구하는 마음을 아신다(출 23:9). 그리고 우리가 간구하는 방법도 아신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이 자비를 베푸는 것도 먼저 가정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물론 가정에서 끝난다면 안 되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비하여 자신을 위한 기도는 대단히 짧게 하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교회를 위한 기도는 잠간 스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된다.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하여 하신 두 가지 간청이 있다. 그 간구는 둘다 자기가 영화를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간구를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기 위하여 하신 청이었다.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란 청으로(1-3절), 그가 지금까지 해오신 것을 앞으로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업을 완수하였으니 나를 영화롭게 해 달하시는 청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가 할 일은 하였으니 여호와여 이제는 당신이 하실 차례니이다"고라 하였다(4,5절)(한글 개혁과 다소 틀림:역자 주).
(1)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1절). 즉 이런 내용이다.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들리겠나이다."이제 본문을 더 상세히 고찰해 보자.
[1] 그가 위하여 기도하신 것.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영화를 얻게 해달하는 것이었다. 즉 이러한 뜻이다. "모든 어두움의 세력들이 결속하여 당신의 아들을 중상할 때가 이르렀나이다. 그러니 아버지여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첫째, 아버지는 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시던 때에도 표적과 기사를 그를 통하여 나타내시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를 잡으러 온 자들이 벙어리가 된 듯 한 마디 답변도 못하던 순간, 또 유다가 주님의 무죄를 고백하고 자결로 이 사실을 입증하던 순간, 빌라도의 아내가 꿈에 그의 의로우심을 깨달았고, 빌라도 자신이 입으로 그의 무죄를 선언한 순간, 또 해가 어두워지고 성전 휘장이 찢어지던 순간들에 아버지는 아들을 의롭게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다.
둘째,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난을 가하심으로 인하여 땅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위엄이 있었고 영광을 받으셨다(13:31). 그가 사탄과 죽음을 정복하신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였다. 또 가시관은 그에게 면류관이었다. 또한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쓴 패에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를 적절히 표현했던 것이다.
셋째, 아버지는 아들이 고통을 받으신 후에 땅 위에서 더욱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즉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리고 택하신 증인들에게 공개적으로 그를 나타내시므로 또 아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그를 위하여 변명해 주시는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그의 왕국을 인간 세계 속에 세우심으로 그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간구하고 주장하신 것이다.
[2] 이 요구를 관찰시키기 위하여 그가 아버지에게 내세운 조건들,
첫째, 그는 아버지와 자기와의 관계를 근거로 하여 호소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동체이시며 중재자로서의 당신의 아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편 2편 7,8절에도 "네가 나의 아들이므로 내가 열방을 너에게 유업으로 주리라"하였다. 또한 사탄도 그가 아들됨의 권리를 포기하면 이 세상 나라를 주겠노라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하셨다. 그리고 그의 장래의 영광을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는 장래의 영광을 하나님에게 의탁하신다. 마찬가지로 양자로 선택받은 우리도 믿음으로 아들의 유업을 간구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성별되어지면 다음은 영화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 한 것이다.
둘째, 그는 시기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한다. 고로 본문에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였다. 이제는 구체적인 시간까지 결정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결정됐다는 말이다. 그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노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그 때가 온 것이고 그는 이 사실을 아셨다.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전 9:12) 인자는 아셨다. 그는 이 시기에 대하여 12장 27절에서는 this hour - 즉 이 때라 하셨으나 본문에서는 the hour - 즉 때라고만 하셨다. 마가복음 14장 35절과 요한복음 16장 21절을 비교하여 보라. "때"라고 하신 것은 강조적인 뜻을 띄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자의 탄생의 때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죽음의 때도 가장 의미있고 주목할 만한 때였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시간이야말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중대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간은 전에는 결코 없었다. 이와 같이 기대하던 시간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에는 다음의 의미가 있다.
a. "내가 겪어야 할 그 때가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이제 이 장엄한 사건이 절정에 도달한 시기였다. 수많은 작은 접전이 있은 후 하늘과 지옥 사이의 결정적인 전투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 편에는 명예가 또 인간에게는 행복이 좌우되는 중대한 싸움에, 영원히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경각이 달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윗과 미가엘은 이쪽 진영에, 골리앗과 용은 저쪽 진영에 속하여 있었다. 이제 전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면 어느 쪽이 이기느냐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이쪽 진영에 속한 자들은 다음과 같이 아뢰인다. "이제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소서.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사(政事)들과 권력들에 대하여 승리하게 하시고 그의 발뒤꿈치로 독사의 머리를 밟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아들을 높이시사 패하지 말게 하옵시며 낙담하지 않게 하소서." 여호수아가 나아가 "정복하며 또 정복할 때도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강하게 하시니"라고 말씀되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그의 승리의 병거로 삼으시는 이때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던 것이다.
b. "내가 관씌움 반기를 고대하던 마지막 순간이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즉, "내가 영화롭게 되어 당신의 우편에 앉을 때가 이르렀나이다"는 뜻의 말씀이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기까지에는 유혈어린 고난의 막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난의 순간은 전혀 안중에 없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는 "내가 영광 받을 때가 이르렀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순간이 오기 전에 그는 이 영광을 기대하시지는 않았다. 우리도 만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시련의 시간 특히 임종의 시간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간구해야 한다. "때가 이르렀사오니 나를 도우소서. 나를 위하여 나타나소서. 지금이야말로 결정적 순간입니다. 이제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고 내가 영광을 얻을 순간이 온 것입니다"(고후 5:2).
셋째, 그는 아버지의 이득과 관심을 위해 들어 주실 것을 간청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하여 지금까지도 일해 오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난의 순간을 통과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a.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 죽음을 당해야 할 순간에 있었다. 그의 고난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아버지는 아들의 고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하신다. 이 고난이야말로 사람들로 말미암아 손상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들은 아버지를 만족스럽게 해드렸으므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이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것이다. 고로 본문의 뜻은 "아버지여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주장하사 이 고난을 내가 잘 감당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인 것이다.
b. 십자가의 도에 의해서였다. 이 도리는 그가 죽으신 얼마 후 세상에 공포되었고 이 도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다시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가 받는 고난에 은혜를 베풀고 그 고난을 영광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즉 십자가의 수치를 제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십자가가 구원함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영광을 얻게 하시지 못하였다면 그의 모든 사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영화롭게 하사 나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이를 통하여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a) 우리들이 기도를 통하여 또 여러 가지의 계획과 목적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목표가 되어야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주님에게 종속되어서 또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만이 존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종을 위하여 이와 같은 문제를 처리해 주시옵소서. 이는 당신의 종이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게 건강을 주옵소서. 그러면 내가 나의 건강한 몸을 드려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나이다. 나로 성공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내게 주신 것으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겠나이다." 즉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란 기도가 우리의 첫 번째 간구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다른 모든 목적을 이룸에 있어서 필연적인 조건이다(벧전 4:11).
(b) 그는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바랄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드린다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게 이루어 주실 것이며 충분한 은혜와 적절한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영광보다는 은밀히 자기를 명예롭게 하는 데 노력을 한다면 그는 우리를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게 내버려 두실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명예를 얻는 대신에 스스로 수치를 당하고 말 것이다.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사실을 들어 간구하신다(2,3절).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내용과 일치하게 그리고 그 위임을 철저히 수행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즉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영화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아들에게 위임하신 권세를 집행하므로 아들이 그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위임하신 사실은 그리스도의 간청의 근거가 된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아들에게 위임하신 권력을 의지하여 당신의 아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란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아들에게 권세를 위임하심이 또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중재자로서의 주님의 권세를 살펴 보자.
a. 그의 권세의 기원. 그 기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권세를 주신 데서"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으셨다. 타락한 상태 아래서의 인간이 본래의 자기가 되기 위하여서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의 휘하에 속해야 한다. 이 나라는 하늘이 인치신 특별 위임에 의하지 않고서는 세워질 수 없는 것이며 이 영광된 사업의 착수자이신 주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현저한 격차를 중재하시는 분이시며 또 한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게 될 웅대한 결속을 보증해 주시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 직능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는 권세를 받으셨다. 이러한 중재자로서의 권세는 창조주로서의 그의 권세와 통치와의 명백히 다른 경로를 거쳐 집행되는 것이다. 교회의 왕이신 주님은 이 세상의 군주들이 그러하듯이 폭군은 아니시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권세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이다.
b. 그의 권세의 범위. 그는 모든 육체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셨다.
(a) 이 말은 전 인류에 대한 권세를 지니셨음을 의미한다. 그는 영들의 세계에 대하여도 권세를 가지셨으며 천상의 볼 수 없는 세계의 권세들도 그에게 예속되어 있다(벧전 3: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에 호소하신다. 그들은 그가 항복케 하여 구원시킬 사람들이었고 이들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자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전 인류는 그의 발 아래 굴복되어 있는 것이다.
(b) 이 말은 부패하고 타락된 만민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셨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타락하였으므로 육체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창 6:3).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인간이 육체가 되지 않았다면 구속자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주 예수는 이 죄를 지은 인류에 대하여 전권을 소유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한 그들에 대한 심판권이 그에게 위임되었다. 즉 속박할 수도 있고 또는 석방할 수도 있으며 사면하거나 정죄할 수 있는 권세가 그에게 있었고 지상에서 용서할 권한과 처벌하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다. 중재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전 세계의 통치권을 마음대로 장악하신다. 그는 열방의 왕이시며 그를 알지 못하거나 그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도 권세를 가지신다. 그는 세상 왕들처럼 그들을 직접 다스리지 않지만 그들을 총지휘하신다(시 22:28; 72:8; 마 28:18; 요 3:35).
c. 이 권세의 거대한 취지와 계획.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 우리의 구원의 신비가 공개되고 있다.
(a) 본문에 보면 택함 받은 자들을 구속자에게 넘겨 주시고 그들을 그의 몫으로 또 그가 믿을 수 있는 자들로 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즉 그들을 그의 사업에 대한 공로와 보상으로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는 모든 타락된 인류에 대하여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특히 선택된 소수의 무리에 대하여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 그러나 택함 받은 자들은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b) 본문에 보면 아들에게 주어진 자들의 행복을 관장하는 일을 하시는 분은 아들이시다. 그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이제 구속자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살펴 보자. 그에게 생명과 면류관을 주는 권세가 그에게 있으시다. 이제 상급을 베푸시는 데 있어 이러한 우선권이 있으신 주 예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살펴 보자. 그리고 구원하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은혜스러운가를 다음에 생각해 보자.
[a] 그는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성별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꽃봉오리와 같은 상태에 있는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4:14). 인간의 심령에 부어진 이러한 은혜는 곧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b] 그는 저 세상에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성취에 의하여 그들의 행복은 완성될 것이다. 본문에는 이 사실만이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모든 사업들 즉 그들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며 그들을 성별하며 그들로 영생을 준비하게 하는 것은 저 세상에서 영화를 얻게 하려는 최종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다른 모든 것은 이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나라요 영광이며 유업을 상속받을 자"로 칭하여지고 있다. 저 세상에서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최종 단계에 실현될 것이지만 실상 모든 계획은 이를 위하여 처음부터 세워진 것이다.
[c] 본문에는 구속자가 이 세상에 대한 전권적인 통치를 하심으로 우리에게 안겨지는 혜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니신 것은 선택된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고린도 후서 4장 15절에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함이라"기록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가 정하신 율례와 규례와 약속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의 영적 생활을 지속시키고 영생을 보장하기 위하여 효율적으로 계획된 것들이다. 그는 교회의 소속된 모든 일의 우두머리이시다.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세상과 은혜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들에 대한 지배권이 같은 한 분의 손에 맡겨진 것은 모든 일이 부믈 받은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치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d. 이 장대한 계획이 본문에 계속 설명되고 있다(3절). 3절의 내용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내게 주라는 권한이 위임되어 주기 시작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 뜻이며 또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일반 종교가 발견하고자 하는 원리들이기도 합니다. 또 영생은 당신이 중재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예수는 타락된 상태에서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거룩한 신앙(기독교)의 가르침과 규례를 베푼 자입니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다.
(a)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제일 큰 목적. 그것은 곧 영생이요, 불사의 인간이 누릴 행복이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성취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 영생의 행복을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고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하신다. 영생은 복음에 의하여 비로소 확실해진 것이요, 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 이 생명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명에 비해 시간적으로 탁월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b) 이 축복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앎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본문에 "당신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니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a]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길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직접 대하여 알게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삶을 사는 자들은 어느 정도 영생이 무엇인지를 경험함으로 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것이 하늘나라이라면 하늘나라는 그 얼마나 좋은 곳이겠는가"라고 말한다(시 17:15 을 참조).
[b]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분을 알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벧후 1:3). 그리고 이 방법이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방법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하여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을 보여 준다.
첫째, 우리 존재의 창조자요 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에게 우리를 인도하심으로써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하여 죽으셨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자로 아는 것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그를 우리의 소유자요, 통치자요, 은혜를 베푸는 자로 신뢰하는 것, 그를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알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리며 우리를 가장 아끼는 분으로 그에게 의지하며 우리의 최고의 목표로써 그를 찬양하는 것, "이것이 곧 영생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가짜요 사기꾼인 이방이 거짓 신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들의 품격으로부터까지 그를 구별하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들에 대해서는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시라"(요일 5:2)고 강조적으로 말씀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동등한 신앙적인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살아계신 마치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며 우리가 숭배하는 신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단순한 이름이나 개념에 불과한 분은 아니시다. 그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그와 경쟁자로 세워진 모든 것들은 허사요 거짓에 불과하다. 그에게 예배하는 것만이 오직 참된 종교이다.
둘째,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지시해 줌으로써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알므로 영생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인간은 타락하였으므로 인간에게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 아래 있으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그를 의로우신 재판관으로 안다는 뜻이 되며, 우리가 그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을 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이러한 앎은 차라리 모르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자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지금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영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6:39, 40 을 참조). 하나님과 또는 그리스도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영생의 문턱에 이르는 것과 같다.
(2)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그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린 것을 기억해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시라고 기도한다(4,5절). 앞의 간구의 뜻은 이 세상에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라는 것이었고 본문(4,5절)의 뜻은 저 세상에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이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서의 그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무엇이 그의 위로가 되었는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내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였고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일을 완성시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한글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겪으신 가난과 수치를 불평하지 않으셨다. 실상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그 어느 불행한 사람 이상으로 피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무시하고 그가 그의 아버지를 위하여 하신 사업과 그 사업의 놀라운 진전을 회고함으로 그는 위로를 삼으신다. 그의 지상에서의 삶을 본문에 기록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가 이 땅에서 사업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에게도 명예가 되는 일이었다.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어느 모로 보나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에 완전 일치되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a. 우리 주 예수는 그를 보내신 분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안락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선한 일을 하시며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다. 그것은 포도원과 같은 세상에서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이 일에 임명하셨고 또 그 일을 하는 데 도우셨다.
b. "그에게 주어진 일을" 그가 완성하셨다는 사실이다. 현재로써는 그가 그의 사업의 최종 단계에까지 도달하지는 않으셨지만 지금까지 겪은 고난을 통하여 거의 완전에까지 이른 상태였으므로 "내가 이 일을 이루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일을 완성시킨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는 이제 그의 일에 마지막 추진과정에 계셨고 그러므로 evtelei,wsa - 즉 내가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그의 사업의 구체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가장 완벽하고도 완전한 방법으로 수행하셨음을 의미한다.
c. 이 일을 완수함으로 그는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고 그를 찬양하였다. "그의 사힌 일이 완전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인 동시에 구속자의 영광이다. 일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요 그 일을 이루신 분은 아들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이 일은 그에게 멸시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도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리이다"라고 말하실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이 땅에서 사업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은 "우리로 그의 봅을 받아 뒤를 따르게 하려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주시려는 뜻이 있었다.
a.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정해 주신 일을 우리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을 우리의 능력에 따라 또 활동범위 안에서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b.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가 인간들에게 주시고 그 대가를 바라시는 이 세상, 또한 우리에게 허용된 영원을 위한 준비 과정이요 시험 기간이기도 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만 한다.
c. 우리는 각자의 인생의 끝날까지 이 세상에서 견디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할 때까지 또 우리의 주인을 위한 고용기간이 끝날 때까지 결코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셋째, 위의 사실이 기록된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어진 일을 이루시었다면 그는 명실공히 구세주이신 것이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일을 중간에서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의 일을 완성하신 그 분은 그리스도의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서 그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2] 그가 어떠한 믿음으로 그의 앞에 있을 기쁨을 바라셨는가를 살펴 보자. 이러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그는 "아버지여 지금도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5절). 이 기쁨에 그는 소망을 두었고 그에게 이 소망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첫째, 그가 본문에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는 1절에서처럼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을 헛수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마 26:44). 그러나 같은 기도였으나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약속하셨고 주님도 확실히 믿고 있었지만 그를 위하여 기도하셔야난 했던 것이다. 약속은 기도를 하지 말라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약속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 되는지를 지시해 주며 또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가 올리움을 받으사 누리신 모든 영예, 권세, 기쁨,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영화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a.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로 끝나지 않는다. 나아가 "당신 자신의 영화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신다. 그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시겠다는 말은 곧 낙원에 거하겠다는 말씀이요 하늘나라를 칭하는 것이다(잠 8:30; 단 7:13; 히 8:1 참조). 높임을 받으신 구속자의 저렇다니 은 영광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곳인 휘장 안에서 드러나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천상 세계에서의 찬양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함께 드리워지며(계 5:13)지상 세계에서 은혜와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시에 드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아들을 자신의 영화로 영화롭게 하셨다.
b. 이 영화는 그가 "창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화"이다. 이 말씀에 의하여 다음의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a) 하나님과 동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있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은 "만물이 있기 전에 계셨고 또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비롯된"분에 대한 것이다.
(b)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의 영화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였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셨기 때문이다(히 1:3).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그의 영광에 새로운 것을 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확인한 데 불과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착수하신 것은 자신이 영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영화로우셨기 때문이다. 그가 구속 사업을 하신 것은 오직 우리가 영광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c)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한 육신을 입으신 상태에서는 스스로 이 영광을 포기하시고 그것을 휘장으로 덮어 버리시었다. 아직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는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었다. 그가 일시적으로 이 영광을 내놓으신 것은 그의 아버지가 정하신 대로 그의 사업을 철저히 이루겠다고 하신 맹세 때문이었다.
(d) 그는 높임을 받으신 상태에 이르시자 이 영광을 되찾으시고 전에 입으시던 빛의 옷을 다시 입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사업을 끝마치신 후 하나님에게 하신 reposcere plgnus - 즉 맹세에서 자유로와지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 요구하신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본성까지도 최고의 영예로운 상태에 이르게 하시라고 기도하신다. 그의 몸은 영광된 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신격에만 있었던 영광이 중재자요 임마누엘이며 신인(神人 God-man)이신 분의 인격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의 군왕들과 구인들과 더불어 영화롭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모두 아시며 그에게 좋으신 것을 택할 수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합치더라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저 세상의 영광을 택하셨다. 그는 사탄이 그에게 "이 세상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영광을 제공하려 하였을 때" 그것을 경멸하였다. 오히려 그는 저 세상의 영광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우리도 이 마음을 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여호와여 이 세상의 영광은 당신이 주고자 하시는 자들에게 주소서. 그러나 장차 온 세상에서 내가 찾이해야 할 몫의 영광은 내게 주소서. 내가 인간들에게 멸시를 당하오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여 아버지의 영화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둘째, 그가 무엇을 근거로 간구하셨는가 본문에서 살펴 보자. 그것은 "내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생각하여 "나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신다.
a. 그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으니 그를 영화롭게 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공평성과 정당성을 띤 주장이다. 예수께서 13장32절에서 옳게 보신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하나님이 주님을 영광되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높이움을 받은 때에 있을 온갖 영광을 바르게 평가하셨다. 이러한 무한한 가치를 볼 수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서슴없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입은 치욕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영광을 입으셨다면 아들도 거시안적 입장에서 볼 때 그가 받으셨던 치욕으로 인하여 그의 영광에 손상을 입을 수 없으시리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b. 위의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약에 의한 것이었다. 만일 아들이 "자기를 퇴를 위한 제물로 드리신다면" 그가 강한 자와 전리품을 나누고"(사 53:10, 12) "나라가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이 계약되어 있었다. 그는 고통 가운데서도 이 사실을 볼 눈이 있었고 그러므로 여기에 자신을 의지하였다. "그가 십자가를 견디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높임을 받으신 상태에 지금 그는 있으시면서도 아직도 그의 높임이 완성되기를 기다리신다. 그가 이렇게 바라실 수 있는 것은 그가 그의 사업을 이루셨기 때문이다(히 10:13).
c. 위의 사실은 아버지께서 그가 이루신 일을 기꺼이 받으셨고 시인하셨다는 가장 뛰어난 증거였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심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만족하셨음을 알게 되었고, 또 만족을 느낀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기꺼이 받으셨다는 참된 증거라 하겠다.
d. 우리는 위의 사실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신 일을 끝까지 해내는 자들만이 그들이 저 세상에 이르게 되면 아버지와 함께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영광을 바로 본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였다.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은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영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 주어진다. '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1)(요한복음 17:6-10)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 후 그리스도는 다음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본문에서 그는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시지는 않았으나 그들 하나 하나의 이름까지 그는 아시고 계셨다(시공을 초월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의미하고 있음:역자 주). 이제 본문의 내용을 고찰해 보자.
Ⅰ. 그가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은 것(9절). 그는 본문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으셨던 무리들에게 속한 세상이 있음을 기억하자.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류가 거하는 세계는 아니었다(21절에 보면 그는 바로 인류의 거처로써의 세계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르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말이로소이다" 하시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유대인들과 구별한 이방인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선택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무리의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작 마당에 있는 아직 바람에 불리지 않은 곡식 더미로 간주하사 하나님은 이를 사랑하시며 이 세상에도 축복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속한 자들을 완전히 아시며"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특별히 살피시고 그들을 추려내신다. 그 다음 남은 것, 곧 제외되고 무가치한 쭉정이 더미를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으시며 또 이들을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니다. 그는 이들을 포기하신다. "이들은 바람에 불려 가버릴 것들이다." 이들을 본문에서 세상이라 칭하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세상의 영에 의하여 지배를 받으며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몫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기도하시지 않는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용서하시라는 과원지기의 청이 있듯이 그들 대신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그가 중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가 없을 때 그는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는다. 그가 본문의 기도에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축복에 대한 분깃이나 기업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였듯이 내가 세상을 저주하노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위하여 내가 기도하지 않노라고만 하신다. 내가 그들을 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시겠다고 하신다. 그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위대한 대제사장의 마음판에도 제외된 것이다. 어린 양에게 인식되지 못한 자들은 예레미야 7장 16절에서 예언자가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거절한 사람들의 경우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것이다. 누가 선택 받았는지 또 제외 당하였는지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다"(딤전 2:1, 4). 생명이 있는 한 소방도 있고 기도할 여지는 남아 있는 것이다(삼상 12:23 참조).
Ⅱ. 그가 위하여 기도한 사람들. 그는 천사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1.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들은 우선적으로 그와 함께 중생에 들어간 제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의 범위가 더 넓게 적용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같은 주님 아래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6, 8절).
2. 그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20절). 이들은 현재 그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미 전에 그의 오심을 믿고 기다리다 죽은 사람들 즉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모두에게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Ⅲ. 그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가 그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추천할 수 있었던 근거. 이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겠다.
1. 그가 그들에 관하여 맡으신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다"(6절) 하였고 9절에 다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러하다. "아버지여 내가 지금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은 당신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이요, 내가 그들을 위해 간구한 것은 당신이 그들을 내게 맡기신 책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들은 먼저 당시의 제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제자들은 주님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에게 교육받도록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생도들이며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다음에는 그 대신 활약을 할 대행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배울 자들로 그에게 주어졌고 그의 생애와 기적의 증인이 되며 그의 은혜와 사랑의 증거자로 주어진 자들이었다. 또 이들은 그의 복음의 반포자로 그의 교회의 설립자로 되기 위하여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숨은 결단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실상 그들이 그를 따른 것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사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한 선물로 주신 사도직과 목사직은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선물이었던 것이다. 율법 시대에 레위 제사직이 먼저 레위 자손이 아닌 아론에게 주어졌듯이(민 3:9)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대제사장이신) 주님에게는 처음에 사도직, 다음에는 모든 시대에 존재하게 된 목사직을 주셨던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직책을 대신하며 모든 회중을 책임지고 성막(곧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었다(엡 4:8; 시 68:18 참조).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선물을 받으셨다. 즉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은 복음 사역을 명예롭게 해 주며 경시당해 온 복음 사역직을 권위있게 하여 준다. 또한 이 사실은 복음 사역자들이 주님이 그의 직책을 완수하셨듯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드릴 강력한 책임을 부여한다.
(2)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확대 적용된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 이르기를 그들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6:37, 39). 그는 자주 그가 구원한 자들은 그의 몫으로 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그의 보호를 받도록 의탁되어졌고 그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또한 그들에 관하여 그는 계명을 받으셨다. 그는 본문에서 다음 사실을 보여 주신다.
[1]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주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주시지 않았다. 선택된 자 곧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은 세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것이다.
첫째, 그들은 피조물이요 그들의 생명과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영광된 그릇들로 주어지기 전 그들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덩이와 같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로움에 의해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져 구분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과 삶이 그에게 저당당하고 말았다. 구원하라고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비를 입어 건짐을 받기 전에 그들은 정의에 의해 희생당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또한 그들이 구세주에게 의탁되기 전에 형리에게 넘겨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셋째,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과 삶은 그를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이양된 것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다시 주장하신다. 즉 "당신이 내게 주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다 당신에게 속한 것이니이다"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중재자로서의 그의 직능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사람들만 뜻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그들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자연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속하여 있으며 그들의 안녕은 은혜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속하여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여 그들 모두가 당신을 섬기도록 그들을 당신에게로 인도하나이다."
[2] 아버지께서는 주실 권리를 가지고 있으시므로 그들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자에게 맡기듯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사에게 맡기듯이,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교사에게 맡기듯이, "당신이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들에게 그의 몫을 넘겨주셨다. 고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였다(히 2:13).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넘져졌다.
첫째, 은총에 의하여 선택된 자가 파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 명의 어린 소자 하나일지라도 멸망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을 맡길 수 있는 분은 충분한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있는 분이어야 했다. 즉 선택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업이 열매 없는 결과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씨앗으로 그에게 주어졌다. 그는 씨앗 곧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결과를 보고 만족히 여기셨다"(사 53:10, 11). 그 씨앗은 그가 "헛되이 또 무익하게 함을 다하였고 피를 흘린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사 49:4).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주여 내게 주신 은총을 거두지 마시고 내게 주신 위로로 늘 머물게 하소서. 왜냐하면 이 은총과 위로는 당신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간구해야 한다.
2. 그가 그들을 취하여 가르치시려는 관심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였고, 또(8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다"고 하셨다. 좀 더 상세하게 고찰하자.
(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숨은 위대한 계획.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타나내고 그를 선포하려는 것이었다(1:18). 또한 무지한 자를 깨우치며 하나님에 관하여 암매(闇昧)한 오판자들을 교정해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더욱 사랑을 받으시며 숭배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 이 사업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실한 수행.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의 충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나타난다.
[1] 그의 교훈의 진실성에서. 그가 전한 교훈은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훈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구속 사건을 인간의 삶에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도 주셨다. 이 말씀은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메시지를 전함에 있어서 교역자들은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2] 그의 가르침의 경향에서. 그의 교훈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행위와 말씀을 통하여 그의 아버지를 높이는 것을 목적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인간들의 영혼에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아버지를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나 다만 아들이 그에게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마 11:27)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그만이 아버지를 사귀어 아시며 따라서 그만이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만이 인간들의 영혼에 접하실 수 있고 그러기에 그만이 인간들의 마음을 열어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모세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신 32:2)교역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수는 있으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신을 나타내신다. 교역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어 음식이나 보화처럼 우리 속에 간직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조만간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낼 것이요, 그들에게 그의 말씀을 주사 그들의 새로운 출생의 씨앗이 되게 하시며 그들의 영역 생활을 지탱시키시며 영원한 축복의 예표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3. 그들에 대한 그의 보살핌의 좋은 결과와 또한 그가 그들과 함께 맛본 고통을 들어 호소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6절)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하였고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절) 하였고 "저희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았나이다"(8절)라고 하셨다.
또한 제자들은 말씀을 받아 간직하고 그 말씀을 수긍하였으며 거기에 만족하였고 "내가 아버지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셨다. 이제 그 내용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에게 주어진 자"들 가운데서 이루어논 성과.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점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1] "땅이 그 씨앗을 받아들이고 흙이 비를 흡수하듯이 그들이 내가 전한 말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경청하였고 그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깨달았으며 또 그 말씀에 감화를 받았다. 그들은 그 말씀에서 받은 기억을 깊이 간직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말씀은 "인상 깊이 남아 있을 말씀"이었다.
[2]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고 계속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대로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복종하는 자만이 간직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스스로 말씀의 준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임된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하여 말씀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각처에 전달되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3] "저희는 그 말씀을 이해하였고 무슨 이유 때문에 그들이 그 말씀을 받아 간직해야 하는지를 잘 깨달았습니다. 또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가 와서 이루려고 한 거룩한 신앙의 참 창시자이심을 깨달았으며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임무와 권능, 성령의 모든 은사, 모든 성령의 은사와 위로, 하나님이 한 량 없이 그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그의 지혜에 의하여 고안되었으며 그의 뜻에 의하여 약속되었고 그의 은총에 의하여 설계된 것이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시므로 자신이 영광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함에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 그의 존재의 모든 것과 그가 지니신 모든 것, 그가 말씀했고 행하셨던 모든 것, 또 지금 그가 행하시며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만족을 주는 사실임을 기억하자(고전 1:30).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재하심에 우리의 영혼을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에서 비롯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심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만족해야 할 것이요, 또 그가 베푸시는 은혜라면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성별될 수 있는 것이다.
[4] 그들은 그 말씀에 대하여 충성의 서명을 하였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저희가 참으로 알기 때문이었다"(8절).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들이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말씀이 진리에 속한 줄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은 지식적인 면으로는 무식하고 결함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그들을 잘 아시고 계시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말씀을 잘 납득시키셨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도와 주시면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도 그 속성을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의 존재를 확실히 알 수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면 비록 보지는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확실히 또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믿음의 내용.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으며 그 인격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직능으로는 영원하신 왕의 대사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도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동등한 권위에서 출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의 규례로 여겨 복종해야 하며 그가 하신 모든 약속은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보시고 계시는가를 살펴 보자.
[1]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좋은 성과를 끼치게 된 사실을 기쁨으로 여기시고 말씀하신다. 그의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그를 수 없이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변함없는 그에 대한 추종과 점진적인 향상 및 결국 이루어 놓은 위대한 성취가 그의 기쁨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도들이 가르침에 숙달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스승이시다. 그는 그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높이 평가하셨고 그들의 약점을 너그러이 용납하셨다. 우리는 그가 우리로 만족스러운 성장이 있게 하시며 그도 그 성장의 결과를 대단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까닭에 그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며 서로 우애를 가지도록 가르치시는 것이다.
[2] 그는 제자들에게 좋은 성과를 끼친 사실을 들어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간청하신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을 아버지에게 드렸다는 것을 들어 간청한다. 은혜를 받아 거기에 부응하는 개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더 큰 은혜를 간청하는데 좋은 이유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가진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라"는 것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그를 믿는 자들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추천하게 하되 그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의뢰하도록 간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4. 그는 그들에 대해 아버지 자신의 관심에 호소한다(9절). 그러므로 본문에서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는 것은 저희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쌍방의 공동 관심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것이 나의 것이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람들 간에 흔히 있듯이) 내 것 네 것((meum and tuum) 때문에 분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영원 전에 그들 사이에서 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것 또한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1)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간청하신다. 그 이유를 그는 "그들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선택된 자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 것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선택된 자들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와 계약 관계를 맺은 것으로 간주되어 그들은 아버지의 소유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그에게 드리셨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들을 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계 5:9, 10).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려진 처음 익은 열매"인 것이다(계 14:4).
[2]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고백하는 것은 간구의 좋은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본문에서 "저희는 당신의 간구의 좋은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본문에서 "저희는 당신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간구하신다. 우리도 자신을 위한 기도에 이 방법을 적용하자. 그리하여 "나는 당신의 것이니 나를 구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자. 그리고(출 32:11 에서 모세가 기도한 것같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음과 같이 기도하자.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사람인데 그들을 그대로 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악마와 세상에게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당신의 이익을 위하여서도 그들이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은 당신께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당신의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간구할 수 있었던 근거. 그것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1] 그들은 본질상(in essence) 한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고 말함이 옳다. 그러나 그 어떤 피조물도 "아버지의 것이 다 내 석이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본질상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권세와 영광이 그와 같으신 분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2] 그들은 이익 관계에 있어서 공통되신다. 즉 두 분 사이에 소유의 구분이 있거나 이해의 대립이 없으시다.
첫째, 창조자로서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아들에게도 소유할 권한이 주어졌으므로 아들은 하시는 사업에 편리한 대로 쓰고 처분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마 11:27)고 기록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광범위하여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예외의 것이 없다.
둘째, 구속자로서 아들이 이루신 것은 아버지를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을 곧 아버지에게 드릴 것이다. 아들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이익은 아버지의 찬양을 위하여 작정된 것이며 또 아들의 사업의 일관된 관심은 아버지의 영광을 돌리는데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데 자신을 드리지 않는 어떠한 것도 자기 것으로 삼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질적 신앙의 지시와 법도에 저촉되는 어떠한 것도 기독교 신앙 속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한편 제한된 의미에 있어서 "아버지의 것은 다 내 것이다"고 참된 신자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계약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이며 그의 존재의 모든 것 또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면 그의 가진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역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다 "주여 내 것은 다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무제약적으로 말해야 한다.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고 그를 섬기는 일에 써야 할 것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가호와 축복 속에 안심하고 맡겨 그의 쓰심에 합당하게 쓰여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내 가진 것을 돌보소서. 왜냐하면 내 것이 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5. 그는 그들로 인하여 얻은 자신의 유익을 들어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dedo,xasmai - 즉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하셨다.
(1) 이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아 왔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며 누린 작은 영예가 있다면 그것은 제자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를 따랐고 또 그에게 복종하였으며 또 그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므로 그는 영광을 받아 왔었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중제(위하여 기도해 주심)의 은총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내가 하늘로 올라가면 그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내 이름을 세상에 증거할 것입니다"라고 하신다. 사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였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였다"(16:14). 그리하여 본문에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 그러므로 "나도 저희를 위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라고 하신다.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그리스도가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교회에 대해서이시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는 휘장 안에 거하시며 마음속에 간직하신다.
[2]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아버지께 의탁합니다. 그들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데 수고하였고 이 까닭에 나를 영화롭게 한 저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아들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 자들을 겸허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의 특별하신 가호에 맡기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2)(요한복음 17:11-16)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성을 띈 간구로 그의 제자들을 보살펴 줄 것을 아버지께 의뢰하신 후 그들을 위하여 특별한 간청을 드린다. 먼저 그는 그들이 하늘에서 있을 영적인 축복을 받게 해달라고 하신다. 그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위대하게 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지는 않았다. 또 그들이 재산을 모으고 명예가 높게 되기를 기도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그들을 죄에서 보호해 주실 것과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게 해 주시며 안전하게 하늘나라에 이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영혼의 번영이 최대의 번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의 영혼을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시고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주고자 해서였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먼저 영혼을 위하여 구하라고 가르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이 처한 현재의 상태와 입장, 그들이 당했던 여러 가지 위험과 사건들을 생각할 때 이러한 축복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항상 적절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아버지에게 우리의 사정을 중재해 주시는 분은 우리의 소원과 고뇌, 위험과 어려움의 상세한 내용까지도 아신다. 그리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어떻게 중재해야 할 것도 아신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자신은 위기를 몰랐지만 그는 아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눅 22:32)고 하셨다. 또한 그는 간구하심에 있어서 관대하시고 넉넉하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앞에서 순서에 따라 간구를 하신다. 또 끊임 없이 우리를 중재하시며 우리에게 열심히 끈덕지게 기도할 것과 기도에 인색하지 말 것과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것을 가르치신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결코 당신을 보내드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야곱이 기도한 것처럼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간구한 첫 번째 사실은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제자들 모두를 아버지의 보호 아래 의탁한다는 말이었다. 보호해 달라는 말씀은 위험을 전제로 한 말씀이요, 그들의 위험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그는 간구하신다.
Ⅰ. 예수께서 간구하신 내용.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저희를 세상에서 보전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놓여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1.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놓여나기를 기도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기를 위함이 아니라" 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그들이 속히 죽어서 세상을 떠나게 해 줄 것을 기도하지 않습니다"란 뜻이다. 세상이 그들에게 괴로움을 끼친다면 그들을 보전하는 가장 안전한 길은 서둘러서 그들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보내 거기서 훌륭한 대접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을 위하여 불 말과 불 병거를 보내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욥이나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이들도 괴로운 일이 발생하였을 때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다.
[1] 그가 오신 것은 사람들로 견딜 수 없게 하고 결국은 죽음까지 결단하게 하는 사나운 열기와 고난을 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정복하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달아나지 않는 것이 그의 뜻이신 것이다.
[2] 그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일을 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행 22:22) 그러기에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히 11:38) 그들을 살려두는데 인색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을 동정하여 이곳에서 빛들 곧 그의 제자들을 옮겨 가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계속 세상에 두셨는데 이는 이 세상에 "그들이 전한 말씀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을"위해서였다. 주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은 아직 그들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들은 각각 순교해야 할 순서가 섭리에 의하여 정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 자기에게 주어진 증거를 완료하기까지는 데려감을 당치 아니하였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훌륭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공스럽고 낙담시키는 일이다(사 57:1).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그들이 소명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즉시 그들을 하늘로 보내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을 얼마 동안 세상에 더 두시면서 이 지상에서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늘에 합당한 자로의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 마음대로 죽을 수 없으므로 즉 하나님이 살라고 하셨기에 사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2) "나는 그들이 이 세상의 고통에서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그 고통을 모면하고 이 세상의 수고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동요없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평안하고 안전한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바라는 보전은 그러한 유의 보전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Non ut omni molestia liberati otium et delicias colant, sed ut inter media pericula salvi tamen maneant Dei auxilio - 즉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들이 사치스러운 안일을 누리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그들이 위험에 부딪첬을 때 보호함을 받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즉 그들이 이 세상과의 모든 갈등에서 보호하심을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 의하여 정복당하지 말기를 바라신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원하였던 것처럼 그들이 백성을 떠나 멀리 가버리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고(렘 9:2) 에스겔과 같이 "악한 자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그들의 얼굴을 담대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겔 3:8). 그리스도를 위한 군사의 명예는 수도 생활의 서원을 하고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또한 다락방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보다 성 안에서 그를 섬기는 것이 더욱 그리스도를 명예롭게 해드리는 것이다.
2. 그들이 세상에서 놓여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이 세상에 있는 부패에서 그들을 보전함으로 가능하였다. 그는 바로 그들이 이렇게 보전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11, 15절). 본문의 예수님의 간구는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거룩하신 아버지여 당신이 내게 주신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하신 간구가 그 하나이다.
[1]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을 떠나시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나신다고 그들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내버림을 당한 것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하셨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듣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들의 아버지이신 분의 보호 아래 그들을 의탁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제자들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탁하셨다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사람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에게 의탁하신 자들을 보호해 주시기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에 힘입어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영혼의 보전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것이다"(벧전 4:19; 딤후 1:12).
첫째, 그는 본문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보호에 의탁하신다. 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의 적의 때문에 패배당하지 않게 되기를 의탁하신다. 다른 말로 그들과 그들이 관여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하신 가호를 받게 되기를 간구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그들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 주소서.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그들이 직면하는 곤경에 의하여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소서. 세상에서 그들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하시며 파산당하지 말게 하소서"란 뜻의 간구이다. 바로 이 기도에 힘입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복음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놀라우리만큼 보전되어 온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의 교회와 사역자들을 지켜 주시고 유지케 하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둘째,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훈도 아래 의탁하신다. 즉 그들이 그들의 의무에서 스스로 떠나거나 마음이 변하여 곁길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 의탁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그들이 고결성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고 제자로의 사명을 다하게 하시며 그들의 의무에서 떠나지 않게 지켜 주소서"란 뜻의 말씀이다. 은혜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은혜로운 보호를 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하다(10:28, 29; 벧전 1:5 참조).
[2]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하여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므로 호소에 활력을 부여한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칭한다. 우리가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의탁할 때 우리는 다음 사실로 인하여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a.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의지하므로 우리는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거룩하심 때문에 그에게 나아오는 거룩한 자들은 보호해 주시겠다고 그가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맹세하실 때 "그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신다"(시 89:35). 만일 그가 거룩한 하나님이시요 죄를 미워하신다면 거룩한 자들을 그의 것으로 삼으실 것이며 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죄를 최대의 악으로 미워하고 싫어한다.
b. 그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므로 간구할 용기를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자기의 자녀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보존하실 것이다. 그밖에 누가 이런 역할을 담당해 줄 수 있겠는가?
둘째, 그는 제자들을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것은 그가 또한 보호해 주시리라고 안심해도 좋다. 이 말씀의 넣은 "당신이 내게 주신 은혜와 위로로 내게 주신 자녀들과 또 내가 받은 사명을 보전해 주소서"인 것이다.
(2) "당신 자신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라고 간구하신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1]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말씀이다. 그들을 보전해 주심으로 나의 이름과 영예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름과 영예도 보전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변심하거나 주저 앉아 버리면 나나 당신의 이름과 영예 모두가 이로 인하여 수모를 당할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간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 자신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위하여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하기를 위안으로 삼았다.
[2] 그들을 당신의 이름 안에 보호해 달라고 하신다. 원문대로 하면 evn tw/| ovno,mati, 즉 저희를 당신의 이름을 알고 두려워하는 일에 늘 거하게 하시며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당신의 이름을 고백하고 섬기는 일에 그들이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의 이익을 그들로 추구하게 하시며 그들로 당신의 이름에 신실하게 하소서. 그들로 당신의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며 당신의 율례와 계명의 법도 아래 거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3] 그들로 당신의 이름에 의하여 또 그 이름을 통하여 보전되게 하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당신 자신의 능력에 의하여 또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보전하시며 그들을 당신 자신처럼 여기사 보존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시며 그들로 당신의 즉시적인 보호를 받게 하소서. 당신이 스스로 약속하신 보전수단에 의하여 그들을 지키시며 그 이름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소서. 말씀과 율례로 그들을 지키시고 당신의 이름이야말로 저들의 강한 성이 되게 하시며 저들의 장막과 거처가 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3) 그들을 "악으로부터" 또는 악에 물들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는 격려가 되고 있다. 이 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저희를 악한 자 곧 악마와 그의 모든 도구로부터 보전해 주소서. 또 악한 자와 그의 모든 자녀로부터 그리고 유혹자인 사탄에게서 저희를 보호해 주시어서 저희로 휩쓸려 떠나가게 마시며 그들의 믿음으로 낙심케 하지 마소서. 파멸자인 그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들로 절망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뜻이다.
[2] "악한 것 곧 죄로부터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죄와 유사한 모든 것에서 또는 죄로 유혹하는 모든 것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저희로 악에서 떠나도록 보전하소서"(고후 13:7)란 뜻이다. 죄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면하기를 바라야 할 악이다.
[3] "이 세상의 악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그리고 이 세상의 고난에서 저희를 보전하소서. 그리하여 세상에서 찔림을 당하거나 악의에 의하여 상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저희로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극복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아무리 많은 고난이 닥쳐도 그로 인하여 악을 저지르지 않게 하시며 어떤 해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말씀이다.
Ⅱ. 그가 그들의 보호를 하나님께 강력히 호소하신 데는 다음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1. 그는 지금까지 그가 저희를 보전해 왔음을 한 이유를 드신다(12절). "내가 이 세상에서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에 대한 참된 믿음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저희가 거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동반자들로서 내게 주신 자들은 내가 보전하였으므로 저희는 모두 안전하였고 그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거나 또는 변심하거나 파멸에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있다면 "지옥이 예정된 아들"(유다를 지칭함) 뿐이었습니다. "그만이 탈락되었고 이것은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 맡으신 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실한 수행. 그러므로 본문에 "그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저희를 보전하였다"고 하였다. 그들에 대한 그의 보전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 안에 보전하였고 그들이 어떤 위험스러운 잘못이나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셨다. 또한 바다와 육지를 횡단하며 개종할 자를 찾는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셨다. 그는 저희가 그를 버리지 않도록 하셨고 그들이 그를 위하여 아낌없이 떠났던 보잘 것 없는 것에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키셨다. 그가 저희를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그들에 대한 보호의 눈길을 걷우시지 않았다. 그는 몸은 따로 떨어져 있을망정 마음은 그들과 함께 하였던 것이다. 그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저런 문제에 부딪쳐서 그를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12제자만은 떠나지 않도록 보전하셨다. 그는 저희의 생명을 노리는 박해자의 마수에서 저희를 지키셨고 자신은 잡히시면서도 저희를 보전하시기까지 하셨다(18:9). "그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볼 수 있는 방법 즉 언제나 그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을 교훈으로 또 그들의 보는 앞에서 행한 기적으로 저희를 지켜 주셨다. 그러나 이제 그가 저희를 떠나고 나면 그들은 보다 영적인 방법으로 보전되어야 했다. 감지할 수 있는 위로와 지원은 때로 주어지기도 하고 때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가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고독하게 버림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직접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문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참된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도들을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전하신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기를 보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는 저희가 사는데 충분하지는 못한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보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저희는 그의 보시기에 귀중한 존재요 영예로운 존재로 곧 그의 재화요 보물이다.
[3] 그들에 대한 구원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전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벧전 1:5). 악한 자는 심판날을 위하여 남겨져 있는 것처럼 의인은 축복의 날을 위하여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저희는 주 예수님께 할당된 몫이었다. 그의 몫으로써 그는 저희를 보전하셨고 선한 목자가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몸을 버리듯이 그렇게 자신을 드리셨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가지신 확신. 그러므로 본문에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틀림 없이 보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 자신이 스스로 버림당한 것은 아닌지 또는 거의 버림받는 상태에 있는지 의심을 품을 때가 있을지는 몰라도(어떤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나 하나도 결코 잃지 않으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6:39). 이 사실은 마지막 날 그들이 다 한자리에 모일 때 그들이 다 모였는데도 그 누구도 부족함이 없게 됨으로 분명해질 것이다.
(3) 유다에게는 낙인이 찍힌다. 그가 보호하려 하였던 사람들 중에서 유다는 제외되었다. 그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들 가운데 속해 있었으나 그들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유다에 대해서 이미 내 놓은 자식으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승과 스승을 따르는 동료 제자들의 사회를 포기하고 자신을 악마의 인도함에 맡기어 얼마 후에는 가야 할 곳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멸망당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과 그의 당한 파멸이 그의 스승이나 동료들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멸망의 자식"이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보전을 그리스도에게 의탁한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가 멸망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고꾸라져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는 가인처럼 "파괴자의 아들"이었고 악한 자의 소산이었다. 다른 말씀에도 주께서 멸하실 가장 큰 원수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불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살후 2:3).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멸망의 아들로 판명되었다는 것은 경악할 만한 사실이다. 이로 보건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아니하면 교회에서는 지위나 명성, 은혜를 받는데 남달리 누리는 특권이나 기회 또는 인간의 신앙 고백이나 외적인 선행이 파멸을 면하는데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동안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지난다. 그러나 결국은 멸망의 아들임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자들은 유다처럼 돈 전대를 사랑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어진 자들에게서 유다를 구별하였다는 사실은(본문의 ei; mh.란 접속사는 예외적 용법이 아니라 반의적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진리와 참 신앙은 그것에 대하여 거짓을 행하는 자들의 배신 때문에 손실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일 2:19).
[2] 위의 결과는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다의 범죄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예견된 것이었고 그의 말씀 속에 예언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예언된 후 그 논리적 결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시 41:9; 69:25; 109:8 참조). 실상 우리가 사도 중 한 사람이 변절할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 알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이 일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2. 그는 지금 그들을 떠나야만 하며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하셨던 방식대로 더 이상 그들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들어 간구하신다(11절). 즉 이런 말씀이다. "이제는 당신이 저희를 보전해 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저희와 함께 있는 동안 그들에게 쏟았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전하사 하나님과 내가 하나인 것같이 저희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21절에서도 이러한 내용의 간구를 고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나 살펴 보자.
(1)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세상에 대한 작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는 승리감과 환희에 도취하여 작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그는 이러한 기쁨으로 그가 떠나야 할 세상과 또 그가 가실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의 생각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합니다. 나는 이제 이 괴로움 많은 세상을 작별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미 이 세상의 괴로움을 충분히 맛보았고 이제는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할 기쁨의 시간이 가까왔읍니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것만이 남은 일입니다." 저 세상에 그들의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것을 완료하고 저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지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된다면 거룩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한다. 이 어둡고 속임수로 가득 찬 세상, 가련하도록 공허하며 불결한 유혹으로 가득 찬 세상에 말이다. 가시덤불 같은 이 세상 때문에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겠고 그 함정과 그물의 위협도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람이 거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도 않겠고 폭풍이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지도 않으리라. 이제 나는 더 세상에 있지 아니하노라.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작별하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노라"라고 말이다.
[2] 또한 그는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임종을 앞둔 그리스도가 맛보신 위로의 절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은 임종을 맞이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머지 절반의 보다 좋은 위로는 아버지에게로 가서 그의 곁에 앉아 영원하고 다함이 없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비록 그것이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마치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종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내가 택하고 섬겼으며 내 영혼이 그토록 갈구하던 당신에게로 갑니다. 빛과 생명의 근원이시며 축복과 기쁨의 왕관이며 중심이신 당신에게 갑니다. 이제 나의 그리움이 충족될 것이며 나의 소망이 성취되며 나의 행복이 완성될 것이외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2) 그는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그가 뒤에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저희는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한 곳인지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이 적은 무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야만 한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하옵소서. 저희는 내가 함께 있기를 원하오니 내 대신 당신이 저희와 함께 계소서. 앞으로 나는 그들을 이제껏 감당하였던 것보다 더욱 세상으로 깊숙이 보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까지 보전되어 왔던 것보다 더욱 보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깊숙이 뛰어들어가 이 격동의 바다 속에서 주의 사역을 해야 하는데 만일 당신이 저희를 보전하시지 않으면 저희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아버지에게 가셔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가의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가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계속하여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다. 그는 그의 가슴판 곧 그의 마음에 그들이 이름을 간직하시고 십자가에서 그의 손의 박혀진 못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그들의 이름을 새기시었다. 그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해서 그도 그들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고 그들이 그의 마음에서 사라진 것은 더욱 아니었다. 우리가 만약 이 거친 세파를 다 거쳐 목적지에 거의 이르렀다고 하면 이제야 이 세파에 뛰어드는 자들을 동정해야 하며 우리가 세상을 떠난다면 아직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동정해야 한다.
[2]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절대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실 때, 그는 다만 "저희는 세상에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하늘을 목적 삼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예고하는 말씀이다. 이 세상은 그들을 유혹하여 곁길로 가게 하며 또는 악의를 가지고 그들을 증오하며 핍박하기도 한다.
3. 그는 그들이 만족한 심정으로 스스로의 안전함을 알게 될 것과 또 자신이 그들의 안전함을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클 것이냐는 점을 들어 아버지에게 간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 "내가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함이니이다"(13절)라고 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욱 크게 기뻐하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눈물과 고통 속에 그들을 떠나시지만 그들의 기쁨은 충만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들의 그의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끝났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그들이 기쁨이 전보다 더욱 완전에 가까워지고 그들이 기쁨으로 더욱 충만하도록 조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본문에서 얻는 교훈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기쁨은 내가 주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며 또는 "내가 바로 기쁨 자체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제일의 기쁨이다. 세상 안에서 맛보는 기쁨은 세상이 지나감에 따라 시들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것이다.
[2] 부지런히 우리의 기쁨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쁨을 건설하는 일은 모든 참된 신자들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그 어떤 부분도 이에 비교할 수 없다(빌 3:1; 4:4).
[3] 완전한 기쁨을 목표로 삼아야겠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기쁨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이 기쁨을 우리 안에 채워야 한다.
(2) 이제까지 그는 제자들을 아버지의 가호와 보호에 엄숙하게 의탁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그가 간구하신 데 대한 증인들로 곁에 두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내가 저희와 이 세상에서 함께 있는 동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그들의 보전을 부탁하는 그의 중재도 그 자체로써는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에게는 더 큰 만족과 위로를 줄 수 있었다. 또한 이로써 그들이 환난 중에도 기뻐하게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미래의 복된 삶을 위하여 위로의 상급을 예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위로를 베푸시며 이러한 위로의 공급은 현재에 그들이 만족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는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최후의 뜻과 유언을 공포하신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남기신 유산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알리시고(많은 유언자들은 이 사항을 말할 때 남겨 주는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보호될 것인가를 알리심으로 그들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신다.
[2]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하신 중재는 그의 안에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데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스도의 중재보다 우리의 두려움과 불신을 가라앉게 하고 우리들에게 큰 위로를 효과 있게 제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뵈옵는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34절에서 이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히 7:25 참조).
4. 그는 또한 그들이 그로 인하여 세상에서 악한 흉계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서 하나님께 간구하신다(14절).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나는 저희에게 세상에 공포해야 할 당신의 말씀을 주었나이다. 또한 저희는 당신의 말씀을 받았고 스스로 믿었으며 세상에 그것을 전파해야 할 책임을 수락하였나이다. 그로 인하여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으니 이는 내가 그리한 것 이상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찾을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세상의 혐오.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 동안은 그들은 세상에 대한 적대 행위를 별로 하지 아니하였다. 그랬음에도 세상은 저희를 미워했다. 그런데 앞으로 그들이 복음을 더 광범위하게 전파하여 세상을 변모시키려 하므로써 세상이 저희를 더 미워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당신이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소서. 그 이유는 저희에게는 많은 원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당신의 사랑을 받게 하시옵소서. 왜냐하면 세상의 증오가 그들을 덮쳐 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 같은 무서운 도전의 와중에서 당신의 가호로써 방패를 삼게 하소서." 약한 자의 편이 되시며 무력한 자를 돕는 것을 하나님은 명예로 여기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기도하신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사람들이 저희를 삼키려 하나이다."
(2)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는 이유. 이 미움 때문에 예수님은 더욱 강력하게 보호를 간구하신다.
[1] 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 거의 다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고 그것을 고백하고 설교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였는데도 말이다.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과 그의 아름다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세상의 악의와 비방을 각오해야만 한다. 세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미워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고 그것에서 그들을 분리해 놓고 사람들에게 세상의 악의와 비방을 각오해야만 한다. 세상은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미워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고 그것에서 그들을 분리해 놓고 사람들에게 세상과 짝이 되어 살지 말라고 가르치며 그러므로 세상을 정죄하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하옵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공격을 당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요 고통을 받는 것도 당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기자도 "주를 찾으므로 내가 욕을 당케 마옵소서"라고 간구한다(시 69:7).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간직하는 사람들은 시험이 닥쳤을 때 특별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사실기억하자(계 3:10). 바로 이러한 보호 때문에 순교자들이 주어지는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는 것이다.
[2] 또 다른 이유는 보다 특수한 것이다. 즉 "저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은 영향을 미쳐 저희로 세상의 부를 버리고 또한 세상의 악에서 돌아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에게 원한을 품는 것이다.
5. 그는 저희가 거룩한 동기에 의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와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아버지에게 간구한다(16절).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여 저희를 보전해 주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나의 영과 마음에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탁해야 한다.
(1) 신앙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대로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2) 신앙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이익에 얽매여서는 안 되고 또 세상을 섬기는 일에 자기를 드려서도 안 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코 세상에 속해 있으신 적이 없으셨다. 이제 그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르신 것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은 요점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위치. 그는 결코 세상에 대한 애호가가 아니셨고 세상의 군왕이나 귀인도 아니셨다. 그에게는 세상의 재물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세상적인 권세도 없으셨다. 그는 세상의 판관도 재산 분배자도 아니셨다.
둘째, 그는 거룩한 영.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으셨다. 세상에 속한 왕은 그의 안에서 아무 이익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그에게 무관하였다. 영예조차 그러하였다. 그는 결코 명예를 추구하지 아니하셨다. 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로 인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쾌락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슬픔에 친숙한 분이었기 때문이다(8:23 참조).
[2]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이다. 저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세상의 영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들 앞서 가신 주님이 그러셨던 것 이상으로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
둘째, 세상에서 해방을 얻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을 떠났듯이 말이다.
셋째,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 그들의 의무요 특성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순간은 저 세상과의 대화이며 또 그래야만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관심은 이 세상 일이 아니라 저 세상의 일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약하였고 결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이 세상과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하였음을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저희를 하늘의 보호하심에 의탁하시었다.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3)(요한복음 17:17-19)
그가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신 다음제목은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악으로부터 보전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선하게 해달하고 하신다.
Ⅰ. 본문의 첫째 간구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17절).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뜻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 자체인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아래와 같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별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하심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여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심이 곧 저희를 보전해 주시는 것이니이다"(살전 5:23).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자.
(1) 주님은 저희가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구하셨다.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거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아버지여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이 기도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1] "저희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한 성별의 역사를 더욱 공고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며 그들의 선에 대한 열의를 더욱 강렬하게 하시며 그들의 훌륭한 결단이 변하지 않게 하옵소서"란 뜻이다.
[2] "저희 안에 일어난 선한 사업을 계속 수행하시어 빛이 더욱 강렬하게 비치도록 하옵소서"란 뜻이다.
[3] "이 사업을 완전케 하시며 완전한 거룩으로 관씌우소서. 저희를 최후까지 거룩하게 하옵소서"란 뜻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이것은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는 모두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이유는 더러운 것을 그대로 그의 것 삼으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이 거룩하게 되지 아니하면 그들을 그의 사업에 참여시킬 수도 없고 그들로 그의 아버지를 뵙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둘째, 은혜로 거룩하게 된 자들은 더욱 성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일지라도 거룩하게 해 주시는 은혜를 위하여 간구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그분이 그 일을 또한 완성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진하지 않는 것은 곧 후퇴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 자는 계속 거룩해져야만 한다. 그는 아직 이루지 못한 자인 것처럼 앞으로 전진하고 위로 솟구쳐야 한다.
셋째, 의롭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고후 5:5).
넷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하는 중재 기도를 하신다는 사실은 거룩케 하는 은혜를 우리가 간구하게 하는 격려가 된다는 사실이다.
(2) 이 은혜가 수여되는 수단.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거룩에 이르는 수단을 제한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1]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고 또 집약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된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결함이 없는 완전한 진리이다.
[2]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가 거룩에 이르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다. 말씀만이 항상 거룩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성령도 거룩하게 하시는 아름다운 역사를 시작하고 수행하심에 있어서 보통 이 말씀을 도구로써 사용하신다. 말씀이야말로 새로운 출생의 씨앗이요(벧전 1:23), 새로운 삶의 양식인 것이다(벧전 2:1, 2).
2. 사역자로서 성별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하심은 다음과 같다.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 자신과 당신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저희를 구별하시고 세상에서 준 저희의 사도 직분을 하늘에서도 인정하옵소서"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선지자들도 거룩함을 입은 자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이러한 소명의 입장에서 볼 때 "저희를 거룩하게 하소서"란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저희에게 직분을 감당할 자격을 부여하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저희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역자로서 필요한 은사를 베푸시사 저희를 신약 시대의 사역자로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2) "저희를 구별하여 사도 직분을 감당하게 하소서(롬 1:1). 나는 저희를 불렀고 저희는 그 부름을 수락하였나이다. 아버지여 당신께서도 저희의 사도직을 아멘으로 인정하옵소서"라는 뜻이다.
(3) "저희를 사도직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옵소서. 당신의 손으로 저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진리에 의하여 또는 그 진리 안에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진리는 외양이나 허상이 아니옵니다. 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를 드림으로 거룩하게 되었듯이 저희를 형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성별하지 마옵시고 참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저희로 당신의 진리 곧 당신의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거룩하게 하옵시며 당신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제사장들을 제단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성별하셨듯이 저희를 성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란 뜻이다(고전 9:13, 14).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아버지에게 중재하시며 오른 손에 별들을 잡으신 아버지의 은총에 저희를 의탁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즉 저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헌신하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에 스스로 먼저 감동되어서 말씀과 가깝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저희로 "우림과 둠밈" 곧 "빛과 성결"을 간직하게 하여 달라고 구해야 한다.
Ⅱ. 제자들을 성별해 주실 것을 간구하시고 그 간구를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은 두 가지 이유를 본문에서 제시하신다.
1. 저희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18절). 그러므로 본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시어서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대사로 삼으셨듯이 나를 저희를 나의 사절로서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그들을 또 불렀습니다"라고 하신다.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창조하신 주님도 그의 사명과 지시는 모든 신앙의 근원이 되시며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고 행하셨으며 저희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시는가를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보냄을 받으셨다.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위로를 받으셨고 또한 우리에게도 주님을 의지하므로 위로가 넘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이 주님의 사명이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기록도(성서) 하늘에서 부여된 것이다.
(2) 그는 그가 제자들에게 부여한 위임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므로 내가 저희를 같은 사명을 위하여 또 같은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보내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가르치시던 같은 말씀을 전하고 같은 증거로써 그 말씀을 확고하게 하며 저희에게 위탁된 그 사명을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위탁할 책임을 부여하여 저희를 보내셨다는 말씀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저희에게는 저희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리셨다(20:21). 이 사실은 제자들로 저희의 사명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음을 영광스럽게 인식하게 하여 준다. 또한 중제자로서의 주님에게 주어진 사명과 화해자로서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사명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저희이게 알려 줌으로 저희의 사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하여 준다. 실상 주님 자신이 "사도로"(히 3:1), "사역자로"(롬 15:8)(한글 개역에는 수종자로 되어 있음), "사자(messenger)로"(말 3:1) 보내심을 받으셨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아들로 보냄을 받으신 데 비해서 그들은 종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뿐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다음의 내용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저희에 대하여 그토록 관심을 가지셨으며 그들의 입장을 늘 심중에 생각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저희에게 어려운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이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보내신 사람들을 지켜 주시며 또 그를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가 우리를 부르신 그 일에 우리가 적절히 적응하게 하시며 우리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2] 어째서 그가 그들을 그의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나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실상 그들의 사명은 주님의 사명을 실행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사명은 그의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줄 선물을 받으셨고(시 68:18)(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역자 주) 또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주셨다(엡 4:8). 그러므로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그가 주신 선물들을 보장하시고 유지시켜 달라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선물들을 그들에게 주셨음을 확증해 달라고 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에 그를 거룩하게 하셨다(10:36). 이제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보냄을 받는 지금 그들로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신다.
2. 그가 그들을 위하여 기울인 노력이 본문의 간구의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19절). 그러므로 그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중재자로서의 사업과 직분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심. 이것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자기를 전적으로 바치셨다. 또한 이제는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몸까지 드리시려는 순간이었다. 즉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이 자기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치시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사장이요 또한 제단의 희생 제물로서 성별하시었다. 그가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던가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또는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당신께 의탁합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아버지께 약속한 바 그를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성별하셨다. 이 사실을 그는 아버지에게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이유로 제시하신다. 왜냐하면 그의 중재 기도는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림으로 응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속죄일에 "오직 자기 피로 성소에 들어가셨고" 휘장 안에서 분향하심과 동시에 희생의 피를 뿌리셨던 것이다(레 16:12, 14).
(2)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호의를 보이심. 그는 그들을 위하여 즉 그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다른 말로 그들이 순교자가 될 수 있기까지 호의를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이러한 의미도 들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몸을 바치도록 내가 나를 희생합니다." 바울도 자기를 드려졌다고 말한다(빌 2:17; 딤후 4:6). 성도들의 죽음 가운데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주 예수의 죽으심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도와 사역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자격을 부여하시고 용납하셨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1] 목회직은 그리스도가 피를 대가로 치루고 사신 것으로 하나님의 만족하심이 이루어 좋은 복된 열매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그리스도의 공로의 대가에 의거한 것이다. 율법 아래서 제사장들은 황소와 염소의 피로 임명을 받았다. 그러나 복음의 사역자들은 예수의 피로써 임명되어진다.
[2] 모든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거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이다. 그 죽으심의 대가를 지불하므로 성령의 선물도 주어진 것이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이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다"(엡 5:25, 26). 목표를 설정하신 그는 또한 방법도 계획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증거하셨고 죽으심으로 진리를 확증하셨으며 이제 그 진리에 의하여 저희는 거룩함을 입은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그 거룩하게 하는 효능과 힘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부터 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읽고 그들이 전리로 거룩하여진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거룩해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기도한 것은 바로 그들이 거룩하여지기를 위해서였다. 즉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기를 내서 거룩하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4)(요한복음 17:20-23)
그들의 순결성을 위하여 기도하신 다음 그는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온 지혜는 첫째는 순결이고 다음은 평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친교라는 것은 그것이 아론의 거룩한 머리 위에 부은 기름이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린 이슬과 같이 고귀하게 이루어질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Ⅰ. 이 기도에 포함되고 있는 대상들(20절)에 대하여 주님은 "지금 나의 제자로 있는 이 사람들 뿐만 아니요"(여기에 포함되는 대상은 11제자와 70명의 제자 그리고 그가 세상에 계셨을 때 그를 따랐던 남녀를 말한다)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입니다. 즉 이후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또는 장차 올 세대를 위하여 저희가 쓴 글을 통하여 나를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이 이 기도로 한 마음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이 기도에 의하여 모두 한결 같은 은혜를 입게 되기를 바랍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다. 본문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자.
1. 여기서 말씀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명상하는 일에 열심히 있으며 그를 믿으며 앞으로 믿을 사마들이란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그를 따를 사람들이 갖출 자격이다. 그리고 이 말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특징도 포함되고 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믿었으나 그러나 그 후 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하고도 믿었던 것이다.
2.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도달하는 길은 "말씀을 통해서"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성서를 기록하도록 명하셨고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하여 세상이 있는 동안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서 말씀 전하는 일이 계속되게 하셨던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를 확실히 그리고 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칭 자유로운척하며 변덕을 부리는 인간의지의 우발성이나 인간성에 깊이 깃든 죄를 모르시고 함부로 기도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잘 아셨다.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그의 결의에 의하여 모든 일이 확고하게 결정된 것을 그는 아셨다. 그는 누가 그에게 주어졌는지 그리고 누가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아 "어린 양의 책에" 등록되었는지 또 누가 의심 없이 그를 믿을지를 아셨다(행 13:48).
4. 예수 그리스도는 뛰어나고 위대한 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가장 천박하고 연약한 신자들을 위해서도 중재 기도를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왕국에서 신망과 영예를 한 몸에 받을 가장 높은 지위에 앉을 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비천한 미물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도 가장 비천한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역사한다. 선한 목자는 가련한 양무리까지 일일이 살피시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명상을 통하여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선택된 소수의 무리들 즉 앞으로 그가 인도해야 할 다른 양들인,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들(시 22:31)까지도 예상하시고 기도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모태에서 형성되기 전에 그는 그들을 아셨으며"(렘 1:5)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에게 "이 일을 옛적부터 고하였고 성사하기 전에 그것을 보이셨던 것이다"(사 48:5).
Ⅱ. 이 기도의 목적(21절). 그것은 "저희가 다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전에도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라고 그는 말씀하셨고 다시 22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심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11절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사역자와 사도로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내용이 일치하기를 바라서 말씀하신 특별한 말씀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의 조화나 첫 번째 복음에 대한 전파자들의 설교 내용의 일치는 이 기도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이 말은 그들이 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뜻을 지니 뿐만 아니라 증거 내용도 하나가 되어야함을 뜻한다. 복음 사역자들의 단합은 복음의 힘이 되며 미덕이 된다. 그러나 21절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 틀림 없다. 이 기도는 그의 것이 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써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즉 "저희가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하나가 되어 온전함을 이루게 하옵소서"란 기도이다(21-23절). 이 기도에는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되고 있다.
1. 그들이 모두 협력하여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기도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모두 하나로 여기시고 저희에게 대헌장을 내리시어 그것에 의하여 저희가 한 교회로 단합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이쪽 하늘 끝과 또 다른 하늘 끝에 이르기까지 서로 헤어져 있으며 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살며 서로 알지 못하고 또 서신의 교환이야 없다고 하더라도 저희로 저희의 같은 머리인 내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11:52; 엡 1:10).
2. 저희 모두가 한 성령에 의하여 생기를 얻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이것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란 기도 속에 포함된 다른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였다(고전 6:17). 우리 모두가 이러한 기도를 잊지 말고 같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자.
3. 저희가 사랑과 자비로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을 품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즉 다음과 같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말씀이다.
(1) 판단이나 느낌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작은 것 하나에 이르기까지 일치되게 해 달하는 뜻은 아니다. 실상 이러한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 다만 하나님에 속한 변역할 수 없는 진리에 있어 이 기도에 힘입어 저희가 모두 일치하게 해 달하는 기도이다. 변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로는 하나님의 가호하심을 받는 것이 목숨보다 중하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죄는 가장 큰 악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가장 좋은 우리의 벗이라는 것, 이 생 후에 저 세상의 생이 있다는 등등의 사실이다.
(2) 좋아할 것과 싫어할 것에 대하여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해 달하는 뜻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모두 같은 신의 속성과 형상을 가진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새 마음을 가지며 그러기에 그것은 한 마음인 것이다.
(3) 저희가 계획과 목적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뜻이다. 저희가 언어가 다르고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같은 법도를 준수하고 있으며 사실상 같은 목적을 위해 기도한다.
(4) 사랑과 열정에 있어서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해달하는 뜻이다. 각각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세상의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같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본문에 서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를 위한 것이었다. 즉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게 될 것과 또 그들이 하늘과 땅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과 친밀히 연합되기를 위한 기도이다(요일 1:3).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모든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가기 이전에 완전한 실현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희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23절;엡 4:13).
Ⅲ. 이 간구가 응해지기 위하여 열거한 이유들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 그것은 세 가지이다.
1.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이 말씀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11, 21-23절).
(1)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성격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며 서로 사랑하심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늘 기쁘시게 해드렸다. 그들은 계획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활동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이 친밀한 하나됨은 "아버지가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란 말씀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적들의 위협을 받으실 때 또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에게서 떨어져나갈 때 이런 고통 중에서 그를 도와달라는 뜻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같이 그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그 안에 거하시었다.
(2)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1]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은 모든 하나 됨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얼마나 열망하시는가를 볼 수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하나이신 것처럼 신자들도 아음과 같은 뜻에서 하나이다.
첫째, 신자들의 연합은 완전하고도 밀접한 연합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하여 또 신의 은총의 능력에 의하여 신의 뜻을 추구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고 있다.
둘째, 신자들의 연합은 거룩한 목적을 위한 성령 안에서의 거룩한 연합이다. 이 연합은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한 정치적 단체로써의 연합은 아니다.
셋째, 신자들의 연합은 완전한 연합이다. 설혹 불완전한 점이 있을지라도 결국은 완전한 연합이 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도 같은 속성과 같은 소유와 완전함을 가지고 계신다. 신자들도 그들이 거룩하여진 이상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하늘의 영광 가운데 은총이 완전히 실현된다면 그들은 서로 정확하게 일치할 것이며 모두 같은 이념을 추구할 것이다.
[2]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도심은 모든 하나 됨의 중심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저희가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달하고 기도하신다. 즉 모두가 한 가지로 만나는 곳이 아버지와 아르의 하나 되신 곳이다. 한 분 하나님이 있고 한 분 중제자가 있으시다. 그리고 이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하나이며 저희 모두가 일치하여 한 분 하나님의 가호하심에 의지하는 것이 축복이며 한 분 중제자의 공로를 그들의 의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목표로 삼고 그리스도를 길(way)로 삼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모는 될지언정 연합은 될 수 없다. 서로 하나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참으로 연합한 모든 사람들은 서로 서로 또한 연합하게 뢰 것이다.
[3]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되심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창조주와 구속주는 그 목적과 계획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그러나 만일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또한 구속자가 신도들을 위하여 은총을 하나님께 받으셨듯이 그들이 서로 공동으로 구속주로부터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창조주와 구속주의 하나 되심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하나님에게 배반한 인류를 하나님께 환원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여 모든 믿는 자로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한 몸을 이루어 저희가 서로 화해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신다(엡 2:15, 16). 이것은 교회 내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연합에 대한 말씀이시다. 나는 본문의 그리스도의 기도가 주로 목적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라고 생각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이루고자 한 목표는 바로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엡 3:6). 그러나 나는 내가 만난 어떤 주석가도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여 믿음을 소유한 이방인들로 믿음이 있는 유대인들과 연합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둘이 합하여 하나의 새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또한 "나는 저희 안에 저희는 내 안에"라는 말씀도 이러한 연합이 교회의 미덕(美德)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비로 교회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첫째, 이 연합은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연합이다. 이것은 "내가 저희 안에"란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신도들의 마음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새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의 생명이요 영혼이시다.
둘째,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통한 신도들의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내 안에"란 말씀의 뜻하는 바이다. 즉 나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이다.
셋째, 이러한 연합의 결과로 신도들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란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빛과 온갖 은혜를 부어 주심의 목표가 저희의 하나됨에 있었다는 사실이다(22절).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연락 수단이요, 연락 책임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 영광을 저희에게 준 것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희가 서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준 은사가 모두 헛 것이 되고 마옵니다." 이 은사는 그러면 누구에게 주어진 은사일까?
(1) 이 은사는 사도들과 첫 번째 교회 설립자들에게 수여된 은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사가 되는 영광, 기적을 행하는 영광, 세상에서 사람을 몰아 한 교회를 이루는 영광 또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세우는 영광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하여 저희를 보낼 때 이 영광의 얼굴을 사도들에게도 수여하였다."
(2) 또는 이 은사는 모든 신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은사라고 볼 수도 있다. 아버지와 계약을 맺고 지내는 영광, 또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품 안에 누으며 그의 우편에 앉도록 예정되어진 영광,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구속주에게 주신 영광이었다. 그리고 이 영광을 구속주는 구속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마 약속하셨다.
[1] 이 영예는 그가 저희에게 주신 것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이 영예를 준비하셨고 그리스도의 약속을 참된 선물로 믿는 믿음에 따라 저희에게 주시고자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영예는 저희에게 주라고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이 영예는 그들을 위하여 보관하라고 그에게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서 그를 임명하신 분에게 성실하셨다.
[3] 그가 저희에게 이 영예를 주신 것은 저희로 하나 되게 하고자 하셔서였다.
첫째,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하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인 관계에 힘입어 모두 하나가 되어야 했다. 성령의 은사,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의 선물인데 아들에 의하여 이 성령의 선물은 모든 신도들에게 주어지며 또 성령은 그들을 하나되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주시는 은사는 여러 가지나 같은 역사를 하기 때문이다(고전 12:4 등).
둘째, 저희를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하는 일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저희가 같은 신조, 같은 계약, 한 성령, 한 성서를 믿고 사용하기로 한 점을 생각할 때 또한 그들이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같은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또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의견의 불일치를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영광은 인간들을 서로 갈라놓는 요인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출세하면 다른 사람은 쇠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세상적인 나라에 대한 꿈에 젖어있는 동안은 그들은 때때로 논쟁을 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영적인 영예는 모든 그리스도의 신복들에게 똑같이 수여되기 때문에 또한 저희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왕이요 제사장들이므로 경쟁할 이유나 반목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주신 영광을 취하면 취할수록 저희는 헛된 영광에 대한 욕망을 버리며 따라서 이러한 일로 왈가왈부할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3. 그는 저희의 하나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게 해달라고 탄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저희의 하나됨이 공익에 기여하게 해달라고 탄원하신다. 이 사실은 본문에서 두 번씩 강조되고 있다(21절). 한 곳에서는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또 다시 "아버지께서 저희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참된 신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 어째서 무슨 이유로 믿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믿는 사람들은 무모한 짓을 하는 것과 같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인 인간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 주신다. 그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에서 물려 받으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진리에 대한 지식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딤전 2:4; 벧후 3:9). 그러므로 세상을 믿게 하며 돌이키는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이시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서 있는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원을 방해할 어떤 행위도 저지르는 것을 삼가야 한다.
(2) 교회가 하나됨으로 맺어질 좋은 결실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교회가 하나됨으로 기독교의 진리성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으며 많은 사람으로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1] 광의에 있어서 교회의 하나됨은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태도를 호전시킬 수 있으며 외부에 있는 자들로 기독교를 좋게 평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복음서의 강령에 의하여 교회가 한 몸으로 규합되면 기독교는 대단히 격상될 것이다. 세상의 자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헤어져 예수를 믿고 전의 그들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변화가 되며, 설교라는 어리석은 방법에 의하여 교회가 융성하고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하여 교회가 보존되며 놀라우리만큼 훌륭하게 교회가 이루어지고 조직되는 것을 세상이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교회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도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야겠오. 하나님이 자네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요"라고 말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자비로 연합하면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이 품위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첫 번 초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사랑이 그런 역사를 불러 일으켰듯이 다른 사람들로 저희와 동참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할 것이다(행 2:42, 43; 4:32, 33).
기독교가 서로 논쟁을 일삼는 대신에 다른 모든 분쟁도 종식시키며 사람들의 분노를 쉬게 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며 사람들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마음과 사랑의 성격을 지니게 하며 예의 바르고 자비로우며 또 그들로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나 사회 생활에 있어서 사회를 보전 발전시키는데 열심히 있게 한다면 이로써 기독교는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호의적인 반응을 얻게 될 것이다.
[2] 협의에 있어서 교회의 하나됨은 사람들에게 다음의 사실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첫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믿을 것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하나됨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신적인 성격을 띠었고 이 교훈으로 인한 신앙을 통하여 서로 다른 역량과 기질과 이해관계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마음을 한 모양으로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요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도 한 분이요 그의 이름도 하나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그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심을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a. 신도들의 특권.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사랑하시던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저희를 몸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는다.
b. 이 특권을 누리려면 저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만일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이 사실에 의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이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뿌려진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변모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존귀한 여김을 받는다는 사실을 세상이 안다면 이 사실은 세상에 좋은 감화를 미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세상이 좋은 사람들의 가치를 알기만 하다면 진주로 담을 싸서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더욱 많이 받게 된다.
그리스도의 중재 기도(5)(요한복음 17:24-26)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신다(24절). 여기에는 사도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는 저희도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드렸을 고찰해 보자.
1. 본문의 기도와 전의 기도와의 관련성. 앞의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이 저희를 보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일치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은사 위에 저희에게 영광으로 관씌워 주시기를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본을 삼아 우리도 먼저 은혜를 위해 다음은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한다(시 84:11). 왜냐하면 이렇게 간구해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태도를 지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 한 경우는 "기초 없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은 경우로 그는 하나님께서 먼저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도 사람들을 영광되게 하실 줄로 아는 자이다. 다른 경우는 "건축을 시작은 하였으나 완성시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같은 경우로 그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는 하고 그들을 영광되게 해 주지는 않는 분으로 아는 자이다.
2. 간구의 방법. 그것은 "아버지여 내가 원하옵나이다"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전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qe,lw - 즉 내가 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만이 쓰실 수 있는 언어 사용법으로 평범한 일반 간구자들에게 격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오직 구할 바에 대하여 마땅한 대가를 치루신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1)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중재의 권한을 나타내 준다. 그의 말씀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권세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드려 거룩한 곳에 들어가셨으며" 그러기에 거기서의 그의 중재는 절대적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는 왕의 입장에서 중재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멜기세덱과 같이)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 곧 왕적인 제사장(kingly priest)이시기 때문이다.
(2) 특별히 여기서 이 말씀은 그의 특별한 권위를 나타내준다. 그는 영생을 부여하는 권세를 가지셨고(2절)., 그리고 그 권세에 의거하여 "아버지여 내가 무엇을 원하옵나이다"라고 하신다. 비록 그가 지금은 "종의 형체"를 입으셨지만 앞으로 그가 영광된 재판장으로 재림하실 때 그의 권세는 가장 놀라웁게 발휘될 것이며 그의 마음에 합당한 자들에게 "너희 축복받을 자들아 나아오라" 하실 것이며 그때 또한 "아버지여 내가 이렇게 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할 것이다.
3. 간구의 내용.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결국은 하늘나라에 와서 그와 함께 거하며 그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우리가 바라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어떠한 상태로 있게 될까? 우리가 누릴 행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살펴 보자. 하늘나라에서는 세 가지가 성취된다.
[1]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죽음을 당하신 후 잠시 머무르셨던 낙원이요, 승천하신 후에는 그의 몸과 영혼이 가신 삼층천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내가 있는 곳"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잠시 있던 곳이란 뜻이고 또 하나는 내가 영원히 거하는 곳이란 뜻이다. 이 세상이란 곳은 우리에게 transitu - 즉 나그네 길에 불과한 것이다. 하늘나라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있을 참 우리의 거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여기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될 것이다.
[2]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그와 함께 거하게 된다. 이것은 무슨 말장난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계신 같은 행복된 장소에 우리도 머문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가 계신 곳이 곧 행복한 장소라는 뜻이다. 이것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인 것이다." 제일 좋은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곳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와 사귀며 교제하는 것이다(빌 1:23).
[3] 우리는 거기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그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여 보자.
첫째, 구속자의 영광이 곧 하늘나라의 광채이다. 그의 영광은 너무 빛나므로 천사들도 그 앞에서 얼굴을 가린 그러한 영광이었다(12:41). 어린 양은 새 예루살렘의 광채이시다(계 21:23). 또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내리시듯이 하늘나라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직 낮은 상태에 머물러 계셨지만 "아버지께서 이 영광을 내게 주셨습니다"라고 확신있게 말씀하셨다. 그 영광은 매우 확실한 것이었고 또 그에게 가까이 이르러 있었다.
둘째, 구속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현재의 복은 하늘나라의 영광을 앙망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앞으로 그의 영광스러우신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욥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6, 27)고 하였다. 그때가 되면 구속받은 자들은 그의 영광된 사업이 성취된 것을 명백히 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은총의 시내가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샘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제야 온전히 깨달을 것이다(그러므로 격언에 Uxor fulget radiis mariti - 즉 남편이 유명해지면 아내도 유명해진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될 것이다.
(2) 우리가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근거.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중재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여 내가 원하옵니다"라고 말씀함으로 우리를 아버지에게 중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하여 우리가 소망을 가졌다는 증거는 우리의 성화이다. 왜냐하면 이런 소망을 가진 자는 스스로를 순결케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순결해지려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이다"(히 10:10).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가 선택하신 자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나누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복도 성취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므로 우리의 구원의 주님도 온전하여지시기 때문이다"(히 2:10).
4. 이러한 요구를 하실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바로 이 사실이 그의 다음과 같은 행위의 이유가 되고 있다.
(1) 그가 이 영광을 자신이 받게 되리라고 믿은 이유가 된다. 그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이 영광을 내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들에게 주어진 중제자로서의 명예와 권세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5:20).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며" 그가 하는 일을 대단히 기뻐하시며 그러기에 "만물을 아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중재자로서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2) 그에게 주어진 자들이 그와 함께 그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것을 바라시는 이유가 된다. 즉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그러기에 내 안에 있는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그들을 위해 요구하는 것을 아버지께서 부정하실 수 없습니다."
Ⅱ. 본 기도의 결론. 이 부분은 제자들을 위한 그의 모든 간구를 강조하려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의 간구 즉 저희를 영화롭게 해달라는 간구를 강조하고자 하신다. 본문에 그가 특별히 주장하고 또 간청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1. 아버지에 관하여. 그는 아버지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들을 말하신다(25절).
(1) 그는 하나님에게 "의로우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붙인다. 앞에서 저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실 때 그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칭하였다. 이제는 저희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시면서 그는 하나님을 "의로우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칭호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약속하셨고 또 아들이 이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한 모든 아름다운 것의 우리에 대한 수여가 보증되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의(義)이다.
(2) 그는 죄악 속에 있는 세상에 대하여 규정하기를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온 천하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거하는 곳은 바로 어두움 속이다. 이러한 무지 때문에 그리스도는 다음의 사실을 제시하신다.
[1] 제자들에게 특별한 은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그들의 사명 때문이고(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세상으로 변모시킬 사명이 주어지고 있다) 또 한 이유는 이 사명을 이루기가 대단히 어려웁다는 이유 때문이다(그들은 빛에 대항하는 자들을 빛으로 인도해야 하며 또 그들을 빛 가운데 살도록 보존해야 했다).
[2] 그들이 앞으로는 더 특별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세상이 가지지 못하였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3) 그는 자기를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찌기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정도로 아버지를 아셨다. 또 그가 무슨 이유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지 또 아버지의 인간 세상에 대한 경륜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의 기도를 하시며 우리가 잘 아는 사람에게 하듯이 믿음으로 아버지에게 나아오신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것이 된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을 간구하신다. 그런데 이 간구를 하시면서 그는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실 다음에 의례 예상하게 되는 "저희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사지 않고 본문의 말씀 즉 "나는 아버지를 알았나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이 내세울 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호에 의탁하기 위해 우리에게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 또 아버지와의 사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관심에서 온 중제하심의 결과요 거기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쓸모 없는 존재이나 그는 가치 있으신 분이시다.
(4) 그는 자기 제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을 아셨나이다"라고 하신다(한글 개역에는 이 부분이 없음). 그러기에
[1] 그들은 이 불신의 세상에서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오시고 그의 은총을 나타내신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고 믿었으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였다. 무지와 불신앙을 고집하는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며 후에는 남들이 차지하지 못하는 영광으로 틀림 없이 관씌움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순박한 믿음을 지닌 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2] 세상과는 구별되었기에 저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명상에 잠기기를 즐겨하였고 또한 그의 아버지와의 친한 사귐을 통해 얻어진 은혜의 동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직접 그리고 완전히 알았나이다. 그리고 저희들은 지금까지는 아버지를 몰랐었고 또 알 만한 능력도 없었사오나 그렇지만 이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았나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또 구속자인 나의 안에서 창조주이신 당신을 알았나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알므로 그들은 그 안에서 아버지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와 사귀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를 인하여 저희를 돌보아 주소서"라고 간구하신 것이다.
2.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26절). 제자들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를 인도하여 아버지를 알게 하였나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이 일을 위하여 매진할 것입니다. 이러한 크고 진지한 뜻을 가진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 그것에 대하여 본문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다"고 기록되었다.
[1] 그리스도는 이 일을 그를 직접 수종하던 제자들을 위하여 행하시었다. 즉 내내 그와 출입을 함께 하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저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과 저희 안에 그에 이름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키는 것을 본분으로 여기셨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과 기적의 취지는 아버지의 영예를 높여드리고 또 아버지의 대한 지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것이었다(1:18).
[2] 이 일을 그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저희에게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가 그를 믿게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을 선포하셨고 또 우리의 이해의 문을 열어 그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시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호 아래 부탁하신 사람들을 그는 먼저 인도하셔서 저희를 아버지와 사귐을 갖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2) 그가 앞으로 저희를 위하여 하시고자 계획하신 일.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앞으로도 그 이름을 알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는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더욱 수준 높은 교훈을 주시고자 마음먹고 계셨다(행 1:3). 그러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저희로 보다 하나님의 일에 깊은 지식을 갖게 하고자 마음 먹고 계셨다. 그리고 그가 마음에 빛을 던져 주고 모든 신자들에게는 더욱 강렬한 빛을 비치시려고 뜻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가 마음에 빛을 던져 주고 모든 신자들에게는 더욱 강렬한 빛을 비치시려고 뜻하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한 번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신 곳에서 계속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가진 자에게는 더욱 풍성히 주시는 분이 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그를 알 필요가 있으며 또 그것을 바라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다음과 같이 간구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주장하사 은혜를 베푸소서. 왜냐하면 저희가 아버지를 인정하고 당신에게 영예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모든 일을 시도하신 그의 목적. 그것은 저희로 묘한 사색에 몰두하게 하거나 또는 저희에게 학식있는 사람들과 상대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저희에게 참된 행복을 확립해 주고 증진시켜 주려는 데 있었다.
[1] 하나님과의 교제.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저희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지식과 또 당신께서 스스로 나타내신 당신의 모든 모습과 당신의 사랑에 저희에게 알리었나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저희에게 임할 뿐만 아니라 저희 안에 거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저희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저희로 맛보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로 충만하게 하셨던 사랑의 성령으로 저희 안에 거하게 하소서"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신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이 하늘의 빛이 그들의 마음에 비추므로 하나님의 사랑도 그들의 마음에 퍼지어 그들 가운데서 저희를 주장하여 거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저희로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자석이 바늘을 끌어 당기는 것과 같은 작용을 우리 속에서 일으키신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끈다. 그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 속에서 역사하는 영과 같은 것이다.
둘째, "저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봄으로 위로를 받게 하소서. 저희로 저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을 지님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시고 앞으로 더욱 그 이름을 알게 되므로 위로를 받게 하옵소서. 저희가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저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도 하옵소서"란 뜻이다(요일 2:3). 저희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저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이다"(롬 5:5). 이 하나님이 우리로 그의 사려깊은 사랑으로 만족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지에 거하게 된 것을 스스로 만족케 하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지에 거하게 된 것을 스스로 만족히 여기도록 배려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자족하며 또 계속 그와 사귀는 삶을 살게 하신다.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더욱 간청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해야 하며 만일 우리가 그것을 염원하게 된 때는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스스로 감사해야 한다.
[2] 그리스도와의 교제. 본문에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는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사랑에 리를 수 없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게 하고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곧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지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것이다(골 1:27). 하나님과의 모든 사귐, 그와 우리가 서로 나누는 사랑 이 모든 것은 주 예수의 손을 거쳐야 하며 이를 통하여 받는 위로도 순전히 그에게 힘입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앞에서도(23절)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이 말은 실상 빼도 의미가 통할 수 있는데도) 다시 이 내용을 반복하셨다. 이것은 그가 기도를 이 말로 끝맺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일에 얼마나 관심이 크신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모든 간구의 중심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도로 "다윗의 아들 예수의 기도는 끝을 맺는다." "나로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게 이 일만 이루어지면 더 이상 바랄 아무것도 없나이다"란 뜻이다. 구속받은 자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구속자에게는 영광이 된다. 이것이 그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바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꼭 이루도록 하자. 그리고 그의 중재하심으로 위로를 얻자. 여기서 본문의 기도는 끝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지금도 사셔서 우리를 위하여 이 기도를 하시고 계신다.
첫댓글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먹을 양식도 사야하는데 후원으로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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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원 병원약과 주사비가 30만원 40만원으로 먹을거라도 사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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