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가족 나들이 / 전성훈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온 세상에 교화의 웃음과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준 부처님 오신 날, 5월의 연휴를 맞으며 올해 들어 처음으로 모처럼 가족이 함께 길을 나선다.
[ 첫째 날 ]
새벽 4시 40분에 집을 떠나 동부간선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량의 흐름이 많았다. 한 시간을 달리자 안성을 지나 천안 톨게이트를 향했다. 다섯 살 손녀와 네 살 손자는 선잠이 깬 상태로 자동차안에서 조잘조잘 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연신 하품을 하면서 졸음에 쫓겼다. 고속도로 가로등도 졸음에 겨운 듯 불빛이 펴져나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쏜살같이 달린다. 어둠이 걷히고 동쪽에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지 노을처럼 붉은 기운이 산허리에 걸리기 시작한다. 한 걸음에 내달린 자동차는 어느 틈에 군산 새만금 방조제 입구에 도착하여, 해넘이 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경치를 구경한 다음 고군산군도 선유도로 향한다. 선유도 이정표가 반갑다고 손짓을 한다. 예전에는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가야했던 선유도와 장자도에 몇 해 전 다리가 놓여 자동차로 쉽게 갈 수 있다.
< 선유도 >
고등학교시절부터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선유도에 50년이 훨씬 지나 찾았다. 손녀와 손자가 양말을 벗고 백사장에서 모래놀이를 하다가,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멩이를 주워 바다에 던지는 물수제비 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며느리가 아이들 옆에서 지켜보며 웃는 걸 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섬이기에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이라고 불렀다는 선유도(仙遊島), 옛날에 이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장소나 커다란 바위에 시신을 자연그대로 놓아 비바람에 부패되게 하는 풍장(風葬)이 행해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와 국제 교류를 하면서 송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고려 임금의 임시행궁인 숭산행궁,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오룡묘와 자복사 등이 선유도 망주봉 문화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다. 고군산군도에는 선유도 이외에도 고운 최치원선생이 단(檀)을 쌓고 글을 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신시도(옛 지명 신치도),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 같다하여 꼭지도라 부르다가 꼬챙이(串)자를 붙인 관리도, 힘에 센 장자가 나왔다는 장자도, 어느 도사가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는 말을 믿고 대장도라 불린 섬, 무당이 상을 차려놓고 춤을 추는 모습 같다고 하는 무녀도가 있다.
< 채석강 >
선유도의 망상을 내려놓고 격포항으로 향했다. ‘채석강 맛집’이라는 곳에서 정식을 주문했다. 간장새우, 간장게장, 양념게장, 고등어구이, 꽁치구이, 전어구이, 바지락전, 바지락탕이 한상 차림 가득하게 나와 온 가족이 모처럼 맛있는 한 끼를 먹으며 매우 흡족해했다. 심심한 간장게장을 먹으며 한낮임에도 달콤한 소주를 세 잔이나 마셨다. 채석강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이끼가 낀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럽게 걸으며 바닷바람을 쐬었다.
변산반도 채석강과 적벽강을 강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변산반도 서쪽 끝의 격포항(格浦港) 오른쪽 닭이봉(鷄峰)일대의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지명이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채석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숙소 구하기 >
채석강 구경을 마치고 늦은 오후가 되어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주 황당한 경험을 할 줄이야 전혀 몰랐다. 네이버를 통해서 예약하고 미리 요금을 송금했는데 현지에 도착하니 빈 방이 없었다. 담당자가 궁색하게 변명하기를, “ 모든 예약이 끝난 상태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제대로 표시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하며 근처 숙박업체 두 곳을 알려주어 다행히 적당한 곳을 구했다. 팬션 들어가는 입구 소로 양쪽에는 아름다운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한 곳으로, 전화위복인지 친절한 팬션 주인이 저녁 식사 때 먹어보라고 자연산 두릅을 따 주었다. 여행 다니며 예약한 장소가 취소되어 곤란한 지경에 빠져 애가 탄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녁이 되어 숯불에 목살을 구워 가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자동차도 그다지 지나가지 않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팬션에는 우리 가족 이외 다른 손님이 보이지 않았고 맑은 공기에 드문드문 유채꽃이 피어 코로나 청정지역임을 알려주었다.
[ 둘째 날 ]
새벽에 눈이 떠져 창문 밖을 내다보니 푸르른 숲속이 반긴다. 상쾌한 아침 공기에 단풍나무는 살랑살랑 춤을 춘다. 밭에서 자라는 상추와 호박을 보니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집 지키는 강아지는 손님이 반갑다고 꼬리를 흔든다. 멀리서 홰치는 수탉소리는 날이 밝았음을 알려준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5월의 바람은 계절의 여왕을 맞이한다. 코로나바이러스 공포에서 벗어나 화창한 5월의 하늘아래 생명이 약동하는 자연의 모습에 나 또한 하나가 되고 싶다.
< 내소사 >
부처님 오신 다음 날 찾은 능가산 내소사, 이른 아침 한가한 시간에 발걸음도 가볍고 살살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음도 차분해진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걷고 싶은 숲길의 하나로 유명하다. 산속의 나무들은 연두빛으로 물들고 대웅보전 앞마당의 오래된 삼층석탑에는 세월의 이끼가 더럭더럭 붙어있다. 고승의 부도에 봄볕이 비치니 중생에게 자비를 베푼 부처님의 가피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대웅보전에서 독경하는 노승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진다. 내소사(來蘇寺)라는 이름은 절집을 찾은 모든 이가 새롭게 태어나라는 의미를 기원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내소사 구경을 마치고 절 입구 음식점에서 모두부, 도토리묵, 바지락전을 주문하고 울금 막걸리를 한잔 씩 마셨다. 숙소로 돌아와 한 잠 자고나서 바지락칼국수와 바지락 죽으로 점심을 먹었다. 뜨거운 바지락칼국수 국물을 마시니 뱃속까지 따뜻해지고 몸이 나른해졌다.
< 고사포해수욕장 >
포만감에 느긋한 마음으로 고사포해수욕장을 찾았다. 해수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성급한 아이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고, 부모와 함께 썰물이 되어 바닷물이 빠진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아이들도 많았다. 백사장에서 커다란 두꺼비집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모습에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저녁에 격포항 수산물 시장을 찾아가서 갑오징어, 광어, 키조개, 가리비 등을 샀다. 갑오징어회는 입안에서 살살 녹아 비싼 값을 톡톡히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이슥해지자 밤공기가 차가워졌다.
[ 셋째 날 ]
손녀와 손자를 재우려면 불을 꺼야하므로 평소보다 일찍 잔 탓에 새벽에 잠이 깼다. 불을 켤 수도 없고 손주들이 깨지 않도록 오전 6시가 넘을 때까지 마냥 누워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 손주들이 일어나고 나서 어제 배불리 먹고 남은 생선회를 조개탕에 넣고 라면을 끊였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던 고급 조개탕 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숙소를 정리하고 팬션 주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에 변산 국립휴양림을 찾았더니 코로나사태로 휴관 중이었다. 군산으로 행선지를 돌려 새만금 휴게소에서 손주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했다. 군산의 명물 짬뽕 맛집을 찾아갔더니 오전 10시 40분경인데 길거리에서 쭉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서 어의가 없었다. 대기번호표를 쥐고 손주들을 데리고 길거리에서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릴 수 없어 군산짬뽕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다.
처음 가 본 선유도는 꿈에 그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해안과 유원지 모습이라서 실망했다. 그저 가 보고 싶었던 곳에 갔었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변산반도는 예전에 두 번 갔었지만 여기저기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번에 이틀 묵으면서 채석강, 내소사, 고사포해안 등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곳을 여유롭게 찾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여행은 언제나 들뜬 마음으로 시작하고 조금은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여행지에서 만나는 자연의 모습과 인간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너그러움과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자연과 함께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고 깨닫게 된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건강하게 잘 자라는 손녀와 손자의 재롱떠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점점 더 늙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는 없다. 5개월 만에 함께한 가족나들이, 그동안 쌓였던 코로나바이러스 스트레스도 변산반도 바닷바람에 날려버렸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지내길 기원하며 다음 나들이를 기약한다. (2020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