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족의 비밀을 배우라
빌립보서 4: 10- 18
사람들은 자족과 만족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족과 만족을 자연적으로, 저절로 얻어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족할만한 풍부한 환경과 여건이 주어지면 자족하며 사는 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환경이 좋지 않아도 자족에 타고난 기질이 있는 사람은 자족하며 사는 줄로 알고 있
습니다.
그러나 자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풍부한 조건 때문에 자족하며 사는 것도 아
니고, 여건이 좋지 않는데도 자족에 타고난 기질이 있는 사람이 자족하며 사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족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또 다른 하나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소유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본성을 보려면 에덴동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그야말로 낙원이었습니다. 질병도, 아픔도, 눈물도, 기근도 없는 파라다이스
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산이요,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강가에 생명수가 흐릅니다.
동산에 각종 과일들이 열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다 친구였습니다.
그런 아담과 하와에게도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동산에 있는 각종 과실은 따먹어도 되
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하신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이 불만을 사탄이 틈을 노린 것입니다.
사단은 한 가지 부족한 것만 있어도 그 부족한 것을 크게 생각하게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
게 합니다. 이게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사단의 꾀에 속으면 안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에덴동산에도 불만이 있었다면 세상 어디에 만족이 있고 행복이
있겠습니까?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도 불만이 있었는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오죽하겠습니
까?
솔로몬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자족하기 힘든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인간이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권력이면 권력, 명예면 명예, 지식이면 지식, 물질이면 물질, 여자이면 여자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도서 5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
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떤 좋은 환경이 주어진다고 결코 자족한다거나 행복해 하지 않는다는 것입
니다.
바라고 소원하던 것이 채워지면 또 다른 부족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족은 배워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족을 배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 자족을 배웠다고 두 번씩이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족은 저절로 자연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배워서 얻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자족하며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자족을 배워가면서 자족하며 살았다는 것
입니다.
‘배웠노라’는 단어는 현재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배워왔다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자족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우리처럼 처음에는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으면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던 사람이었
습니다.
그러다가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인생의 여러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이제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며 산다는 것
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양립되는 두 상황이 나옵니다.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입니다.
사람들은 풍부하고 배부르면 교만해집니다.
또한 비천해지고 궁핍해지면 비굴해지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움을 통해서 자신이 풍부해지더라도 결코 교만 한다거나, 비천 할지라
도, 궁핍 할지라도 결코 비굴해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도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정말 13절의 고백처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 알았다는 말은 비천에 처해도 자족하며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감옥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이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게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쓴 편지입
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합니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17번이나 등장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0절에도 보십시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바울은 배고픔과 궁핍한 가운데서도 자족하며, 크게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풍부에 처할 때도 기뻐했습니다.
18절에 보면 빌립보 교회가 그동안 보내주지 못했던 선교헌금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선교헌금을 보내주지 않아도 내게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
다고 합니다.
물질이 많아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없어도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없어도 부족함이 없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보내줌으로 더 풍성해졌다고 말하면서 기뻐합니다.
바울이 선교의 물질을 받아서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물질이 생겨서 기뻐한 것이 아
닙니다.
18절 말씀처럼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기에 기
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선교물질을 보내주는 그 마음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
이 제물이야말로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기에 바울은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목회자의 목회 사역을 돕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잘하면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면 건강의 축복을 받고, 십의 일조를 하면 물질의 축복을 받고,
목회자에게 잘하면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전천후 만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의 몸의 체온은 추우나 더우나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항상 36도를 유지합니다.
온도가 거기에서 몇 도만 내려가도, 올라가도 생명이 위험합니다.
바울은 마치 몸의 체온처럼 한결같이 기뻐하며 감사하며 자족하며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족의 비결 -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도대체 바울이 깨달은 자족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족의 비결은 13절에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며 좋아합니까?
제 핸드폰에도 카카오톡에 어떤 분이 이 구절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성공신학의 근거로 삼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자신에게 자신감을 주고 어떤 용기
를 주는 구절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것은 환경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 안에 있습니다.
환경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라면 감옥에서 당장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환경 조건이 바뀌어 집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
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 말씀은 앞 뒤 문맥으로 보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중병에 걸려 있다면 그 병에서 반드시 낫는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그 병중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반드시 다시 성공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업이 부도났어도 그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사업에 넘어지고 질병에 쓰러졌을 때 다시 일으켜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 조건은 그대로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누구이시니까? 예수 그리스이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능력을 주
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 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
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자족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돈이 많다고 그 돈이 우리의 염려를 다 가져갑니까?
돈이 많을수록 걱정도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고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병이 없이 건강하다고 행복합니까?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 힘으로 염려를 없앨 수
있습니까?
남보다 많이 배워 지식이 많다고 만족함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는 것이 많으니까 지식이 많을수록 걱정도 더 많은 것입니다.
참된 만족과 자족의 비밀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자족의 비밀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만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바다 위에 작은 돌섬이 하나 떠있습니다. 보기에는 미미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섬은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친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수만 톤의 군함이 와서 밀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함이 피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돌섬이지만 그것이 지구 땅 덩어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참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는데 어떤 풍랑이 감히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찬송가 455장 가사처럼 세상과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만 있으면
자족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애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우리가 주님 안에만 있으면 주님으로부터 날마다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때 어떤 비천에 처해도, 궁핍에 처해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형편에 놓여 있습니까? 혹 병들이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파탄지경에 놓여 있습니까?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고통 받고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만족과 자족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무리 큰 문제에 직면해 있어도 그 문제에 갇혀 있지 말고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으로부
터 능력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바울은 늘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늘 주님 안에 있는 다는 말은 늘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늘 주님만 생각하고 늘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때도 자기의 비천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때도 풍부함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
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교만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처한 여건과 환경을 바라보지 마세요.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사셨던 분들은 아마 이런 경험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장마가 져서 시냇물이 불어났습니다. 몇 개의 나무로 걸쳐 놓은 다리를 건어야 하는데 건
너자니 물이 무섭습니다. 돌아서 가려면 너무 멉니다. 나무로 걸쳐 놓은 다리를 건너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어난 시냇물을 안전하게 건너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흘러가는 시냇물을 절대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되도록 시선을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집, 산, 바위 등 고정되어 있는 물체를 바라보며 건너야 안전히 건널 수 있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려서 빠져 버립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
드로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바다 위를 잘 걸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습
니다. 물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바다에 빠져버렸
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간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이겨낼 수 없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해 있을 때 나의 비천함을 바라보면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풍부할 때 나의 풍부함을 바라보면 자고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모든 환경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자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기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은 배워야 합니다. 자족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의 비밀은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다는 말은 늘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늘 주님만 생각하고 늘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늘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
니다. 우리도 우리의 시선을 변함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도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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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사람은 만족할 수 없음을 모든것이 갖추어진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첫번째 사람들을 통하여 봅니다
자족은 배워야 하는 것이며 자족의 비밀은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주님 안에 있는 다는 말은 늘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바라본다는 뜻으로써
사도 바울처럼 어떤 환경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마음 깊이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