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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야(雪夜)/김광균
어느 먼 -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 - 곳에 여인(女人)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추회(追悔) : 추억과 회한
<해설> 이 시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현상 당선작이다. 1939년 첫시집 [와사등]에도 실려 있다.
이 시는 눈 내리는 밤의 정경 속에 피어오르는 추억과 환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시는 감정보다는 지성을 중시하는 주지적 경향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기 전의 작품이다. 따라서 종래의 낭만적 서정시에 있었던 감성적 표현이 눈에 띄는 등 김광균의 다른 시와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예컨대 5연에 나타난 '잃어진 추억의 조각'은 감상성을 보여 주는 부분인데, 이렇게 볼 때 김광균이 원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면모를 지닌 시인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한편 이 시는 김광균의 시 세계가 한층 성숙해진 것을 보여 준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시는 영상적 표현과 서정적 표현이 잘 결합되어 있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호롱불 야위어 가며"로 표현한다든지, 눈이 내리는 모습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 비유하는 등 참신한 표현 기법도 돋보인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이 시는 어느 겨울 밤 내리는 눈에 의해 떠오른 옛 추억과 회한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애상과 회한의 감정을 직접 전달하기보다는 눈 내리는 밤의 분위기를 시각, 청각 등의 감각적 이미지를 이용해 형상화하고 있다. 눈은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등에 비유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눈'은 정화된 슬픔의 표상이며 과거의 추억을 환기하고 애상적 정조를 갖게하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김광균 시인의 대표시로 꼽히는 <설야>는 기지에 찬 비유나 현란한 이미지보다는 서정적 분위기의 표현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정시인인 김광균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소재와 시인의 정감이 완전히 융합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시적 긴장감의 결여라든지 비유의 남용으로 인한 의미의 불필요한 중첩 등 구조적 결함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서정성과 현대성의 조화 내지 융합을 지향하는 그의 의식이 이 작품에서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이 시는 수사(修辭)의 남용이나 언어유희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던 당대 모더니즘운동이나 김광균 자신의 다른 시들에 비하여 퍽 이색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갈은 서정성과 현대성의 조화는 주지적 서정시(主知的抒情詩)라고 붙리는 한국 현대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한시와 소리
한시를 읽다 보면 소리와 관련한 다양한 시상을 접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시각적 심상을 포착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거니와 때로는 청각적 심상, 또는 소리를 매개로 한 각종 상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명말(明末)의 학자 오종선(吳從先)은 ‘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시냇물 소리, 계곡물 소리, 대 바람 소리, 솔바람 소리, 산새 우짖는 소리, 깊은 골짜기 소리,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꽃잎 지는 소리, 잎 지는 소리는 모두 하늘과 땅 사이의 맑은 소리요, 시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 뒤에, 그렇지만 참으로 영혼을 녹이는 소리를 들자면 꽃 피는 소리를 으뜸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김광균이 <설야(雪夜)>에서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포착한 눈 내리는 소리도 그에 못지않게 정감 있는 소리이다. 언젠가 흑산도 너머에 있는 외로운 섬 홍도의 산중턱에서 들었던 한바다의 겨울 파도소리도 마음에 각인된 인상적인 소리의 하나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술 거르는 소리를 듣다(聞汁酒聲)>에서, 술을 거를 때 떨어지는 술 방울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벌써 술 마시고 시름을 깨치는 상상을 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일을 하는 것보다 그 일에 대한 상상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인상적 소리는 많다. 폭포 소리, 처마의 낙숫물 소리, 다듬이 소리, 가야금 소리, 한밤의 젓대소리, 교회의 종소리, 뱃고동 소리, 새벽닭 울음소리, 천둥벼락 소리, 절간의 독경 소리 등에 대한 감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또 지금은 사라진 소리도 있다. 창밖으로 들려오던 낭랑한 글 읽는 소리, 칙칙폭폭 하던 증기기관차 소리, 공부하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잔소리. 그런 소리가 그리운 사람도 있다. (성범중/울산대, 경상일보 '성법중교수의 한시산책')
* 별의 별 눈(雪)
로맨틱하게, 사색적이게, 때로는 몽환적 분위기로 따지면 겨울철 눈만한 게 없다. 무거운 잿빛 하늘이 내려오면서 너무도 가벼운 눈송이가 사방으로 내려앉는다. 바람은 눈발의 연출가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렇게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애상적, 이국적이라면 발랄라이카의 음색이 애잔한 영화 ‘닥터 지바고’의 거대한 설원은 운명적, 서사적 눈 이야기다. 눈 내리는 밤을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설야)라 했던 김광균은 역시 앞서간 모더니스트였다.
눈이 빚어내는 분위기 만큼이나 눈의 종류도 다양하다. 싸락눈 함박눈은 기본, 진눈깨비와 눈보라, 소나기눈도 있다. 도둑눈은 일찍 잠든 아이들에게 늘 작은 경이였고 첫눈은 뭇 연인들에게 거사의 그날을 선사한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은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을 작게 만들었고 설화(눈꽃)는 겨울등반을 즐기는 등산객들에겐 늘상 유혹이다. 잔설이 힘든 계절의 상흔 같은 것이라면 봄눈은 만물생동의 새 계절에 대한 시샘이다. 한 길만큼 쌓였대서 길눈이고 전인미답의 깨끗한 눈은 숫눈이라 한다. 만년설, 가랑눈, 복(福)눈, 자국눈, 가루눈, 찬눈…. 에스키모 언어에 눈에 관한 단어들이 발달했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도 못지 않다. (허원순/논설의원, 경향신문 '천지컬럼')
<김광균(金光均): 1914 - 1993 >
*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호는 우두(雨杜). 송도상업학교(松都商業學校)를 졸업하고,
* 1926년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옛생각>, <병(病)> 등을 발표하였다.
*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황혼보>, <사향도(思鄕圖) >, <오후의 구도(構圖)>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1937년에는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가 당선되어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 1939년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에는 <오후(午後)의 구도(構圖)>, <설야(雪夜)> 등 시들이 실려 있다.
* 1947년 <노신(魯迅)>(1947), <황혼가(黃昏歌)>(1947) 등을 발표하는 한편, 1939년 이후 광복까지의 작품을 주로 모은 두번째 시집 [기항지(寄港地)](1947)를 간행하였는데, <추일서정(秋日抒情)>이 실려있다.
* 1948년 건설실업공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 1957년 제3시집 [황혼가](1957)를 펴낸 이후 시작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였으나,
* 1986년 [추풍귀우(秋風鬼雨)]를 펴낸 것을 비롯하여 [임진화(壬辰花)](1989) 등의 시집을 잇달아 펴내면서 시 창작에 대한 집념과 열성을 보여주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4가 김광균 시비, 시제는 '설야'>
* 기업가 시인 김광균
“그가 기업에 투신하지 않고 계속 시업에 몰두했더라면 우리나라의 현대시문학사는 얼마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문단에서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 이야기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시집을 내기도 하고 몇 편의 신작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김광균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무역업체 ‘건설상회(후에 ‘건설실업’으로 개명)’를 떠맡아 중견기업으로 키우면서 ‘시인의 꿈’은 실질적으로 접은 셈이었다. 하지만 2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만으로도 그는 한국 시단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시인이었다.
191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광균은 보통학교에 다니던 12세 때부터 중외일보 등 여러 신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송도상고를 졸업하고 고무공장에 취업한 뒤 그는 본격적인 시업의 길에 들어섰다. 현상문예나 추천 등 공식적인 등단 경로를 밟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발표될 때마다 문단의 시선을 끌었다. 35년 김광균은 이육사·서정주·신석초 등과 함께 ‘시인부락’ ‘자오선’의 동인활동을 펴면서 시단에 확고한 자리를 구축했다. 같은 해 연말 김기림이 그해의 시단 총평을 하면서 감광균을 ‘유망 신인’으로 소개한 것이 그의 재능을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당시 김기림은 ‘모더니즘의 기수’로 꼽히고 있었고, 그에 따라 김광균은 그 대를 잇는 ‘신세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김광균의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김기림·백철 등 비평가들은 ‘청각조차 시각화하는 기이한 재주’ 또는 ‘무형적인 것을 유형화하는 능력’ 따위의 표현으로 김광균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평가에 걸맞게 김광균은 줄곧 ‘시는 곧 회화다’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시에 있어서의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했다. 39년 출간된 첫 시집 ‘와사등’과 47년 출간된 두 번째 시집 ‘기항지’는 그와 같은 김광균의 시적 경향과 특징이 잘 나타난 시집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그의 시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김광균이 떠맡은 ‘건설실업’은 성장을 거듭해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무역협회 부회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7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시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단의 친구들은 틈틈이 시를 쓰라고 권유했지만 김광균은 그때마다 기업 경영과 시작 활동을 병행할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동갑내기 시인 장만영은 그에게 시적 자극을 주기 위해 57년 세 번째 시집 '황혼가'를 펴내주기도 했다.
비록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시에 대한 애정마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시를 찾아 읽었고, 틈날 때마다 문단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77년 김광균은 그가 발표한 작품들을 모두 모아'김광균 시전집-와사등'을 펴내면서 한국 문단을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평양 출신의 후배시인 박태진(그 역시 일찍이 실업계에 투신한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과 상의한 끝에 작고한 문인들의 문학비를 세워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용은 물론 전액 김광균의 부담이었고, 비석으로 쓸 돌도 돌 공장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골랐다.
처음 세운 문학비가 75년 세상을 떠난 절친한 친구 장만영의 시비였다. 송지영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용인 기독교 묘원에 있는 장만영의 유택에 시비가 세워졌을 때 김광균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고 박태진은 전했다. 장만영의 시비를 세운 뒤 김광균은 시에 대한 열정이 새삼 솟았는지 ‘현대문학’에 신작시 5편을 발표했다. 기업가로 변신하면서 붓을 놓은 지 30여 년 만이었다. 20세기 마지막 모더니스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 뒤로도 김광균의 문학비 건립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명동 대폿집에 드나들던 시절의 친구였던 이봉구의 문학비를 경기도 안성 그의 옛집 앞마당에 세워주었고,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높이 평가했던 김기림과 백철의 문학비도 세워주었다. 김기림은 납북된 탓에 묘소가 없었으므로 그가 한때 적을 두었던 서울 계동 중앙중·고등학교 입구에 세워졌고, 평북 의주 출신의 백철 역시 마땅한 장소가 없어 사위의 선영에 건립했다. 93년 김광균이 세상을 떠난 뒤 구상 등이 주동이 돼 그의 시비 건립을 논의했으나 그의 시비가 건립된 것은 11년이 지난 2004년이었다. 그의 시비는 서울 혜화전철역 부근에 세워졌다. (정규웅/문학평론가, 중앙선데이 매가진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 [시·산문 한자리 '김광균 문학전집']
시에서 즐겨 쓴 표현 '차단한'… 식민지 시대 방향 상실로 재해석하고, 그의 산문정신 조명할 자료도 제시한다.
전집에 해설을 쓴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김광균 시인이 즐겨 쓴 표현 '차단한'을 새롭게 해석해 눈길을 끌었다. '차단한'은 김광균의 개인 조어(造語)였다. '와사등'에서 '차단―한 등불'이란 표현이 나왔을 뿐 아니라 다른 시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우에/ 차단―한 내 꿈 우에"(시 '등'),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시 '설야')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선 '차단한'을 '차디찬'으로 보거나, '차단(遮斷)한'으로 풀이하는 견해가 뒤섞여왔다. "단절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준다"는 해석이 많았다. 그런데 유성호 교수는 '차단한'을 가리켜 "흐릿하고 아득한 감각을 전해주는 김광균 특유의 조어"라며 "이 어휘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상실감과 슬픔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풀이했다. 특히 시 '와사등'은 도시의 '차단―한 등불'을 식민지 시대의 방향 상실을 가리키는 '슬픈 신호'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김광균 시인이 경성의 화려한 밤 풍경을 예찬하기보다는 그 화려함 속의 공허감과 상실감을 감각적이고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내기 위해 '차단한'이란 조어를 내놓았다는 해석이다.
이번 전집은 김광균의 산문 정신을 새롭게 조명할 자료를 여럿 제시했다. 김광균은 8·15 광복 이후 문단의 좌우 대립에서 중도 노선을 취하는 평론을 자주 발표했다. 그는 "정치의 진보가 문학의 진보일 수 없다"고 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인민 속으로 들어가자'는 구호에 매몰돼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전통 서정을 지향하는 시인들을 향해선 "시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자기만족에 연연하면 시는 굶어 죽고 만다"고 지적했다.
김광균은 화가 이중섭도 잘 알고 지냈다. 그는 이중섭이 세상을 뜬 뒤 '이중섭을 욕보이지 말라'는 수필도 썼다. 이중섭이 심심풀이로 종이에 그려 본 스케치 같은 그림들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런 그림들이 화가의 유작이라며 거래되는 세태를 꾸짖은 글이었다. 개성상업학교를 나온 김광균은 시를 쓰면서 사업가로도 활동했고 무역협회 부회장과 전경련 상임위원도 지냈다. 이번 전집엔 그가 쓴 '내수 산업의 운명' 같은 경제 시평(時評)도 들어 있다. (박해현/기자, 조선일보)
♣ 망부석/김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