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인옥사님, 페북
미가 5:1-15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
12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1. 우리는 자신의 미래가 궁금해 묻고 다니는 것을 크게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미래를 그려보고 계획하는 것과 점보는 것은 별개입니다.
2. 왜 내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봅니까?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무슨 상관이 있길래 낯선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고 다닙니까?
3. 만약 내 미래를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먼저 밝고 좋은 얘기를 들으면 복채는 아깝지 않겠지요. 더 달라면 기꺼이 더 줄 것입니다.
4. 어둡고 불길한 얘기를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피할 방도를 백방으로 찾으려고 하겠지요. 낚시 바늘을 물었습니다. 이미 마수에 걸려든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어떤 경우라도 이런 결과를 가져올 점이나 복술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니까요.
6. 여기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왜 미래가 궁금합니까? 왜 나의 미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펼쳐나가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7.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가능하다면 신의 힘을 빌어 내 미래를 보란 듯이 만들겠다는 헛된 욕심 때문입니다.
8.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냥 생각도 소원도 없는 한낱 부품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정 반댑니다.
9. 한없이 자발적이고 끝없이 창의적인 삶으로 비상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입니다.
10. 어디서 비롯하는 태도입니까? 아버지의 깊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내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미래를 소망으로 가득 채웁니다.
11. 사랑 받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운과 불운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과 좁은 계산 방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12. 그에게는 사람이 선물입니다. 인생은 선물입니다. 심지어 고난도 선물입니다. 그런데 왜 고난을 피해보겠다고 자기 인생의 미래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 다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돈을 벌건 권력을 쥐건 이미 귀신의 밥입니다.
@조정민목사님, 페북
미가 6:9-16 “부족감은 질병의 증상입니다.”
14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1. 행복은 채워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족함에서 풀려나는 데 있습니다. 채우고 채워도 부족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2. 감옥이나 군에서 가장 가혹한 벌은 체벌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지고 맙니다.
3.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반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상황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습니다.
4. 내가 당장 상황을 바꿔서가 아닙니다. 상황이 나를 바꿀 수 없을 때 내가 오히려 그 상황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5.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낯섭니다. 그는 고작해야 상황에 휘둘리고 굴복하고 타협합니다. 그리고 나는 적응하고 순치됩니다.
6. 문제는 무엇입니까? 참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근원적인 목마름에 늘 시달립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시고 마셔도 목이 마릅니다.
7. 하나님이 따로 심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스로 어둠에 갇혀 어쩔 줄을 모르는데 무슨 벌이 또 필요합니까? 그 사람의 내면은 항상 공허합니다.
8. 참으로 이상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나를 중요하게 여길수록 나는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집니다.
9.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지금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사방에 알리는 중입니다. 그는 뭘 감추어도 못 지킵니다.
10. 개인만의 이야기입니까? 국가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강대국은 없습니다. 흥망성쇠의 사이클은 자연법칙과도 같습니다.
11. 왜입니까? 부정과 비리, 강포와 부패 때문입니다. 권력의 핵심에서 시작되지만 그야말로 사회 전반에 흘러 넘칩니다. 점차 손쓸 수가 없습니다.
12. 하나님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그곳에서 불러내십니다. 부를 때 응답하면 구원입니다. 부를 때 뛰쳐나온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부러워하며,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같을 수 있습니까?
@조정민목사님, 페북
미가 7:1-20 “‘어른이’들 세상을 어찌 회복할꼬?”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1. 사람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더불어 사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사람 인자 외에 사이 간자를 더해 인간입니다.
2. 사람이 된다는 것, 인간이 된다는 것은 따라서 점점 공동체 지향적, 공동체 중심적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점점 남을 더 의식하는 것입니다.
3. 문제는 남을 의식하면서도 남을 배려하고 남을 돕기보다 나를 표현하고 나를 주장하는 일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어립니다.
4. 우리 곁에는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몸은 성인이고 나이는 어른인데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와 같아서 누구는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5. 미가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타락과 부패가 만연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어른들이 ‘어른이’로 행동한 탓에 국가적 파국을 맞습니다.
6. 그는 애통한 어조로 공의와 자비와 겸손을 회복의 처방으로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7. 정직한 자가 없고 경건한 자를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는 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습니다.
8. 미가 선지자가 아들에게 유언하듯 말합니다. “이웃 사람 믿지 말고 친구들 의지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아내에게 말할 때도 지극히 조심해라.”
9. 덧붙이는 얘기도 몹시 불편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등질 것이고, 가족들은 원수와 같을 것이다.” 인간 관계의 축이 무너질 것이란 얘깁니다.
10. 사람 말을 믿을 수 없어 더 답답합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더 외롭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오해가 그치지 않고 쌓입니다.
11. 이때 할 일은 사람에게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더 마음을 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12.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먼접니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쁨이 회복되고 다시 열정이 살아납니다. 그때 이웃에 대한 긍휼함을 되찾게 되고, 그때 비로소 이웃과의 관계가 실타래 풀리듯 풀립니다.